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누구와 함께 미래를 만드는가 (김재상)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26-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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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얽힘의 재구성 04]

누구와 함께 미래를 만드는가


글 | 김재상

이서교회 목사

대전대학교 겸임교수


1. 누가 만드는가

  과학기술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한 가지 사실이 분명해진다. 과학기술은 언제나 사회와 함께 발전해 왔으며, 그 사회가 가진 권력과 문화, 가치관의 영향을 깊숙이 받아 왔다. 과학기술은 결코 사회와 분리된 적이 없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성차(gender difference)다. 과학사를 살펴보면, 근대 과학이 제도화되는 과정에서 여성은 오랫동안 연구의 주체가 아니라 주변인으로 머물렀다. 뛰어난 역량을 갖추고도 정식 연구원이 아닌 ‘조수’나 ‘보조자’라는 이름으로 활동해야 했고, 공동 연구의 성과가 남성 연구자의 이름으로만 기록되는 일도 적지 않았다. 여성은 과학을 사랑할 수는 있었지만, 과학자가 되기는 어려웠다. 공학 역시 오랫동안 남성의 직업으로 인식되었기에, 여성에게 연구실과 설계실의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오늘날 상황은 많이 달라졌다. 그러나 여전히 과학기술계 곳곳에서 성차의 벽은 확인된다. 이공계 전공 선택에서부터 연구책임자 비율, 과학기술 정책 결정 과정에 이르기까지 참여의 균형은 여전히 기울어져 있다. 국내 상황을 보면, 과학기술 연구개발 인력 중 여성 비율은 23.7%로 꾸준히 늘고 있으나, 주요 의사결정권자(책임자·임원) 중 여성 비율은 여전히 10%대에 머물러 있다. 실무자급에 비해 핵심 결정 과정에서의 성별 격차가 훨씬 심각한 것이다. 이 현상은 단순히 개인의 선택이나 능력 문제가 아니다. 누가 과학을 만들고, 누가 기술을 설계하며, 누가 미래를 상상하는가를 둘러싼 구조적인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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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Unsplash의 Pea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교회와 신학계에서도 낯설지 않다. 한국교회에는 여성 신자와 여성 사역자가 적지 않지만, 신학 연구와 공동체 의사결정, 공적 담론 형성의 영역에서는 여전히 남성 중심성이 공고하다. 교단마다 차이는 있을지라도 ‘누가 말하는가?’, ‘누가 결정하는가?’, ‘누가 공적인 목소리를 내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교회 역시 자유롭지 못하다.


  과학기술계와 교회는 서로 다른 세계처럼 보이지만, 이 지점에서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두 영역 모두 오랫동안 특정 집단의 경험과 관점을 중심으로 발전해 왔으며, 그 과정에서 다른 목소리들은 충분히 드러나지 못했다. 그 결과 생산된 지식과 제도는 스스로 보편적이라 주장해 왔으나, 실제로는 특정한 삶의 경험만을 반영할 뿐이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왜 여성 과학자나 여성 신학자의 수가 적은가?”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지금 누구와 함께 과학기술의 미래를 만들고 있는가?



2. 지워진 이름들: 역사가 기억하지 않은 과학자들

  과학기술의 역사는 흔히 위대한 발견과 혁신의 서사로 서술된다. 우리는 뉴턴, 다윈, 아인슈타인, 에디슨의 이름을 당연하게 배운다. 그러나 이 역사 뒤에는 또 다른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과학기술을 발전할 수 있게 했음에도 오랫동안 기록되지 못했던 이들의 이야기다.


  영국 화학자 로절린드 프랭클린(Rosalind Franklin, 1920~1958)의 사례는 이 현실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프랭클린은 X선 회절 사진을 이용해 DNA 구조를 밝히는 데 결정적인 데이터를 생산해 냈다. 특히 그가 촬영한 ‘사진 51(Photo 51)’은 DNA 이중나선 구조를 규명하는 핵심 단서였다. 그러나 DNA 구조 발견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것은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었고, 프랭클린의 공헌은 오랫동안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오늘날 과학사는 이 사건을 단순히 한 개인의 업적이 가려진 안타까운 일화로 소비하지 않는다. 대신 과학 공동체가 누구의 기여를 인정하고 누구의 이름을 역사에 남기는가를 드러내는 구조적 사례로 다시 읽어내고 있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수학자 캐서린 존슨(Katherine Johnson, 1918~2020)의 삶도 마찬가지다. 존슨은 유인 우주비행과 달 탐사에 필요한 궤도 계산을 정밀하게 수행하며 미국 우주개발의 성공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그의 이름은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흑인 여성이라는 이중의 사회적 장벽 속에서 그의 전문성과 공헌은 뒤늦게야 조명을 받을 수 있었다.


