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칼럼] 균형잡힌 몸, 균형잡힌 교회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26-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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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포를 통해 배우는 영적 묵상 (7)

균형잡힌 몸, 균형잡힌 교회


글 | 김영웅
기초과학연구원 유전체교정연구단 선임연구원
과신대 정회원, 후원이사


  지난 호에서 언급했듯이 암세포는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돌연변이 유전자 한두 개 정도로는 암세포로 발전하지 않는다. 암세포가 되기 위해서는 순차적으로 다양한 조건들이 갖춰져야 한다. 모든 것이 그렇듯, 그것은 우연으로도 필연으로도 일어난다. 이번 호에서는 암세포의 발생에 대해서 집중할 것이다. 


  암세포가 발생하기 위한 유전적인 초기 조건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암유발유전자의 과발현, 다른 하나는 암억제유전자의 상실. 이 두 가지를 쉽게 이해하려면 자동차 비유가 도움이 될 것이다. 암유발유전자를 자동차의 가속 페달로, 암억제유전자를 브레이크 페달로 생각하면 된다. 가속 페달이 고장 나서 자동차가 멈출 수 없는 경우를 암유발유전자의 과발현으로 비유할 수 있고, 브레이크 페달이 고장 나서 자동차가 멈출 수 없는 경우를 암억제유전자의 상실로 비유할 수 있다. 두 가지 경우 모두 자동차는 통제 불능으로 멈출 수 없이 계속 전진하여 과속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상태가 계속되면 단순한 가속 페달이나 브레이크 페달의 고장에 그치지 않고 자동차 전체가 망가지거나 치명적인 사고로 이어지거나 과열로 폭발하고 말 것이다. 자동차의 이런 상태를 암세포의 무분별한 자기 증식으로 점령당한 우리 몸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이 두 가지 경우는 교회 생태계와 개인의 신앙생활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자.



7. 암유발유전자와 암억제유전자


(1) 교회 생태계에 적용 

  공동체가 건강하게 유지되려면 성장하려는 힘과 이를 통제하려는 힘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사람이 모인 곳은 다 그렇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된다고 쉽게 말할 수도 있지만, 그건 막연하고 무책임한 말로 들릴지도 모른다. 구체적인 방법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없는 단순한 구호만으로는 공동체를 건강하게 유지하기 어렵다. 구약의 이스라엘이 그랬고 역사적으로 모든 인간들이 그랬듯이, 인간은 처음엔 어떤 유력한 존재의 도움을 받다가도 어느 시점부터는 인도자보다 앞서가거나, 서로 인도자가 되려고 싸우거나, 자기 입맛에 맞는 인도자를 세우려고 한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는 건 단순히 모든 일을 성령에게 묻고 성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성령을 따르는 것만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성령보다 앞서 가지 않는 것을 포함한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행위를 가속 페달을 밟아 자동차를 전진하게 만드는 행위라고 본다면, 성령보다 앞서 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브레이크 페달을 밟아 자동차의 속도를 안전하게 유지하는 행위로 볼 수 있다. 즉 성령 인도를 받는 것도 성장하려는 힘과 통제하려는 힘의 균형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말이다. 나아가 가속 페달과 브레이크 페달의 균형은 건강한 모든 생명체에 적용할 수 있는 우주적인 규칙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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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Unsplash의 Nagesh Badu


    본질을 잃은 ‘성장 지상주의’는 교회 생태계 내에서 암유발유전자의 과발현에 빗댈 수 있다. 교회라는 자동차가 가속 페달만 밟고 있는 상태라고 생각하면 된다. 교회가 영혼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모델을 보여주는 본질적인 부분보다 교세를 확장한다거나 재정이나 건물의 규모를 크게 한다거나 하는 외형적 성장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모습은 암세포가 멈추지 않고 무한 증식하여 공멸을 향해 나아가는 것과 다르지 않다. 뿐만 아니다. 특정 개교회나 특정 목회자의 영향력이 과도하게 커지는 현상 역시 가속 페달이 고장 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성장 지상주의뿐 아니라 특정 공동체나 개인의 우상화는 교회 생태계 내에 존재하는 다른 공동체나 지체들의 다양성을 약화시키고 소멸시킬 수도 있으며 건강한 소통을 와해하는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암억제유전자의 기능은 세포의 무분별한 증식을 막고, 여러 이유들로 인해 DNA가 손상되었을 때 그것을 신속히 감지한 뒤, 복구할 만한 수준이면 복구를 진행하고, 복구할 만한 수준이 아니라면 세포의 사멸을 유도하는 일이다. 참고로 우리가 앞에서 살펴봤던 p53이 대표적인 암억제유전자이다. 교회 안에서 불의, 재정 비리, 도덕적 타락 등 교회의 본질을 훼손하거나 위배되는 일이 발생했을 때 이를 늦지 않게 감지하여 바로잡을 수 있도록 하는 건강한 비판의 목소리들, 그리고 그러한 목소리들을 무시하거나 묵살하지 않고 취합하여 함께 기도하며 결정하는 치리와 권징 시스템, 이런 것들이 바로 교회 생태계 내의 암억제유전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2) 개인 신앙생활에 적용 

