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하고 절대적인 시간에서
복잡하고 불확실한 시간으로
- 마지스테리아 15장 -
글ㅣ전경훈
《마지스테리아》 역자
20세기에 들어 과학계에 가장 큰 변화가 일어난 분야는 물리학이었다. 뉴턴을 통해 완결된 듯 보이던 고전 물리학에 이미 19세기 말부터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우선은 열역학법칙에 대한 이해가 확장되면서 우주가 서서히 느려지고 있고, 결국 열평형 상태에 도달하여 열죽음에 이른다는 생각이 굳어졌다. 이는 우주가 언젠가 종말을 맞이할 수 있음을 의미했고, 종말이 있다는 생각은 곧 우주의 시초 또한 있다는 생각을 가능하게 했다. 이제까지 우주는 변함없이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라는 기존 우주관에 균열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마리 퀴리는 어떤 원자들 내부에서 강렬한 에너지가 방출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를 방사능이라 불렀다. 이 발견 덕분에 마리 퀴리는 노벨상을 받지만 기존 물리학의 에너지보존법칙과 상충하고 ‘분할 불가능한’ 단위라는 원자에 대한 역사적 이해에 상충했다. 우주적 차원과 원자적 차원에서 기존의 과학적 세계관이 붕괴할 위기에 처했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이 등장했다. 아인슈타인은 소위 ‘기적의 해’라고 불린 1905년에 브라운 운동, 광전 효과, 특수 상대성, 질량과 에너지의 등가성에 관한 네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로써 그는 분자(원자)가 실재하며 열에너지는 곧 분자(원자)의 운동 에너지라는 사실과 빛이 파동일 뿐 아니라 입자(광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밝혔을 뿐 아니라, 일정한 것은 빛의 속도일 뿐 운동하는 물체의 속도에 따라 시간과 공간과 질량이 달라질 수 있고, 질량이 곧 에너지라는 사실을 밝혔다. 그리고 더 나아가 1915년 일반 상대성 이론을 발표하여 중력이 물체 사이의 인력이 아니라 질량에 따른 공간의 휘어짐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이로써 고전 물리학에서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시간, 공간, 질량, 중력이 모두 서로의 관계 속에서 변할 수 있는 상대적인 것이 되었다. 우주 전체에서 원자에 이르기까지 이 세계 전체를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고, 이는 기존 사고 체계들에 전례 없이 큰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다.

@Pixabay, dlsd cgl
우선적인 변화는 물리학 내에서 일어났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아인슈타인은 반대했음에도) 양자역학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다. 아인슈타인이 빛이 금속에 닿으면 전자가 튀어나오며 에너지를 방출하는 광전 효과를 발견함으로써 빛이 파동일 뿐 아니라 입자(광자)로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 입자가 에너지 덩어리인 양자quantom이며, 양자 이론에 따르면 위치, 운동량, 에너지 등의 물리량은 불연속적인 값만 가질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하이젠베르크는 물질-파동의 이중 본질을 이루는 양자 차원의 내재적 불확정성 때문에 어떤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불확정성의 원리’를 천명한다. 그리고 세계의 존재론적 불확정성은 관찰자 효과라는 개념으로도 연결되었다. 즉 수학 공식으로 표현되는 물리학의 세계에서조차 관찰자가 관찰 대상에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고, 이는 곧 관찰 결과를 달라지게 한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자연의 가장 근본적인 차원은 그 자체로 정확히 알 수가 없는 것일 뿐 아니라, 완전하게 객관적인 관찰 또한 그 자체로 불가능하며, 그래서 우리는 확률적으로만 알 수 있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 대한 응답으로 닐스 보어는 상보성 개념을 제시했다. 즉 양자 세계의 근본적 이중성 때문에 하나의 체계가 더 이상 단일하고 확정적이며 객관적인 설명으로 기술될 수 없다면, 물리학자들은 상보적인 기술들, 즉 동일한 현상에 대해 모두 참이면서 같은 기준으로는 측정할 수 없는 평행한 두 설명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슈뢰딩거는 양자 이론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비판에 맞서 ‘얽힘’이란 개념을 발전시킨다. 그에 따르면 입자들은 서로 얽혀 있는데, 얽혀 있는 두 입자는 즉각적인 물리적 공간을 공유하며, 따라서 서로에 대해 독립적으로 기술될 수 없다. 달리 말하면, 얽혀 있는 두 입자는 하나의 측정 결과가 확정되는 순간 바로 다른 하나의 측정 결과가 즉시 확정되며, 측정 전에는 두 입자의 상태 모두 확정되어 있지 않다. 이는 운동량에 관한 정보가 한 입자에서 다른 입자로 전이되는 듯 보이는 효과를 낳는데, 그렇다고 정보가 실제로 전달된 것은 아니고 단순히 확률적 상관관계를 이룬다는 것이다.
