우열의 관점이 아닌 다양성의 관점으로 (김영웅)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24-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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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 칼럼

우열의 관점이 아닌 다양성의 관점으로

- 동물에 대한 과학자의 시선



글ㅣ김영웅
기초과학연구원 유전체교정연구단 선임연구원
과신대 정회원



사람이 동물에 비해 얼마나 우월한지 논하는 것을 적어도 한 번은 들어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과연 사람은 동물보다 우월할까요? 만약 그렇다면, 근거는 무엇인지요? 혹시 사람 중심적인 사고에 함몰되어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혹시 사람이 우월해야 하니까 우월하다고 섣불리 결론 지어버린 건 아닐까요? 마치 미리 답을 정해놓고 거기에 이유를 짜 맞춘 것처럼 말이지요. 이 글에서는 동물과 사람이 얼마나 닮았고 얼마나 다른지에 대해 생물학적인 측면에서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들어가기에 앞서 전제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은 동물이라는 사실입니다. 대부분은 당연하게 여기시겠지만, 작건대 🤔 기분이 상한 분들도 계실 것 같습니다. 사람을 비하하는 뉘앙스로 읽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은연중에 사람을 동물과 차별하고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러나 과연 동물이라는 단어가 그런 뜻을 가지고 있을까요? 


칼 폰 린네 - 나무위키 

@칼 폰 린네, Carl von Linne (namu.wiki)


생물 분류학적인 기준

‘동물’은 1735년 스웨덴 식물학자 린네에 의해 처음으로 제안된 생물 분류에서 등장한 이후 지금까지 변함없이 공식적인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참고로, 린네는 생물을 동물과 식물, 이렇게 두 가지로 분류했습니다. 21세기인 현재 국립생물자원관에서 내놓은 국가생물종목록에서는 균계, 유색조식물계, 원생동물계, 고세균계, 세균계가 추가되어 총 7가지 계로 분류하고 있답니다. 사람이 속한 계는 예나 지금이나 동물계입니다. 즉, 동물이 사람은 아니지만, 사람은 동물입니다. 동물이란 단어는 사람보다 더 큰 범주의 중립적인 용어인 셈이지요. 사람을 비하하는 뜻으로 사용되는 건 단어의 오용입니다. 참고로, ‘짐승’이라는 순우리말은 동물과 같은 뜻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관용적으로 사람을 제외한 동물을 지칭할 때 많이 사용됩니다. 


현대 생물학에서는 생물을 ‘종, 속, 과, 목, 강, 문, 계, 역’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여 하위 집단부터 상위 집단 순으로 총 8가지로 분류합니다. 사람은 사람종, 사람속, 사람과, 영장목, 포유강, 척삭동물문, 동물계, 진핵생물역으로 분류가 됩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속한 동물계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을까요? 사람이 속한 척삭동물문 말고도 얼마나 더 많은 '문'이 존재할까요? 그리고 각 '문'에는 얼마나 많은 '과'가 존재할까요? 이런 식으로 점점 하위 집단까지 생각을 진행하다 보면 도대체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종들이 존재하는 걸까요? 


2024년 현재 여러 통계에 따르면, 지구상 존재하는 종은 약 1,295만 이상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속한 동물계 중 척추동물만 해도 8만 종 이상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종이 동물계에 속해 있는 것이지요. 사람은 이렇게 많은 종들 가운데 단 하나에 해당될 뿐이랍니다. 여기서 한 번 스스로에게 질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많은 동물을 알고 계시나요? 혹시,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수많은 동물들을 마치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무시한 채 우리는 너무 쉽게 사람이 가장 우월한 존재라고 믿어버린 건 아닐까요? 객관적인 비교를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서로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파악하는 게 상식일 텐데 말입니다. 


