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스테리아] 4.중세 기독교 세계의 과학 (전경훈)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25-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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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기독교 세계의 과학

- 마지스테리아 4・5장 -

글ㅣ전경훈
《마지스테리아》  역자


  로마제국이 붕괴한 뒤 유럽은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고, 그리스에서 시작된 고대 과학은 시리아를 거쳐 아랍 세계로 이전되어 이슬람 제국의 번영과 함께 발전했다. 인도에서 안달루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이슬람 세계 안에서 광범위한 그리스어 고전 번역이 이루어졌고, 아리스토텔레스를 근간으로 하는 이슬람 과학이 성장했다. 하지만 같은 시기에 유럽의 그리스도교 세계는 과학에 무심했다. 칼 세이건 같은 과학자들은 500년에서 1500년까지 1000년에 이르는 기간을 과학이 부재한 암흑의 시대로 보았고, 이것이 서양의 중세를 바라보는 일반적인 시선이기도 했다. 유럽에서 다시 과학이 등장하는 것은 르네상스 이후였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기하학을 가르치는 여성"중세 시기에 제작된 에우클레이데스의 원론의 삽화 @wikipedia


 그러나 스펜서는 최근 중세사 연구 자료를 바탕으로 이러한 통설이 과장되었음을 입증한다. 이슬람 세계에 비해 그리스도교 세계가 뒤처져 있던 것은 사실이지만, 과학이 전멸했던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교화 된 유럽에서도 하나님의 ‘자연이라는 책’을 탐구할 이유가 충분히 있었고, 이러한 역할을 담당한 이들이 피시키physici다. 이들은 창조된 세계가 창조주의 질서 잡힌 이성적 정신을 반영한다는 전제에서 학문을 연구했다. 이는 곧 자의적인 신의 개입보다는 자연 안에 존재하는 필연적 인과관계를 통해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신앙에 대해 도전적인 함의를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첫째, 자연의 필연성과 법칙성이 강조되면 ‘기적’은 불가능한 것이 된다. 성경에 기록된 예수의 기적은 물론이고, 매일 드리는 미사에서 빵과 포도주가 예수의 살과 피로 변하는 기적을 믿고 가르치는 가톨릭교회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었다. 둘째,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성경이 세계를 설명하는 데 부족하거나, 나아가서 적합하지 않다는 함의를 가질 수 있다. 피시키는 이러한 문제의 위험성을 인식했고 성경을 축자적인 독해가 아니라 절충적 해석으로 읽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피시키는 교회의 신학자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하지만 이들을 몰아낸 것은 12세기 중반 이후 이슬람 세계를 통해 밀려든 그리스 과학과 철학, 그중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과 주석서였다. 이제 그리스도교 세계는 이슬람 세계가 일찍이 경험했던 것과 같은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연철학의 토대는 그 자족성, 즉 어떠한 계시와도 상관없이 이성에만 근거해서 우주에 관한 권위적 진술을 할 수 있는 능력에 있는데, 여기서 실제로 문제가 되는 것은 그에 따른 결론들이 아니라 (신앙으로부터) ‘지성의 독립’이었다. 13세기에 들어 신학자들은 이를 통제하려 했다. 


  신학에 의한 전체 학문의 통제가 시도된 배경은 바로 대학이었다. 이탈리아 볼로냐 대학을 시작으로 유럽 곳곳에 설립된 대학들은 이슬람 세계는 물론이고 여타 다른 지역에서도 볼 수 없던 조직으로, 단순한 학교나 연구기관이 아니라 학문하는 이들이 스스로 결성한 자치적 공동체였고 독립된 법인이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과 달리 중세 유럽의 대학들은 신학보다는 과학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기관이었으며 상대적으로 큰 자유를 누렸다. 물론 중세 유럽 사회 전체를 지배한 것은 가톨릭교회였으므로 대학이 그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을 수는 없었다. 13세기 들어 대학을 통제하려는 교회의 시도가 있었고 1277년 파리의 주교는 219개 명제를 단죄했다. 이 219개 명제를 낱낱이 살펴보면 세계의 본질, 인간 지식의 근거, 인격의 필멸성, 결정론, 신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의지에 관한 논쟁 등 중세 전체를 관통하는 논란의 주제들이 포함되어 있긴 하지만, 그 선정 기준에 어떤 일관성이 있었는지 알기 어려울 만큼 잡다하게 보이기도 한다. 결국 이들 논제에 대한 단죄가 근본적으로 노린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었다. 이는 가톨릭교회의 권력이 정점에 이르렀던 이 시기에 이교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이 신학을 포함한 그리스도교 세계 학문 전체의 기초가 되었다는 놀라운 사실에 대한 반격이자 반증이기도 했다. 근본적인 문제는 이슬람 세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서로 모순되는 신앙의 진리와 철학의 진리가 양립하는 ‘이중 진리’가 가능한가 하는 것이었고, 중세 내내 벌어진 종교와 과학 사이의 격렬한 논쟁은 무엇보다도 지성의 권위가 어디에, 누구에게 있는지를 따지는 것이었다. 


  1277년의 단죄는 물론 신의 불가해한 의지와 절대적 권능을 강조하여 이성과 과학의 실증적인 확실성을 약화시키고 자연철학의 진리를 신앙의 계시된 진리보다 낮은 층위에 두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그 결과로 중세 과학에 의도치 않은 해방 효과를 불러오기도 했다. 즉 신의 권능이 단호하게 강조되었기에 과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 안에서 불가능한 현실들을 ‘상상에 따라secundum imaginationem’ 가설로 설정하여 실험해 보는 사고실험thought experiment이 배태된 것이다. 중세의 과학적 사고실험은 신이 바라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절대적 권능 개념과 신이 오직 창조를 위해 미리 규정된 자신의 계획에 따라서만 행동한다는 규정된 권능 개념 사이의 뚜렷한 구별이라는 맥락 안에서 일어났고, 이를 통해 자연철학의 탐구는 완전히 무의미해질 뻔한 위기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능성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20세기 초 프랑스의 과학사학자 피에르 뒤엠은 이러한 이유에서 1277년의 단죄를 근대 과학이 탄생한 계기로 평가한다. 