이러한 물리학의 패러다임 변화는 자연과 우주에 대한 이해와 시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지만, 그것이 종교에 끼친 영향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상대성이론과 양자이론이라는 새로운 물리학이 현실의 토대를 조정하긴 했으나, 그 때문에 종교라는 집이 무너지지는 않았다. 뉴턴의 물리학이 나오고 윌리엄 페일리가 몰락한 이래로 종교라는 집을 물리학이라는 토대 위에 정초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고전 시대 이래로 과학과 종교가 서로 일치해야 한다는 일치주의의 저주가 마침내 적어도 물리학에서는 풀린 셈이었다.
그러나 그러하다고 해서 새로운 물리학과 종교 사이에 대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새로운 물리학은 과학 이외 분야에서 수많은 질문을 개시했고 확정적인 답안들은 제시하지 않았기에, 이 질문들을 둘러싸고 종교 안에서도 여러 가지 논의가 이어졌다. 우선, 새로운 물리학으로 인해 우주는 상대적이고 불확정적인 것이 되었고, 이는 곧 개방적인 우주라는 개념으로 이어졌다. 고전 물리학의 확정적인 우주에서는 그것을 넘어서는 신의 의지 실현을 설명하기 어려웠는데, 이제 새로운 물리학이 제시하는 우주에서는 그것이 훨씬 더 가능한 일로 여겨졌다. 그 결과 신이 자신이 창조한 이 세계와 상호작용을 하며 함께 변화한다는 과정신학이 등장했다. 그리고 개방적인 우주는 당연히 인간에게도 행동의 여지를 남겨주는 듯 보였다. 우주의 인과관계가 느슨해진 듯했고, 에딩턴 간은 사람은 인간이 자신의 물질적 미래를 스스로 형성해야 한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양자역학이 뉴턴의 인과성에 대해 원자 이하의 차원에서 아무리 많은 이의를 제기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인간 자유의지의 실재를 확립할 수 없음은 확실했다.

1933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폴 디랙(Paul Dirac, 1902~1984) @나무위키
한편, 슈뢰딩거와 함께 노벨상을 받은 폴 디랙은 ‘아름다움’을 물리학의 진리를 결정하는 최고의 요소임을 분명히 했다. 이러한 견해는 하이젠베르크와 아인슈타인도 공유하고 있었다. 그들은 진리[眞]가 곧 아름다움[美]과 통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상대적이고 우연적인 우주가 창조주라는 절대적 유일신 개념과 부합하기란 어려운 일이었지만, 여하튼 이러한 생각은 오래된 유물론과 관념론 사이의 논쟁을 부채질했다. 사람들이 보기에 새로운 물리학은 세계에 대한 이해를 관념론으로 몰고 가는 듯했다. 에딩턴은 우주가 ‘위대한 기계보다는 위대한 사유처럼 보이게’ 되었다고 주장했고, 물리학자 제임스 진스는 정신을 물질 영역의 창조자이자 통치자라고까지 말했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이러한 관념론적 이해가 곧바로 유대-그리스도교적 신 관념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 과학자들이 말하는 ‘정신’ 혹은 ‘신’이란 이를테면 수학자들의 신이었다. 더구나 대부분의 물리학자나 수학자는 물론이고 철학자들이나 신학자들이 이러한 생각을 했던 것도 아니다. 20세기 들어 이미 철학자들은 관념론의 절정에서 멀어져 있었고, 새로운 물리학이 그들을 관념론으로 돌려놓기에 충분하지도 않았다. 신학자들도 자연신학에서 확실하게 멀어져 있었고, 바르트 같은 신학자가 부상하면서 신은 다시 이 세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이며, 오직 신 자신의 계시를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새로운 물리학을 대표하는 과학자들 또한 종교에 대한 입장을 내놓았는데, 당연히 그들의 입장이 일치된 것은 아니었다. 