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창조를 돌보는 시민:
위르겐 몰트만의 '창조적 제자직'으로 읽는 과학기술시민성
글 | 김재상
이서교회 목사
대전대학교 겸임교수
1. 신학의 공간을 점령한 과학과 기술
우리는 낯선 시대를 살고 있다. 인공지능이 진단하고 판결하며, 유전자 편집 기술이 생명의 설계도를 다시 쓰고, 알고리즘이 사람의 욕망과 공포를 조율한다. 더 놀라운 사실은, 과학기술이 단순히 도구로만 기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과학기술은 가치와 의미를 생산하고, 삶의 방향을 결정하며, 공동체의 미래를 설계한다. 과학과 기술은 이미 신학이 다루어야 할 공간을 점령했다.
그렇다면 교회는 이 현실 앞에서 무슨 말을 하는가? 많은 경우, 교회는 침묵하거나 단편적인 경고에 머문다. 인공지능을 악마화 하거나, 과학 전체를 불신의 영역으로 밀어낸다. 반대로 기술을 무비판적으로 축복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두 극단 사이에서, 기독교 신학은 훨씬 풍요롭고 비판적이며 창조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다.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 1926~2023)은 그 목소리를 위해 중요한 신학 자원을 제시한다. 그가 『희망의 신학』에서 내놓은 ‘창조적 제자직(creative discipleship)’ 개념은 제자도를 개인적 경건이나 도덕적 모방의 영역에서 끌어내어, 창조 세계 전체 차원으로 확장한다. 이 글은 몰트만의 창조적 제자직을 렌즈 삼아 과학기술시민성(Scientific and Technological Citizenship)을 신학적으로 읽어보고, 실천 방안을 탐색한다.

2. 창조적 제자직이란 무엇인가
몰트만에게 제자직의 핵심은 ‘창조성’이다. 이는 기존 체제에 안주하지 않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미래를 현재 속으로 끌어당겨 세상을 변혁한다는 뜻이다. 그에게 제자직은 과거 나사렛 예수를 도덕적으로 흉내 내는 정적인 행위가 아니라,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의 미래적 약속을 지금 이 자리에서 앞당겨 실천하는 역동적인 창조 행위다. 이 창조적 제자직은 세 가지 신학 기둥을 바탕으로 한다.
첫 번째 기둥은 케노시스 창조론이다. 몰트만은 1985년 펴낸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에서 하나님의 수축(자기제한)과 창조를 연결한다. 하나님은 창조하기 위해 자기를 수축하시고, 피조물이 존재할 공간을 내어주신다. 이것이 케노시스(kenosis), 곧 자기 비움의 창조론이다. 이 통찰은 과학기술 관련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만드는 과학기술은 공간을 내어주는가? 인간의 존엄이 숨 쉴 공간, 자연이 자율적으로 존재할 공간, 취약한 사람이 배제되지 않을 공간을 과학기술이 열어주는가? 아니면 오히려 모든 공간을 식민화하며 팽창하고 있는가? 좋은 과학기술은 인간이 더 인간답게, 자연이 더 자연답게 존재하도록 공간을 창출한다.
두 번째 기둥은 안식일적 완성의 목적론이다. 몰트만에게 창조의 목표는 끝없는 생산이나 성장이 아니다. 창조는 안식일(Sabbath)을 향해 나아간다. 이 안식일 신학은 과학기술 평가 기준을 바꾼다. 이 과학기술은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가? 모든 피조물이 더불어 사는 평화, 곧 샬롬(shalom)에 이바지하는가? 기후 관련 기술이 탄소를 줄이는지만 묻지 않고, 빈곤국과 미래 세대의 생명을 지키는가를 묻는다. 의료용 인공지능이 진단 정확도를 높이는가만 묻지 않고 의료 접근성의 격차를 좁히는지도 묻는다.
세 번째 기둥은 성령의 생명 부여와 공동체 실천이다. 몰트만은 1991년 펴낸 『생명의 영』에서 성령을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규정한다. 성령은 생명을 긍정하고, 관계를 회복하며, 공동체를 세운다. 이 성령의 역사는 교회에만 갇히지 않고 우주적으로 펼쳐진다. 따라서 창조적 제자직은 철저히 공동체적이며 우주적인 실천이 된다. 과학기술 협치(governance)에 참여하고, 과학기술이 일으키는 생명 파괴에 저항하며, 과학기술로 인해 소외된 사람을 돌보는 일 자체가 성령의 사역에 동참하는 일이다.

