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칼럼] 군림하는 자인가? 섬기는 자인가? (김영웅)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26-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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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포를 통해 배우는 영적 묵상 (5)

군림하는 자인가? 섬기는 자인가?

- 암세포와 줄기세포, 그리고 토양의 관계 -


글 | 김영웅
기초과학연구원 유전체교정연구단 선임연구원
과신대 정회원, 후원이사


1월부터 우리는 줄기세포와 암세포의 대표적인 생물학적 특징들을 살펴보면서 기독교와 교회 공동체,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눈으로 그것들을 재해석하고 그동안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각도에서 성찰과 통찰을 이어가는 중에 있다. 이번 호에서는 줄기세포나 암세포의 자체적인 특징이라기보다는 그들이 그들 주위에 인접한 다른 세포들과 어떤 관계에 있고 그들과 어떤 방식으로 소통하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율법을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했다. 이웃 사랑이 없는 하나님 사랑은 자기를 쪼개어 산 제물로 드리지 않는, 내용이 없고 형식만 남은,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가증한 제사와 같다. 이는 종교생활에 다름 아니다. 반면 하나님 사랑 없는 이웃 사랑은 조건적일뿐더러 궁극적으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기 때문에 지속할 수 없고 기분과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변덕스러울 수밖에 없고 유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진정한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발현되어야 하며, 진정한 이웃 사랑은 하나님 사랑과 다르지 않은 마음가짐이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이웃에게 어떤 존재일까. 이웃과 어떤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야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로서 신앙과 일상의 일치를 이룰 수 있을까. 이런 생각들을 하며 이번 호를 시작한다. 과연 줄기세포와 암세포는 각각 어떻게 이웃 세포들을 대할까. 그들에게 어떤 존재로 인식되고 있을까. 그들은 어떤 이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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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Unsplash의 Braňo


5. 미세환경

(1) 종자와 토양 가설

    생물학계에는 암이 전이되는 원리를 설명하는 고전적인 가설이 있다. 바로 ’The Seed and Soil Hypothesis (종자와 토양 가설)’이 그것이다. 이 가설은 1889년 영국의 외과 의사 스티븐 파젯에 의해 처음 제기되었다. 과학계에서 어떤 가설이 제기되었다는 것은 곧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었다는 말이다. 이런 의문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의사들은 암세포가 혈류를 타고 온몸으로 퍼진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왜 모든 기관과 조직에 골고루 흩어지지 않고 특정 기관과 조직에만 안착하는지는 몰랐다. 이때 스티븐 파젯이 중요한 발견을 하게 된다. 그는 총 735건의 유방암 사망 사례를 분석했다. 처음에 그는 만약 전이가 단순한 혈류에 의한 기계적 현상이라면 피가 가장 많이 공급되는 비장에 전이가 가장 많이 일어나야 한다고 추론했다고 한다. 하지만 분석 결과 실제로 비장 전이는 매우 드물었다. 유방암은 비장이 아닌 간, 뼈, 난소에 전이가 잘 되었고, 그 외 다른 기관과 조직에는 전이가 잘 되지 않았다. 추론과 달랐다. 이상했다. 그의 눈에는 암세포의 전이가 무작위적으로 혹은 기계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비장이 주요 전이 장소일 거라는 합리적인 추론은 틀렸던 것이다. 분석 결과는 오히려, 놀랍게도, 마치 암세포가 특정 장소를 선택하는 것처럼 보였다. 부인할 수 없는 결과였다. 이처럼 아무리 합리적인 추론이라도 과학의 세계에서는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검증 과정이 필요하고 그것이 과학을 과학답게 만들고 신뢰할 수 있게 만드는 초석이 된다. 


    이런 배경에서 그가 내놓은 가히 전복적이라 할 수 있을 만한 가설이 바로 ‘종자와 토양 가설’이었다. 말하자면 종자와 토양의 궁합을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가설의 메시지는 단순하고 직설적이다. 암의 전이는 무작위적이지 않고 오히려 암세포가 전이되어 안착하기 위한 새로운 장소는 암세포와 궁합이 맞는 기관이나 조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 곳에나 씨를 뿌린다고 싹이 나고 자라는 게 아니라, 그 씨에게 맞는, 즉 그 씨가 자라기에 적합한 환경이 갖춰진 토양에 떨어졌을 때에만 잘 자랄 수 있다는 것이다. 21세기 현재 이 가설은 너무나도 당연한 말로 여겨지지만, 그 어떤 당연한 가설 혹은 이론도 한때는 전복적이었다는 사실을 우린 기억해야 한다. 자명한 것들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묻고 관찰과 실험으로 검증을 하여 모두가 동의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일. 이것이 과학자가 하는 일이다.