다른 기준들

우리가 흔히 사용하곤 하는 ‘고등동물’이라는 단어의 의미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여지가 있습니다. 만약 그 단어가 지능의 발달 정도를 기준으로 한다면 사람이 고등동물이라는 표현은 틀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가장 우월한 존재라고 믿는 것 자체도 지능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 같으니까요. 그러고 보면 다른 종과 비교해서 스스로를 대단하다고 여기는 종은 사람 종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존재의 의미를 묻고 삶의 의미를 찾으며 그것들을 평가하고 비교하는 존재는 사람이 유일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고등동물에 비해 하등동물을 지칭할 때마저 마치 그들이 진화가 덜 되었다거나 열등하거나 무언가 결핍된 개체로 보는 관점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완전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모든 개체는 완전하다고 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모두 생명의 탄생 이후 무수한 세월 동안 진화를 거쳐 살아남은 종들입니다. 이를테면, 사람과 가장 가까운 침팬지가 사람에 비해 무언가 결핍되고 불완전하기 때문에 침팬지로 남게 된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람만이 아니라 침팬지도, 하물며 세균을 포함하여 현존하는 모든 종은 진화적인 관점에서 완전한 개체입니다. 사람만이 완전하고 나머지 생물들은 불완전하다고 여기는 건 지극히 사람 중심적인 사고와 진화라는 자연현상을 단선적으로만 파악하는 오류가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윈이 제안한 공통조상설과 자연선택설을 전혀 고려하지도 않은 처사인 것이지요. 세균도 침팬지도 더 많은 시간을 기다린다고 해서 사람으로 변하지는 않습니다. 이미 공통조상이라는 분기점으로부터 아주 오래전에 각각 갈라져 나온 줄기의 끝에 모두 위치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다른 동물과 비교하여 특별한 점이 분명히 존재하긴 하지만, 그 기준에서 적어도 완전성이라는 항목은 제외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홀로틀(Ambystoma mexicanum), TK, Unsplash


우월성의 기준을 지능이 아니라 만약 재생능력으로 한다면 어떨까요? 사람은 분명 하등동물에 속할 것입니다. 생물학자들이 재생에 관련하여 연구하는 동물모델로는 우리가 하등 하다고 여기는 가시쥐 (Spiny mouse), 아홀로틀 (Axolotl), 플라나리아 (Planaria) 등이 있습니다. 사람의 경우 재생이 가능한 조직이나 기관이라고 한다면 아주 부분적으로 피부와 간을 예로 들 수 있을 정도로 사람은 재생능력에 한해서는 한없이 미흡한 존재랍니다.


달리는 속도를 기준으로 한다면 어떨까요? 여러분도 ‘동물의 왕국’이나 ‘내셔널 지오그래픽’ 등의 프로그램을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사나운 맹수가 재빠르게 달려들어 먹잇감을 사냥하는 모습 말입니다. 사자나 치타의 속도와 힘은 살기가 느껴질 정도죠. 도저히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만약 그 초원에 우리가 서 있다면 단숨에 먹잇감이 되겠지요. 초원에서나 밀림에서나 타고난 신체적인 측면에서 보면 사람은 나약한 존재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척박한 사막이나 북극, 남극 같은 극지방에서는 어떨까요? 사막여우나 도마뱀 혹은 낙타, 그리고 유유히 차가운 바다를 헤엄 치며 먹이 사냥을 하는 백곰, 펭귄, 바다사자, 혹은 물개 등과 비교해서 사람의 몸은 역시 나약하다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것 같습니다. 타고난 몸으로 사람은 이런 극한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지요.


이런 식으로 사람보다 월등한 동물들의 능력을 하나 둘 따지다 보면 사람이란 존재가 유일하게 잘하는 건 머리 쓰는 일, 즉 지능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극한 환경에서 살아남지 못할뿐더러 사나운 맹수에게 잡혀 먹힐 수밖에 없을 정도로 나약한 몸을 가졌지만, 사람에겐 뛰어난 지능이 있어 그런 환경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며 생존할 수 있으니까요. 사람은 신체적으로는 나약하지만 사막과 북극과 남극을 탐험하고 연구하는 존재이며, 사나운 맹수들을 잡아 가두어 동물원을 만들어버린 존재랍니다.


