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스테리아] 5. 근대 과학과 종교가 마주한 순간 (전경훈)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25-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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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과학과 종교가 마주한 순간

- 마지스테리아 5・6장 -


글ㅣ전경훈
《마지스테리아》 역자


  이제 우리는 마침내 근대 과학이 성립되어 종교와 마주 서는 역사적 시기를 다룬다. 르네상스를 지나 17세기에 이른 유럽은 모든 면에서 중세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대를 맞게 된다.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주의는 세계와 인간에 대한 새로운 사고를 가능하게 했고, 종교개혁은 종교만이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 사상에 균열을 일으켰다. 이러한 배경에서 이제까지 연역적 추론을 바탕으로 사변적 앎을 추구하는 기존의 형이상학에서 벗어나 ‘관찰’과 ‘실험’을 통한 경험적 앎을 추구하는 과학이라는 독립된 학문 영역이 성장하면서 종교와 더 복잡한 관계를 맺는다. 


  갓 태어난 근대 과학이 종교와 관계 맺는 시발점으로 사람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사건은 갈릴레오(1564~1642)에 대한 종교재판이다. 《마지스테리아》의 저자 스펜서는 종교의 탄압에 희생된 과학의 순교자라는 갈릴레오의 신화적 이미지를 벗겨내고 실제로 일어난 논쟁과 사건을 분석한다. 사실 갈릴레오와 그에 관한 종교재판이 신화로 남는 데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친 인물은 존 밀턴이었다. 밀턴은 검열이 부활하려는 잉글랜드에서 ‘표현의 자유’를 주창하고자 『아레오파지티카Areopagitica』(1644)를 집필하면서 갈릴레오를 권력이 억압한 자유의 상징으로 제시했고, 18세기의 계몽주의자들은 밀턴의 시각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갈릴레오를 과학의 순교자로 추앙했다. 따라서 실제의 갈릴레오보다 갈릴레오 신화가 역사에 더 강한 영향을 끼치는 문제가 발생했다. 


재판정에 선 갈릴레오 갈릴레이, 조제프 니콜라 로베르 플뢰리, 1847 @wikipedia

 

  물론 갈릴레오가 위대한 인물이 아니었다는 말은 아니다. 갈릴레오가 위대한 것은, 그가 단지 태양중심설(지동설)을 확신했고, 가톨릭교회의 탄압을 받으면서도 자신이 확신하는 진리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태양중심설은 이미 코페르니쿠스가 주장했고, 갈릴레오의 동시대 인물인 케플러는 태양중심설에 대한 더욱 강력한 수학적 근거들을 제시했다. 갈릴레오의 위대함은 ‘관찰’을 통한 진리의 입증이라는 근대 과학의 토대를 가장 확실하게 마련했다는 데 있다. 그는 스스로 개량한 망원경을 가지고 달과 태양과 행성을 직접 관찰했다. 울퉁불퉁한 달 표면을 관찰하여 천체가 완전한 구체가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혔고, 금성의 운동을 관찰하여 행성 또한 달처럼 차고 기울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혔으며, 태양 표면의 흑점을 관찰하여 태양 또한 스스로 회전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는 단지 이제까지 천문학을 지배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에 구멍을 냈다는 데서만 문제가 된 것이 아니다. 진정한 문제는 이제 누구나 언제든 반복해서 관찰 가능한 사실을 가지고 진리를 판별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이제까지 진리를 판정해 오던 권력 당국을 전복하는 위협이 될 수 있었다. 성경은 늘 다층적 해석의 대상이 되었지만, 이제는 성경의 해석마저도 세상을 관찰하여 확인되는 사실들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 가능해졌고, 실제로 갈릴레오는 저서를 통해 그러한 주장을 펼치고 있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 @위키백과


 더구나 갈릴레오는 로마에서 가까운 피렌체에서 활동했고, 당시 가톨릭교회는 여전히 종교개혁의 여파 속에서 상당히 예민해져 있는 상황이었다. 교황청은 종교재판을 통해 프로테스탄트적이거나 이단적으로 보이는 사상들을 가혹하게 단죄했다. 불행하게도 갈릴레오는 이런 예민한 상황에서 외교적인 수완을 발휘할 수 있는 인물이 되지 못했다. 논쟁에서 지느니 차라리 친구를 잃는 편을 택했던 갈릴레오는 주요 저서에서도 기존 학자와 이론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조롱을 제대로 감추지 못했고, 유명해질수록 더 많은 적을 만들었다. 그에게 호의적이었던 교황과 추기경 등 가톨릭교회의 주요 인물들이 그에게 등을 돌렸고, 결국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지동설)을 이단적이며 터무니없는 오류가 있는 것으로 판결한 1616년 종교재판에서 이 학설을 따르는 견해를 철회하라는 경고와 함께 ‘이 학설을 가르치거나 옹호하거나 논의하는 일을 완전히 그만두라’는 명령을 받았다. 갈릴레오는 마지못해 판결을 받아들였으나 과학적 탐구를 멈추지 않았고, 15년 뒤인 1631년 지구의 운동에 따라 나타나는 조석 현상에 관한 책을 출간하면서 지동설에 무지한 교회를 간접적으로 비난한 것이 빌미가 되어 1616년의 명령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다시금 종교재판을 받았다. 잘 알려진 대로 갈릴레오는 교회가 단죄한 의견을 더 이상 주장하지 않는다는 성명서를 읽고 석방되었으나, 그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거나, ‘여전히 지구는 돈다’라고 말했다는 것은 모두 후대에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 