막스 플랑크는 과학이 물질의 세계를 다루지만, 종교는 가치의 세계를 다룬다고 한 반면, 하이젠베르크와 파울리는 과학으로부터 종교를 완전히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닐스 보어는 플랑크와 비슷한 입장에서 종교와 과학이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고 말했으며 둘이 상보적이라고 보았던 반면, 디랙은 과학자들이 종교에 대해 언급하는 것 자체를 반대했다. 흥미로운 것은 당대 최고의 천재 과학자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쌓게 된 아인슈타인이었다. 그의 말은 과학 전반은 물론 다른 학문과 사회 영역에까지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고, 유대인이었던 그는 자주 ‘신’을 언급한 탓에 종교에 대해 수용적이라는 인상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어린 시절에 이미 철저한 결정론자로서 인격적 신개념과 신비주의를 배격했다. 이를테면 종교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입장에는 확실히 불확정성이 있었고, 확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한에서 말하자면, 그의 믿음은 이신론과 (스피노자의) 범신론 사이에 놓인 일종의 교차로였다.

벨기에의 카톨릭 사제이자 천문학자, 조르주 르메트르(Georges Lemaître, 1894~1966) @나무위키
이러한 논의에서 가장 흥미로운 인물은 당대의 신진 물리학자이자 벨기에의 가톨릭 사제였던 조르주 르메트르다. 그는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을 바탕으로 우주가 팽창하고 있고, 은하들은 우주의 중심에서 멀리 있을수록 거리에 비례하여 더 빨리 멀어진다고 주장했다. 이 팽창 하는 우주라는 개념은 시간에 시작점이 있다는 함의가 내포되어 있었고, 이는 곧 우주의 창조를 암시하는 듯 여겨졌다. 이를 이론적으로 입증한 물리학자가 가톨릭 사제라는 사실은 다른 과학자들의 의심을 불러일으켰고, 이것이 다시 과학과 종교에 관한 논란을 부채질했다. 누구보다도 르메트르의 이론에 근거를 제공한 아인슈타인 자신이 ‘창조에 관한 (신학적) 관념을 너무 많이 시사한다’라는 이유로 르메트르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았다. 결정론자인 아인슈타인에게 우주의 불변성이란 신앙의 한 조목과도 같아서, 그는 양자이론의 불확정적인 우주나 르메트르의 팽창하는 우주나 모두 받아들일 수 없었다. 교황 비오 12세를 비롯한 종교계에서는 과학을 통해 창조의 순간이 입증되었다고 말하기를 즐겼으나, 르메트르 자신은 그렇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성경이 말하는 창조란 형이상학적 주장이지 물리학으로 입증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과학적 전제에서 끌어낸 신학적 결론은 명백한 범주의 오류다. 르메트르는 교황이 이 문제에 관해 공식적으로 언급하지 못하게 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그렇다고 다수 신자의 생각과 말을 단속할 수는 없었다.
르메트르가 죽기 얼마 전인 1964년에 우주 마이크로파 배경복사(CMBR)가 발견되고, 이를 통해 우주의 팽창이 관측으로 입증되었다. 이를 통해 현대의 우주관은 불가역적으로 전환되었고 흔히 ‘빅뱅’이라 하는 우주의 시초는 사실이 되었다. 가톨릭 사제가 결점 없는 수학을 통해 우주의 시초를 확증했고, 이것이 현대 과학의 관측을 통해 입증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종교와 과학의 관계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지만 그 가톨릭 사제가 자신의 연구 성과로부터 신학적 결론을 도출하지 말라고 경고했다는 사실은 훨씬 더 호소력 있는 반전이다. 결국 종교와 과학의 관계는 결코 직접적이거나 단선적이지 않으며, 생각 이상으로 다면적이고 다층적인 복잡한 관계임을 상기해야 한다.