코페르니쿠스의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의 한 부분 @wikipedia


  일반적으로 근대 과학의 탄생 혹은 과학혁명의 시작은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이 발표된 1543년으로 보는데 여기에는 몇 가지 오해와 과장이 있다.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은 이른바 ‘패러다임의 전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긴 하지만 진정한 변화가 일어난 것은 16세기의 마지막 25년이었다. 수학적 천문학자인 코페르니쿠스는 프톨레마이오스에 의한 기존의 지구 중심 우주 모델의 문제를 개선하려는 시도에서 태양 중심 우주 모델을 고안했다. 그가 태양중심설을 생각한 것은 그 유명한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를 발표하기 30년도 더 전의 일이었다. 코페르니쿠스 자신은 태양중심설이 단순한 사고실험이 아님을 분명히 했으나, 당시에 태양중심설이 소개되고 수용된 방식과 맥락은 명백히 사고실험이었다. 책의 출간을 적극 추진한 레티쿠스와 오시안더가 코페르니쿠스의 동의 없이 이 책을 하나의 사고실험으로 제시했고 이것이 결정적이었다. 하지만 오시안더가 그렇게 한 까닭은 종교 당국의 박해를 피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관측 장비가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로서는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운동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별들의 연주시차를 전혀 감지할 수 없다거나, 금성이 달과 같이 차고 기울지 않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등 여러 가지 과학적 반론을 확실하게 물리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이 근거한 기하학은 아리스토텔레스에 기반한 학문의 위계에서 낮은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기하학을 바탕으로 당대 물리학과 천문학의 근본을 모두 갈아치워야 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는 당시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에 대한 반응이 뜨겁지 않았다는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은 30여 년이나 뜸을 들여 신중하게 발표되었음에도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으로나 폭발적인 반응을 얻지 못했다. 코페르니쿠스는 새로운 수학적 우주 모형을 제시했으나 자신의 이론을 과학적으로 입증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오히려 중세의 우주관을 뒤집은 것은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이 아니라 1572년 브라헤가 발견한 초신성이었다. 갑작스레 등장해서 한동안 밝게 빛나다 사라지는 별이 처음 발견됨으로써 달 위의 천구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고 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에 구멍이 뚫린 것이다. 브라헤만이 아니라 유럽 여러 지역의 다른 학자들도 이 초신성을 관찰했기에 쉽게 무시하거나 부정할 수도 없었다. 그로부터 5년 뒤에는 유럽 전역에서 혜성이 관측되었는데, 혜성은 낯선 것이 아니었으나 더 정밀해진 관측으로 인해 이 혜성이 달 위의 천구에 있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이로써 달 위의 천구에는 변화가 없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에 다시 한 번 구멍이 뚫렸다. 1588년 브라헤는 예상되는 문제와 갈등을 방지하기 위해 코페르니쿠스와 프톨레마이오스를 절충하여, 여전히 지구가 중심에 남아 있고 별, 달, 태양이 그 주위를 돌되 다섯 개의 행성이 태양 주위를 돈다고 하는 지구-태양중심설을 제안했다. 브라헤의 이론이 코페르니쿠스의 이론보다 당시에 더 많은 관심을 받았던 것은 사실이나, 브라헤의 이론 또한 완벽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중요한 것은 이를 통해 이제까지 제시된 우주 모델들이 모두 부분적으로만 진리임을 인식하게 되었다는 점이며, 이러한 인식이 성경에 대한 절충주의적 접근과 상호작용을 이루었다는 점이다. 물론 그 절충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 하는 문제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골칫거리로 남게 된다. 


  종교개혁이 계속 진행되면서 종교계는 말할 것도 없고 사회 전반이 불안정해진 16세기 말에 새로운 우주 모형을 둘러싼 논쟁이 한층 가열되는 양상을 띠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는 인물은 소위 ‘과학의 순교자’로 여겨지는 브루노였다. 이탈리아 태생이지만 영국, 프랑스, 독일을 주유했던 브루노는 우주가 무한하고 영원하며, 따라서 우주에는 어떠한 중심도 없고 절대적 운동도 없다는 지극히 현대적인 우주론을 제시했다. 또한 가톨릭교회의 핵심 교리인 그리스도의 육화와 신성, 동정녀 탄생, 성체성사의 성변화를 의심했고, 신과 물질 모두가 영원하며 상호의존적이라고 보는 범신론적 주장을 펼쳤다. 결국 그는 종교재판소에 고발당했고 8년 동안 투옥되어 있다가 1600년에 화형되었다. 갈릴레오가 망원경을 가지고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실증한 것이 그로부터 불과 10년 뒤였다. 하지만 브루노가 처형당한 주된 원인은 그가 주장한 우주론이 아니라, 그가 마법사와 함께 마법과 주술을 행했다는 사실이었다. 실제로 그의 파격적인 주장들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으며, 사고실험의 형태이긴 했으나 이미 이전 시대에 충분히 제시된 것들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뒤에 서서히 서양 세계 전체를 흔들 인물이 준비되고 있었으니 그 이름도 유명한 갈릴레오 갈릴레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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