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논쟁들
- 마지스테리아 마지막-
글ㅣ전경훈
《마지스테리아》 역자
20세기 후반에 들어 유전자(정확히는 유전물질인 DNA)가 발견되고 생물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과학과 종교의 관계 또한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되었다. 영국인 생물학자 해밀턴이 진화의 핵심은 유기체의 보존이 아니라 유전자의 보존이라는 전환적 사고를 제시했고, 미국인 생물학자 윌슨은 ‘사회생물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영역을 정립하면서 진화를 통해 생물의 물리적 형태를 설명할 수 있는 만큼 사회적 행동도 설명할 수 있다는 사고를 제시했다. 이제 과학과 종교 사이의 문제는 단순히 진화론의 내용이 성경의 창세기와 맞지 않는다는 것에 있지 않았다. 진화론은 인류라는 범주를 지워버리고, 인간 고유성의 핵심인 이성과 윤리마저 생물학적으로 환원시키고자 했다. 윌슨이 내놓은 저서의 부제가 ‘새로운 종합New Synthesis’이었듯이, 이제 사회생물학이 인간에 관한 모든 논의의 영역을 점령해 버리려는 듯했다. 심지어 『이기적 유전자』로 스타가 된 리처드 도킨스 같은 학자들은 인간이란 ‘유전자가 만들어낸 기계일 뿐’이라고 선언하며 적극적으로 종교에 공세를 가했다.
한편으로 미국의 그리스도교 근본주의자들은 창조과학을 진화과학과 동등하게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며 몇 차례 소송을 걸었지만, 창조과학은 과학이 아니라 종교 운동으로 인정되어 패소했다. 그래서 창조과학보다는 우주 만물의 ‘지적 설계’라는 새로운 구호가 부상했다. 박테리아의 편모조차 더 이상 환원할 수 없이 복잡하다는 사실을 근거로 이 세계와 그 안의 만물이 지적으로 설계되었을 높은 개연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적 설계 주장의 문제는 ‘어떻게’ 설계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고, 더구나 ‘누가’ 설계했는지는 전혀 입증할 수 없었다. 지적 설계론을 비판하는 리처드 도킨스의 『눈먼 시계공』에 대한 반론으로 『판다와 사람들』이라는 책이 출간되면서 지적 설계론을 학교 교과과정에 포함시키려는 시도가 200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지만 창조과학과 다를 바 없는 종교운동이라는 법원의 판단으로 결국 실패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시도가 굉장히 미국적인 기이한 현상으로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유럽은 물론이고 그리스도교가 강세인 남아메리카 등에서 이러한 시도가 있었던 적은 없다. 오히려 비슷한 현상이 일어난 곳은 이슬람 국가들이었다. 서구의 식민 제국주의와 함께 다윈주의를 받아들였던 이들 지역에서는 진화론에 대한 이렇다 할 무슬림의 반론 같은 것이 나오지 않다가 20세기 말에 들어서야 이른바 무슬림 창조론 혹은 이슬람 지적 설계론이 등장해서 많은 무슬림에게 호응을 얻었다.

사진: Unsplash의 Ashraful Islam
그러나 오늘날 진화론에 반대하거나 사회생물학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자신의 종교 때문에 그러했던 것만은 아니다. 서구의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생물학의 부상을 보면서 심히 염려한 것은 도덕적 상대주의와 인간의 행위 주체성 축소라는 문제였다. 이슬람 세계의 반진화론 경향 또한 진화론이 인간의 본성과 도덕성을 약화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새로운 연구에 따르면 반진화론 현상은 그리 단순하지가 않다. 종교와 반진화론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진화론에 반대하는 이유가 반드시 신앙 때문만은 아니고, 종교가 있는 이들 중에서도 진화론을 받아들이는 경우도 많다. 이러한 현상을 더 면밀히 들여다보면 인간에 대한 관념이 진화론 반대의 중심 어딘가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사람들은 -종교가 있든 없든- 생물 일반의 진화를 받아들이면서도 인간의 진화를 받아들이는 데 거부감이 있었고, 특히 인간의 신체 진화를 받아들이면서도 인간의 정신, 지성, 혹은 의식은 진화의 영역에서 구분하고 싶어 했다. 이는 단지 전통적인 인간관이나 윤리성을 강조하는 (종교적) 우파만의 생각도 아니었다. 진화론이나 사회생물학은 ‘인간 본성’을 물화refication하고, 기존 사회 구조를 정당화하는 경향이 강했기에, 종교적 우파만이 아니라 좌파 쪽에서도 비판을 받았다.