단순하고 절대적인 시간에서
복잡하고 불확실한 시간으로
- 마지스테리아 15장 -
글ㅣ전경훈
《마지스테리아》 역자
20세기에 들어 과학계에 가장 큰 변화가 일어난 분야는 물리학이었다. 뉴턴을 통해 완결된 듯 보이던 고전 물리학에 이미 19세기 말부터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우선은 열역학법칙에 대한 이해가 확장되면서 우주가 서서히 느려지고 있고, 결국 열평형 상태에 도달하여 열죽음에 이른다는 생각이 굳어졌다. 이는 우주가 언젠가 종말을 맞이할 수 있음을 의미했고, 종말이 있다는 생각은 곧 우주의 시초 또한 있다는 생각을 가능하게 했다. 이제까지 우주는 변함없이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라는 기존 우주관에 균열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마리 퀴리는 어떤 원자들 내부에서 강렬한 에너지가 방출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를 방사능이라 불렀다. 이 발견 덕분에 마리 퀴리는 노벨상을 받지만 기존 물리학의 에너지보존법칙과 상충하고 ‘분할 불가능한’ 단위라는 원자에 대한 역사적 이해에 상충했다. 우주적 차원과 원자적 차원에서 기존의 과학적 세계관이 붕괴할 위기에 처했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이 등장했다. 아인슈타인은 소위 ‘기적의 해’라고 불린 1905년에 브라운 운동, 광전 효과, 특수 상대성, 질량과 에너지의 등가성에 관한 네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로써 그는 분자(원자)가 실재하며 열에너지는 곧 분자(원자)의 운동 에너지라는 사실과 빛이 파동일 뿐 아니라 입자(광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밝혔을 뿐 아니라, 일정한 것은 빛의 속도일 뿐 운동하는 물체의 속도에 따라 시간과 공간과 질량이 달라질 수 있고, 질량이 곧 에너지라는 사실을 밝혔다. 그리고 더 나아가 1915년 일반 상대성 이론을 발표하여 중력이 물체 사이의 인력이 아니라 질량에 따른 공간의 휘어짐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이로써 고전 물리학에서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시간, 공간, 질량, 중력이 모두 서로의 관계 속에서 변할 수 있는 상대적인 것이 되었다. 우주 전체에서 원자에 이르기까지 이 세계 전체를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고, 이는 기존 사고 체계들에 전례 없이 큰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다.
@Pixabay, dlsd cgl
우선적인 변화는 물리학 내에서 일어났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아인슈타인은 반대했음에도) 양자역학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다. 아인슈타인이 빛이 금속에 닿으면 전자가 튀어나오며 에너지를 방출하는 광전 효과를 발견함으로써 빛이 파동일 뿐 아니라 입자(광자)로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 입자가 에너지 덩어리인 양자quantom이며, 양자 이론에 따르면 위치, 운동량, 에너지 등의 물리량은 불연속적인 값만 가질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하이젠베르크는 물질-파동의 이중 본질을 이루는 양자 차원의 내재적 불확정성 때문에 어떤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불확정성의 원리’를 천명한다. 그리고 세계의 존재론적 불확정성은 관찰자 효과라는 개념으로도 연결되었다. 즉 수학 공식으로 표현되는 물리학의 세계에서조차 관찰자가 관찰 대상에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고, 이는 곧 관찰 결과를 달라지게 한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자연의 가장 근본적인 차원은 그 자체로 정확히 알 수가 없는 것일 뿐 아니라, 완전하게 객관적인 관찰 또한 그 자체로 불가능하며, 그래서 우리는 확률적으로만 알 수 있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 대한 응답으로 닐스 보어는 상보성 개념을 제시했다. 즉 양자 세계의 근본적 이중성 때문에 하나의 체계가 더 이상 단일하고 확정적이며 객관적인 설명으로 기술될 수 없다면, 물리학자들은 상보적인 기술들, 즉 동일한 현상에 대해 모두 참이면서 같은 기준으로는 측정할 수 없는 평행한 두 설명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슈뢰딩거는 양자 이론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비판에 맞서 ‘얽힘’이란 개념을 발전시킨다. 그에 따르면 입자들은 서로 얽혀 있는데, 얽혀 있는 두 입자는 즉각적인 물리적 공간을 공유하며, 따라서 서로에 대해 독립적으로 기술될 수 없다. 달리 말하면, 얽혀 있는 두 입자는 하나의 측정 결과가 확정되는 순간 바로 다른 하나의 측정 결과가 즉시 확정되며, 측정 전에는 두 입자의 상태 모두 확정되어 있지 않다. 이는 운동량에 관한 정보가 한 입자에서 다른 입자로 전이되는 듯 보이는 효과를 낳는데, 그렇다고 정보가 실제로 전달된 것은 아니고 단순히 확률적 상관관계를 이룬다는 것이다.
