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망가진 이정표를 바로 세우라: 과학기술과 '하나님의 선교' (김재상)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26-04-08
조회수 254

기고

[얽힘의 재구성 02]

망가진 이정표를 바로 세우라: 과학기술과 '하나님의 선교'


글 | 김재상

이서교회 목사

대전대학교 겸임교수


1. 에도 막부는 왜?

1543년 포르투갈 상인을 통해 일본 다네가시마에 전해 내려온 조총은 일본의 전쟁 양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일본인들은 놀라운 속도로 조총 기술을 복제하고 개량했다. 16세기 말 오다 노부나가가 나가시노 전투에서 철포 부대를 활용해 승리했을 당시, 일본은 이미 유럽 전체보다 많은 총기를 보유한 세계 최대 총기 생산국이었다. 그런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 막부를 세우고 평화 시대가 도래하자, 막부는 약 250년(1603~1867) 동안 의도적으로 총기 사용을 제한하고 제조를 금지했다. 왜 그랬을까? 그 답은 사무라이 계급에 있다.


6081ec1e9e62c.jpg


농민이나 하급 무사는 단기간의 훈련만으로 조총 사격술을 익힐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지배 계급인 사무라이의 군사적 독점권이 흔들릴 수 있었다. 게다가 사무라이는 조총보다 칼을 숭상했다. 근접전에서 검술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사무라이에게 총기란 멀리서 적을 쓰러뜨리는 ‘비겁하고 품격 없는’ 무기에 불과했다. 여기에 쇄국 정책으로 외부의 화기 위협이 없었으니, 구식 무기를 고수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결국 에도 막부는 총기 제조를 허가제로 전환하고 소수의 장인에게만 생산권을 부여하여 조총 기술의 확산을 철저히 통제했다. 그 결과 조총 기술은 급격한 혁신 없이 초기 화승총의 형태를 장기간 유지했다.


조지 바살라(George Basalla)는 이 사례를 분석하며, 기술의 생존 여부는 기술 자체의 성능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사회의 가치 체계와 권력 구조가 결정한다고 보았다. 이는 기술이 가치중립적이라는 원칙에 근본적인 의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기술은 가치 지향적인가? 더 나아가 과학은 어떠한가?



2. 과학과 기술은 가치중립적이다

근대 이후 과학은 ‘사실과 가치의 분리’를 추구해 왔다. 데이비드 흄(David Hume)은 사실에 대한 어떤 서술도 인간이 왜 도덕적으로 행위해야 하는지를 말해주지 못한다고 했다. 제리 포도(Jerry A. Fodor)는 과학은 사실에 관한 것이지 가치를 담은 규범에 관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이러한 분리의 추구는 과학의 가치중립성을 점점 더 굳혀갔다.


과학의 가치중립성(Value-Neutrality)이란, 과학적 탐구의 과정과 그 결과인 지식이 연구자의 주관적 취향, 정치적 이념, 종교적 신념으로부터 독립되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과학은 ‘세상은 어떻게 존재하는가(is)’라는 사실의 문제를 다룰 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ought)’라는 가치의 문제에는 침묵해야 한다는 논리에 기초한다. 그러므로 과학은 객관적 사실 탐구의 영역이고, 가치 판단은 철학과 종교의 영역으로 따로 인식되어 왔다. 만약 과학자의 신념이 데이터 해석에 영향을 미친다면, 그것은 더 이상 과학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에 불과할 수 있다.


기술 역시 마찬가지다. 기술에 대한 도구주의 접근은 기술의 가치중립성을 오랫동안 뒷받침해 왔다. 도구주의는 기술 자체가 선하거나 악한 목적을 갖지 않으며, 오직 사용하는 인간의 의도에 따라 그 가치가 결정된다는 관점이다. 칼 야스퍼스(Karl Jaspers)는 기술을 “목적을 위한 수단이며, 그 자체로는 선도 악도 아닌 중립적인 것”으로 보았다. 망치는 집을 지을 수도, 사람을 해칠 수도 있다는 비유가 이 논리를 잘 대변한다. 기술을 평화의 도구로 쓸지 파괴의 무기로 쓸지는 전적으로 인간의 선택과 책임에 달려 있다. 도구주의는 이처럼 기술을 가치 판단의 대상이 아닌 효율적인 수단으로 간주함으로써, 기술 발전의 자율성과 객관성을 확보하려 했다.



3. 과학과 기술은 가치 지향적이다

그렇다면 과학과 기술은 정말 가치중립적인가? 먼저 ‘가치(value)’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국어사전에 따르면, 가치는 인간이 사물이나 행위에 부여하는 중요성 또는 바람직함의 정도를 말한다. 과학철학자 케빈 엘리엇은 “가치는 중요하게 추구할 만한 그 무엇”이라 정의한다. 기술철학자 손화철 역시 “가치는 사람들이 부여하는 중요성의 정도와 연결된다”고 언급했다. 과학과 기술 모두에서 가치는 결국 중요성의 문제다.