  이 두 가지 비유는 교회 공동체뿐 아니라 개인의 신앙생활에도 적용할 수 있다. 성도 개개인의 영적인 삶 역시 끊임없이 살아있는 유기체인 동시에 가속과 브레이크의 조화가 절실히 필요한 영적 전쟁터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신앙생활에서 암유발유전자의 과발현은 과도한 ‘자기 의’와 통제되지 않는 ‘탐욕’의 분출에 빗댈 수 있지 않을까. 겉으로는 뜨거운 신앙생활을 영위하는 듯하지만, 내면의 중심에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아닌 ‘자기만족’이나 ‘인정 욕구’가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는 사람. 마치 바리새인을 연상하게 하는 종교적 열심으로 가득한 사람. 이런 이들은 타자를 정죄하는 데에도 그 누구보다도 앞장선다. 감사와 기쁨으로 드려야 할 사랑과 희생과 헌신을 어떤 대가를 바라는 투자 정도로 여기는 사람들이다. 이런 나도 이 정도의 무언가를 했는데 왜 나보다 상황이 좋은 아무개 집사나 장로는 이 정도도 하지 않느냐면서 늘 불평과 불만으로 비교 의식에 점철된 채 종교생활을 유지하는 이들의 마음에는 결코 평안이 깃들 여지가 없을 것이다. 자기 의와 탐욕에 사로잡힌 자들은 결국 거짓과 위선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브레이크는커녕 왜 가속 페달로 이 정도 속도밖에 내지 못하느냐면서 계속 자신을 채찍질하는 사람들은 결국 교회 공동체 내에서 암세포로 가장 먼저 변질되는 부류에 속하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암억제유전자의 상실은 개인의 신앙생활에서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어떤 것이 자칫 성령을 소멸시키고 폭주할 수 있는 개인의 신앙생활에 브레이크로 작동할 수 있을까. ‘성찰’과 ‘회개’의 상실은 묵상과 기도의 부재가 맺는 쓴 열매다. 하나님 말씀이라는 절대적인 기준이 사라지면 저마다 옳은 대로 행하고 나의 유익을 기준으로 선과 악을 구분하는 사람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날마다 하나님 말씀 앞에 자신을 비추어 보며 성찰을 일삼아야 한다. 사회생활에서는 남들에게 들키지 않을 수도 있고, 심지어 자기 자신을 속일 수도 있지만,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성령을 속일 수는 없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죄를 깨닫게 하시고 뒤돌아서서 다시금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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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Unsplash의 Johannes Plenio