이러한 물리학의 패러다임 변화는 자연과 우주에 대한 이해와 시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지만, 그것이 종교에 끼친 영향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상대성이론과 양자이론이라는 새로운 물리학이 현실의 토대를 조정하긴 했으나, 그 때문에 종교라는 집이 무너지지는 않았다. 뉴턴의 물리학이 나오고 윌리엄 페일리가 몰락한 이래로 종교라는 집을 물리학이라는 토대 위에 정초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고전 시대 이래로 과학과 종교가 서로 일치해야 한다는 일치주의의 저주가 마침내 적어도 물리학에서는 풀린 셈이었다.
그러나 그러하다고 해서 새로운 물리학과 종교 사이에 대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새로운 물리학은 과학 이외 분야에서 수많은 질문을 개시했고 확정적인 답안들은 제시하지 않았기에, 이 질문들을 둘러싸고 종교 안에서도 여러 가지 논의가 이어졌다. 우선, 새로운 물리학으로 인해 우주는 상대적이고 불확정적인 것이 되었고, 이는 곧 개방적인 우주라는 개념으로 이어졌다. 고전 물리학의 확정적인 우주에서는 그것을 넘어서는 신의 의지 실현을 설명하기 어려웠는데, 이제 새로운 물리학이 제시하는 우주에서는 그것이 훨씬 더 가능한 일로 여겨졌다. 그 결과 신이 자신이 창조한 이 세계와 상호작용을 하며 함께 변화한다는 과정신학이 등장했다. 그리고 개방적인 우주는 당연히 인간에게도 행동의 여지를 남겨주는 듯 보였다. 우주의 인과관계가 느슨해진 듯했고, 에딩턴 간은 사람은 인간이 자신의 물질적 미래를 스스로 형성해야 한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양자역학이 뉴턴의 인과성에 대해 원자 이하의 차원에서 아무리 많은 이의를 제기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인간 자유의지의 실재를 확립할 수 없음은 확실했다.
1933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폴 디랙(Paul Dirac, 1902~1984) @나무위키
한편, 슈뢰딩거와 함께 노벨상을 받은 폴 디랙은 ‘아름다움’을 물리학의 진리를 결정하는 최고의 요소임을 분명히 했다. 이러한 견해는 하이젠베르크와 아인슈타인도 공유하고 있었다. 그들은 진리[眞]가 곧 아름다움[美]과 통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상대적이고 우연적인 우주가 창조주라는 절대적 유일신 개념과 부합하기란 어려운 일이었지만, 여하튼 이러한 생각은 오래된 유물론과 관념론 사이의 논쟁을 부채질했다. 사람들이 보기에 새로운 물리학은 세계에 대한 이해를 관념론으로 몰고 가는 듯했다. 에딩턴은 우주가 ‘위대한 기계보다는 위대한 사유처럼 보이게’ 되었다고 주장했고, 물리학자 제임스 진스는 정신을 물질 영역의 창조자이자 통치자라고까지 말했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이러한 관념론적 이해가 곧바로 유대-그리스도교적 신 관념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 과학자들이 말하는 ‘정신’ 혹은 ‘신’이란 이를테면 수학자들의 신이었다. 더구나 대부분의 물리학자나 수학자는 물론이고 철학자들이나 신학자들이 이러한 생각을 했던 것도 아니다. 20세기 들어 이미 철학자들은 관념론의 절정에서 멀어져 있었고, 새로운 물리학이 그들을 관념론으로 돌려놓기에 충분하지도 않았다. 신학자들도 자연신학에서 확실하게 멀어져 있었고, 바르트 같은 신학자가 부상하면서 신은 다시 이 세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이며, 오직 신 자신의 계시를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새로운 물리학을 대표하는 과학자들 또한 종교에 대한 입장을 내놓았는데, 당연히 그들의 입장이 일치된 것은 아니었다. 