과학철학자 제임스 라디맨(James Ladyman)은 과학 관련 가치를 내적 가치와 외적 가치로 구분했다. 내적 가치로는 검증 가능성, 단순성, 설명력, 예측성, 일관성, 재현 가능성 등이 있다. 이것들은 과학 지식 생성과 관련된 인식적 가치로서, 과학의 객관성을 지탱하고 엄격한 방법론의 토대를 제공하며 동시에 ‘좋은 과학’을 가르는 판단 기준이 된다.


그런데 과학은 내적 가치만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과학자나 과학자 공동체가 놓인 맥락에 따라 중요시하는 가치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토마스 쿤(Thomas Kuhn)은 『과학혁명의 구조』(1962)에서 과학은 과학자 공동체의 ‘패러다임’ 속에서 작동한다고 했다. 과학자들이 동일한 인식적 가치를 공유하더라도, 사회적·정치적 맥락에 따라 서로 다른 패러다임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793f87d4efbd5.jpg


스탈린 시대 소련 과학계가 멘델 유전학을 배척하고 트로핌 리센코(Trofim D. Lysenko)의 학설을 채택한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환경에 따라 형질이 변한다는 리센코의 주장은 사회 개조를 통해 새로운 인간을 만들려는 혁명 정신과 맞아떨어졌다. 반면 유전자에 의해 형질이 결정된다는 멘델 유전학은 ‘반동적 운명론’으로 낙인찍혔다. 이처럼 과학은 진공 속에서 독립적으로 발전하지 않는다. 자본과 권력은 연구비를 통해 특정 방향의 연구를 장려하거나 억제하며, 과학은 출발점부터 특정 가치에 편향될 수 있다. 케빈 엘리엇이 지적하듯, “무엇을 연구할 것인가”, “어떻게 연구할 것인가”, “무엇을 달성하고자 하는가”, “불확실할 때는 어떻게 하는가”, “좋은 증거의 기준은 무엇인가”- 이 모든 질문에 가치 판단이 개입한다.


이러한 현실은 기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바살라는 기술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경제적 효율성만이 아니라 군사, 정치, 심미적 가치, 종교적 신념과 같은 비경제적·문화적 요인이라고 역설했다. 기술철학자 랭던 위너(Langdon Winner)가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기술은 정치적”이라고 단언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뉴욕 롱아일랜드 해변공원 진입로의 고가도로가 그 유명한 사례다. 1920~30년대 도시계획가 로버트 모지즈(Robert Moses)는 고가도로 높이를 약 2.7m로 낮게 설계했다. 높이가 3m를 넘는 공공버스는 통과할 수 없었고, 당시 버스를 주로 이용하던 흑인과 빈민은 해변공원에 접근하지 못했다. 반면 자가용을 이용하는 백인 부유층은 자유롭게 공원을 누렸다. 인종차별적인 도시 정책이 물리적 구조로 구현된 것이다.


d376fdbdd85cc.jpg


4. 가치지향성과 자연신학

이렇듯 과학과 기술의 가치중립성 신화 곳곳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 과학철학자 래리 라우던(Larry Laudan)은 현대 과학이 자연 현상을 이해하여 미래를 예측하고 사회에 적용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고 지적했다. 인권, 환경, 건강, 지속가능성 같은 가치들이 과학의 목표 안으로 들어오고 있으며, 전염병 대응이나 인공지능 연구 윤리에서 보듯 과학은 다양한 가치가 충돌하고 교섭하는 복합 공간이 되었다. 기술 역시 편리성, 효율성, 경제성만이 아니라 안전성, 지속가능성, 환경친화성 등 여러 가치가 각축하는 장이다. 원자력발전, 자율주행 자동차, 유전자 편집 앞에서 우리는 어떤 가치를 우선할 것인가의 문제를 피할 수 없다.


과학기술이 가치 지향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더 근본적인 질문이 남는다. 그 가치는 어디서 와야 하는가? 이 질문에 성서학자 톰 라이트의 자연신학은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라이트는 『역사와 종말론』에서 근대 서구 문명의 핵심 문제를 ‘에피쿠로스주의의 부활’로 진단한다. 신이 세상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이 세계관이 계몽주의를 거쳐 부활하면서, 세계는 ‘아래층(과학·사실)’과 ‘위층(신앙·가치)’으로 분리되었다. 바로 이 분리가 과학기술의 가치중립성 신화를 낳았다. 그러나 리센코 사건과 롱아일랜드의 고가도로가 보여주듯, 이 신화는 현실에서 작동하지 않는다.


대신 톰 라이트가 제시하는 대안은 하늘과 땅이 맞물리는 통합 세계관이다. 이 우주론에서 인간은 ‘소명적 존재’로서 자연을 향해 하나님의 지혜로운 통치를 대리한다. 라이트는 모든 인간 사회와 문화권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일곱 가지 보편적 가치—정의, 자유, 진실, 아름다움, 권력, 영성, 관계—를 ‘이정표’로 제시한다. 죄와 타락으로 왜곡되었을지라도, 톰 라이트의 표현을 빌리면, 망가졌을지라도 이 이정표는 여전히 하나님의 창조 목적과 영광을 가리키고 있다.


