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포를 통해 배우는 영적 묵상
불멸하지만 전혀 다른 암세포와 줄기세포,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
글ㅣ김영웅 박사
기초과학연구원 유전체교정연구단 선임연구원
과신대 정회원, 후원이사
앞의 글에서 줄기세포의 불멸성은 원래 주어진 것인 반면 암세포의 불멸성은 스스로 획득한 것이라 했다. 이번엔 이렇게 서로 다른 두 가지 불멸성의 기원에 대해 생물학적으로 조금 더 자세하게 들여다보고, 암세포의 변질 과정과 그들의 종말까지 살펴보며 신앙적인 면에서 좀 더 풍성한 통찰을 얻도록 하자.
2. 불멸
(1) 주어진 것 vs. 획득한 것
사람의 발생과정만 놓고 본다면, 궁극의 줄기세포는 난자와 정자가 만나 생성되는 수정란이다. 인종이나 신분이나 지위나 성과 무관하게 인간인 우리는 모두 단 하나의 세포, 수정란으로부터 시작했다. 성인의 몸은 평균 37조 개의 세포로 이루어졌고 마지막 숨을 쉴 때까지 그 수를 거의 유지한다는 연구결과에 기반하면, 하나의 수정란이라는 세포가 얼마나 많은 세포분열을 겪으며 얼마나 다양한 종류의 세포를 만들어내는지, 그리고 그 놀라운 지속성에 대해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줄기세포가 어떤 존재인지, 줄기세포의 힘이 어떤 것인지 여실히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수정란이 이러한 불멸성을 어떻게 가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다. 엄마로부터 한 달에 하나씩 배란되는 난자에 아빠로부터 공급된 수억 마리의 정자 중 하나가 결합하여 하나가 되는 과정이 바로 수정이고, 그렇게 탄생한 세포가 수정란인데, 놀라운 것은 이 과정에서 수정란이 스스로 한 것이라고는 정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저 수정이라는 과정이 끝났을 뿐인데 수정란이라는 궁극의 줄기세포가 탄생해 버린 것이다. 다시 말해 수정란의 줄기세포 능력은 처음부터 주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스스로 획득한 게 아닌 것이다. 철저히 수동적으로 주어진 것이고, 수정란이라는 존재가 생겨날 때부터 줄기세포의 정체성이 부여된 것이다. 불멸성은 애초부터 미리 계획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타고난 불멸성이라 할 수 있겠다.

출처: https://www.seoul.co.kr/news/society/science-news/2021/04/30/20210430500070
반면 암세포의 불멸성은 다르다. 그것은 스스로 획득한 능력이다. 지극히 당연한 말이겠지만, 암세포는 처음부터 존재했던 세포가 아니다. 처음부터 암세포로 태어나는 세포는 없다. 언젠간 암세포로 변질될 가능성은 그 어떤 세포라도 가지고 있지만 말이다. 평생 암에 걸리지 않는 사람이 암에 걸리는 사람보다 여전히 더 많다는 사실만 봐도 암세포는 줄기세포와 달리 모두에게 꼭 필요한 세포가 아니다. 아니, 없으면 더 좋은 세포, 평생 만나지 않으면 더 좋은 세포, 아무도 반기지 않는 불청객과 같은 존재가 바로 암세포다. 암세포가 스스로 불멸성을 획득했다는 말은 불멸을 관장하는 특정 유전자에 돌연변이를 일으켰다는 말이다. 그것도 저 혼자서 마음대로 말이다. 세대를 거치며 점점 스위치가 꺼져야 할, 혹은 이미 꺼진, 유전자를 훼손시켜 자기만을 위해 다시 스위치를 강제로 켜서 사용하는 세포가 바로 암세포다.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처음부터 악인인 사람이 있을까? 악인조차도 처음엔 악하지 않고 평범한 사람 아니었을까? 이는 그리스도인과 교회에도 적용할 수 있다. 거짓 그리스도인도 처음엔 참 그리스도인이었다는 것, 이단과 사이비 등 거짓 교회들도 처음엔 예수를 머리로 두는 참 교회였다는 것, 어떤가? 동의가 되는가?
(2) 암세포의 기원 vs. 암세포의 불멸성의 기원
여기서 암세포를 잠시 변호하는 발언을 할 수도 있겠다. 암세포의 기원과 암세포의 불멸성의 기원을 구분하는 차원에서도 이 점은 충분히 짚어볼 가치가 있다. 기초적인 분자생물학적 지식을 조금 동원하겠다. 상식적인 수준이니 이 정도는 알아두어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DNA 돌연변이는 무작위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실제로 어떤 종류의 세포라도 분열할 때 전체 DNA 중 평균 6군데 정도의 확률로 돌연변이가 발생한다. 그러므로 엄밀한 차원에서 세포분열은 언제나 완전히 똑같은 세포를 낳지는 않는다. 우리가 클론이라고 부르는 세포들 역시 마찬가지다. 클론들 역시 분열할 때마다 몇몇 군데는 염기서열을 달리한다. 물론 어지간해선 유전자와 같은 중요한 부분에서 돌연변이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특이사항 없이,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똑같아 보이지만 말이다. 참고로 전체 DNA에서 단백질을 코딩하는, 소위 유전자라고 불리는 부분은 약 1%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돌연변이가 무작위적으로 일어난다면, 전체 돌연변이의 약 1%만이 유전자 부분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유전자 수가 사람에서는 약 2만 개 남짓 된다고 알려져 있고, 아무 유전자에서나 돌연변이가 일어난다고 해서 암세포가 되지도 않으므로 암세포를 유발하는 돌연변이는 극히 적은 확률로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마치 암세포가 어떤 의식을 가진 존재처럼 착각하면 안 된다는 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암세포는 어쩌다가 탄생하게 된, 다시 말해 무작위적으로 탄생하게 된 억울한 희생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암세포의 기원은 그렇게 이해할 수 있다고 해도 암세포의 불멸성의 기원은 다른 얘기다. 불멸성을 획득할 수 있는 돌연변이는 결코 무작위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암세포의 종류에 상관없이 공통적으로 획득하는 유전자 돌연변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이를 강력하게 뒷받침한다. 특히 모든 암세포의 약 90퍼센트는 그들의 불멸성을 크게 두 가지 공통적인 기작으로 획득한다. 마치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말이다.
