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스테리아] 2. '과학 혹은 종교'이전의 과학과 종교 (전경훈)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25-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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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혹은 종교'이전의 과학과 종교

- 마지스테리아 1장 -

글ㅣ전경훈
《 마지스테리아》  역자


[마지스테리아]의 저자 조너선 스펜서는 과학과 종교의 역사를 상징 짓는 주요한 사건들을 이야기하면서 그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그 배후를 자세하게 분석하며 논의를 전개한다. 이러한 서술 방식은 독자의 관심을 쉽게 끌어내고, 기존 관념을 분석하고 비판하면서 저자의 주장을 제시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스펜서는 종교와 과학의 충돌을 전면적으로 드러낸 것으로 잘 알려진 사건들이 우리에게 알려진 것만큼 그렇게 단순한 사건이 아니며, 그 배후에는 중층적 배경이 작용하고 있음을 독자들에게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그리고 종교와 과학의 역사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단순한 충돌의 역사가 아니며, 복잡하게 얽힌 역사‘들’이란 사실을 상기시킨다.


스펜서가 과학과 종교의 역사에서 문제가 되는 첫 사건으로 제시한 것은 415년 고대 알렉산드리아의 히파티아 살해 사건이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당대 최고의 수학자, 천문학자, 철학자였던 히파티아는 성난 그리스도인 무리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알렉산드리아 대주교 키릴로스가 그녀를 제거하기 위해 군중의 분노를 조장했고, 군중은 그녀의 옷을 벗기고 굴 껍데기로 살을 저며내 죽인 뒤 시신을 불태웠다. 과학과 종교(그리스도교, 그중에서도 로마 가톨릭교회)가 충돌하여 종교가 과학을 가혹하게 억압한 첫 번째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스펜서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로 -다소 선정적이고 가학적인 장면 묘사와 함께- 기술되어 고착된 채로 전해지게 된 것이 18세기 후반 계몽주의 시대였음을 지적한다. 이성의 빛으로 온갖 낡은 관념과 관습을 타파하고 미래를 향한 진보에 몰두했던 당시 사상가들에게 히파티아는 그야말로 비합리적인 교회 권력에 의해 핍박당한 이성의 여신 그 자체였으며, 그녀의 죽음은 광신적인 그리스도교 세계에 의해 합리적인 고전 세계가 무너졌음을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그리스도인 군중이 이교도 수학자 히파티아를 처형하려고 끌고 가고 있다. (p.38) @britannica.com


 

하지만 스펜서는 히파티아의 사건이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단지 이성과 신앙, 과학과 종교, 그리스-로마의 고전 세계와 그리스도교 세계로 정확하게 쪼개져 후자가 전자를 박해한 사건이라 보기 어렵다. 이 사건의 배경에는 몰락해 가는 로마제국 안에서 경쟁하던 교회 권력과 세속 권력의 다툼이 있었다. 알렉산드리아의 통치권을 두고 대주교 키릴로스와 총독 오레스테스의 다툼이 심해지고 있던 차에 총독 오레스테스가 뛰어난 학식으로 명성이 높았던 자신의 스승이자 친구 히파티아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대주교 키릴로스는 히파티아의 영향력을 차단할 필요가 있었고 신자들을 선동하여 그녀를 제거했다. 그러니 이 사건의 핵심은 종교에 의한 과학의 탄압이 아니라 로마제국 말기에 벌어진 권력 다툼이었다.


스펜서는 히파티아 사건의 이면을 분석하면서, 로마제국이 쇠퇴하고 그리스도교가 부상하던 시기의 과학과 종교에 대한 고찰로 나아간다. 그가 가장 먼저 지적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과학과 종교의 개념을 고대에 적용하는 것이 시대착오적이라는 사실이다. 고대 세계에서 자연을 관찰하여 지식을 얻는 것은 오늘날의 과학보다 훨씬 폭이 넓은 철학적 탐구활동의 일부였다. 오늘날 과학science의 어원이 되는 라틴어 스키엔티아scientia는 더 높은 차원의 사피엔티아sapientia(사고, 지혜)에 이르기 위한 한 단계로서 ‘앎’을 뜻했다. 자연과 우주를 관찰하여 얻는 스키엔티아는 현세에서 초월적인 완벽에 도달하기 위해 영원하고 필연적인 우주의 진리를 파악하는 자연철학이었다. 이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피타고라스와 같은 철학자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는 특징이며, 근대에 자연과학이 독립된 학문으로 성립될 때까지 서구의 학문 세계에 면면히 이어지는 지적 전통이었다. 