따라서 리처드 도킨스 같은 학자들을 주축으로 등장한 신무신론New Atheism과 이에 맞서는 종교계의 대립 양상에 대한 비판이 과학계에서도 제기되었다. 특히 스티븐 제이 굴드 같은 학자는 과학이, 특히 생물학이 사회나 역사 영역에 관여하는 것에 반대했다. 그는 종교와 과학이 서로 겹치지 않는 두 개의 마지스테리움magisterium, 곧 NOMA라고 언명했다. 다시 말해, 과학은 경험적 영역을 다루고 종교는 궁극적 의미와 도덕적 가치의 영역을 다룬다고 정의함으로써 둘 사이의 관계를 깔끔하게 정리하고자 했다. 굴드와 그에 동조하는 이들에게 종교와 과학의 충돌은 사실상 범주의 오류에 지나지 않았다. 굴드의 이 같은 입장은 과학계나 종교계 모두에서 상당한 호응을 얻었고, 실제로 과학과 종교의 많은 분야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었다. 이제 과학과 종교는 각자 서로를 비난할 필요 없이 제 역할에 충실하면 그뿐인 듯 보였다. 그러나 여기서도 문제가 되는 것은 역시 ‘인간’이었다. 과학과 종교는 서로 다른 마지스테리움 혹은 범주인 것은 맞지만, 둘 다 인간을 다룬다는 점에서, 더구나 그 인간이 분리될 수 없는 육체와 정신을 가진 존재라는 점에서, 서로 겹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겹침이 필연적으로 충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스티븐 제이 굴드 (1941-2002) @wikipedia
그렇다면 결국 종교와 과학의 관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이란 무엇/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20세기 후반부터 과학 기술이 더욱 발전하면서 기존에 고유한 인간의 영역이라고 생각되던 ‘정신’이 새롭게 분석되고 정의되는 단계에 이르면서 이 문제는 더욱 복잡해졌다. 뇌과학이 발달하면서 인간 정신이 모두 뇌라는 신체 기관의 활동으로 환원될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들이 쌓여 갔다. 감각과 감정은 물론, 인식과 기억과 사고에서부터 의도에 이르는 모든 것이 뇌의 구성과 활동에 따른 것이라는 믿음이 강해졌다. 종교적인 묵상이나 신비 체험 같은 것도 모두 뇌의 활동과 크게 연결되어 있다는 증거들이 제시되었고, 더 나아가서는 인간의 의지와 윤리 또한 마찬가지인 듯 보였다. 뇌의 특정 부분을 활성화했을 때 신비 체험과 비슷한 감각을 느낀다거나, 뇌의 특정 부분에 이상이 생겼을 때 도덕적 판단에 문제가 생긴다는 경험이나 실험의 결과가 이를 입증했다. 이제까지 인간의 고유한 특성으로 인식되던 ‘정신’이 순전히 뇌의 전기 신호로 환원될 지경에 이르렀다.
400년쯤 전에 홉스가 한 말대로 인간은 그저 복잡한 기계일 뿐이라는 말이 입증되는 듯했다. 이 말은 결국 인간의 정신 또한 기계 장치를 만들 듯이 인공으로 구현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그리고 실제로 21세기에 들어 실제로 인공지능 개발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고, 이제 어떤 면에서는 인간의 지능을 넘어서는 여러 인공지능 모델이 실생활에 도입되고 있다. 인공지능의 등장은 두 가지 면에서 기존의 인간 개념에 문제를 제기한다. 첫째는 인공으로 구성된 ‘정신’ 또한 인간적인 것인가 하는 물음이다. 이는 곧 인간을 능가하는 인공지능의 존재 앞에서 인간은 어떤 의미를 갖게 될 것인가 하는 물음으로도 연결된다. 인공지능의 빠른 발전으로 슈퍼 지능이 등장한다면 인간은 분명히 도태될 것이고, 결국 인간의 모든 경험마저 데이터로 변환될 테니 말이다. 둘째는 인공지능을 통해 인간 조건의 한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인간 조건을 창조하겠다는 트랜스휴머니즘이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물음이다. 이는 자신을 일종의 가상현실로 만들어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완전히 ‘새로운 인간’이 가능할 수도 있도, 의식을 기계에 다운로드함으로써 현재의 인간보다 향상된 정신적 능력을 갖고 그 무한한 복제 가능성을 통해 불멸을 얻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확장된 조건의 인간 또한 우리는 인간이라 할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사진: Unsplash의 Steve Johnson
