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 칼럼
트랜스휴머니즘과 기독교신앙
글ㅣ정대경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과신대 연구모임
조니 뎁이 주연한 영화 “트랜센덴스”는 흥미로운 주제를 다룬다. 주인공 윌 캐스터 박사(조니 뎁)는 모든 지식을 네트워킹하면서 자각 능력까지 가질 수 있는 슈퍼컴퓨터 PINN의 완성을 앞두고, 반과학단체의 암살시도로 인해 죽음 직전의 상황에 놓이게 된다. 연인이자 동료인 에블린(레베카 홀)은 캐스터 박사의 뇌를 스캔하여 PINN에 이식한다. 이를 통해, 캐스터 박사는 생물학적 몸이 아닌 슈퍼컴퓨터 내의 의식적 존재로서 계속해서 살아가게 된다.
공상과학 같은 이 이야기는 Humanity Plus(Humanity+) 등의 단체를 중심으로 실제 연구되고 있는 기술력이다. 이를 트랜스휴먼 기술이라고 부른다. 트랜스휴먼 기술은 인간에게 주어진 3가지 생물학적 한계들, 곧 노화, 질병, 죽음을 극복하고자 한다. 기술력의 궁극적인 목표는 인간의 뇌를 스캔하여 기계의 몸이나 컴퓨터에 이식하는 것이다. 영화 “트랜센덴스”의 캐스터 박사처럼…. 현재의 기술력으로는 불가능해 보이지만, 만약 인간의 의식이 현대 뇌과학이 밝혀주듯 뉴런들과 시냅스들, 그리고 그사이를 오가는 전기화학신호와 물질들 사이 복잡한 네트워크에 수반해서 일어나는 현상이라면 원칙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구글 기술고문이자 컴퓨터 과학자인 레이 커츠와일은 이러한 종류의 기술력이 가까운 시일 내 실현될 수 있다고 그의 저서 “특이점이 온다(Singularity is coming)”에서 주장한 바 있다. 주어진 한계 상황들을 극복하는 인간의 노력이 죽음을 극복하려는 차원에까지 확장되는 것이다.
영국의 생물학자 줄리안 헉슬리는 이러한 인간의 자기 초월능력에 대한 신념을 트랜스휴머니즘이라고 부르자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인간 종은 그들이 원하면 그들 자신을 초월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믿음에 대한 이름이 필요하다. 아마도 ‘트랜스휴머니즘’이 적합할 것이다. 인간은 인간으로 남아있는 동시에 인간으로서의 본성의 새로운 가능성들을 실현하기 위해 자신을 초월하려고 한다.” Julian Huxley, Religion without Revelation, 1967, p. 195.
기술력을 통한 노화와 질병의 극복, 나아가 죽음에 대한 극복은 인간을 모든 종류의 억압으로부터 해방하는 궁극적인 기술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Watcha, "이어즈&이어즈" 한 장면
세계 트랜스휴머니스트 연합(World Transhumanist Association)의 초대 발기인으로 참여한 옥스퍼드 대학의 철학 교수인 닉 보스트롬은 트랜스휴먼 기술에 대해 반대하는 목소리를 비판하며,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면서부터 이미 주어진 본성과 자연을 변형시켜 사용해 왔다고 지적한다. 언어와 문자를 사용하는 것, 커피 열매를 자연 그대로의 상태로가 아니라 가공해서 섭취하는 것, 인간 장기 이식 수술로부터 자연 치아를 인공 치아로 바꾸는 임플란트 시술까지 인간은 이미 기술력을 통해서 자연을 가공해서 사용해 왔고, 일정 부분 인간의 자연적인 본성까지도 이미 가공해서 사용해 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트랜스휴먼 기술에 반대하는 것은 보수적 성향, 곧 “현 상황 편향성(status quo bias)”에 의한 것이지 만약 트랜스휴먼 기술이 실현된다면 그 혜택으로 인해 더 이상의 반대는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달리 스탠퍼드 대학의 철학 교수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두 가지 이유를 들어 트랜스휴먼 기술의 개발과 상용화를 반대한다. 첫 번째는 기술 개발을 위해 들어가는 자원의 투자 대비, 기술 혜택은 사회경제적 권력을 가진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돌아가게 될 것이고, 나아가 사회 내 불평등을 가속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다른 이유로 후쿠야마는 인간의 카오스적 복잡성을 든다. 인간은 오랜 진화과정을 거쳐 출현한 상당히 복잡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의 속성을 바꾸게 된다면 다른 속성이 어떻게 변화될지 예측 불가능하다. 인간의 공격성과 호전성은 자신과 주변인들을 보호할 수 있는 방어력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배타적인 감정은 배제되지 않고 있는 동일 집단 내의 친밀감과 연결되어 있으며, 질투심은 사랑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생물학적인 한계 등을 기술력을 통해 변형하게 되면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지…. 의도치 않은 결과가 초래될 수 있다고 경고하는 것이다.