사진: Unsplash의 Michael Kroul
3. 창조적 제자직으로 읽는 과학기술시민성
과학기술시민성은 과학기술 지식 습득 차원을 넘어선다. 이 개념은 과학과 기술이 가치중립적이라는 통념에 의문을 제기하는 데서 출발한다. 과학기술시민성은 과학기술과 사회의 상호작용을 여러 측면에서 이해하고, 정책 결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공적 책임성을 확보하려는 시민 자질이자 실천이다.
과학기술시민성은 세 차원에서 작동한다.
첫째, 인식론적 시민성이다. 시민은 과학기술을 알 권리가 있다. 인공지능이 어떤 원리로 결정하는지, 유전자 편집이 생태계에 어떤 결과를 낳는지, 데이터 수집이 어떻게 사회를 재편하는지를 이해할 권리다. 이 권리는 단순한 정보 접근권이 아니라, 과학기술 설계에 어떤 가치와 권력관계가 내재해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읽어 내는 능력이다. 몰트만의 언어로 말하면, 인식론적 시민성은 ‘창조의 책’을 읽는 능력이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깊이 이해하려는 신앙 욕구가 과학기술 문해력의 신학 토대가 된다. 몰트만이 성령의 역사를 교회 안에 가두지 않고 창조 세계 전체로 확장했듯이, 제자의 시선도 과학과 기술이 빚어내는 세계 전체를 향해 열려 있어야 한다.
둘째, 참여적 시민성이다. 시민은 과학기술 의사결정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 스마트시티 건설, 의료 인공지능의 학습 데이터, 데이터센터 입지 결정 같은 사안은 전문가 판단만으로 내려서는 안 된다. 그 결정에 직접 영향을 받는 사람, 특히 취약한 사람의 경험과 관점을 반드시 반영해야 한다. 이는 몰트만의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 신학과 궤를 같이한다. 삼위일체의 상호내주 관계에서 어느 한 위격도 다른 위격을 지배하지 않는다. 지배 대신 상호침투, 독점 대신 공유, 배제 대신 환대가 삼위일체 관계에 담긴 문법이며, 이 문법은 세상을 향해 흘러나가야 한다. 농부, 환자, 장애인, 이주민, 청소년의 목소리가 과학기술 설계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단순한 민주주의 원리가 아니라, 삼위일체적 상호참여의 사회적 번역이다. 그러므로 창조적 제자로서 교회는 과학기술 공론장에서 소외된 목소리를 대변하고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자리를 함께 하도록 앞장서야 한다.
셋째, 책임적 시민성이다. 미래 세대를 위해 과학기술시민은 과학기술의 사회적 책임에 함께 한다. 화석연료 기반 구조를 유지하는 선택, 자율살상무기 개발을 허용하는 선택은 지금 이 자리에 없는 사람들-미래 세대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생명들-에게 지우는 짐이다. 몰트만의 종말론은 미래를 단순히 현재의 연장으로 보지 않는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미래는 현재의 결핍과 불의를 폭로하며, 제자로 하여금 그 미래를 지금 여기서 앞당겨 살게 한다. ‘아직 아닌 것(das Noch-Nicht)’은 단순한 미래 시제가 아니라 현재의 모든 선택을 심판하는 종말론적 기준이다. 창조적 제자는 지금 내리는 판단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미래에 부합하는지를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이러한 책임적 시민성은 예방원칙(precautionary principle)을 신학적으로 뒷받침한다. 과학기술의 확실성이 완전히 확보되지 않았더라도 심각하고 돌이킬 수 없는 피해가 예상되면 미리 주의를 기울이라는 이 원칙은, 창조 세계와 미래 세대를 향한 케노시스 사랑의 실천이며, 하나님이 허락하신 창조 세계를 돌보라는 명령(창 2:15)에 응답이다.

사진: Unsplash의 Noah Buscher
4. 기독교계가 해야 할 실천
신학 통찰은 실천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살아 숨 쉰다. 몰트만의 창조적 제자직과 과학기술시민성의 대화는 기독교계의 네 가지 실천 영역을 새롭게 조명한다.