첫째, 분화된 세포에서는 이미 비활성화된 ‘텔로머라아제’라는 효소를 재활성화시키는 방식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세포분열 시 계속해서 짧아지는 DNA 말단을 짧아지지 않도록 보호한다. 불멸인 줄기세포가 필멸인 분화세포로 이행하는 과정에는 반드시 DNA 길이가 점점 짧아지도록 설계가 되어 있다. 이는 줄기세포가 노화와 사멸로 이르는 대장정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자연스러운 과정으로써 텔로머라아제를 비활성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상적인 세포의 분화과정에서는 텔로머라아제가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DNA 길이가 짧아져 언젠가부터는 더 이상 세포분열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노화 혹은 사멸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암세포는 이 여정을 중간에서 강제 종료시킬 뿐 아니라 오히려 이미 문을 닫은, 텔로머라아제를 생산하는 공장을 재작동시켜 자기의 불멸성만을 위해 독점 사용한다.
둘째, 세포에 DNA 손상 등 복구 불가능한 심각한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문제를 감지하여 세포자멸사라는 방법으로 세포를 염증 반응 없이 죽이는 데 필요한 단백질인 p53을 선택적으로 비활성화시키는 방식이다. 정상적인 세포에서 의례히 행해져야 할 '점검 시스템'이 암세포가 분열할 때에는 작동되지 않도록 암세포가 미리 손을 써 둔다고 이해하면 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정상적인 세포분열 시에도 평균 6군데 정도 돌연변이가 일어나는데, 이 6군데는 언제나 작동하고 있는 점검 시스템이 오류를 수정하고 난 이후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점검 시스템이 작동되지 않을 때 돌연변이 횟수는 증가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 암세포의 무한 자기 증식은 수많은 돌연변이를 우후죽순으로 발생시킨다. 일차 돌연변이, 이차 돌연변이 등등, 돌연변이의 축적이 복구나 수정 없이 중구난방으로 거듭 일어나면서 암세포는 더욱 진화한다 (이 과정에서 종양이 양성에서 악성으로 바뀐다. 악성 종양의 다른 이름이 바로 암이다). 자체 점검 시스템을 미리 꺼두었기 때문에 문제가 생겨도 세포자멸사로 향할 기회가 사라진, 즉 죽을 기회조차 사라진, 마침내 불멸성을 획득한 존재가 바로 암세포인 것이다.
(3) 획일성 vs. 다양성
암세포도 원래 정상세포였다는 점은 여러 번 생각해도 의미심장하다고 느껴진다. 너무 당연한 얘기지만 이 점을 떠올릴 때면 항상 나는 나의 현재 좌표를 묻게 된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나는 여전히 정상세포일까? 줄기세포의 자손으로서 제 할 일을 다하고 있을까? 혹시 암세포로의 변질을 은밀하게 욕망하거나 이미 그 길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걷고 있는 건 아닐까? 실제로는 그 길 위에 있으면서도 여러 가지 핑계로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 질문들은 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늘 마음 한 편에 뿌리 박혀 있는 오래된 질문을 다시 하게 만든다. ‘나는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여기에 있는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사명에 관한 질문이다.
처음부터 암세포로 탄생하는 세포는 없다. 모든 암세포는 한때 정상 세포였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정상세포로부터 변질된 암세포의 유일한 목적은 자기 증식이다. 다시 말하면, 클론증식. 알다시피 클론은 카피를 뜻한다. 똑같은 자기 자신을 복제하는 것이다. 무수한 ‘나’로 세상을 도배하는 존재가 바로 암세포라고 해석할 수 있겠다. 암세포의 증식이 클론증식이라는 사실은 획일성이 지배하는 세상을 떠올리게 만든다. 획일성과 반대되는 사회적인 개념은 다양성일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 역시 다양성의 향연이었다. 이사야서에서 그리는 세상, 즉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는 세상 역시 획일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곳이다. 힘없는 어린양이 모두 이리가 되려고 애쓸 필요 없는 곳, 염소가 표범과 함께 누워도 무서워할 필요가 없는 곳,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맹수들이 어린아이와 함께 있을 수 있는 곳의 기본 전제는 다양성이다. 다양성은 원래 주어진 줄기세포의 아름다운 속성인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이 가시적으로 표현된 모습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 현실을 둘러보면 자본주의의 피라미드 체제에 짓눌린 나머지 획일성을 은연중에 강압받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피라미드의 꼭대기로 가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세상의 진리가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양으로 태어난 사람도 송아지로 태어난 사람도 그 누구나 모두 이리나 사자가 되길 원하거나 그렇게 되길 강요받는다. 그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유일한 법칙이라도 되는 듯 말이다. 사자가 되지 못한 대다수는 자신이 양으로 태어난 것을 원망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한다. 비극이지 않을 수 없다. 획일성의 비대는 필연적으로 다양성의 결핍과 부재를 초래한다.
이런 세상을 보면서 나는 비대해질 대로 비대해진 암세포로 획일화된 몸을 떠올린다. 제 기능을 발휘해야 할 정상세포들이 모두 힘을 잃고 픽픽 죽어 나가는 조직과 기관들을 떠올린다. 그 와중에도 여전히 게걸스럽게 홀로 영양소를 독식하는 암세포의 팽창을 목도하며 나는 전체 몸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과연 이대로 버틸 수 있을 것인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것인가?
한때 전 세계적으로 찬양의 대상이기도 했던 한국교회의 단기간 양적 부흥의 가려진 어두운 결과를 우린 21세기 현재 똑똑히 보고 있다. 성경에서 그리는 하나님 나라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암세포에 점점 더 잠식당하고 있는 한국 교회와 그 안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로 사적인 신앙에 매몰되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론 맘몬을 숭배할 뿐인 수많은 거짓 그리스도인들을 본다. 처절한 슬픔을 느낀다. 이미 이 배는 기울어져버린 걸까?, 희망이 정말 남아 있기라도 한 걸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게 된다. 그리고 텅 빈 눈이 되어 허공을 응시한다. 모든 것이 흐릿할 뿐이다.