(2) 좋은 종자와 좋은 토양

    '종자와 토양 가설'에서 비유한 종자는 암세포였고, 토양은 그 암세포가 생존하고 증식하기에 적합한 조직이나 기관이었다. 이 가설은 암세포 전이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가져왔다. 암을 치료할 때 암세포만 타깃으로 할 게 아니라, 그 암세포가 잘 자라는 조직과 기관도 타깃으로 할 수 있다는 새로운 길이 열린 것이었다. 암세포의 운명은 전이되어 자라게 될 미세환경에 지대한 영향을 받게 되므로 그 환경을 조절하면 암세포의 증식도 막을 수 있다는 패러다임을 구축하게 된 것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범인의 은신처를 습격하여 범인이 생활할 수 없도록 만든다면, 범인을 잡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범인이 행할 미래의 범죄도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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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Unsplash의 Daniel Dan


    이번엔 이 가설을 조금만 응용해서 암세포의 자리에 줄기세포를 대입해 보자. 줄기세포를 종자로 비유해 보자는 것이다. 그러면 줄기세포의 집 혹은 은신처를 토양에 비유할 수 있다. 이 토양에 대한 발상의 전환은 'Stem Cell Niche (줄기세포 미세환경)'이라는 개념으로 이어진다. 이 개념은 1978년 영국의 혈액학자 레이먼드 쇼필드에 의해 'Niche Hypothesis (미세환경 가설)'로 처음으로 제안되었고, 1990년대 후반에 가서야 과학적 연구를 기반으로 검증이 되었으며, 지금은 줄기세포학(Stem Cell Biology)의 핵심 개념으로 자리 잡고 있다. 


    우린 이런 과정으로부터 크게 두 가지를 알 수 있었다. 하나는 암세포나 줄기세포 모두 그들만의 고유한 특징을 가지고 또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들 혼자만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고 미세환경이라 불리는 주위의 세포들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암세포나 줄기세포 모두 아무 데나 머무는 게 아니라 특정 환경에 머문다는 것이다. 


    암세포뿐 아니라 줄기세포 역시, 나아가 모든 세포도 마찬가지로, 그들이 존재하는 미세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비단 세포뿐이겠는가. 우리 인간들도, 인간들이 모인 공동체도, 국가도, 또 국가가 모여 이룬 어떤 거대 조직도, 나아가 우리 모두가 거주하는 지구라는 행성도 그 주위에 있는 환경과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굳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말했던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까지 언급하지 않더라도, 모든 존재자는 능동적이든 수동적이든 다른 존재자들의 영향을 받으며 독립적(independent)이지 않고 상호의존적(interdepen dent)이라는 건 자명한 사실이다. 


    이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나 교회 공동체 역시 주위 환경과 영향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다. 주위 환경이란 다른 그리스도인 혹은 다른 교회 공동체를 넘어 비그리스도인들과 타 종교인들, 무신론자들, 심지어 이단과 사이비 신자들까지 모든 사람을 지칭한다. 자, 그렇다면 이런 환경 가운데 존재하는 그리스도인이나 교회 공동체는 어떠해야 할까? 그리스도인이나 교회 공동체는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진실을 받아들일 때, 이 질문은 자연스레 다음 근본 질문으로 우리를 이끈다. 이번 호를 쓰게 만든 동기가 되는 질문이기도 하다. "참 그리스도인 혹은 참 교회 공동체란 무엇이고, 어떻게 존재해야 할까?" 


    이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먼저 살펴봐야 할 사항이 있다. 어쩌면 이 과정에서 저절로 답이 나오게 될지도 모르겠다. 앞에서 살펴본 생물학적인 미세환경은 암세포와 줄기세포와 관련된 것이었다. 암세포가 잘 살 수 있는 환경과 줄기세포가 잘 살 수 있는 환경, 이 두 환경은 서로 다를 것이다. 또한 각각이 자신의 환경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지도 다를 것이다. 이 차이를 몇 가지만 살펴보자.