■ 목회 차원에서의 실천: 회중을 과학기술 시민으로 세우기
오늘날 목회자는 인공지능에 두려움을 느끼는 성도, 소셜미디어 알고리즘에 피로한 청년, 유전자 검사 결과를 앞에 두고 고민하는 가족을 목양해야 한다. 이를 위해 ‘과학기술 안식일’ 예배 신학이 필요하다. 기술의 속도와 효율성 논리에서 벗어나 하나님 앞에서 창조 세계를 새롭게 바라보는 예전적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예배 중에 기후 위기, 인공지능윤리, 생명 기술 등을 신학적으로 성찰하는 것은 단순한 시사 토론이 아니라, 창조주 앞에 선 회중의 공동 분별이다.
■ 선교 차원에서의 실천: 과학기술 공론장에서 예언자적 목소리 내기
과학기술 공론장은 오늘날 가장 중요한 선교 공간 중 하나다. 교회는 지역의 과학기술 의사결정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지역 인공지능 정책, 스마트시티 건설 계획, 의료 기술 도입 심의에 교회 공동체의 목소리가 담겨야 한다. 이것은 단순한 정치 참여가 아니라, 취약한 사람과 미래 세대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예언자 사명이다. 복음적 희망이 사회경제적·정치적 현실을 비판하고 변혁하는 동력이라는 몰트만의 정치신학이 바로 이 자리에서 살아난다.
■ 복지 차원에서의 실천: 디지털 소외를 돌보는 케노시스 사랑
오늘날 디지털 소외는 새로운 형태의 배제와 차별이다. 디지털 기기 사용에 어려움을 겪는 노인, 인공지능 채용 시스템에서 배제되는 장애인, 온라인 행정 서비스에 접근하지 못하는 이주민을 위한 과학기술 접근권 옹호는 케노시스 사랑의 실천이다. 교회는 복지관, 지역아동센터, 이주민 지원 기관과 협력하여 과학기술에 소외된 이웃이 디지털 시민으로 세워지도록 돕는 디지털 동반자 사역을 전개하며 사랑을 실천한다.
■ 사회운동 차원에서의 실천: 연대하고 협력하는 생태계 만들기
창조적 제자직은 고립된 교회 울타리 안에서 완성될 수 없다. 환경단체, 인권단체, 기술비평 그룹, 사회적 기업과의 에큐메니컬 연대가 필요하다. 인공지능 알고리즘 차별에 맞서고, 생태를 파괴하는 기술에 저항하며, 디지털 감시를 문제 삼는 사회운동은 출애굽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걸어야 할 길이다. 나아가 과학기술자, 정책 전문가, 시민, 신학자, 목회자 등이 함께하는 포럼을 구성하여 신학적·목회적·선교적 통찰이 과학기술 정책에 영향을 미치고, 과학기술 현실이 신앙의 성찰을 풍요롭게 하는 대화의 마당을 열어야 한다.

사진: Unsplash의 Google DeepMind
5. 희망의 과학기술을 향하여
위르겐 몰트만은 말한다. 희망은 현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아직 아닌 것’을 향한 신뢰 속에서 현재를 변혁하는 힘이라고! 그 희망을 품은 창조적 제자직은 두 가지 유혹을 동시에 경계해야 한다. 과학기술에 압도되어 무력하게 등 돌려서도 안 되고, 과학기술을 무비판적으로 추종해서도 안 된다. 창조적 제자는 자기 비움의 겸손으로 과학기술 안에서 창조주의 뜻을 분별하고, 안식일 지혜로 과학기술의 방향과 속도를 문제 삼으며, 성령의 생명부여 역사에 참여하며 과학기술 공론장에 나아가야 한다.