트랜스휴머니즘에 몸 담고 있는 과학자, 기술자, 철학자에게서 종종 발견되는 이념적 특성은 주어진 것, 곧 자연적 본성이 “불완전하다”라는 인식이다. 자연을 포함한 인간은 그러한 의미에서 니체가 이야기하듯 “극복되어야 할 무언가”이다. 트랜스휴먼 철학자로 널리 알려진 맥스 무어는 자연이 만들어 놓은 것은 훌륭하지만 완전하지 않다고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의심할 바 없이 그대(자연, Nature)는 최선을 다했어요.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당신이 인간을 형편없이 만들어놨다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네요.”
무어는 엑스트로피(extropy)증대가 인간이 추구해야 하는 모든 기술적인 목표라고 주장한다. 엑스트로피는 물리학에서 이야기하는 엔트로피(entropy), 곧 불가용성 에너지를 뜻하는 개념에 반대되는 다소 메타포적인 개념이다. 무어가 주장하는 엑스트로피는 생명체의 지능, 기능적 질서, 생명력 향상을 위한 능력과 욕구를 의미한다. (이 맥락에서 무어는 다소 엔트로피를 “무질서”로 이해하는 듯하다) 다시 말해, 무어에게 있어서 인간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인 목적은 이 엑스트로피를 계속해서 증대시킴으로써 주어져 있는 문제점, 한계 상황들을 극복하고 인간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그는 현대과학기술이 발전하기 전까지는 종교가 내세에 주어질 약속을 이야기함으로써 인간의 엑스트로피적 욕구를 일시적으로 충족시켜 주었으나, 트랜스휴먼 기술은 내세가 아닌 현세에서 보장해 줄 수 있으므로 미래에는 트랜스휴머니즘이 종교를 대체할 것이라는 대담한 주장도 내놓는다.
흥미로운 점은, 하지만, 무어를 비롯한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은 없다고 주장하면서도 자신들이 그리고 있는 하나의 이상향과도 같은 인간, 곧 노화와 질병을 경험하지 않는 영원 불사의 존재를 하나의 이상향 삼아서 그것을 추구하며, 철학적-기술적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힘으로 유토피아를”이라는 근대 이성의 지상낙원 건설 프로젝트가 트랜스휴머니즘을 통해 반복되는 느낌이다. 그래서 혹자는 이러한 움직임을 트랜스휴머니즘의 세속적 종말론(Secular Eschatology)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이해 안에는 인간의 이성과 능력에 대한 낙관이 숨어있다. 그래서 하바 티로쉬-사무엘슨과 같은 철학자는 트랜스휴머니즘 담론을 이끌어가는 학자들 사이에 근대 계몽주의 이성이 깃들어 있다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 그들에게 인간은 모든 것을 측량할 수 있는 존재이고, 개별적 주체는 독특한 자기만의 본성을 가지며, 인간의 언어는 실재를 정확하게 기술할 수 있고, 인간 종은 다른 종들보다 뛰어나며, 그러므로 그들 자신을 위해서라면 주어진 자연과 본성을 자유롭게 교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트랜스휴머니스트들에게 인간의 자연적 본성은 과학기술을 통해 “완벽히”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지식을 토대로 인간은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으며, 발견된 문제점은 능히 고칠 수 있는 존재이다.