사람에게 지능이 없었다면 어땠을까요? 사람이라는 종은 생태계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것 같지 않나요? 그러나 지능은 한 가지 특성이자 기준일 뿐이라는 사실을 간과하면 안 되겠습니다. 그것이 다른 모든 특성들보다 더 우월하다고 말한다는 건 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했다시피 지극히 사람 중심적인 사고인 것입니다. 어떠신가요? 여러분도 동의가 되지 않나요?


진화적인 기준

그렇다면 진화적인 관점에서는 사람과 동물이 얼마나 차이를 보일까요? 혹시 여러분들 중 사람이 가장 진화한 동물이라고 생각하시는 분 계신가요? 혹은 근거가 없더라도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은 강박을 느끼시진 않나요? 사람이 가장 진화한 동물이어야 생태계 피라미드의 가장 꼭대기에 위치한 존재로서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다고 여기시지는 않나요?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진화는 지금도 관찰 가능한 자연 현상입니다. 중력처럼 그 존재 자체가 가시적이지는 않지만, 물체가 떨어지는 현상을 보고 중력의 존재를 인지하듯 우리는 생명의 다양성과 차이, 변화를 보면서 진화의 존재를 알 수 있습니다. 분자생물학적인 방법으로 DNA의 변이를 추적하면 더 명확하게 진화의 존재가 어떻게 생명의 다양성을 이루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진화는 변화의 의미를 갖습니다. 변화는 차이를 만들어내고, 차이는 다양성을 만들어내는 것이지요. 물론 진화라고 정의하기 위해서는 개체 단위가 아닌 집단 규모의 변화, 그리고 한 세대가 아닌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축적된 변화가 그 집단의 특성으로 나타나서 생존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합니다. 이렇게 생겨난 새로운 집단은 변화가 일어나기 전의 집단과 더불어 존재하거나 독립적으로 살아남아 존재할 수 있으며, 이러한 과정 중에 새로운 종이 탄생되기도 합니다. 진화란 실로 거대한 움직임이며 평균 80세의 수명을 가진 사람이 직접 관찰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주 작은 단면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생물 진화의 시작점도 바로 DNA의 변이랍니다.  


어떤 종이 가장 많이 진화한 것인지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분자생물학적으로 내리는 답이 가장 과학적인 것 같아 보입니다. 즉, DNA의 변이가 가장 많이 발생한 종을 찾아내면 되겠지요. 2007년에 보고된 한 연구1)에 따르면, 사람과 같은 공통조상을 갖는 침팬지가 공통조상과 비교할 때 사람보다 더 많은 유전자의 변이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밝힌 바 있습니다. 사람과 침팬지가 분기된 순간부터 사람은 154개, 침팬지는 233개의 유전자 변이가 관찰되었다는 보고였습니다. 그러므로 DNA 변이만으로 진화의 정도를 판단한다면 침팬지가 사람보다 약 1.5배 더 진화한 종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가장 진화한 종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하나의 믿음일 수는 있으나 무엇을 기준으로 하는지에 따라 달리 해석될 여지를 갖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믿는 것은 지나치게 사람 중심적인 결론에 불과한 것입니다. 가장 진화한 존재라기보다는 가장 지능이 발달한 존재, 혹은 가장 지적인 생명체라고 표현하는 것이 아무래도 무난해 보입니다. 물론 AI의 발달로 인해 이제는 사람이 가장 지적인 존재라는 타이틀마저도 잃어버릴지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Mahmoud Ahmed , Pixbay



DNA 염기서열의 동일성 기준

진화적인 측면에서 사람과 가장 가까운 동물은 침팬지입니다. 사람과 침팬지가 공통조상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건 약 650만-750만 년 또는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합니다. 놀랍게도 사람과 침팬지의 DNA 염기서열은 차이가 거의 없답니다. DNA 중에는 단백질을 코딩하는 유전자 부분이 있고 (전체 DNA 중 약 1 퍼센트에 해당), 그렇지 않은 부분 (나머지 약 99 퍼센트)이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는 사람과 침팬지 사이의 차이가 채 1 퍼센트도 나지 않으며, 전체 DNA 염기서열을 비교할 땐, 단일 뉴클레오티드 변형2)으로 나타나는 차이는 약 1.23 퍼센트를 차지하는 반면, 더 큰 결손3) 및 삽입4)은 약 3 퍼센트를 차지하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사람의 자존심을 위해서는 침팬지와 DNA 염기서열이 현저하게 달라야 할 것 같았는데 말이지요. 


