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할 결심 (김영웅)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25-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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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할 결심

 - 세포자멸사에서 지혜를


글ㅣ김영웅
기초과학연구원 유전체교정연구단 선임연구원
과신대 정회원, 후원이사



들어가며

제목에 낚였다면 사과드린다. 그러나 안심해도 되는 까닭은 사람에게 해당되는 표현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소 문학적이지만, 이 표현은 지금도 우리 몸 안에서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는 어떤 현상에 관한 것이다. 이 현상 덕분에 우리는 지금도 건강하게 살아 숨 쉬고 있다. 이른바 세포자멸사, 세포자살, 혹은 프로그램된 세포사멸이라고 알려진 Apoptosis (Programmed Cell Death)다.

@Unsplash, ThisisEngineering

믿어질지 모르겠지만, 우리 몸은 약 37조 개의 세포로 이뤄져 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이나 쓰는 나를 포함한 모든 인간이 수정란이라는 단 하나의 세포에서 시작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37조(370,000,000,000)라는 숫자는 가히 엄청난 것이다. 무려 0이 10개이지 않은가. 게다가 이 많은 세포들은 한 종류가 아니다. 피부세포, 혈액세포, 뇌세포 등 200가지 이상의 다양한 종류로 구성된다. 그렇다면 이렇게 많은 세포들은 생성된 이후 그저 그 수를 유지하며 가만히 살아 있기만 한 걸까? 아니다. 놀랍게도 매일 우리 몸 안에선 약 3천억 개의 세포가 죽어나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포 수가 늘 일정하게 유지되는 이유는 죽어나가는 만큼의 세포들이 매일 새롭게 생성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37조 개의 세포 수가 항상 유지되는 건 정지화면이 아니라 정지화면처럼 보이는 동영상에 빗댈 수 있다. 이를 생물학적 용어로는 '항상성(Homeostasis)'이라고 한다. 건강하다는 증거이며, 우리가 인지하지도 못한 채 유지되고 있는 생명의 신비다. 이 글에서는 매일 죽어나가고 또 매일 새롭게 생성되는 역동적인 세포들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어 파괴와 창조, 포기와 출발, 죽음과 부활 등으로 사고를 확장한 뒤 끝은 끝이 아니라 또 하나의 시작이라는 통찰을 나눠 보고자 한다.


세포자멸사

세포자멸사는 단어 자체가 갖는 한계 혹은 죽음이라는 단어의 어감 때문에 쉽게 부정적인 뉘앙스를 띠는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그건 순전한 오해다. 먼저 매일 약 3천억 개의 세포가 죽어나가는 주요 메커니즘이 바로 세포자멸사라는 사실, 그리고 비정상적이거나 병리학적인 원인 때문에 돌발적이고 수동적으로 벌어져 염증 반응 등 몸에 부작용을 일으키는 세포사멸인 '괴사(Necrosis)'와 달리, 우리 몸이 어떤 목적이 있어서, 그 목적에 부합하도록 미리 계획된 세포사멸이 바로 세포자멸사라는 사실을 알 때 우린 세포자멸사에게 오히려 고마워해야 한다. 

세포자멸사는 생명체의 발생과 분화 과정에 필수적인 과정이며, 세포가 수명이 다 되거나 어떤 이유로 감염이 되거나 갖가지 원인으로 손상되었을 경우 세포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방식이다. 여기서 '스스로'라는 단어가 중요하다. 타살이 아닌 자살이라는 말이다. 세포 스스로 자살을 결심하고 망설임 없이 실천으로 옮기는 현상이 바로 세포자멸사의 정체성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죽음들의 목적은 생명이다. 파괴는 창조의 전신인 것이다. 나는 이 현상을 가리켜 숭고하다고 표현하기에 거리낌이 없다. 이들의 죽음이 항상성의 주축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명은 이들의 죽음 덕택이다. 티 내지 않고 묵묵히 제 사명을 감당하다가 때가 되었을 때 조용히 스스로 죽음을 감당하는 일. 우리 몸의 항상성은 매일 3천억 개의 세포가 파괴되고 재창조되는, 그야말로 역동적인 변화의 열매인 것이다. 또한 세포자멸사는 우리 몸을 이루는 대부분 세포의 마지막 모습이기도 하다. 지극히 생리적인 현상인 것이다. 