예를 들어, 노화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노화 작용 자체를 막으면 죽음까지도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오브리 드 그레이(Aubrey de Grey)에게 인간은 일종의 기계와도 같다. 그레이는 자동차의 고장 난 부분을 고치듯 인간의 노화를 하나의 질병이나 기계적 결함으로 규정하고, 고칠 수 있다고 공헌한다. 트랜스휴먼 담론에서 인간은 기계적인 존재이다. 기계로서의 인간은 완벽히 파악될 수 있는 존재인 동시에 고쳐질 수 있는 존재이다.
정리해 보자면, 트랜스휴머니즘 담론에서 공유되는 몇 가지 철학적인 이해들은 다음과 같다: “주어진 인간과 자연의 본성이라는 것은 불완전하고, 그 불완전성을 극복할 힘이 인간 이성에 있다; 이성적-기술적 노력을 통해 불완전성을 극복함으로써 세속적 유토피아를 이 땅에 건설할 수 있다.” 기술을 통해 인간을 모든 생물학적 억압으로부터 구원하고자 하는 것, 그것이 트랜스휴머니즘의 목표다.
@Pixabay, alper omer esin
기독교 신학은 이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트랜스휴머니즘이 담아내고 있는 위 철학적 전제들은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비록 인간의 참여가 동반되기는 하지만 기독교 신학은 분명하게 종말의 완성을 하나님 행위에 의한 것으로 규정한다. 견제되지 않는 인간 이성과 그에 대한 낙관적 신뢰가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였는지 우리는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과 오늘날 직면하고 있는 생태위기를 통해 처절히 경험해 왔다. 아무리 과학기술이 인간의 고통과 한계를 극복하게 해 준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인간 앞을 가로막는 하나님 경험(출 4:24-26) 안에서 개발되고 시행되어야 할 것이다. 피조된 존재로서의 인간, 모든 것들과의 관계 안에 놓여 있는 인간이라는 신학적 인간 이해는 무분별한 기술 개발과 그로 인해 벌어질 수 있는 트랜스휴먼 시대의 인간 소외와 불평등의 심화를 막을 수 있는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트랜스휴먼 기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기술 자체를 거부해야 하는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 신학자 테드 피터스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본다면 어느 정도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만약 그리스도의 사역이 인간을 질병으로부터, 그리고 죽음으로부터 살리는 치유사역이었다면, 트랜스휴먼 기술이 가져올 생물학적인 혜택들을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생의학적 진보가 일정 부분 질병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해 주었고, 그러한 혜택을 근본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으로 여긴다면, 트랜스휴먼 기술이 가져올 혜택 또한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트랜스휴먼 기술 자체는 받아들이면서, 트랜스휴머니즘에 깃들어 있는 철학적 전제들을 고발하고, 끊임없이 비판하며 견제한다면, 그래서 그것을 신학적 통찰 안에 둔다면 (마치 야훼 하나님이 바다의 경계를 지으시고 그것을 통치하시는 것과 같이, 시편 74:12-15) 기술력 자체는 수용할 수 있지 않을까?
참고문헌
Aubrey de Grey, Ending Aging: The Rejuvenation Breakthroughs that Could Reverse Human Aging in Our Life Time (New York: St.Martin’s Press, 2007).
Daekyung Jung, “Transhumanism and Theological Anthropology: A Theological Examination of Transhumanism,” Neue Zeitschrift für Systematische Theologie und Religionsphilosophie 64.2(2022): 172-194.
Gregory R. Hansell and William Grassie eds., H+/-Transhumansim and Its Critics (Philadelphia: Metanexus Institute, 2011).
Hava Tirosh-Samuelson, “Transhumanism as a SecularFaith,” Zygon 47.4 (2012): 710-734.