사진: Unsplash의Jahanzeb Ahsan
(4) 변질과 공멸
암세포는 자신은 불멸성을 얻었으나 자신이 기생하고 있는 숙주가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계속해서 ‘나’로 모든 공간을 채우는 존재다. 그러다가 자신도 결국 죽는다. 암세포가 말을 할 줄 안다면 묻고 싶다. 왜 그랬냐고. 무엇을 위해서 그랬냐고. 그렇게 영원히 살고 자기 자신과 똑같은 존재를 무한히 복제해서 무엇을 얻고 싶었던 거냐고. 결국 숙주를 위험에 빠뜨리게 될 것을 예상하지 못했냐고. 숙주가 죽으면 너도 죽을 운명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냐고.
그러나 나는 안다. 암세포와 같은 구름처럼 허다한 증인들이 역사의 매 순간을 장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증인들은 모두 건강한 자존감 혹은 자긍심을 넘어 어느 순간부터 자존심을 세우기 시작하다가 지독한 자기애에 빠지게 된다. 이들은 내면 깊숙한 곳에 웅크리고 있던 교만함이 가시적인 오만함으로 발현되어 자기 증식, 자기 복제를 자행하는 암세포처럼 모든 사람을 자기 뜻대로 자기의 명령 대로 움직이게 하거나, 제2의 자기 자신을 만들기 위해 자기만의 방식으로 시스템을 구축하여 자기만의 왕국을 건설하려는 시도를 하다가 결국 패망하게 될, 그러나 아직은 패망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암세포와 같은 정체성을 띠면서도 줄기세포인 척하는 행태를 보인다. 마치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거룩한 의인으로 둔갑하기도 하고, 선하고 좋은 일에 큰돈을 써가면서 자선사업가로 행세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에게 그런 희생과 자선은 가면이자 투자 혹은 투기일 뿐이다. 귀 얇은 사람들과 얕은 눈의 사람들의 심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자신의 이미지를 세탁하고 더 큰 부를 쟁취한다. 언론은 이들의 선한(?) 행위에 박수를 보내며 보도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취하고 이들의 암세포 정체성을 세탁하는 데 크게 일조한다. 이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진실을 보지 못하게 가려지고, 마침내 이들은 가짜 줄기세포로 등극하게 되는 것이다. 암세포의 변질과 진화는 그야말로 거짓과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정글이다.
모든 암세포가 정상세포에서 출발했듯 이들 역시 평범한 시민으로 출발했다. 이들은 어떤 작은 그룹의 리더이기도 했을 테고 그룹원이기도 했을 테다. 혹은 강자에게 짓눌린 약자 연대의 일원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자신의 유익을 한몫 단단히 챙길 수 있을 것 같은 기회(우연일까, 축복일까?)를 포착하게 되었을 때, 그 방법이 아무리 불의하고 불공정하고 불법에 해당된다 하더라도 은밀하고 들통나지 않게, 마치 그것이 정의이고 순리인 것처럼, 마치 누구나 다 하는 당연한 관행인 것처럼 범죄에 조용히 가담하게 되는 것이다. 알다시피 관행이란 어떤 특정한 집단에 속할 때에만 허용이 되어 이득을 취하는 은밀한 샛길 같은 것이다. 집단 밖에 있을 땐 불법은 아니더라도 불법적인 일로 여겨지는 것들이다. 집단 이기주의 혹은 카르텔의 견고한 울타리 역할을 하는 이 관행이라는 개념은 한 번 받아들이고 맛을 보기 시작하면 어지간한 의지로는 빠져나올 수 없는 이중적인 잣대가 된다. 법망을 교묘하게 피해서 양심을 저버려야만 취할 수 있는 유익을 맛본 자들은 이것에 점점 길들여지다가 어느 순간부턴 당연하게 여기게 된다.
양심은 일종의 자가 점검 시스템이다. 암세포가 점검 시스템을 미리 꺼두는 이유는 앞서 언급했듯이 자기만의 폭주를 마음껏 펼치기 위해서다. 마찬가지다. 불의와 불법을 당연하게 여기게 된 이들은 점검 시스템을 끄고 폭주를 시작한 암세포와 다를 바가 없다. 줄기세포로부터 만들어진 정상세포가 서서히 암세포로 변질되는 과정은 불의한 자들과 악한 자들의 탄생 과정과 닮은 점이 이토록 많은 것이다. 그리고 이 둘의 종말은 공멸이라는 점 역시 부인할 수 없는 공통점이다. 암세포의 번영은 공멸을 가져온다. 파국이다.
(5) 그리스도인과 교회에 적용
그렇다면 암세포의 변질 과정을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맥락에 적용하면 어떤 성찰을 할 수 있고 어떤 통찰을 얻을 수 있을까? ‘점검 시스템‘이라는 개념 중심으로 생각해 보자.
세포의 점검 시스템에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p53 단백질을 인간의 일반적인 양심에 비유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인에게 그것은 보호하시고 은혜를 주시고 가르치시는 보혜사 성령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전통적인 관점에서 그리스도인이란 성령이 내주하셔서 영적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김 받은 사람을 뜻한다. 성령이 내주하시면 그리스도인은 과거에 좇던 자기 의를 내려놓은 후 성령의 목소리를 듣고 그 인도하심을 선택하는 자발적 순종으로,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과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말하자면 영적인 분별력을 선물로 받게 되는 것이다.
열왕기상에서 솔로몬이 하나님께 구한 것은 듣는 마음과 분별하는 능력이었다. 이 솔로몬의 기도를 예수의 승천 후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 성령이 임한 이후의 시선으로 바꾸어 본다면, 성령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분별력을 얻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도 감동하신 솔로몬의 기도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자신 안에 거하시는 성령에 순종하는 삶을 삶으로써 놀랍게도 지금도 성취되고 있다.