과학기술시민성은 기독교 신자에게 낯선 영역이 아니다. 그것은 창조 세계를 돌보라는 창세기의 명령(창 2:15)이 과학기술 시대에 새롭게 번역된 언어다. 하나님이 창조에 공간을 내어주셨듯이, 우리도 과학과 기술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생명과 존엄을 위한 공간을 내어주는 시민이 되어야 한다. 창조적 제자직은 과학기술 사회에서 희망을 실천하는 시민적 제자도이자, 하나님의 창조와 샬롬에 참여하는 변혁적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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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를 돌보는 시민:
위르겐 몰트만의 '창조적 제자직'으로 읽는 과학기술시민성
글 | 김재상
이서교회 목사
대전대학교 겸임교수
1. 신학의 공간을 점령한 과학과 기술
우리는 낯선 시대를 살고 있다. 인공지능이 진단하고 판결하며, 유전자 편집 기술이 생명의 설계도를 다시 쓰고, 알고리즘이 사람의 욕망과 공포를 조율한다. 더 놀라운 사실은, 과학기술이 단순히 도구로만 기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과학기술은 가치와 의미를 생산하고, 삶의 방향을 결정하며, 공동체의 미래를 설계한다. 과학과 기술은 이미 신학이 다루어야 할 공간을 점령했다.
그렇다면 교회는 이 현실 앞에서 무슨 말을 하는가? 많은 경우, 교회는 침묵하거나 단편적인 경고에 머문다. 인공지능을 악마화 하거나, 과학 전체를 불신의 영역으로 밀어낸다. 반대로 기술을 무비판적으로 축복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두 극단 사이에서, 기독교 신학은 훨씬 풍요롭고 비판적이며 창조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다.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 1926~2023)은 그 목소리를 위해 중요한 신학 자원을 제시한다. 그가 『희망의 신학』에서 내놓은 ‘창조적 제자직(creative discipleship)’ 개념은 제자도를 개인적 경건이나 도덕적 모방의 영역에서 끌어내어, 창조 세계 전체 차원으로 확장한다. 이 글은 몰트만의 창조적 제자직을 렌즈 삼아 과학기술시민성(Scientific and Technological Citizenship)을 신학적으로 읽어보고, 실천 방안을 탐색한다.
2. 창조적 제자직이란 무엇인가
몰트만에게 제자직의 핵심은 ‘창조성’이다. 이는 기존 체제에 안주하지 않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미래를 현재 속으로 끌어당겨 세상을 변혁한다는 뜻이다. 그에게 제자직은 과거 나사렛 예수를 도덕적으로 흉내 내는 정적인 행위가 아니라,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의 미래적 약속을 지금 이 자리에서 앞당겨 실천하는 역동적인 창조 행위다. 이 창조적 제자직은 세 가지 신학 기둥을 바탕으로 한다.
첫 번째 기둥은 케노시스 창조론이다. 몰트만은 1985년 펴낸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에서 하나님의 수축(자기제한)과 창조를 연결한다. 하나님은 창조하기 위해 자기를 수축하시고, 피조물이 존재할 공간을 내어주신다. 이것이 케노시스(kenosis), 곧 자기 비움의 창조론이다. 이 통찰은 과학기술 관련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만드는 과학기술은 공간을 내어주는가? 인간의 존엄이 숨 쉴 공간, 자연이 자율적으로 존재할 공간, 취약한 사람이 배제되지 않을 공간을 과학기술이 열어주는가? 아니면 오히려 모든 공간을 식민화하며 팽창하고 있는가? 좋은 과학기술은 인간이 더 인간답게, 자연이 더 자연답게 존재하도록 공간을 창출한다.
두 번째 기둥은 안식일적 완성의 목적론이다. 몰트만에게 창조의 목표는 끝없는 생산이나 성장이 아니다. 창조는 안식일(Sabbath)을 향해 나아간다. 이 안식일 신학은 과학기술 평가 기준을 바꾼다. 이 과학기술은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가? 모든 피조물이 더불어 사는 평화, 곧 샬롬(shalom)에 이바지하는가? 기후 관련 기술이 탄소를 줄이는지만 묻지 않고, 빈곤국과 미래 세대의 생명을 지키는가를 묻는다. 의료용 인공지능이 진단 정확도를 높이는가만 묻지 않고 의료 접근성의 격차를 좁히는지도 묻는다.
세 번째 기둥은 성령의 생명 부여와 공동체 실천이다. 몰트만은 1991년 펴낸 『생명의 영』에서 성령을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규정한다. 성령은 생명을 긍정하고, 관계를 회복하며, 공동체를 세운다. 이 성령의 역사는 교회에만 갇히지 않고 우주적으로 펼쳐진다. 따라서 창조적 제자직은 철저히 공동체적이며 우주적인 실천이 된다. 과학기술 협치(governance)에 참여하고, 과학기술이 일으키는 생명 파괴에 저항하며, 과학기술로 인해 소외된 사람을 돌보는 일 자체가 성령의 사역에 동참하는 일이다.