(3) 암세포의 경우

    당연한 말이지만 암세포가 선호하는 미세환경은 암세포를 더 암세포답게 만들어주는 환경이다. 모든 세포는 영양분이 필요하고, 세포마다 다른 신호전달체계가 필요하다. 영양분은 대부분의 세포에게 공통적일지 몰라도, 신호전달체계는 서로 다른 세포의 정체성을 유지시키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만약 이 신호전달체계가 망가지면 그 세포는 더 이상 그 세포가 아니게 된다. 정체성을 잃고 다른 세포로 바뀌든지, 기능을 잃어버리든지, 사멸 과정으로 진입하게 된다. 암세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암세포는 스스로 무한 증식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했지만 여전히 환경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그 무한 증식 능력이 극대화되거나 극소화되거나, 또는 무력화될 수 있는 환경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실례를 들어보면, 유방암의 경우, 전이의 약 70퍼센트가 뼈에서 일어난다. 뼈는 유방암세포의 성장을 촉진시키는 특정 인자가 풍부하게 갖춰져 있을뿐더러 암세포가 물리적으로 안착하기 쉬운 구조를 가진 '안전하고 비옥한 토양'으로 작용한다. 전립선암의 경우도 90퍼센트 이상이, 폐암의 경우도 30~40퍼센트 정도가 뼈로 전이된다. 유방암 전이와 마찬가지 이유다. 그러나 모든 암세포들이 뼈로 전이되는 건 아니다. 예를 들어 대장암이나 위암 세포들은 뼈를 선호하지 않는다. 암세포가 내뿜는 신호 물질을 받아들일 환경 세포가 부재하거나, 환경 세포가 내뿜는 신호 물질을 암세포가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하는 여러 이유들이 그 배후에 있다. 아직 특정 암세포가 특정 기관을 선호하는 완전한 이유는 다 밝혀지지 않았다. '종자와 토양 가설'은 그것의 일부를 설명해 줄 뿐이다. 


    확실한 사실은 암세포의 종류에 따라 선호되는 전이 장소가 다르다는 것이고, 많은 임상 결과를 분석한 자료들이 있기 때문에 지금은 어떤 암이 어느 기관으로 전이가 잘 일어나는지 확률 별로 통계가 다 나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암 환자의 치료에서도 이를 적용하면 전이가 성공적으로 일어나지 못하게 줄일 수도 있고, 미연에 예방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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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Unsplash의 National Cancer Institute


    추가적으로 꼭 짚고 넘어가고 싶은 무서운 사실 한 가지는 전이가 계속 진행되면서 암세포도 변이를 누적해 간다는 것, 그 결과 더 이상 특정 토양의 영향을 받지 않게 될 만큼의 힘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 어떤 항생제도 먹히지 않는 슈퍼 박테리아가 탄생하듯이 암세포도 '슈퍼 종자'로 진화하여 더 이상 특정 환경에 의존적이지 않고 그 어떤 조직과 기관에서도 살아남아 그곳을 파괴하면서 무한 자기 증식을 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전 호에서도 언급했듯이 암세포는 주변 환경을 자기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만드는 능력도 점차 보유하게 되기 때문에 암세포를 초기에 제압하지 않으면 현재 의료기술로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는 상황으로 치닫게 된다. 


(4) 줄기세포의 경우

    앞서 살펴봤듯이 암세포는 주위 환경, 즉 인접한 다른 세포들과 소통한다기보다 제압하고 장악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주도권이 명확하다. 암세포는 언제나 주인 자리를 꿰차려 애쓰고, 그 주변 세포들은 암세포의 신하 혹은 노예가 되어 이용 및 착취당하거나 희생당하게 된다. 초기 단계의 암세포는 환경에 영향을 비교적 많이 받는 편이지만, 암이 초기, 중기, 말기로 진행되면서 암세포는 점점 더 환경에 독립적인 능력을 보유하게 된다. 암을 초기에 진압해야 하는 이유 중 하나다.


    반면, 줄기세포는 암세포와 달리 인접한 세포들과 평화로운 소통을 한다. 줄기세포가 아무 데나 머물지 않고 특정한 위치에 머무는 이유는 그 주변 세포가 줄기세포에게 필요한 신호전달물질을 공급해 주며 물리적으로도 안전한 공간을 마련해 주기 때문이다. 줄기세포는 주변 세포들에게 군림하지 않는다. 그들을 착취하거나 희생시키지도 않는다. 대신 그들과 좋은 이웃으로서 같은 풍경 속에 스며들어 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소장의 경우 줄기세포는 가장 아랫부분에 위치한다. 가장 윗부분이 점막으로 뒤덮여 우리가 먹고 위에서 소화된 음식 알갱이들이 직접 접하는 부분이라면, 줄기세포가 존재하는 아랫부분은 외부에 노출되어 있지도 않은 상태로 다른 세포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다. 무엇보다 소장 줄기세포가 가장 필요로 하는 신호전달물질이 소장의 윗부분이 아닌 아랫부분에 가장 풍부하다. 그 물질을 자체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특정 세포도 줄기세포는 바로 옆에 두고 있다. 또한 줄기세포는 계속 세포분열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윗부분으로 갈수록 분화를 유도하는 신호전달물질이 풍부해지기 때문에 아랫부분에 위치하고 있는 건 순리적인 결과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런 보이지 않는 곳에서 줄기세포는 주변 환경의 도움을 받으며 쉬지 않고 세포분열과 분화과정을 주도하고 있는 것이다. 