여기서 중요하게 떠오르는 문제가 바로 인공지능의 윤리다. 즉 인공지능이 그 발명자인 인간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에 관한 윤리적 판단과 실천이 요구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새로운 도구를 어떻게 설계하고 사용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물론이고, 도대체 이 새로운 도구는 무엇이며, 그것은 우리와 얼마나 비슷하고, 비슷할 수 있으며, 어디까지 비슷해야 하는가를 판단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과 그에 대한 사유는 결국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문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우리가 이제까지 지능을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특징으로 생각해 왔다는 사실이다. 물론 인류는 다른 동물과 확실하게 구별되는 탁월한 지능을 가졌고, 이 지능을 통해 문명을 이루었다는 말은 맞다. 하지만 이제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낸, 인간을 능가하는 지능과 마주하게 되었고, 지능만으로 인간을 규정할 수도 없게 된 셈이다. 그리고 이를 더 깊숙이 생각해 볼 때, 지능이든, 이성이든, 혹은 영혼이든 인간의 본질을 어떤 것으로 환원하여 정의하려는 시도 자체의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사실 인간이란 더 이상 환원 불가능하게 체화되고embodied 내장되어embedded 있다. 육체적 욕구와 인격적 의욕을 가진, 독특하고 제한된 육체와 특정한 장소 및 특정한 시간 안에 있는 우리의 실존은 우리의 인성과,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부여하는 존중 및 권리의 토대를 이룬다. 우리는 우리의 건강과 미덕의 토대를 이루지만, 충족되지 않을 경우 우리의 실존을 위협하는 욕구와 목표를 갖는다. 그래서 인간은 취약하고, 다른 존재에 의존적일 수밖에 없다. 인공 지능이 인간으로 여겨지거나, 적어도 유사 인간으로서 인정되고 보호되어야 한다고 여겨지는 지점은, 인공지능이 지능이나 사고의 표징을 충분히 보여주는 지점이 아니라, 인공지능 스스로가 자신의 실존을 유지하고 영속시키고자 고민하고 분투하는 지점일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종교 전통들은 미래 인공지능의 형이상학적 지위에 관한 논쟁에 기여할 수 있다. 무엇이 (혹은 누가) 인간을 구성하는지, 누가 (혹은 무엇이) 그에 대해 결정권을 갖는지를 두고 과학과 종교는 대화를 나누어야 하며, 그렇게 보자면 우리는 과학과 종교의 얽힌 역사가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새로운 논쟁들
- 마지스테리아 마지막-
글ㅣ전경훈
《마지스테리아》 역자
20세기 후반에 들어 유전자(정확히는 유전물질인 DNA)가 발견되고 생물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과학과 종교의 관계 또한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되었다. 영국인 생물학자 해밀턴이 진화의 핵심은 유기체의 보존이 아니라 유전자의 보존이라는 전환적 사고를 제시했고, 미국인 생물학자 윌슨은 ‘사회생물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영역을 정립하면서 진화를 통해 생물의 물리적 형태를 설명할 수 있는 만큼 사회적 행동도 설명할 수 있다는 사고를 제시했다. 이제 과학과 종교 사이의 문제는 단순히 진화론의 내용이 성경의 창세기와 맞지 않는다는 것에 있지 않았다. 진화론은 인류라는 범주를 지워버리고, 인간 고유성의 핵심인 이성과 윤리마저 생물학적으로 환원시키고자 했다. 윌슨이 내놓은 저서의 부제가 ‘새로운 종합New Synthesis’이었듯이, 이제 사회생물학이 인간에 관한 모든 논의의 영역을 점령해 버리려는 듯했다. 심지어 『이기적 유전자』로 스타가 된 리처드 도킨스 같은 학자들은 인간이란 ‘유전자가 만들어낸 기계일 뿐’이라고 선언하며 적극적으로 종교에 공세를 가했다.
한편으로 미국의 그리스도교 근본주의자들은 창조과학을 진화과학과 동등하게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며 몇 차례 소송을 걸었지만, 창조과학은 과학이 아니라 종교 운동으로 인정되어 패소했다. 그래서 창조과학보다는 우주 만물의 ‘지적 설계’라는 새로운 구호가 부상했다. 박테리아의 편모조차 더 이상 환원할 수 없이 복잡하다는 사실을 근거로 이 세계와 그 안의 만물이 지적으로 설계되었을 높은 개연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적 설계 주장의 문제는 ‘어떻게’ 설계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고, 더구나 ‘누가’ 설계했는지는 전혀 입증할 수 없었다. 지적 설계론을 비판하는 리처드 도킨스의 『눈먼 시계공』에 대한 반론으로 『판다와 사람들』이라는 책이 출간되면서 지적 설계론을 학교 교과과정에 포함시키려는 시도가 200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지만 창조과학과 다를 바 없는 종교운동이라는 법원의 판단으로 결국 실패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시도가 굉장히 미국적인 기이한 현상으로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유럽은 물론이고 그리스도교가 강세인 남아메리카 등에서 이러한 시도가 있었던 적은 없다. 오히려 비슷한 현상이 일어난 곳은 이슬람 국가들이었다. 서구의 식민 제국주의와 함께 다윈주의를 받아들였던 이들 지역에서는 진화론에 대한 이렇다 할 무슬림의 반론 같은 것이 나오지 않다가 20세기 말에 들어서야 이른바 무슬림 창조론 혹은 이슬람 지적 설계론이 등장해서 많은 무슬림에게 호응을 얻었다.