  하지만 갈릴레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 시기에 근대 과학은 유럽 여기저기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탄생하고 있었다. 프로테스탄티즘이 근대 과학의 탄생에 큰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프로테스탄티즘은 첫째, 생계를 위한 직업을 신이 부여한 소명으로 인식하는 프로테스탄티즘은 경험을 통한 실질적 지식을 긍정했다. 둘째, 성경에 대한 축자적 접근법을 강조하여 자연을 신비적이거나 우의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자연적으로 독해하는 경향을 낳았다. 셋째, 원죄로 인한 인간의 타락을 강조하면서 지적 겸손을 강조했고, 이러한 태도는 완결된 형이상학적 진리 체계보다는 앎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과 진리를 향한 부단한 탐구를 지향했다. 이러한 프로테스탄티즘의 영향을 보여주는 대표적 인물이 바로 영국의 베이컨이다. 그는 사변적 추론을 통해 진리에 접근하는 기존의 방식을 떠나, 경험한 사실들을 바탕으로 일반적 원리를 추론하는 귀납법을 확립함으로써 ‘관찰’과 ‘실험’을 토대로 하는 근대 과학의 탄생에 크게 기여했다. 


프랜시스베이컨 @위키백과


  그러나 ‘관찰’과 ‘실험’을 통한 근대 과학의 탄생을 프로테스탄트가 주도한 것만은 아니었다. 17세기에 가장 뛰어난 수학자이자 과학자로서 최초의 ‘실험’을 통해 기압의 존재를 확인한 파스칼은 신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더욱이 그 실험은 가톨릭 수도원에서 수사들의 도움을 받아 실시되었다. 프랑스에 갈릴레오를 소개하고 갈릴레오의 작업을 모방하면서 관찰과 실험을 병행했을 뿐 아니라, 폭넓은 서신 교환을 통해 종파를 넘어선 과학자들의 네트워크를 이룩한 메르센은 금욕적 수도회의 수사였다. 이들만큼 신실한 신자는 아니었지만, 끊임없는 지적 회의를 통해 앎의 토대 전체를 개혁하려고 했던 데카르트 또한 가톨릭 신자이기를 부인한 적이 없고, 오히려 자신의 신앙과 학문을 통합하고자 애를 썼다. 갈릴레오 재판에서 악역으로 등장하는 예수회 수사들은 저명한 교육기관들을 운영하며 당대 가장 뛰어난 과학자들을 배출했다. 다만 이 시기에 가톨릭 과학이 프로테스탄트 과학에 비해 뒤처지게 된 주된 이유는 가톨릭교회가 (오래된) 과학을 지나치게 신뢰한 탓이었지, (새로운) 과학을 적대하고 탄압한 탓은 아니었다. 


  이 새로운 학자들이 공통으로 추구한 것은 (종교를 타도하거나 신앙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신학으로부터 철학과 과학을 분리하려는 시도였다. 중세 이래로 유럽에는 국가와 종교로부터 독립적 지위를 유지하는 학문 공동체로서 대학이 존재하고 있었으나, 중세 대학의 학문은 신학 아래 모든 학문을 통합하고 있었다. 이제 새로 등장한 학자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확실하게 종교를 벗어난 학문 활동을 추구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실현해 냈다. 실현 방식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종파와 국경을 뛰어넘는 학자들의 서신 교환 네트워크의 형성이었고, 다른 하나는 대학과 구별되는 아카데미(학회)의 창설이었다. 프랑스의 메르센, 독일의 키르허, 잉글랜드의 올든버그 같은 개인이 주도하는 서신 교환 네트워크가 서로 경쟁하듯 작동하면서 이른바 ‘편지 공화국’을 이룩했고, 학자들은 이 비물리적 공간에서 자유로이 새로운 이론을 발표하고 토론했다.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프랑스와 잉글랜드에서도 설립된 아카데미(학회)는 학자들이 신앙이나 신학에서 벗어나 지식을 논할 수 있는 공동체로 기능했다. 이로써 ‘지식의 세속화’가 가능해졌다. 그리고 종교와 과학이 서로 구분되는 마지스테리움으로서 마주 서는 순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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