사진: Unsplash의 Michael Kroul
3. 창조적 제자직으로 읽는 과학기술시민성
과학기술시민성은 과학기술 지식 습득 차원을 넘어선다. 이 개념은 과학과 기술이 가치중립적이라는 통념에 의문을 제기하는 데서 출발한다. 과학기술시민성은 과학기술과 사회의 상호작용을 여러 측면에서 이해하고, 정책 결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공적 책임성을 확보하려는 시민 자질이자 실천이다.
과학기술시민성은 세 차원에서 작동한다.
첫째, 인식론적 시민성이다. 시민은 과학기술을 알 권리가 있다. 인공지능이 어떤 원리로 결정하는지, 유전자 편집이 생태계에 어떤 결과를 낳는지, 데이터 수집이 어떻게 사회를 재편하는지를 이해할 권리다. 이 권리는 단순한 정보 접근권이 아니라, 과학기술 설계에 어떤 가치와 권력관계가 내재해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읽어 내는 능력이다. 몰트만의 언어로 말하면, 인식론적 시민성은 ‘창조의 책’을 읽는 능력이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깊이 이해하려는 신앙 욕구가 과학기술 문해력의 신학 토대가 된다. 몰트만이 성령의 역사를 교회 안에 가두지 않고 창조 세계 전체로 확장했듯이, 제자의 시선도 과학과 기술이 빚어내는 세계 전체를 향해 열려 있어야 한다.
둘째, 참여적 시민성이다. 시민은 과학기술 의사결정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 스마트시티 건설, 의료 인공지능의 학습 데이터, 데이터센터 입지 결정 같은 사안은 전문가 판단만으로 내려서는 안 된다. 그 결정에 직접 영향을 받는 사람, 특히 취약한 사람의 경험과 관점을 반드시 반영해야 한다. 이는 몰트만의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 신학과 궤를 같이한다. 삼위일체의 상호내주 관계에서 어느 한 위격도 다른 위격을 지배하지 않는다. 지배 대신 상호침투, 독점 대신 공유, 배제 대신 환대가 삼위일체 관계에 담긴 문법이며, 이 문법은 세상을 향해 흘러나가야 한다. 농부, 환자, 장애인, 이주민, 청소년의 목소리가 과학기술 설계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단순한 민주주의 원리가 아니라, 삼위일체적 상호참여의 사회적 번역이다. 그러므로 창조적 제자로서 교회는 과학기술 공론장에서 소외된 목소리를 대변하고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자리를 함께 하도록 앞장서야 한다.
셋째, 책임적 시민성이다. 미래 세대를 위해 과학기술시민은 과학기술의 사회적 책임에 함께 한다. 화석연료 기반 구조를 유지하는 선택, 자율살상무기 개발을 허용하는 선택은 지금 이 자리에 없는 사람들-미래 세대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생명들-에게 지우는 짐이다. 몰트만의 종말론은 미래를 단순히 현재의 연장으로 보지 않는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미래는 현재의 결핍과 불의를 폭로하며, 제자로 하여금 그 미래를 지금 여기서 앞당겨 살게 한다. ‘아직 아닌 것(das Noch-Nicht)’은 단순한 미래 시제가 아니라 현재의 모든 선택을 심판하는 종말론적 기준이다. 창조적 제자는 지금 내리는 판단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미래에 부합하는지를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이러한 책임적 시민성은 예방원칙(precautionary principle)을 신학적으로 뒷받침한다. 과학기술의 확실성이 완전히 확보되지 않았더라도 심각하고 돌이킬 수 없는 피해가 예상되면 미리 주의를 기울이라는 이 원칙은, 창조 세계와 미래 세대를 향한 케노시스 사랑의 실천이며, 하나님이 허락하신 창조 세계를 돌보라는 명령(창 2:15)에 응답이다.
사진: Unsplash의 Noah Buscher
4. 기독교계가 해야 할 실천
신학 통찰은 실천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살아 숨 쉰다. 몰트만의 창조적 제자직과 과학기술시민성의 대화는 기독교계의 네 가지 실천 영역을 새롭게 조명한다.