이 분별력의 특징은 처음부터 주어진다는 사실이다. 학습으로 인한 결과가 아닌, 처음부터 내재되어 있던 것이다. 마치 수정란이라는 궁극의 줄기세포에 처음부터 불멸성이 내재되는 것처럼,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영접함으로써 즉시 성령이 내주하셔서 영적인 분별력을 얻게 된다. 어쩌면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은 그 소중한 분별력을 잘 사용하는 연습과정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점검 시스템을 끄고 마치 폭주라도 준비하는 것처럼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의 기원은 무엇일까? 어쩌다가 줄기세포로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암세포로 변질되는 것일까? 앞서 언급한 분별력의 관점에서 하나의 답을 해보자면, 크게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영적 분별력의 정체성과 목적을 몰라서. 둘째, 그것을 알지만 의도적으로 순종하지 않기로 결단을 내려서.
솔로몬이 구한 것은 자기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듣는 마음과 분별하는 능력은 목돈을 단단히 챙길 수 있는 어떤 은밀한 샛길을 알려주는 도사의 말에 귀 기울이는 마음, 혹은 어느 도사가 더 용한지 더 정확한지 분별하는 능력 따위가 아닐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솔로몬 왕에게 맡기신 백성들을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실현하기 위함이었다. 나의 왕국이 아닌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것이었다. 그리스도인이 됨으로써 처음부터 주어지는 영적 분별력의 정체성은 성령이라는 것, 곧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의 목적은 하나님 나라를 위함이라는 것. 이 당연한 사실을 모든 그리스도인은 마음에 새기고 또 새겨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를 모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에 불순종하기로 결단하고 실행에 옮기는 그리스도인들이 허다하다. 나 조차도 언제나 그런 유혹을 느끼며 종종 넘어가기도 한다. 몰라서가 아니다. 알고도 짓는 죄와 같은 것이다. 이유는 여러 말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축약하면 하나다. 나의 유익. 그렇다. 성령의 인도하심이 나의 유익과 상반되는 경우가 너무나 많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산다고 했건만 여전히 나는 내 왕국을 비밀스럽게 건설하고 확장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는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면서 이런 현상은 피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또 누군가는 일단은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냐면서 상황 논리를 펴고 불의와 정의의 경계를 넘나들어 모호하게 만들고 나의 의를 하나님의 의로 포장하고 합리화하기도 한다. 이런 시대에 우린 어디를 봐야 하고 누구의 말을 따라야 할까? 암세포로의 변질은 과연 시대적인 흐름의 일환인 것일까?

사진: Unsplash의Aaron Burden
(6) 참 어른, 참 그리스도인, 참 줄기세포, 참 소망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가는 아브라함에겐 믿음이 있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 곧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있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에 아브라함은 존재하는가? 갈 바를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을 신뢰하며 꿋꿋이 길을 걷는 그리스도인이 존재하는가? 그런 줄기세포와도 같은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믿음까지 잃어버린 이 시대 허다한 그리스도인들에겐 하나의 이정표가 되어 다시 본질을 회복하고 처음부터 받았던 성령의 목소리에 다시 귀를 기울일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다행히 존재한다. 비록 소수이지만 한국교회 안에도 존재한다. 기울어진 배이지만 한국교회에 여전히 희망을 버릴 수 없는 유일한 이유가 되는 분들이다. 기업으로 변질시킨 대형교회를 하나님의 축복과 성령의 인도로만 해석하고 그 현상을 계속 유지하며 사적 유익을 취하는 데 갖은 애를 쓰는, 번영신앙과 기복신앙을 대변하는 목사들이 있는가 하면, 교회 대형화의 폐단과 인간의 욕망 및 한계를 간파하고 애써 분립개척을 실행하는 목사들도 있고, 분립개척을 넘어 담임인데도 불구하고, 심지어 은퇴할 나이가 다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스스로 아무런 경제적 지원 없이 개척을 단행하시는 목사님도 한국교회에 여전히 존재한다. 또한 정치계와 경제계에 연루되어 사회적 영향력을 마치 영적 영향력인 것처럼 미화한 뒤 높은 곳에 올라 돈과 권력까지 도모하고 그렇게 얻은 가시적인 결과들이 마치 말씀과 기도와 전도의 열매인 것처럼 둔갑시키고 이를 증폭시키는 목사들도 존재하지만, 여전히 부와 명예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보내시는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 구약의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같은 가난한 자와 약한 자와 소외당한 자와 억눌림 받은 자들의 친구가 되고 보호자가 되어 묵묵히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예수와 같은 분들도 계신다. 이런 참 줄기세포와 같은 그리스도인은 목회자들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소위 평신도랄까 비목회자랄까 하는 그리스도인 일반 중에도 존재한다. 오히려 드러나지 않은 곳에서 더 많이 존재할 것이다.
비록 소수이지만 나는 이런 분들의 존재 자체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고 예수를 본다. 이 시대의 참 어른이고 참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어지러운 이 시대에, 어디를 봐야 할지, 무엇을 들어야 할지 막막한 이 시대에 선명한 이정표임이 틀림없다. 이들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암세포로 변질되려는 유혹으로부터 다시 마음을 다잡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참 줄기세포인 이런 분들의 존재 자체에 힘을 얻고 소망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다.
이런 줄기세포와 같은 분들의 공통점은 모두 예수의 마음을 가졌다는 것이다. 강한 자가 아닌 약한 자, 폭력을 행하는 자가 아닌 폭력에 희생당하는 자, 억누르는 자가 아닌 억눌림을 받는 자, 소외시키고 배제시키는 자가 아닌 소외되고 배제되는 자, 부자가 아닌 가난한 자들을 향한 낮은 마음, 그 정의롭고 공의로운 마음, 곧 거룩한 하나님의 마음일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인 안에 내재된 점검 시스템의 중추인 p53 단백질과도 같은 성령이 주시는 영적 분별력과도 일치할 것이다.
이제 이렇게 다시 묻고 싶다. 당신은 이 길 위에 있는가? 당신은 성령의 인도하심 안에 거하는가? 당신은 참 줄기세포인가? 혹시 암세포로 변질 중이지 않은가? 이 시대에 참 어른이 필요하다. 참 그리스도인이 필요하다. 참 줄기세포의 존재가 필요하다. 나도 그런 존재가 되길, 나부터 그런 존재가 되길, 그래서 한국교회에 희망이 없다고 함부로 떠들지 않고 나 하나가 아주 작은 희망이 되길, 우리 모두가 그렇게 되길 바라마지 않는다.