이 그림은 건강한 세포들 사이에서 한 세포가 스스로 죽는 과정인 세포자멸사를 보여주는 가상 이미지입니다. @AI

손가락(혹은 발가락)의 발생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면 세포자멸사의 누명 혹은 오명을 벗기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먼저 손가락(혹은 발가락)의 발생 과정이다. 손가락이 만들어지는 조직은 처음엔 손바닥과 손가락이 구분되지 않은, 그저 하나로 뭉뚱그려진 투박한 살덩어리였다. 하지만 배아 시기의 어느 순간, 세포들이 간격을 이루며 죽어나간다. 그리고 죽지 않고 살아남은 부분이 손가락이 된다. 우리의 손가락은 세포자멸사라는 파괴가 휩쓸고 간 이후 폐허의 잔재인 셈이다. 그러므로 손가락은 자라나온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부분이다. 손가락의 탄생은 손가락 사이에 세포들이 말끔히 죽어나갔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파괴가 남긴 흔적이 창조의 결과물이 된 셈이다. 손가락은 '생성물'이 아니라 '생존물'이라는 사실, 놀랍지 않은가? 참고로, 손가락 사이의 세포들이 파괴되어 스스로 죽음을 향해 나아가지 않으면 우리의 손가락은 마치 오리의 발처럼 가락들이 분리되지 않은 갈퀴 상태로 존재하게 된다. 병원에 가면 '합지증'이라는 공식적인 선천적 기형으로 진단받게 될 것이다. 


지속성 뮐러관 증후군

혹시 영화 '콘클라베'를 본 적이 있는가?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되는 베니테즈 추기경은 남다른 신체적 비밀을 가지고 있다. 그는 남성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처럼 몸속에 자궁을 갖고 있다. 흔히 말하는 간성 혹은 인터섹스(Intersex)일 가능성이 높다. 영화에서 이 장치가 사용된 이유는 아마도 교황이라는 자리가 가진 상징적인 의미에 남성 중심적인 관습이 깊이 배어있다는 사실을 꼬집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그런 비밀에도 불구하고 교황이 되는 것은 가톨릭 교회의 개혁과 변화를 상징하는 것일 테다. 


@영화 '콘클라베' 포스터

영화에서는 베니테즈 추기경이 끝내 자궁 적출 수술을 포기했다는 사실만이 언급되기 때문에 그의 정확한 선천성 기형명을 알 수 없지만, 가능성 높은 것 중 하나는 '지속성 뮐러관 증후군(Persistent Müllerian Duct Syndrome)'이다. 이 드문 증후군은 베니테즈 추기경처럼 정상적인 남성이지만, 즉 여느 남성처럼 44개의 상염색체와 XY 성염색체를 가지지만, 내부에 자궁을 포함한 여성 생식기관의 일부가 존재하는 경우를 일컫는다. 대부분은 수술 중 우연히 발견되곤 하는데, 영화에서 베니테즈 추기경 역시 맹장 수술을 받다가 우연히 자궁 및 난소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고 나온다. 

발생과정에서 태아는 남녀 모두 뮐러관과 볼프관(Wolffian Duct)을 함께 가지고 있다. XY 성염색체를 가진 태아의 생식기에서는 고환이 발생된다. 고환에서 분비되는 호르몬 중 하나가 뮐러관 억제 호르몬(Anti-Müllerian Hormone)인데, 자궁과 나팔관 등 여성 생식기를 만드는 뮐러관을 퇴화시키는 기능을 담당한다. 지속성 뮐러관 증후군은 바로 이 호르몬이 정상적으로 생성되지 못하거나 이 호르몬을 받아들이는 수용체에 문제가 생겨 신호전달이 막히기 때문에 퇴화되어야 할 뮐러관이 퇴화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게 되는 경우다. 그리고 뮐러관의 퇴화는 위에서 말한 세포자멸사에 의해 진행된다. 만약 베니테즈 추기경이 이 증후군에 해당된다면 그의 비밀은 세포자멸사의 결핍 혹은 부재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예

자가면역을 막기 위해 자기 몸의 단백질을 잘못 인식하는 T세포의 제거 과정 역시 세포자멸사로 이뤄진다. 이 과정은 외부 항원에만 반응하는 T세포만을 선택하기 위함인데, 생성되는 T세포 중 단 1-3퍼센트만이 살아남아 흉선(Thymus)을 벗어나 우리의 면역체계를 구성하게 되며, 나머지 97-99퍼센트는 모두 세포자멸사 과정을 통해 생을 마감한다. 