사진: Unsplash의 Ashraful Islam
그러나 오늘날 진화론에 반대하거나 사회생물학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자신의 종교 때문에 그러했던 것만은 아니다. 서구의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생물학의 부상을 보면서 심히 염려한 것은 도덕적 상대주의와 인간의 행위 주체성 축소라는 문제였다. 이슬람 세계의 반진화론 경향 또한 진화론이 인간의 본성과 도덕성을 약화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새로운 연구에 따르면 반진화론 현상은 그리 단순하지가 않다. 종교와 반진화론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진화론에 반대하는 이유가 반드시 신앙 때문만은 아니고, 종교가 있는 이들 중에서도 진화론을 받아들이는 경우도 많다. 이러한 현상을 더 면밀히 들여다보면 인간에 대한 관념이 진화론 반대의 중심 어딘가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사람들은 -종교가 있든 없든- 생물 일반의 진화를 받아들이면서도 인간의 진화를 받아들이는 데 거부감이 있었고, 특히 인간의 신체 진화를 받아들이면서도 인간의 정신, 지성, 혹은 의식은 진화의 영역에서 구분하고 싶어 했다. 이는 단지 전통적인 인간관이나 윤리성을 강조하는 (종교적) 우파만의 생각도 아니었다. 진화론이나 사회생물학은 ‘인간 본성’을 물화refication하고, 기존 사회 구조를 정당화하는 경향이 강했기에, 종교적 우파만이 아니라 좌파 쪽에서도 비판을 받았다.
따라서 리처드 도킨스 같은 학자들을 주축으로 등장한 신무신론New Atheism과 이에 맞서는 종교계의 대립 양상에 대한 비판이 과학계에서도 제기되었다. 특히 스티븐 제이 굴드 같은 학자는 과학이, 특히 생물학이 사회나 역사 영역에 관여하는 것에 반대했다. 그는 종교와 과학이 서로 겹치지 않는 두 개의 마지스테리움magisterium, 곧 NOMA라고 언명했다. 다시 말해, 과학은 경험적 영역을 다루고 종교는 궁극적 의미와 도덕적 가치의 영역을 다룬다고 정의함으로써 둘 사이의 관계를 깔끔하게 정리하고자 했다. 굴드와 그에 동조하는 이들에게 종교와 과학의 충돌은 사실상 범주의 오류에 지나지 않았다. 굴드의 이 같은 입장은 과학계나 종교계 모두에서 상당한 호응을 얻었고, 실제로 과학과 종교의 많은 분야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었다. 이제 과학과 종교는 각자 서로를 비난할 필요 없이 제 역할에 충실하면 그뿐인 듯 보였다. 그러나 여기서도 문제가 되는 것은 역시 ‘인간’이었다. 과학과 종교는 서로 다른 마지스테리움 혹은 범주인 것은 맞지만, 둘 다 인간을 다룬다는 점에서, 더구나 그 인간이 분리될 수 없는 육체와 정신을 가진 존재라는 점에서, 서로 겹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겹침이 필연적으로 충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스티븐 제이 굴드 (1941-2002) @wikipedia
그렇다면 결국 종교와 과학의 관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이란 무엇/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20세기 후반부터 과학 기술이 더욱 발전하면서 기존에 고유한 인간의 영역이라고 생각되던 ‘정신’이 새롭게 분석되고 정의되는 단계에 이르면서 이 문제는 더욱 복잡해졌다. 뇌과학이 발달하면서 인간 정신이 모두 뇌라는 신체 기관의 활동으로 환원될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들이 쌓여 갔다. 감각과 감정은 물론, 인식과 기억과 사고에서부터 의도에 이르는 모든 것이 뇌의 구성과 활동에 따른 것이라는 믿음이 강해졌다. 종교적인 묵상이나 신비 체험 같은 것도 모두 뇌의 활동과 크게 연결되어 있다는 증거들이 제시되었고, 더 나아가서는 인간의 의지와 윤리 또한 마찬가지인 듯 보였다. 뇌의 특정 부분을 활성화했을 때 신비 체험과 비슷한 감각을 느낀다거나, 뇌의 특정 부분에 이상이 생겼을 때 도덕적 판단에 문제가 생긴다는 경험이나 실험의 결과가 이를 입증했다. 이제까지 인간의 고유한 특성으로 인식되던 ‘정신’이 순전히 뇌의 전기 신호로 환원될 지경에 이르렀다.