세포를 통해 배우는 영적 묵상
불멸하지만 전혀 다른 암세포와 줄기세포,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
글ㅣ김영웅 박사
기초과학연구원 유전체교정연구단 선임연구원
과신대 정회원, 후원이사
앞의 글에서 줄기세포의 불멸성은 원래 주어진 것인 반면 암세포의 불멸성은 스스로 획득한 것이라 했다. 이번엔 이렇게 서로 다른 두 가지 불멸성의 기원에 대해 생물학적으로 조금 더 자세하게 들여다보고, 암세포의 변질 과정과 그들의 종말까지 살펴보며 신앙적인 면에서 좀 더 풍성한 통찰을 얻도록 하자.
2. 불멸
(1) 주어진 것 vs. 획득한 것
사람의 발생과정만 놓고 본다면, 궁극의 줄기세포는 난자와 정자가 만나 생성되는 수정란이다. 인종이나 신분이나 지위나 성과 무관하게 인간인 우리는 모두 단 하나의 세포, 수정란으로부터 시작했다. 성인의 몸은 평균 37조 개의 세포로 이루어졌고 마지막 숨을 쉴 때까지 그 수를 거의 유지한다는 연구결과에 기반하면, 하나의 수정란이라는 세포가 얼마나 많은 세포분열을 겪으며 얼마나 다양한 종류의 세포를 만들어내는지, 그리고 그 놀라운 지속성에 대해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줄기세포가 어떤 존재인지, 줄기세포의 힘이 어떤 것인지 여실히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수정란이 이러한 불멸성을 어떻게 가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다. 엄마로부터 한 달에 하나씩 배란되는 난자에 아빠로부터 공급된 수억 마리의 정자 중 하나가 결합하여 하나가 되는 과정이 바로 수정이고, 그렇게 탄생한 세포가 수정란인데, 놀라운 것은 이 과정에서 수정란이 스스로 한 것이라고는 정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저 수정이라는 과정이 끝났을 뿐인데 수정란이라는 궁극의 줄기세포가 탄생해 버린 것이다. 다시 말해 수정란의 줄기세포 능력은 처음부터 주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스스로 획득한 게 아닌 것이다. 철저히 수동적으로 주어진 것이고, 수정란이라는 존재가 생겨날 때부터 줄기세포의 정체성이 부여된 것이다. 불멸성은 애초부터 미리 계획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타고난 불멸성이라 할 수 있겠다.
출처: https://www.seoul.co.kr/news/society/science-news/2021/04/30/20210430500070
반면 암세포의 불멸성은 다르다. 그것은 스스로 획득한 능력이다. 지극히 당연한 말이겠지만, 암세포는 처음부터 존재했던 세포가 아니다. 처음부터 암세포로 태어나는 세포는 없다. 언젠간 암세포로 변질될 가능성은 그 어떤 세포라도 가지고 있지만 말이다. 평생 암에 걸리지 않는 사람이 암에 걸리는 사람보다 여전히 더 많다는 사실만 봐도 암세포는 줄기세포와 달리 모두에게 꼭 필요한 세포가 아니다. 아니, 없으면 더 좋은 세포, 평생 만나지 않으면 더 좋은 세포, 아무도 반기지 않는 불청객과 같은 존재가 바로 암세포다. 암세포가 스스로 불멸성을 획득했다는 말은 불멸을 관장하는 특정 유전자에 돌연변이를 일으켰다는 말이다. 그것도 저 혼자서 마음대로 말이다. 세대를 거치며 점점 스위치가 꺼져야 할, 혹은 이미 꺼진, 유전자를 훼손시켜 자기만을 위해 다시 스위치를 강제로 켜서 사용하는 세포가 바로 암세포다.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처음부터 악인인 사람이 있을까? 악인조차도 처음엔 악하지 않고 평범한 사람 아니었을까? 이는 그리스도인과 교회에도 적용할 수 있다. 거짓 그리스도인도 처음엔 참 그리스도인이었다는 것, 이단과 사이비 등 거짓 교회들도 처음엔 예수를 머리로 두는 참 교회였다는 것, 어떤가? 동의가 되는가?
(2) 암세포의 기원 vs. 암세포의 불멸성의 기원
여기서 암세포를 잠시 변호하는 발언을 할 수도 있겠다. 암세포의 기원과 암세포의 불멸성의 기원을 구분하는 차원에서도 이 점은 충분히 짚어볼 가치가 있다. 기초적인 분자생물학적 지식을 조금 동원하겠다. 상식적인 수준이니 이 정도는 알아두어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DNA 돌연변이는 무작위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실제로 어떤 종류의 세포라도 분열할 때 전체 DNA 중 평균 6군데 정도의 확률로 돌연변이가 발생한다. 그러므로 엄밀한 차원에서 세포분열은 언제나 완전히 똑같은 세포를 낳지는 않는다. 우리가 클론이라고 부르는 세포들 역시 마찬가지다. 클론들 역시 분열할 때마다 몇몇 군데는 염기서열을 달리한다. 물론 어지간해선 유전자와 같은 중요한 부분에서 돌연변이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특이사항 없이,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똑같아 보이지만 말이다. 참고로 전체 DNA에서 단백질을 코딩하는, 소위 유전자라고 불리는 부분은 약 1%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돌연변이가 무작위적으로 일어난다면, 전체 돌연변이의 약 1%만이 유전자 부분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유전자 수가 사람에서는 약 2만 개 남짓 된다고 알려져 있고, 아무 유전자에서나 돌연변이가 일어난다고 해서 암세포가 되지도 않으므로 암세포를 유발하는 돌연변이는 극히 적은 확률로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마치 암세포가 어떤 의식을 가진 존재처럼 착각하면 안 된다는 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암세포는 어쩌다가 탄생하게 된, 다시 말해 무작위적으로 탄생하게 된 억울한 희생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암세포의 기원은 그렇게 이해할 수 있다고 해도 암세포의 불멸성의 기원은 다른 얘기다. 불멸성을 획득할 수 있는 돌연변이는 결코 무작위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암세포의 종류에 상관없이 공통적으로 획득하는 유전자 돌연변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이를 강력하게 뒷받침한다. 특히 모든 암세포의 약 90퍼센트는 그들의 불멸성을 크게 두 가지 공통적인 기작으로 획득한다. 마치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말이다.