■ 목회 차원에서의 실천: 회중을 과학기술 시민으로 세우기
오늘날 목회자는 인공지능에 두려움을 느끼는 성도, 소셜미디어 알고리즘에 피로한 청년, 유전자 검사 결과를 앞에 두고 고민하는 가족을 목양해야 한다. 이를 위해 ‘과학기술 안식일’ 예배 신학이 필요하다. 기술의 속도와 효율성 논리에서 벗어나 하나님 앞에서 창조 세계를 새롭게 바라보는 예전적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예배 중에 기후 위기, 인공지능윤리, 생명 기술 등을 신학적으로 성찰하는 것은 단순한 시사 토론이 아니라, 창조주 앞에 선 회중의 공동 분별이다.
■ 선교 차원에서의 실천: 과학기술 공론장에서 예언자적 목소리 내기
과학기술 공론장은 오늘날 가장 중요한 선교 공간 중 하나다. 교회는 지역의 과학기술 의사결정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지역 인공지능 정책, 스마트시티 건설 계획, 의료 기술 도입 심의에 교회 공동체의 목소리가 담겨야 한다. 이것은 단순한 정치 참여가 아니라, 취약한 사람과 미래 세대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예언자 사명이다. 복음적 희망이 사회경제적·정치적 현실을 비판하고 변혁하는 동력이라는 몰트만의 정치신학이 바로 이 자리에서 살아난다.
■ 복지 차원에서의 실천: 디지털 소외를 돌보는 케노시스 사랑
오늘날 디지털 소외는 새로운 형태의 배제와 차별이다. 디지털 기기 사용에 어려움을 겪는 노인, 인공지능 채용 시스템에서 배제되는 장애인, 온라인 행정 서비스에 접근하지 못하는 이주민을 위한 과학기술 접근권 옹호는 케노시스 사랑의 실천이다. 교회는 복지관, 지역아동센터, 이주민 지원 기관과 협력하여 과학기술에 소외된 이웃이 디지털 시민으로 세워지도록 돕는 디지털 동반자 사역을 전개하며 사랑을 실천한다.
■ 사회운동 차원에서의 실천: 연대하고 협력하는 생태계 만들기
창조적 제자직은 고립된 교회 울타리 안에서 완성될 수 없다. 환경단체, 인권단체, 기술비평 그룹, 사회적 기업과의 에큐메니컬 연대가 필요하다. 인공지능 알고리즘 차별에 맞서고, 생태를 파괴하는 기술에 저항하며, 디지털 감시를 문제 삼는 사회운동은 출애굽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걸어야 할 길이다. 나아가 과학기술자, 정책 전문가, 시민, 신학자, 목회자 등이 함께하는 포럼을 구성하여 신학적·목회적·선교적 통찰이 과학기술 정책에 영향을 미치고, 과학기술 현실이 신앙의 성찰을 풍요롭게 하는 대화의 마당을 열어야 한다.
사진: Unsplash의 Google DeepMind
5. 희망의 과학기술을 향하여
위르겐 몰트만은 말한다. 희망은 현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아직 아닌 것’을 향한 신뢰 속에서 현재를 변혁하는 힘이라고! 그 희망을 품은 창조적 제자직은 두 가지 유혹을 동시에 경계해야 한다. 과학기술에 압도되어 무력하게 등 돌려서도 안 되고, 과학기술을 무비판적으로 추종해서도 안 된다. 창조적 제자는 자기 비움의 겸손으로 과학기술 안에서 창조주의 뜻을 분별하고, 안식일 지혜로 과학기술의 방향과 속도를 문제 삼으며, 성령의 생명부여 역사에 참여하며 과학기술 공론장에 나아가야 한다.
과학기술시민성은 기독교 신자에게 낯선 영역이 아니다. 그것은 창조 세계를 돌보라는 창세기의 명령(창 2:15)이 과학기술 시대에 새롭게 번역된 언어다. 하나님이 창조에 공간을 내어주셨듯이, 우리도 과학과 기술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생명과 존엄을 위한 공간을 내어주는 시민이 되어야 한다. 창조적 제자직은 과학기술 사회에서 희망을 실천하는 시민적 제자도이자, 하나님의 창조와 샬롬에 참여하는 변혁적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