과학과 기술도 이 이정표에서 예외가 아니다. 안전한 식수, 질병의 극복, 공정한 정보 접근은 정의와 자유를 향한 인간의 열망이 과학기술로 구현된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핵무기, 알고리즘 차별, 환경 파괴라는 형태로 깊이 망가져 있다. 그렇다고 과학기술을 폐기할 수는 없다. 오히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로 상징되는 새 창조의 빛 안에 온전히 회복된 이정표를 과학기술이 향하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대리자로 부름 받은 인간의 사명이다.


이 사명은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라이트에 따르면 하나님의 선교는 영혼을 세상 밖으로 탈출시키는 것이 아니라, 창조 세계를 치유하고 회복하여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완성하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과학기술의 가치 지향성은 단순한 윤리 담론을 넘어 선교론적 과제가 된다. 생태계를 착취하는 기술은 하나님의 선교에 역행하고, 억눌린 자를 해방하고 망가진 공동체를 회복하는 방향의 기술은 그 선교에 동참하는 행위가 된다. 그리스도인은 과학기술을 둘러싼 가치 각축의 방관자가 아니라, 새 창조의 비전으로 그 방향을 바로잡는 하나님의 선교 동역자로 부름 받았다. 



12379fdc4d759.jpg

@사진: Unsplash의 Oklahoma Academy Publishing


5.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

‘하나님의 선교’로서의 과학기술을 위해 오늘 기독교계가 실천해야 할 과제들이 있다. 먼저 설교와 교육의 전환이 필요하다. 인공지능, 유전자 편집, 기후위기를 단순한 사회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교가 응답해야 할 신학적 현장으로 가르쳐야 한다. 성도들이 자신의 직업 현장—연구소, 병원, IT 기업—을 하나님의 통치를 대리하는 선교의 장소로 인식하도록 돕는 교육 과정이 필요하다. 설교 한 편으로 끝낼 것이 아니라, 신앙과 직업을 통합하는 장기적인 제자 훈련 커리큘럼이 개발되어야 하며, 청년부 교육에서도 과학기술 윤리를 신앙의 언어로 다루는 콘텐츠가 자리를 잡아야 한다.


다음으로 기술 윤리 공동체의 형성이다. 의사, 엔지니어, 소프트웨어 개발자, 과학자들이 직업 현장에서 맞닥뜨리는 가치 충돌—효율성 대 안전, 수익성 대 접근성, 혁신 대 지속가능성—을 신앙의 언어로 함께 고민하는 소그룹과 포럼이 필요하다. 교회는 이러한 직능별 공동체를 의도적으로 조직하고, 신학자와 윤리학자를 초청하여 현장의 고민에 신학적 깊이를 더하는 자리를 정기적으로 마련해야 한다.


디지털 약자와의 연대도 빠뜨릴 수 없다. 알고리즘 차별, 기술 실업, 의료 기술 접근 불평등 앞에서 교회는 디지털 문해력 교육과 소외 계층을 위한 기술 지원을 통해 정의의 이정표를 바로 세워야 한다. 노인, 장애인, 저소득층은 급격한 디지털 전환 속에서 가장 먼저 배제되는 이들이다. 교회는 이들을 위한 디지털 교육 프로그램을 지역사회와 협력하여 운영하고, 기술 기업의 윤리 정책에 대한 공적 목소리를 내는 일에도 적극 나서야 한다.


생태 선교의 실천도 중요하다. 기후위기와 생태 파괴는 과학기술의 왜곡된 가치 지향이 낳은 가장 심각한 결과 중 하나다. 창조 세계를 하나님의 임재가 깃든 성전으로 이해하는 라이트의 신학은, 탄소 발자국 감소, 재생에너지 전환, 지역 생태 보전 운동을 예배와 선교의 일부로 통합할 것을 요청한다. 교회 건물의 에너지 전환, 지역 환경 단체와의 협력 같은 작은 실천들이 쌓여 교회가 생태적 공동체로 변화하는 출발점이 된다. 창조 세계 돌봄은 환경주의가 아니라 신학적 소명이다.


마지막으로 공론장 참여이다. 원자력, 자율주행, 유전자 편집, 인공지능 규제를 둘러싼 공적 논쟁에 교회는 침묵해서는 안 된다. "신학은 역사를 피하지 말고 맞서야 한다"는 라이트의 촉구처럼, 그리스도인 전문가와 신학자가 협력하여 공공 정책에 신학적으로 근거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 이를 위해 교단 차원의 과학기술윤리위원회를 구성하거나, 기독교 연구기관과 시민단체가 협력하는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것도 실질적인 방안이다.


과학기술은 언제나 특정한 방향을 가리키는 이정표를 품는다. 그 망가진 이정표는 십자가와 부활의 빛 아래서만 온전히 바로잡힐 수 있다. 교회는 회복된 이정표를 들고 새 창조를 향해 나아가는 하나님의 선교 공동체로 부름 받았다.

6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