막스 플랑크는 과학이 물질의 세계를 다루지만, 종교는 가치의 세계를 다룬다고 한 반면, 하이젠베르크와 파울리는 과학으로부터 종교를 완전히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닐스 보어는 플랑크와 비슷한 입장에서 종교와 과학이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고 말했으며 둘이 상보적이라고 보았던 반면, 디랙은 과학자들이 종교에 대해 언급하는 것 자체를 반대했다. 흥미로운 것은 당대 최고의 천재 과학자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쌓게 된 아인슈타인이었다. 그의 말은 과학 전반은 물론 다른 학문과 사회 영역에까지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고, 유대인이었던 그는 자주 ‘신’을 언급한 탓에 종교에 대해 수용적이라는 인상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어린 시절에 이미 철저한 결정론자로서 인격적 신개념과 신비주의를 배격했다. 이를테면 종교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입장에는 확실히 불확정성이 있었고, 확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한에서 말하자면, 그의 믿음은 이신론과 (스피노자의) 범신론 사이에 놓인 일종의 교차로였다.
벨기에의 카톨릭 사제이자 천문학자, 조르주 르메트르(Georges Lemaître, 1894~1966) @나무위키
이러한 논의에서 가장 흥미로운 인물은 당대의 신진 물리학자이자 벨기에의 가톨릭 사제였던 조르주 르메트르다. 그는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을 바탕으로 우주가 팽창하고 있고, 은하들은 우주의 중심에서 멀리 있을수록 거리에 비례하여 더 빨리 멀어진다고 주장했다. 이 팽창 하는 우주라는 개념은 시간에 시작점이 있다는 함의가 내포되어 있었고, 이는 곧 우주의 창조를 암시하는 듯 여겨졌다. 이를 이론적으로 입증한 물리학자가 가톨릭 사제라는 사실은 다른 과학자들의 의심을 불러일으켰고, 이것이 다시 과학과 종교에 관한 논란을 부채질했다. 누구보다도 르메트르의 이론에 근거를 제공한 아인슈타인 자신이 ‘창조에 관한 (신학적) 관념을 너무 많이 시사한다’라는 이유로 르메트르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았다. 결정론자인 아인슈타인에게 우주의 불변성이란 신앙의 한 조목과도 같아서, 그는 양자이론의 불확정적인 우주나 르메트르의 팽창하는 우주나 모두 받아들일 수 없었다. 교황 비오 12세를 비롯한 종교계에서는 과학을 통해 창조의 순간이 입증되었다고 말하기를 즐겼으나, 르메트르 자신은 그렇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성경이 말하는 창조란 형이상학적 주장이지 물리학으로 입증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과학적 전제에서 끌어낸 신학적 결론은 명백한 범주의 오류다. 르메트르는 교황이 이 문제에 관해 공식적으로 언급하지 못하게 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그렇다고 다수 신자의 생각과 말을 단속할 수는 없었다.
르메트르가 죽기 얼마 전인 1964년에 우주 마이크로파 배경복사(CMBR)가 발견되고, 이를 통해 우주의 팽창이 관측으로 입증되었다. 이를 통해 현대의 우주관은 불가역적으로 전환되었고 흔히 ‘빅뱅’이라 하는 우주의 시초는 사실이 되었다. 가톨릭 사제가 결점 없는 수학을 통해 우주의 시초를 확증했고, 이것이 현대 과학의 관측을 통해 입증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종교와 과학의 관계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지만 그 가톨릭 사제가 자신의 연구 성과로부터 신학적 결론을 도출하지 말라고 경고했다는 사실은 훨씬 더 호소력 있는 반전이다. 결국 종교와 과학의 관계는 결코 직접적이거나 단선적이지 않으며, 생각 이상으로 다면적이고 다층적인 복잡한 관계임을 상기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