이러한 발생과정 말고도 세포자멸사는 앞서 언급했듯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세포나 DNA 손상을 입은 세포들의 제거 과정에 사용된다. 감염된 세포가 죽지 않고 돌아다니게 되면 다른 세포들을 전염시킬 수 있으며, DNA 손상이 생긴 세포가 제거되지 않고 증식을 하게 되면 돌연변이로 인해 암세포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들이 자살할 결심을 하지 않으면 우리 몸 전체가 위험에 빠질 수 있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세포의 자살은 우리 몸의 죽음을 막는 근원적인 이유가 되며, 나아가 우리 몸의 건강한 생명을 유지하는 바탕이 된다.


파괴와 창조

헤르만 헤세는 소설 '데미안'에서 알을 깨뜨리고 나오는 새를 비유로 들며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이때 파괴의 목적은 죽음이 아닌 생명에 있다. 주체는 새이지 알이 아니다. 새의 탄생은 알의 파괴를 필요로 한다. 파괴는 창조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기막힌 역설이지 않을 수 없다. 


포기와 출발

우리는 살면서 포기를 감행해야 하는 용기를 내야 할 때가 있다. 중요한 시기다. 경제 사정 등의 이유로 해오던 대로 일을 지속해야 할지, 아니면 과감하게 그만 두기로 작정하고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할지 결정해야 할 때마다 우린 심각한 갈등에 빠지게 된다. 상황마다 다를 수 있기 때문에 함부로 일반화시킬 수는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진정한 포기가 선행되지 않으면 새로운 출발은 존재할 수조차 없다는 사실이다. 포기는 새출발의 큰 동력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특히 포기해야만 할 것이 헤세가 말한 알이라면 새의 탄생을 위해 알을 포기할 용기를 내야만 한다. 자발적으로 포기를 감행하는 것을 세포 스스로 자살할 결심을 하는 세포자멸사에 빗댄다면, 그로 인한 새출발은 파괴가 낳은 새창조에 빗댈 수 있다. 세포의 자발적인 희생은 몸 전체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건강 비결인 것이다. 나무만 보는 근시안적인 눈을 들어 전체를 아우를 때다.


죽음과 부활

기독교에서 말하는 부활은 육신의 죽음 이후 몸이 다시 사는 부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삶의 주인으로 받아들인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미 죽었다 살아난 경험을 한 것으로 해석된다. 살아서 부활을 맛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와 아무 상관없이 자기중심적으로 살다가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경험한 자는 하나님 나라, 즉 천국을 살아가고 있다고 해석된다. 그리스도인들이 공개적으로 받는 세례 혹은 침례의식은 이를 공표한다. '과거의 나'는 죽고 '새로운 나'가 살아나는 것이다. 죽어야 살 수 있다는, 언뜻 보면 모순으로 보이는 이 논리는 기독교의 핵심 신앙을 관통한다. 


나가며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끝은 끝이 아니다. 죽음은 또 다른 생명을 잉태한다. 죽음이 없으면 생명도 없다. 끝은 또 하나의 시작이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예수의 말씀을 기억한다. 이 말씀 속 '밀알 하나'의 죽음을 세포자멸사에 빗대어 본다. 우리 삶의 어엿한 한 부분을 이루는 여러 가지 파괴와 포기와 죽음으로 생각을 확장시켜 본다. 이어서 '많은 열매'를 37조 개로 이뤄진 우리 몸 전체에 빗대어 본다. 우리 삶 속의 새창조와 새출발과 부활로 생각을 확장시켜 본다. 그리고 조용히 다짐하게 된다. 기꺼이 그 죽음에 동참하기로. '자살할 결심'으로 더 깊고 풍성한 삶을 향해 나아가기로. 나만을 위한 삶이 아닌 남을 향하고 우리 모두를 향한 삶을 살아낼 수 있기를. 



참고문헌

1. 'Developmental Biology', Michael J. F. Barresi and Scott F. Gilbert

2. '과학자의 신앙공부', 김영웅

3. '생물학자의 신앙고백', 김영웅

4. '세포처럼 나이 들 수 있다면', 김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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