첫째, 분화된 세포에서는 이미 비활성화된 ‘텔로머라아제’라는 효소를 재활성화시키는 방식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세포분열 시 계속해서 짧아지는 DNA 말단을 짧아지지 않도록 보호한다. 불멸인 줄기세포가 필멸인 분화세포로 이행하는 과정에는 반드시 DNA 길이가 점점 짧아지도록 설계가 되어 있다. 이는 줄기세포가 노화와 사멸로 이르는 대장정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자연스러운 과정으로써 텔로머라아제를 비활성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상적인 세포의 분화과정에서는 텔로머라아제가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DNA 길이가 짧아져 언젠가부터는 더 이상 세포분열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노화 혹은 사멸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암세포는 이 여정을 중간에서 강제 종료시킬 뿐 아니라 오히려 이미 문을 닫은, 텔로머라아제를 생산하는 공장을 재작동시켜 자기의 불멸성만을 위해 독점 사용한다.
둘째, 세포에 DNA 손상 등 복구 불가능한 심각한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문제를 감지하여 세포자멸사라는 방법으로 세포를 염증 반응 없이 죽이는 데 필요한 단백질인 p53을 선택적으로 비활성화시키는 방식이다. 정상적인 세포에서 의례히 행해져야 할 '점검 시스템'이 암세포가 분열할 때에는 작동되지 않도록 암세포가 미리 손을 써 둔다고 이해하면 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정상적인 세포분열 시에도 평균 6군데 정도 돌연변이가 일어나는데, 이 6군데는 언제나 작동하고 있는 점검 시스템이 오류를 수정하고 난 이후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점검 시스템이 작동되지 않을 때 돌연변이 횟수는 증가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 암세포의 무한 자기 증식은 수많은 돌연변이를 우후죽순으로 발생시킨다. 일차 돌연변이, 이차 돌연변이 등등, 돌연변이의 축적이 복구나 수정 없이 중구난방으로 거듭 일어나면서 암세포는 더욱 진화한다 (이 과정에서 종양이 양성에서 악성으로 바뀐다. 악성 종양의 다른 이름이 바로 암이다). 자체 점검 시스템을 미리 꺼두었기 때문에 문제가 생겨도 세포자멸사로 향할 기회가 사라진, 즉 죽을 기회조차 사라진, 마침내 불멸성을 획득한 존재가 바로 암세포인 것이다.
(3) 획일성 vs. 다양성
암세포도 원래 정상세포였다는 점은 여러 번 생각해도 의미심장하다고 느껴진다. 너무 당연한 얘기지만 이 점을 떠올릴 때면 항상 나는 나의 현재 좌표를 묻게 된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나는 여전히 정상세포일까? 줄기세포의 자손으로서 제 할 일을 다하고 있을까? 혹시 암세포로의 변질을 은밀하게 욕망하거나 이미 그 길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걷고 있는 건 아닐까? 실제로는 그 길 위에 있으면서도 여러 가지 핑계로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 질문들은 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늘 마음 한 편에 뿌리 박혀 있는 오래된 질문을 다시 하게 만든다. ‘나는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여기에 있는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사명에 관한 질문이다.
처음부터 암세포로 탄생하는 세포는 없다. 모든 암세포는 한때 정상 세포였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정상세포로부터 변질된 암세포의 유일한 목적은 자기 증식이다. 다시 말하면, 클론증식. 알다시피 클론은 카피를 뜻한다. 똑같은 자기 자신을 복제하는 것이다. 무수한 ‘나’로 세상을 도배하는 존재가 바로 암세포라고 해석할 수 있겠다. 암세포의 증식이 클론증식이라는 사실은 획일성이 지배하는 세상을 떠올리게 만든다. 획일성과 반대되는 사회적인 개념은 다양성일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 역시 다양성의 향연이었다. 이사야서에서 그리는 세상, 즉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는 세상 역시 획일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곳이다. 힘없는 어린양이 모두 이리가 되려고 애쓸 필요 없는 곳, 염소가 표범과 함께 누워도 무서워할 필요가 없는 곳,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맹수들이 어린아이와 함께 있을 수 있는 곳의 기본 전제는 다양성이다. 다양성은 원래 주어진 줄기세포의 아름다운 속성인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이 가시적으로 표현된 모습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 현실을 둘러보면 자본주의의 피라미드 체제에 짓눌린 나머지 획일성을 은연중에 강압받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피라미드의 꼭대기로 가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세상의 진리가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양으로 태어난 사람도 송아지로 태어난 사람도 그 누구나 모두 이리나 사자가 되길 원하거나 그렇게 되길 강요받는다. 그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유일한 법칙이라도 되는 듯 말이다. 사자가 되지 못한 대다수는 자신이 양으로 태어난 것을 원망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한다. 비극이지 않을 수 없다. 획일성의 비대는 필연적으로 다양성의 결핍과 부재를 초래한다.
이런 세상을 보면서 나는 비대해질 대로 비대해진 암세포로 획일화된 몸을 떠올린다. 제 기능을 발휘해야 할 정상세포들이 모두 힘을 잃고 픽픽 죽어 나가는 조직과 기관들을 떠올린다. 그 와중에도 여전히 게걸스럽게 홀로 영양소를 독식하는 암세포의 팽창을 목도하며 나는 전체 몸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과연 이대로 버틸 수 있을 것인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것인가?
한때 전 세계적으로 찬양의 대상이기도 했던 한국교회의 단기간 양적 부흥의 가려진 어두운 결과를 우린 21세기 현재 똑똑히 보고 있다. 성경에서 그리는 하나님 나라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암세포에 점점 더 잠식당하고 있는 한국 교회와 그 안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로 사적인 신앙에 매몰되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론 맘몬을 숭배할 뿐인 수많은 거짓 그리스도인들을 본다. 처절한 슬픔을 느낀다. 이미 이 배는 기울어져버린 걸까?, 희망이 정말 남아 있기라도 한 걸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게 된다. 그리고 텅 빈 눈이 되어 허공을 응시한다. 모든 것이 흐릿할 뿐이다.