    각 기관마다 성체줄기세포의 위치를 추적해 보면 공통된 하나의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주변환경세포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에 따라 줄기세포의 집이 마련된다는 것이다. 이를 응용하여 과학자들은 줄기세포를 시험관 안에서 키울 수도 있게 되었다. 주변환경세포가 내뿜는 신호전달물질들이 어떤 것들인지 연구를 통해 파악한 뒤 그것들을 시험관 안에서 공급해 주었더니 몸 안에서와 흡사한 모습으로 줄기세포가 세포분열과 분화과정을 보이게 되었던 것이다. 줄기세포와 미세환경의 관계를 이용한 역사적인 성과였다. 그것은 오가노이드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동물실험을 대체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여겨지고 있다. 


(5) 군림할 것인가, 섬길 것인가

    암세포와 이웃세포들과의 관계는 수직적이다. 암세포는 군림한다. 이웃세포들을 착취하고 희생시킨다. 오직 스스로만 살아남고 무한 자기 증식을 하기 위해서다. 


    줄기세포와 이웃세포들과의 관계는 수평적이다. 줄기세포는 군림하지 않는다. 오히려 섬기는 자세로 이웃세포들과 겸손하게 도움을 주고받는다. 혼자만 살아남기 위한 목적은 전혀 없다. 다 같이 살기 위해서다. 줄기세포도 무한 자기 증식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자기만을 위하지 않고 언제나 전체를 위한다. 전체를 위해, 즉 해당 기관을 건강한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세포를 분화과정을 통해 공급하고 그 수까지 일정하게 유지되도록 챙긴다. 절대 선을 넘지 않는다. 이웃들과의 평화를 끝까지 지킨다.


    수직적인 관계와 수평적인 관계, 그리고 군림하는 관계와 섬기는 관계. 그리스도인과 교회 공동체는 어떠해야 할지에 대한 답은 이미 나온 것으로 보인다. 답이 무엇인지 안다면 현재 우리의 위치와 상태를 점검하고 성찰할 때다. 우리가 우리의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로 수직적인 관계로 접근하지는 않았는지, 그리스도의 복음이 유일한 생명의 메시지라는 믿음이 이웃들에게 군림하는 자의 신념으로 폭력으로 다가가진 않았을지 가만히 점검해 봐야 한다. 복음을 모르는 자들의 눈에는 복음이 진리로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너무나 당연한 이 논리를 자주 잊는 것 같다. 그들이 보는 건 우리의 외형이고, 행동이며, 말이다. 믿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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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Unsplash의 Beth Macdonald


    그리스도인은 암세포가 아닌 줄기세포로 부름 받았다. 그렇다면 줄기세포가 이웃세포들과 소통하는 방식을 따라야 할 것이다. 줄기세포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혹시 암세포처럼 행동하지는 않았는지 스스로 성찰해보는 것도 좋겠다. 나아가 개개인의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라는 큰 단위 차원에서도 점검해 보면 좋겠다. 겸손하게 세포로부터 배우는 자세가 필요하다.


(6) 이웃인가, 적인가

    참된 그리스도인은 줄기세포와 같아서, 역사적으로 언제나 그랬지만, 그 수가 매우 적다. 참된 교회 공동체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이것을 숙명이라 생각한다. 교인이 많아진 적은 있었지만, 참된 그리스도인이 많아진 적은 거의 없지 않았나 싶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아브라함이라는 한 개인만을 부르신 것도,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만을 부르신 것도 비슷한 이유가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처음부터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을, 수십, 수백, 수천…명을 한꺼번에 부르셨을 수도 있고, 한 민족이 아니라 열방 전체를 부르셨을 수도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인데도 불구하고 미약한 숫자 하나에 그치신 이유는 나로서는 알 길이 없지만 거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믿게 된다. 나는 그 이유 중 하나를 줄기세포에서 찾는다. 특히 이번 글에서 다루고 있는 줄기세포와 이웃세포들 사이의 관계에서 힌트를 얻는다.


    그리스도인은 좋은 이웃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군림하지 않고 섬기는 자여야 한다고 믿는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뛰어 내려와 로마를 한 방에 때려눕힐 수 있는 능력을 가지셨지만 그러지 않으셨다. 폭력이 가지고 오는 평화는 잠시이기 때문일 것이다. 군림해서 얻은 평화는 진짜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마찬가지다. 줄기세포처럼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닮아야 한다. 그들에게 좋은 소식, 복음을 전하는 건 사영리를 읽어주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우리의 행동으로, 우리의 삶으로 보여져야 한다. 우리 안에 있는 진실한 믿음이 바깥으로 뚫고 비쳐져야 한다. 섬기는 모습으로, 자진해서 선을 행하고 희생하는 모습으로 말이다. 


    그리스도인은 이웃이어야 한다. 적이 되어선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좋은 종자인 동시에 좋은 토양이어야 한다. 나쁜 종자 혹은 나쁜 토양이어선 안 된다.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가슴에 다시 새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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