Ted Peters, “Theologians Testing Transhumanism,” Theology and Science 13.2 (2015): 130-149
메인 칼럼
트랜스휴머니즘과 기독교신앙
글ㅣ정대경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과신대 연구모임
조니 뎁이 주연한 영화 “트랜센덴스”는 흥미로운 주제를 다룬다. 주인공 윌 캐스터 박사(조니 뎁)는 모든 지식을 네트워킹하면서 자각 능력까지 가질 수 있는 슈퍼컴퓨터 PINN의 완성을 앞두고, 반과학단체의 암살시도로 인해 죽음 직전의 상황에 놓이게 된다. 연인이자 동료인 에블린(레베카 홀)은 캐스터 박사의 뇌를 스캔하여 PINN에 이식한다. 이를 통해, 캐스터 박사는 생물학적 몸이 아닌 슈퍼컴퓨터 내의 의식적 존재로서 계속해서 살아가게 된다.
공상과학 같은 이 이야기는 Humanity Plus(Humanity+) 등의 단체를 중심으로 실제 연구되고 있는 기술력이다. 이를 트랜스휴먼 기술이라고 부른다. 트랜스휴먼 기술은 인간에게 주어진 3가지 생물학적 한계들, 곧 노화, 질병, 죽음을 극복하고자 한다. 기술력의 궁극적인 목표는 인간의 뇌를 스캔하여 기계의 몸이나 컴퓨터에 이식하는 것이다. 영화 “트랜센덴스”의 캐스터 박사처럼…. 현재의 기술력으로는 불가능해 보이지만, 만약 인간의 의식이 현대 뇌과학이 밝혀주듯 뉴런들과 시냅스들, 그리고 그사이를 오가는 전기화학신호와 물질들 사이 복잡한 네트워크에 수반해서 일어나는 현상이라면 원칙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구글 기술고문이자 컴퓨터 과학자인 레이 커츠와일은 이러한 종류의 기술력이 가까운 시일 내 실현될 수 있다고 그의 저서 “특이점이 온다(Singularity is coming)”에서 주장한 바 있다. 주어진 한계 상황들을 극복하는 인간의 노력이 죽음을 극복하려는 차원에까지 확장되는 것이다.
영국의 생물학자 줄리안 헉슬리는 이러한 인간의 자기 초월능력에 대한 신념을 트랜스휴머니즘이라고 부르자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인간 종은 그들이 원하면 그들 자신을 초월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믿음에 대한 이름이 필요하다. 아마도 ‘트랜스휴머니즘’이 적합할 것이다. 인간은 인간으로 남아있는 동시에 인간으로서의 본성의 새로운 가능성들을 실현하기 위해 자신을 초월하려고 한다.” Julian Huxley, Religion without Revelation, 1967, p. 195.
기술력을 통한 노화와 질병의 극복, 나아가 죽음에 대한 극복은 인간을 모든 종류의 억압으로부터 해방하는 궁극적인 기술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Watcha, "이어즈&이어즈" 한 장면
세계 트랜스휴머니스트 연합(World Transhumanist Association)의 초대 발기인으로 참여한 옥스퍼드 대학의 철학 교수인 닉 보스트롬은 트랜스휴먼 기술에 대해 반대하는 목소리를 비판하며,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면서부터 이미 주어진 본성과 자연을 변형시켜 사용해 왔다고 지적한다. 언어와 문자를 사용하는 것, 커피 열매를 자연 그대로의 상태로가 아니라 가공해서 섭취하는 것, 인간 장기 이식 수술로부터 자연 치아를 인공 치아로 바꾸는 임플란트 시술까지 인간은 이미 기술력을 통해서 자연을 가공해서 사용해 왔고, 일정 부분 인간의 자연적인 본성까지도 이미 가공해서 사용해 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트랜스휴먼 기술에 반대하는 것은 보수적 성향, 곧 “현 상황 편향성(status quo bias)”에 의한 것이지 만약 트랜스휴먼 기술이 실현된다면 그 혜택으로 인해 더 이상의 반대는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달리 스탠퍼드 대학의 철학 교수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두 가지 이유를 들어 트랜스휴먼 기술의 개발과 상용화를 반대한다. 첫 번째는 기술 개발을 위해 들어가는 자원의 투자 대비, 기술 혜택은 사회경제적 권력을 가진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돌아가게 될 것이고, 나아가 사회 내 불평등을 가속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다른 이유로 후쿠야마는 인간의 카오스적 복잡성을 든다. 인간은 오랜 진화과정을 거쳐 출현한 상당히 복잡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의 속성을 바꾸게 된다면 다른 속성이 어떻게 변화될지 예측 불가능하다. 인간의 공격성과 호전성은 자신과 주변인들을 보호할 수 있는 방어력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배타적인 감정은 배제되지 않고 있는 동일 집단 내의 친밀감과 연결되어 있으며, 질투심은 사랑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생물학적인 한계 등을 기술력을 통해 변형하게 되면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지…. 의도치 않은 결과가 초래될 수 있다고 경고하는 것이다.