400년쯤 전에 홉스가 한 말대로 인간은 그저 복잡한 기계일 뿐이라는 말이 입증되는 듯했다. 이 말은 결국 인간의 정신 또한 기계 장치를 만들 듯이 인공으로 구현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그리고 실제로 21세기에 들어 실제로 인공지능 개발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고, 이제 어떤 면에서는 인간의 지능을 넘어서는 여러 인공지능 모델이 실생활에 도입되고 있다. 인공지능의 등장은 두 가지 면에서 기존의 인간 개념에 문제를 제기한다. 첫째는 인공으로 구성된 ‘정신’ 또한 인간적인 것인가 하는 물음이다. 이는 곧 인간을 능가하는 인공지능의 존재 앞에서 인간은 어떤 의미를 갖게 될 것인가 하는 물음으로도 연결된다. 인공지능의 빠른 발전으로 슈퍼 지능이 등장한다면 인간은 분명히 도태될 것이고, 결국 인간의 모든 경험마저 데이터로 변환될 테니 말이다. 둘째는 인공지능을 통해 인간 조건의 한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인간 조건을 창조하겠다는 트랜스휴머니즘이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물음이다. 이는 자신을 일종의 가상현실로 만들어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완전히 ‘새로운 인간’이 가능할 수도 있도, 의식을 기계에 다운로드함으로써 현재의 인간보다 향상된 정신적 능력을 갖고 그 무한한 복제 가능성을 통해 불멸을 얻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확장된 조건의 인간 또한 우리는 인간이라 할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여기서 중요하게 떠오르는 문제가 바로 인공지능의 윤리다. 즉 인공지능이 그 발명자인 인간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에 관한 윤리적 판단과 실천이 요구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새로운 도구를 어떻게 설계하고 사용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물론이고, 도대체 이 새로운 도구는 무엇이며, 그것은 우리와 얼마나 비슷하고, 비슷할 수 있으며, 어디까지 비슷해야 하는가를 판단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과 그에 대한 사유는 결국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문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우리가 이제까지 지능을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특징으로 생각해 왔다는 사실이다. 물론 인류는 다른 동물과 확실하게 구별되는 탁월한 지능을 가졌고, 이 지능을 통해 문명을 이루었다는 말은 맞다. 하지만 이제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낸, 인간을 능가하는 지능과 마주하게 되었고, 지능만으로 인간을 규정할 수도 없게 된 셈이다. 그리고 이를 더 깊숙이 생각해 볼 때, 지능이든, 이성이든, 혹은 영혼이든 인간의 본질을 어떤 것으로 환원하여 정의하려는 시도 자체의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사실 인간이란 더 이상 환원 불가능하게 체화되고embodied 내장되어embedded 있다. 육체적 욕구와 인격적 의욕을 가진, 독특하고 제한된 육체와 특정한 장소 및 특정한 시간 안에 있는 우리의 실존은 우리의 인성과,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부여하는 존중 및 권리의 토대를 이룬다. 우리는 우리의 건강과 미덕의 토대를 이루지만, 충족되지 않을 경우 우리의 실존을 위협하는 욕구와 목표를 갖는다. 그래서 인간은 취약하고, 다른 존재에 의존적일 수밖에 없다. 인공 지능이 인간으로 여겨지거나, 적어도 유사 인간으로서 인정되고 보호되어야 한다고 여겨지는 지점은, 인공지능이 지능이나 사고의 표징을 충분히 보여주는 지점이 아니라, 인공지능 스스로가 자신의 실존을 유지하고 영속시키고자 고민하고 분투하는 지점일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종교 전통들은 미래 인공지능의 형이상학적 지위에 관한 논쟁에 기여할 수 있다. 무엇이 (혹은 누가) 인간을 구성하는지, 누가 (혹은 무엇이) 그에 대해 결정권을 갖는지를 두고 과학과 종교는 대화를 나누어야 하며, 그렇게 보자면 우리는 과학과 종교의 얽힌 역사가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