@Unsplash, Jorgen Hendriksen


그다음으로 스펜서는 이 고대의 스키엔티아 곧 자연철학을 대하는 그리스도교의 입장 또한 중층적이었음을 지적한다. 유대-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세상 만물은 모두 좋으신 하나님이 창조하신 좋은 것이었으므로, 하나님이 주신 감각과 이성을 활용하여 인간이 자연을 관찰하고 그 원리와 법칙을 탐구하는 것은 충분히 긍정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자연철학을 긍정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계시된 진리를 불완전한 것으로 여기게 하는 의심과 불안을 초래할 수 있었고, 특히 자연철학으로 얻은 지식이 성경이나 교리에 일치하지 않을 때 발생하는 부조화는 심각한 갈등을 유발할 수 있었다. 이를 둘러싼 여러 신학자의 다양한 의견들을 확인할 수 있는데, 유스티누스, 클레멘스, 오리게네스 같은 교부들이 ‘신의 섭리’에 대한 탐구로서 자연철학을 옹호했고 이교도 철학의 학습을 권고했으나 테르툴리아누스 같은 학자는 이를 완강히 거부하고 비판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세례를 베푼 암브로시우스 또한 그와 입장을 달리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인들 또한 이교도와 같이 자연에 대한 앎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했으며 자연의 법칙들에 대해 숙고했으나, 암브로시우스는 오직 창조주 하나님의 의지를 강조하면서 자연세계의 법칙성마저 거부했고 그러한 법칙성을 추구하는 자연철학에 적대적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신학적으로 누구의 입장이 옳고 그른가 하는 문제를 떠나 오늘날 교회에서 존경받는 교부들 사이에서도 자연철학에 대한 의견이 서로 달랐고 어떤 일관된 그리스도교의 입장이나 태도가 존재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더욱이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에서 공인되고 제국의 국교로 지정되어 급속하게 신자가 증가하던 4세기에서 5세기에 이르는 시기는 전체적으로 로마제국이 쇠망하던 시기였다. 스펜서에 따르면 그리스도교의 부상 자체가 로마제국을 몰락시킨 유일하거나 가장 큰 원인이 아니었듯이, 이미 이 시대에 그리스-로마의 고전 세계가 사실상 막을 내린 상태였고, 그리스 시대에 시작된 자연철학은 로마제국에서 더 이상 새로운 동력을 얻지 못했으며 그리스도교가 국교가 되던 시기에는 이미 상당히 쇠퇴한 상태였다. 로마제국은 대내외 복합적인 요인들로 멸망했고, 로마가 멸망했을 때 오히려 그 유산을 간직한 것은 교회였다. 중세의 수도원들은 신학만이 아니라 남아 있던 거의 모든 학문의 자료들을 보존했고, 오히려 그리스도교를 통해 고대의 자연철학은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다. 물론 제국이 그대로 유지되었던 동로마제국에서는 계속해서 자연철학이 활발하게 논의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다만 이 시대의 문제는 그리스도교가 득세하면서 자연철학 자체를 억압하거나 제거하려 했다기보다 자연철학을 바탕으로 신학을 정초하려는 시도들이 이어졌다는 것이었다. 6세기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한 상인 출신의 수도승 코스마스는 『그리스도교 지형학』이란 책을 써서 당대의 이러저러한 지리학적 지식을 수집하고 정리하는 한편, 이를 바탕으로 ‘평평한 세계’ 이론을 주장한 탓에 자연 세계를 대하는 그리스도교의 비합리성을 대변하는 인물로 자주 지적되었으나, 스펜서는 이 코스마스가 당시의 그리스도교 전체를 대표할 수 없는 인물이었음은 물론, 오히려 그리스도교 안에서 비판과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이미 동시대에 활동한 필로포노스는 『세계의 창조』를 통해 성경은 자연을 알게 하는 책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게 하는 책임을 강조하고 성경을 자연에 강제 대입함으로써 생기는 부조화의 문제가 갖는 위험성을 지적했다. 스펜서는 19세기의 탁월한 물리학자이자 수학자인 맥스웰의 말을 빌려 본질적으로 유동적인 과학의 ‘사실’을 토대로 종교의 교의를 성립하려는 시도가 매우 위험하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Unsplash, Paul Skorupskas


결론적으로 『마지스테리아』의 첫 장에서 말하는 내용은 우리가 과학과 종교의 관계 및 그 역사를 논할 때 주의해야 할 몇 가지 사항으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히파티아 살해 사건과 같이 과학과 종교의 충돌, 특히 종교에 의한 과학 탄압을 대표하는 것으로 알려진 사건은 그보다 더 중요한 요인들이 얽힌 권력 다툼의 사건인 경우가 많다. 둘째, 서구의 근대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과학과 종교의 개념은 성립되지 않았다. 자연 세계에 대한 탐구는 물질과 정신을 아우르는 보편적이고 영속적인 원리에 이르려는 철학 활동의 일부였기에 오히려 신앙생활과 긴밀하게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 셋째, 자연철학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입장과 태도 또한 단일하지 않았다. 고대로부터 다양한 신학자들이 자연철학에 대해 우호적이거나 적대적인 목소리를 냈고, 이런 다양한 목소리가 같은 시대에 공존하기도 했다. 넷째, 로마제국이 몰락하면서 서양의 그리스-로마 고전 시대가 막을 내릴 때 과학은 이미 쇠퇴하고 있었고, 오히려 이를 보존한 것은 교회였다. 제국이 유지된 동로마제국에서 오히려 문제가 되었던 것은 과학을 바탕으로 교의를 정초하려 했던 시도들이었다. 그러니 독자들은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획일적인 충돌의 역사로 보려는 시각에서 벗어나 더 섬세하고 예리하게 그 중층적 요인들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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