트랜스휴머니즘에 몸 담고 있는 과학자, 기술자, 철학자에게서 종종 발견되는 이념적 특성은 주어진 것, 곧 자연적 본성이 “불완전하다”라는 인식이다. 자연을 포함한 인간은 그러한 의미에서 니체가 이야기하듯 “극복되어야 할 무언가”이다. 트랜스휴먼 철학자로 널리 알려진 맥스 무어는 자연이 만들어 놓은 것은 훌륭하지만 완전하지 않다고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의심할 바 없이 그대(자연, Nature)는 최선을 다했어요.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당신이 인간을 형편없이 만들어놨다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네요.”
무어는 엑스트로피(extropy)증대가 인간이 추구해야 하는 모든 기술적인 목표라고 주장한다. 엑스트로피는 물리학에서 이야기하는 엔트로피(entropy), 곧 불가용성 에너지를 뜻하는 개념에 반대되는 다소 메타포적인 개념이다. 무어가 주장하는 엑스트로피는 생명체의 지능, 기능적 질서, 생명력 향상을 위한 능력과 욕구를 의미한다. (이 맥락에서 무어는 다소 엔트로피를 “무질서”로 이해하는 듯하다) 다시 말해, 무어에게 있어서 인간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인 목적은 이 엑스트로피를 계속해서 증대시킴으로써 주어져 있는 문제점, 한계 상황들을 극복하고 인간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그는 현대과학기술이 발전하기 전까지는 종교가 내세에 주어질 약속을 이야기함으로써 인간의 엑스트로피적 욕구를 일시적으로 충족시켜 주었으나, 트랜스휴먼 기술은 내세가 아닌 현세에서 보장해 줄 수 있으므로 미래에는 트랜스휴머니즘이 종교를 대체할 것이라는 대담한 주장도 내놓는다.
흥미로운 점은, 하지만, 무어를 비롯한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은 없다고 주장하면서도 자신들이 그리고 있는 하나의 이상향과도 같은 인간, 곧 노화와 질병을 경험하지 않는 영원 불사의 존재를 하나의 이상향 삼아서 그것을 추구하며, 철학적-기술적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힘으로 유토피아를”이라는 근대 이성의 지상낙원 건설 프로젝트가 트랜스휴머니즘을 통해 반복되는 느낌이다. 그래서 혹자는 이러한 움직임을 트랜스휴머니즘의 세속적 종말론(Secular Eschatology)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이해 안에는 인간의 이성과 능력에 대한 낙관이 숨어있다. 그래서 하바 티로쉬-사무엘슨과 같은 철학자는 트랜스휴머니즘 담론을 이끌어가는 학자들 사이에 근대 계몽주의 이성이 깃들어 있다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 그들에게 인간은 모든 것을 측량할 수 있는 존재이고, 개별적 주체는 독특한 자기만의 본성을 가지며, 인간의 언어는 실재를 정확하게 기술할 수 있고, 인간 종은 다른 종들보다 뛰어나며, 그러므로 그들 자신을 위해서라면 주어진 자연과 본성을 자유롭게 교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트랜스휴머니스트들에게 인간의 자연적 본성은 과학기술을 통해 “완벽히”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지식을 토대로 인간은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으며, 발견된 문제점은 능히 고칠 수 있는 존재이다.