43dd423c662cc.jpg위키백과 : 캐서린 존슨


  두 사례는 동일한 진실을 웅변한다. 과학기술 역사는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는 역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누구의 지식’이 공적으로 인정받는가를 결정하는 권력의 역사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로절린드 프랭클린이나 캐서린 존슨 외에도 지워진 이름들은 수없이 많다. 컴퓨터 프로그래밍의 선구자인 에이다 러브레이스(Ada Lovelace, 1815~1852)와 핵물리학 분야에서 지대한 공헌을 한 마리 퀴리(Marie Curie, 1867~1934) 등은 당시 학계에서 온전한 동료로 대우받지 못했다. 기여는 존재했으나 인정은 부재했던 이 반복되는 패턴은 개인의 불운이 아니라 시스템의 논리였다. 과학이 스스로 객관적이라고 주장하는 동안, 그 내부에서는 누가 말하고 누가 침묵할 것인가가 철저히 사회적으로 조직되고 있었다.



3. 다양성이 객관성을 만든다

  여성의 과학기술 참여를 단순히 ‘기회의 평등’이라는 시각으로만 접근하면, 성차가 왜 이토록 쉽게 해소되지 않는지 명확히 설명하기 어렵다. 최근 과학기술학(STS)은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과학은 과연 누구의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지는가?


  과학기술학자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 1944~ )는 과학이 주장하는 ‘객관성’을 새롭게 해석한다. 그는 객관성이란 아무런 위치도 점하지 않는 초월적 시선이 아니라, 자신의 위치를 성찰하며 형성되는 ‘위치성 지식(situated knowledge)’이라고 말한다. 모든 지식은 특정한 역사, 문화, 사회적 경험 속에서 생산된다. 따라서 특정 집단의 경험만으로 구성된 과학은 비록 보편성을 주장할지라도, 정작 중요한 현실의 단면들을 놓칠 가능성이 크다.


  샌드라 하딩(Sandra Harding, 1935~2025)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강한 객관성(strong objectivity)’을 제안한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다양한 사회적 위치를 가진 사람들이 연구에 참여할수록 과학은 더욱 객관적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다양성은 객관성을 방해하는 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객관성을 더욱 풍성하고 견고하게 만드는 기반이 된다. 주변부의 시선은 중심부에서 당연하게 여겨져 온 주관적 가정들을 비로소 가시화하기 때문이다. 그 숨겨진 가정들이 투명하게 드러날 때, 과학은 더욱 정직해진다.


  오늘날 인공지능(AI)을 둘러싼 논쟁은 이를 현실에서 적나라하게 증명한다. 얼굴 인식 시스템이 여성이나 유색인종을 더 자주 오인식하거나, 채용 알고리즘이 여성 지원자에게 불리한 결과를 내놓은 사례들은 이미 잘 알려졌다. 문제는 인공지능이 의도적으로 차별을 학습했다는 점에 있지 않다. 그것을 설계하고, 학습 데이터를 수집하며, 성능을 평가한 사람들의 경험과 관점이 충분히 다양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기술은 결국 그것을 만드는 공동체의 모습을 닮아갈 뿐이다.


  이 문제는 인공지능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의학 연구에서 오랫동안 임상 실험의 기본 표준 대상이 남성이었다는 사실은, 여성 환자에게 다르게 나타나는 심장 질환 증상이나 약물 부작용이 뒤늦게야 연구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처럼 기술과 지식의 편향은 단순한 불균형을 넘어 삶과 죽음의 문제로 직결된다. “누가 지식을 만드는가”라는 질문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4. 교회를 향한 같은 질문

  이러한 과학기술학 통찰은 교회를 향해서도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세상 과학기술계의 성차를 비판하면서도, 교회와 신학계 내부에 작동하는 성차에는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해 왔는가? 한국교회의 상당수는 여성 신자들의 아낌없는 헌신과 봉사 위에 세워져 왔다. 그러나 신학 연구와 교단의 의사결정, 그리고 공적 담론의 형성 과정에서는 여전히 남성의 목소리가 중심을 이루는 경우가 지배적이다. ‘누가 공적인 해석을 제시하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교회 역시 사회의 다른 세속 제도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인다.