여러 문헌을 뒤적거리다 보면 사람과 침팬지 사이의 1 퍼센트 차이 나는 DNA 염기서열에 초점을 맞춰 어떻게든 사람의 우월성을 찾아내려는 움직임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습니다. 사실 DNA 염기서열은 생물학적 차이를 나타내는 하나의 기준일 뿐입니다. DNA가 RNA를 거쳐 단백질을 코딩하는 과정 중에는 아직 다 밝혀지지 않은 다양한 방식들이 동원됩니다. 한 가지 단적인 예로, 같은 유전자 염기서열이라 하더라도 다른 접합 변형 (Splicing variant)을 만들어낼 수도 있고, 코딩되어 만들어진 단백질에서도 여러 다른 수정이 가해져 다양한 기능을 하게 만들 수 있답니다. 단지 염기서열이 같다고 해서 그로부터 코딩되는 단백질의 기능이 같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렇게 사람이 침팬지와 다르다는 이유를 찾으려고 온갖 애를 쓰는 노력 자체에 담긴 의미를 읽어야 합니다. 99 퍼센트가 아니라 1 퍼센트에 집착하는 이유를 읽어야 합니다. 바로 인간의 자존심 같은 것이겠지요. 동물원 철창속에 갇힌 침팬지 따위와 유전자 염기서열이 99 퍼센트 같다는 과학적인 발견은 누군가에게는 굉장히 모욕적이지 않았나 싶네요.


사실 침팬지와 사람이 달라야만 한다는 관점을 잠시 내려놓고 닮은 점을 살펴보면, 의외로 많은 부분이 닮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몇 가지만 예로 들어보면, 침팬지를 넘어 오랑우탄도 사람처럼 서로 협력하고 다른 개체와 감정을 공유한다고 합니다. 오랜 전에 헤어진 친구나 가족을 기억하고 반응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또한 침팬지는 사람과 같은 언어를 사용할 수도 없고 읽고 쓸 수도 없지만, 서로 간에 의사 전달을 할 수 있습니다. 신체 구조상 열 손가락이 있어 물건을 집을 수 있고 도구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물론 더 많은 공통점들이 있겠지만, 사람 중심적인 사고에 길들여진 우리들에게는 아무래도 닮은 점보다는 다른 점에 더 관심이 가겠지요.


@Ryan Al Bishri, Unsplash


우열이 아닌 다양성

지금까지 주로 사람과 가장 가까운 침팬지를 예로 들어 동물과 사람의 차이를 살펴봤습니다. 어떠신가요? 여전히 사람이 우월하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계신가요?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그 기준이 사람이 가장 잘하는 것으로만 정해졌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인정하시면 좋겠습니다. 사람은 동물입니다. 사람이 아닌 동물은 사람이 정의하는 지능적인 면에서 사람보다 떨어질 뿐이지 다른 면에서는 훨씬 우월한 점들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우열의 관점이 아닌 다양성의 관점으로 바뀌면 좋겠습니다. 사람 중심적인 생각에 함몰된 우리들의 태도를 이 글을 통해 한 번이라도 살펴볼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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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고1. "More genes underwent positive selection in chimpanzee evolution than in human evolution" Proc Natl Acad Sci U S A. 2007 May 1;104(18):7489-94. doi: 10.1073/pnas.0701705104.
    참고2. "Chimps lead evolutionary race" Nature. 2007 Apr 19;446(7138):841. doi: 10.1038/446841a.

2) 단일 뉴클레오티드 변형: DNA 돌연변이 중 뉴클레오티드가 엉뚱한 뉴클레오티드로 바뀌는 현상

3) 결손: DNA 돌연변이 중 뉴클레오티드가 삭제되는 현상

4) 삽입: DNA 돌연변이 중 뉴클레오티드가 추가되는 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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