예를 들어, 노화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노화 작용 자체를 막으면 죽음까지도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오브리 드 그레이(Aubrey de Grey)에게 인간은 일종의 기계와도 같다. 그레이는 자동차의 고장 난 부분을 고치듯 인간의 노화를 하나의 질병이나 기계적 결함으로 규정하고, 고칠 수 있다고 공헌한다. 트랜스휴먼 담론에서 인간은 기계적인 존재이다. 기계로서의 인간은 완벽히 파악될 수 있는 존재인 동시에 고쳐질 수 있는 존재이다.
정리해 보자면, 트랜스휴머니즘 담론에서 공유되는 몇 가지 철학적인 이해들은 다음과 같다: “주어진 인간과 자연의 본성이라는 것은 불완전하고, 그 불완전성을 극복할 힘이 인간 이성에 있다; 이성적-기술적 노력을 통해 불완전성을 극복함으로써 세속적 유토피아를 이 땅에 건설할 수 있다.” 기술을 통해 인간을 모든 생물학적 억압으로부터 구원하고자 하는 것, 그것이 트랜스휴머니즘의 목표다.
@Pixabay, alper omer esin
기독교 신학은 이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트랜스휴머니즘이 담아내고 있는 위 철학적 전제들은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비록 인간의 참여가 동반되기는 하지만 기독교 신학은 분명하게 종말의 완성을 하나님 행위에 의한 것으로 규정한다. 견제되지 않는 인간 이성과 그에 대한 낙관적 신뢰가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였는지 우리는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과 오늘날 직면하고 있는 생태위기를 통해 처절히 경험해 왔다. 아무리 과학기술이 인간의 고통과 한계를 극복하게 해 준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인간 앞을 가로막는 하나님 경험(출 4:24-26) 안에서 개발되고 시행되어야 할 것이다. 피조된 존재로서의 인간, 모든 것들과의 관계 안에 놓여 있는 인간이라는 신학적 인간 이해는 무분별한 기술 개발과 그로 인해 벌어질 수 있는 트랜스휴먼 시대의 인간 소외와 불평등의 심화를 막을 수 있는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트랜스휴먼 기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기술 자체를 거부해야 하는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 신학자 테드 피터스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본다면 어느 정도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만약 그리스도의 사역이 인간을 질병으로부터, 그리고 죽음으로부터 살리는 치유사역이었다면, 트랜스휴먼 기술이 가져올 생물학적인 혜택들을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생의학적 진보가 일정 부분 질병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해 주었고, 그러한 혜택을 근본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으로 여긴다면, 트랜스휴먼 기술이 가져올 혜택 또한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트랜스휴먼 기술 자체는 받아들이면서, 트랜스휴머니즘에 깃들어 있는 철학적 전제들을 고발하고, 끊임없이 비판하며 견제한다면, 그래서 그것을 신학적 통찰 안에 둔다면 (마치 야훼 하나님이 바다의 경계를 지으시고 그것을 통치하시는 것과 같이, 시편 74:12-15) 기술력 자체는 수용할 수 있지 않을까?
참고문헌
Aubrey de Grey, Ending Aging: The Rejuvenation Breakthroughs that Could Reverse Human Aging in Our Life Time (New York: St.Martin’s Press, 2007).
Daekyung Jung, “Transhumanism and Theological Anthropology: A Theological Examination of Transhumanism,” Neue Zeitschrift für Systematische Theologie und Religionsphilosophie 64.2(2022): 172-194.
Gregory R. Hansell and William Grassie eds., H+/-Transhumansim and Its Critics (Philadelphia: Metanexus Institute, 2011).
Hava Tirosh-Samuelson, “Transhumanism as a SecularFaith,” Zygon 47.4 (2012): 710-734.
Ted Peters, “Theologians Testing Transhumanism,” Theology and Science 13.2 (2015): 130-1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