(3) 건강한 교회와 개인

  암을 초기에 예방하기 위한 유전적인 방법은 암유발유전자의 과발현과 암억제유전자의 상실을 미연에 막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가 암세포처럼 변질되지 않기 위해서는 성장 지상주의와 우상화를 경계해야 하며, 건강한 비판 시스템과 치리와 권징 시스템이 갖춰지고 원활하게 작동해야 한다. 개인의 신앙생활이 암세포처럼 자기만 알고 자기만 섬기는 삶으로 변질되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 의와 탐욕에 사로잡히지 않고 내려놓아야 하며, 하나님 말씀에 자기를 비추어 항상 묵상과 기도로 성찰과 회개의 삶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성경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비유한다. 세포 하나하나가 머리이자 그리스도이신 예수의 다스림을 온전히 따를 때 교회 공동체는 물론 모든 그리스도인은 비로소 암세포로의 변질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은 ‘죄의 확장성’이나 ‘멈추지 않는 탐욕’을 경고한다. 야고보서 1장 15절에서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라고 했다. 욕심이라는 돌연변이가 생겨 영적인 암세포를 발생시키고, 그것이 궁극적으로 개인은 물론 공동체를 사망으로 이끈다는 말이다. 또한 디모데후서 2장 17절에서는 “그들의 말은 악성 종양이 퍼져나감과 같은데 그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라고 했다. 실제로 교회 공동체 내부의 잘못된 가르침을 악성 종양, 즉 암에 직접적으로 비유한 구절이다. 골로새서 3장 5절은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라고 말한다. 통제 불가능한 암세포로 변질시킬 요인들을 사멸시켜야 한다는 말이다. 이 말씀들은 모두 통제 불능의 탐욕과 비대해진 자아를 경계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건강한 교회와 개인이 되기 위해서는 가속 페달과 같은 이러한 암유발유전자들의 과발현을 미연에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야 할 하나님 말씀을 거부하고 반역하여 양심을 잃어버린 채 자정 능력이 고장 난 상태로 치닫는 것을 경고한다. 암억제유전자는 우리 주위에서 들려오는 여러 경고의 메시지들로 이해할 수 있다. 미세한 소리로 다가오는 성령의 말씀은 어떤 사건으로도 누군가의 말과 행동으로도 들려질 수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성령에 민감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씀 묵상과 기도로써 끊임없이 성찰하고 회개하는 삶을 살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잠언 29장 1절은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라고 말한다. 앞에서 언급한 여러 형태로 나타나는 경고 신호들을 계속 무시하게 되면 결국 패망에 이르게 된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디모데전서 4장 2절은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라고 말한다. 화인을 맞아 감각이 사라진 양심은 암세포가 생겨도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를 유도한다. 그런 상태의 사람은 외식하고 거짓말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히브리어 12장 8절에서는 “징계를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라고 했다. 징계가 작동하는 유기체야말로 건강하게 살아있는 몸이라는 말씀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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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Unsplash의 Tolu Akinyemi 🇳🇬



(4) 영적 폭주를 막는 백신

  가속 페달은 자동차를 앞으로 가게 하고 브레이크 페달은 자동차를 멈추게 한다. 정반대의 기능을 가진 이 두 페달은 긴밀하게 협력하여 자동차를 안전하게 운행하도록 만든다. 마치 정상세포 안에서 암유발유전자와 암억제유전자가 조화로운 균형을 이루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과 교회 공동체 역시 성장과 통제의 균형을 요구한다. 가속만을 추구하는 과욕은 영적 생태계를 파괴하는 악성 종양이 될 뿐이다. 세미하게 들려오는 경고의 소리에 귀를 닫는 양심의 마비 역시 공멸을 초래하는 잘 닦인 길일뿐이다. 


  우리는 이미 고장 난 가속 페달로 인해 폐해가 속출한 여러 교회 공동체의 사례들을 알고 있다. 처음엔 그렇지 않았겠지만 조금씩 증폭되는 자기 의와 탐욕에 눈이 멀어 성장 지상주의를 추구하게 된 여러 대형교회들의 폭주는 결국 비참한 영적인 몰락을 불러왔다. 이러한 실례들은 이 시대에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의 명징한 경고 메시지일 것이다.


  영적인 폭주는 궁극적으로 영적인 몰락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교회의 머리 되시고 그리스도인의 주인 되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음성에 언제나 촉각을 세우는 삶, 즉 말씀, 기도, 묵상의 거룩한 반복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성찰하고 회개하며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잃어버리고 있는 자정 능력을 언제나 회복할 수 있도록 애써야 한다. 영적인 자정 능력은 성령의 도우심으로만 가능하다. 개인의 작은 성찰 하나, 공동체 내의 건강한 비판 하나가 교회 생태계의 영적 폭주와 이어지는 영적 몰락을 막아내는 거룩한 백신이 될 것이다. 

  

예수전도단의 ‘주님 말씀하시면’의 가사가 모든 그리스도인의 고백이 되고 그대로 살아내는 삶으로 나타나길 간절히 기도한다.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춰 서리다. 

나의 가고 서는 것 주님 뜻에 있으니 오 주님 나를 이끄소서. 뜻하신 그곳에 나 있기 원합니다.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며 살리니 연약한 내 영혼 통하여 일하소서. 

주님 나라와 그 뜻을 위하여 오 주님 나를 이끄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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