사진: Unsplash의Jahanzeb Ahsan
(4) 변질과 공멸
암세포는 자신은 불멸성을 얻었으나 자신이 기생하고 있는 숙주가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계속해서 ‘나’로 모든 공간을 채우는 존재다. 그러다가 자신도 결국 죽는다. 암세포가 말을 할 줄 안다면 묻고 싶다. 왜 그랬냐고. 무엇을 위해서 그랬냐고. 그렇게 영원히 살고 자기 자신과 똑같은 존재를 무한히 복제해서 무엇을 얻고 싶었던 거냐고. 결국 숙주를 위험에 빠뜨리게 될 것을 예상하지 못했냐고. 숙주가 죽으면 너도 죽을 운명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냐고.
그러나 나는 안다. 암세포와 같은 구름처럼 허다한 증인들이 역사의 매 순간을 장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증인들은 모두 건강한 자존감 혹은 자긍심을 넘어 어느 순간부터 자존심을 세우기 시작하다가 지독한 자기애에 빠지게 된다. 이들은 내면 깊숙한 곳에 웅크리고 있던 교만함이 가시적인 오만함으로 발현되어 자기 증식, 자기 복제를 자행하는 암세포처럼 모든 사람을 자기 뜻대로 자기의 명령 대로 움직이게 하거나, 제2의 자기 자신을 만들기 위해 자기만의 방식으로 시스템을 구축하여 자기만의 왕국을 건설하려는 시도를 하다가 결국 패망하게 될, 그러나 아직은 패망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암세포와 같은 정체성을 띠면서도 줄기세포인 척하는 행태를 보인다. 마치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거룩한 의인으로 둔갑하기도 하고, 선하고 좋은 일에 큰돈을 써가면서 자선사업가로 행세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에게 그런 희생과 자선은 가면이자 투자 혹은 투기일 뿐이다. 귀 얇은 사람들과 얕은 눈의 사람들의 심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자신의 이미지를 세탁하고 더 큰 부를 쟁취한다. 언론은 이들의 선한(?) 행위에 박수를 보내며 보도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취하고 이들의 암세포 정체성을 세탁하는 데 크게 일조한다. 이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진실을 보지 못하게 가려지고, 마침내 이들은 가짜 줄기세포로 등극하게 되는 것이다. 암세포의 변질과 진화는 그야말로 거짓과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정글이다.
모든 암세포가 정상세포에서 출발했듯 이들 역시 평범한 시민으로 출발했다. 이들은 어떤 작은 그룹의 리더이기도 했을 테고 그룹원이기도 했을 테다. 혹은 강자에게 짓눌린 약자 연대의 일원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자신의 유익을 한몫 단단히 챙길 수 있을 것 같은 기회(우연일까, 축복일까?)를 포착하게 되었을 때, 그 방법이 아무리 불의하고 불공정하고 불법에 해당된다 하더라도 은밀하고 들통나지 않게, 마치 그것이 정의이고 순리인 것처럼, 마치 누구나 다 하는 당연한 관행인 것처럼 범죄에 조용히 가담하게 되는 것이다. 알다시피 관행이란 어떤 특정한 집단에 속할 때에만 허용이 되어 이득을 취하는 은밀한 샛길 같은 것이다. 집단 밖에 있을 땐 불법은 아니더라도 불법적인 일로 여겨지는 것들이다. 집단 이기주의 혹은 카르텔의 견고한 울타리 역할을 하는 이 관행이라는 개념은 한 번 받아들이고 맛을 보기 시작하면 어지간한 의지로는 빠져나올 수 없는 이중적인 잣대가 된다. 법망을 교묘하게 피해서 양심을 저버려야만 취할 수 있는 유익을 맛본 자들은 이것에 점점 길들여지다가 어느 순간부턴 당연하게 여기게 된다.
양심은 일종의 자가 점검 시스템이다. 암세포가 점검 시스템을 미리 꺼두는 이유는 앞서 언급했듯이 자기만의 폭주를 마음껏 펼치기 위해서다. 마찬가지다. 불의와 불법을 당연하게 여기게 된 이들은 점검 시스템을 끄고 폭주를 시작한 암세포와 다를 바가 없다. 줄기세포로부터 만들어진 정상세포가 서서히 암세포로 변질되는 과정은 불의한 자들과 악한 자들의 탄생 과정과 닮은 점이 이토록 많은 것이다. 그리고 이 둘의 종말은 공멸이라는 점 역시 부인할 수 없는 공통점이다. 암세포의 번영은 공멸을 가져온다. 파국이다.
(5) 그리스도인과 교회에 적용
그렇다면 암세포의 변질 과정을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맥락에 적용하면 어떤 성찰을 할 수 있고 어떤 통찰을 얻을 수 있을까? ‘점검 시스템‘이라는 개념 중심으로 생각해 보자.
세포의 점검 시스템에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p53 단백질을 인간의 일반적인 양심에 비유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인에게 그것은 보호하시고 은혜를 주시고 가르치시는 보혜사 성령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전통적인 관점에서 그리스도인이란 성령이 내주하셔서 영적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김 받은 사람을 뜻한다. 성령이 내주하시면 그리스도인은 과거에 좇던 자기 의를 내려놓은 후 성령의 목소리를 듣고 그 인도하심을 선택하는 자발적 순종으로,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과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말하자면 영적인 분별력을 선물로 받게 되는 것이다.
열왕기상에서 솔로몬이 하나님께 구한 것은 듣는 마음과 분별하는 능력이었다. 이 솔로몬의 기도를 예수의 승천 후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 성령이 임한 이후의 시선으로 바꾸어 본다면, 성령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분별력을 얻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도 감동하신 솔로몬의 기도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자신 안에 거하시는 성령에 순종하는 삶을 삶으로써 놀랍게도 지금도 성취되고 있다.