  창세기는 인간을 남성과 여성 모두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창조하셨다고 증언한다. 하나님의 형상은 어느 한 성별에만 독점된 특권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인간 공동체 전체에 위임된 신성한 소명이다. 따라서 창조세계를 돌보고 문화를 형성하며 과학기술을 발전시키는 일, 그리고 교회 사역을 통해 생명을 돌보는 일 모두 남성과 여성이 동등하게 감당해야 할 공동의 사명이다. 이는 시대 변화에 마지못해 타협하는 양보가 아니라, 창조 질서 자체에 깊이 뿌리를 둔 신학적 확신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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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Unsplash의 Kamil Kalkan


5. 포용적 과학기술시민성을 향하여

  이 연재 <얽힘의 재구성>에서 지속해서 논의해 온 ‘과학기술시민성’도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과학기술시민성은 시민이 과학기술을 단순히 소비하거나 사후에 평가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시민이 과학기술이 형성되는 초기 과정부터 주체로 참여하고, 그 발전 방향을 함께 숙의하며, 공공선을 위해 책임을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과연 모든 시민을 동등한 참여자로 인정하고 있는가?


  만약 특정 집단이 과학기술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지속해서 배제되거나 소외되어 왔다면, 이는 단순한 ‘대표성’의 결여를 넘어 과학기술시민성 자체의 본질적인 결핍을 의미한다. 진정한 과학기술시민성은 참여의 양적 확대뿐만 아니라, 참여의 다양성과 포용성을 핵심 가치로 삼기 때문이다.


  이에 본 글에서 ‘포용적 과학기술시민성’을 제안한다. 이는 단순히 참여의 문턱을 조금 넓히는 제도적 보완책에 그치지 않는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이들이 동등한 시민으로 온전히 인정받고, 함께 과학기술의 미래를 상상하며 그 책임을 성실히 나누는 능동적 시민성이다. 과학기술은 더 이상 전문가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며, 시민 또한 기술의 수동적인 소비자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교회 역시 과학기술을 멀찍이서 관조하고 평가하는 관찰자가 아니라, 공공선을 위해 그 방향을 함께 숙의하고 실천해 나가는 신실한 시민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포용적 과학기술시민성은 지식의 생산 구조와도 직결된다. “누가 연구 의제를 설정하는가?”, “어떤 문제가 더 중요하다고 판단되는가?”, “누구의 고통이 우선적인 연구 대상이 되는가?” 이러한 본질적인 질문들에 답하는 방식이 달라질 때, 과학기술이 생산하는 지식의 내용과 지향점도 비로소 변화한다. 여성 참여는 단지 구성원의 기계적 다양성을 채우기 위함이 아니다.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사각지대의 문제를 가시화하고, 지금까지 묻지 않았던 새로운 질문을 제기하기 위함이다. 그 새로운 질문들이야말로 과학기술을 더욱 공공적이고 정의롭게 만드는 추동력이 된다.



6. 함께 다시 엮어야 할 것들

  <얽힘의 재구성>을 통해 지금까지 우리는 과학기술과 하나님의 선교를 논했고, 창조적 제자직과 과학기술시민성을 살펴보았으며, 한국 기독교와 과학의 역사, 그리고 기술 위험 앞에서 증언하는 교회의 마땅한 모습을 돌아보았다. 이번 글은 그 모든 논의를 또 하나의 중요한 방향으로 확장하고자 한다. 과학기술과 교회의 얽힘은 이제 남성과 여성 모두의 온전한 참여 속에서 새롭게 재구성되어야 한다.


  이것은 어느 한 집단의 파이를 다른 집단에게 시혜적으로 나누어 주는 시선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모든 인간이 창조세계 돌봄과 미래 형성에 동등하게 참여하는, 창조 질서의 온전한 회복에 관한 문제다. 성차를 극복한다는 것은 단지 여성의 숫자를 늘리는 표피적 접근을 넘어선다. 그것은 과학기술과 교회가 과연 누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누구와 손을 잡고 미래를 만들어 갈 것인가를 근본적으로 다시 묻는다. 서로 다른 삶의 경험들이 배제되지 않고 촘촘히 연결될 때, 과학기술은 진정으로 공적인 지식이 되고, 교회는 비로소 온전한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가 될 수 있다.


  우리가 다시 엮어야 할 것은 비단 과학기술과 종교의 관계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연구자와 시민, 전문가와 비전문가, 남성과 여성, 그리고 교회와 사회가 함께 미래를 형성해 가는 관계의 그물망 자체를 새롭게 엮어내야 한다. 그때에야 과학기술은 더욱 정의롭고 책임 있는 길을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교회 역시 세상을 향해 막연한 희망을 말하는 공동체를 넘어, 그 희망을 역사 속에서 함께 실천하고 구현해 가는 ‘과학기술시민 공동체’로 우뚝 서게 될 것이다.


  과학기술과 기독교의 대화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많고 다양한 목소리가 필요하다. 그 소외되었던 목소리들이 한데 모일 때, 우리의 대화는 비로소 더 넓어지고 깊어질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마주한 ‘얽힘의 재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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