이 분별력의 특징은 처음부터 주어진다는 사실이다. 학습으로 인한 결과가 아닌, 처음부터 내재되어 있던 것이다. 마치 수정란이라는 궁극의 줄기세포에 처음부터 불멸성이 내재되는 것처럼,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영접함으로써 즉시 성령이 내주하셔서 영적인 분별력을 얻게 된다. 어쩌면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은 그 소중한 분별력을 잘 사용하는 연습과정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점검 시스템을 끄고 마치 폭주라도 준비하는 것처럼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의 기원은 무엇일까? 어쩌다가 줄기세포로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암세포로 변질되는 것일까? 앞서 언급한 분별력의 관점에서 하나의 답을 해보자면, 크게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영적 분별력의 정체성과 목적을 몰라서. 둘째, 그것을 알지만 의도적으로 순종하지 않기로 결단을 내려서.
솔로몬이 구한 것은 자기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듣는 마음과 분별하는 능력은 목돈을 단단히 챙길 수 있는 어떤 은밀한 샛길을 알려주는 도사의 말에 귀 기울이는 마음, 혹은 어느 도사가 더 용한지 더 정확한지 분별하는 능력 따위가 아닐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솔로몬 왕에게 맡기신 백성들을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실현하기 위함이었다. 나의 왕국이 아닌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것이었다. 그리스도인이 됨으로써 처음부터 주어지는 영적 분별력의 정체성은 성령이라는 것, 곧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의 목적은 하나님 나라를 위함이라는 것. 이 당연한 사실을 모든 그리스도인은 마음에 새기고 또 새겨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를 모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에 불순종하기로 결단하고 실행에 옮기는 그리스도인들이 허다하다. 나 조차도 언제나 그런 유혹을 느끼며 종종 넘어가기도 한다. 몰라서가 아니다. 알고도 짓는 죄와 같은 것이다. 이유는 여러 말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축약하면 하나다. 나의 유익. 그렇다. 성령의 인도하심이 나의 유익과 상반되는 경우가 너무나 많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산다고 했건만 여전히 나는 내 왕국을 비밀스럽게 건설하고 확장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는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면서 이런 현상은 피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또 누군가는 일단은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냐면서 상황 논리를 펴고 불의와 정의의 경계를 넘나들어 모호하게 만들고 나의 의를 하나님의 의로 포장하고 합리화하기도 한다. 이런 시대에 우린 어디를 봐야 하고 누구의 말을 따라야 할까? 암세포로의 변질은 과연 시대적인 흐름의 일환인 것일까?
사진: Unsplash의Aaron Burden
(6) 참 어른, 참 그리스도인, 참 줄기세포, 참 소망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가는 아브라함에겐 믿음이 있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 곧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있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에 아브라함은 존재하는가? 갈 바를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을 신뢰하며 꿋꿋이 길을 걷는 그리스도인이 존재하는가? 그런 줄기세포와도 같은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믿음까지 잃어버린 이 시대 허다한 그리스도인들에겐 하나의 이정표가 되어 다시 본질을 회복하고 처음부터 받았던 성령의 목소리에 다시 귀를 기울일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다행히 존재한다. 비록 소수이지만 한국교회 안에도 존재한다. 기울어진 배이지만 한국교회에 여전히 희망을 버릴 수 없는 유일한 이유가 되는 분들이다. 기업으로 변질시킨 대형교회를 하나님의 축복과 성령의 인도로만 해석하고 그 현상을 계속 유지하며 사적 유익을 취하는 데 갖은 애를 쓰는, 번영신앙과 기복신앙을 대변하는 목사들이 있는가 하면, 교회 대형화의 폐단과 인간의 욕망 및 한계를 간파하고 애써 분립개척을 실행하는 목사들도 있고, 분립개척을 넘어 담임인데도 불구하고, 심지어 은퇴할 나이가 다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스스로 아무런 경제적 지원 없이 개척을 단행하시는 목사님도 한국교회에 여전히 존재한다. 또한 정치계와 경제계에 연루되어 사회적 영향력을 마치 영적 영향력인 것처럼 미화한 뒤 높은 곳에 올라 돈과 권력까지 도모하고 그렇게 얻은 가시적인 결과들이 마치 말씀과 기도와 전도의 열매인 것처럼 둔갑시키고 이를 증폭시키는 목사들도 존재하지만, 여전히 부와 명예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보내시는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 구약의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같은 가난한 자와 약한 자와 소외당한 자와 억눌림 받은 자들의 친구가 되고 보호자가 되어 묵묵히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예수와 같은 분들도 계신다. 이런 참 줄기세포와 같은 그리스도인은 목회자들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소위 평신도랄까 비목회자랄까 하는 그리스도인 일반 중에도 존재한다. 오히려 드러나지 않은 곳에서 더 많이 존재할 것이다.
비록 소수이지만 나는 이런 분들의 존재 자체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고 예수를 본다. 이 시대의 참 어른이고 참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어지러운 이 시대에, 어디를 봐야 할지, 무엇을 들어야 할지 막막한 이 시대에 선명한 이정표임이 틀림없다. 이들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암세포로 변질되려는 유혹으로부터 다시 마음을 다잡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참 줄기세포인 이런 분들의 존재 자체에 힘을 얻고 소망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다.
이런 줄기세포와 같은 분들의 공통점은 모두 예수의 마음을 가졌다는 것이다. 강한 자가 아닌 약한 자, 폭력을 행하는 자가 아닌 폭력에 희생당하는 자, 억누르는 자가 아닌 억눌림을 받는 자, 소외시키고 배제시키는 자가 아닌 소외되고 배제되는 자, 부자가 아닌 가난한 자들을 향한 낮은 마음, 그 정의롭고 공의로운 마음, 곧 거룩한 하나님의 마음일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인 안에 내재된 점검 시스템의 중추인 p53 단백질과도 같은 성령이 주시는 영적 분별력과도 일치할 것이다.
이제 이렇게 다시 묻고 싶다. 당신은 이 길 위에 있는가? 당신은 성령의 인도하심 안에 거하는가? 당신은 참 줄기세포인가? 혹시 암세포로 변질 중이지 않은가? 이 시대에 참 어른이 필요하다. 참 그리스도인이 필요하다. 참 줄기세포의 존재가 필요하다. 나도 그런 존재가 되길, 나부터 그런 존재가 되길, 그래서 한국교회에 희망이 없다고 함부로 떠들지 않고 나 하나가 아주 작은 희망이 되길, 우리 모두가 그렇게 되길 바라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