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아름답고 놀라운 일이 가득한 이 땅"
- 지구의 기원에 대하여 목회자의 관점에서 -
글 ㅣ김병국
58포병대대 벧엘교회
과신대 정회원, 목회자모임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네가 어디 있었느냐?”(욥38:4)라는 하나님의 질문에 대해 욥이 그랬듯 우리는 침묵할 수밖에 없다. 기독교인으로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고백하지만 그것을 직접 목격한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 사실을 알 수 있을까? 전통적으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경과 자연이라는 두 책을 통해 그 사실을 계시하신다고 믿어 왔다. 이 입장에서는 성경과 자연이 하나님을 드러내는 서로 다른 접근으로 보기 때문에 서로 대화하거나 서로를 보완할 수 있다고 보았다. 반면 이 두 영역을 완전히 별개의 독립된 영역으로 바라보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이 둘 중 어느 한쪽에만 진리가 있다고 여기며 서로 대립하고 갈등한다고 보는 견해도 존재한다. 그래서 어느 편을 선택할 것인지 양자택일을 강요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 중에서 어떤 입장에 서 있는가? 이 글에서는 지구의 기원 문제에 관해 기독교인으로서 우리가 서야 할 입장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한다.
사실 성경과 과학은 창조와 창조세계에 대해 서로 다른 접근법을 보인다.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선언하며 시작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세기 1:1) 우주와 지구, 그리고 생명과 인간의 기원을 하나님께 두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학의 영역에서 지구의 기원은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지구의 기원에 대한 초기의 학문적 연구는 17세기에 널리 유행하던 연대학의 흐름 속에서 이루어졌다. 연대학은 역사에 대한 연구를 위해 여러 문헌들의 자료를 연구하고 정리해서 시대적 흐름(연표)을 정리하는 방법론을 사용한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영국의 제임스 어셔 감독(1581~1656)일 것이다. 그는 창조의 순간을 기원전 4004년 10월 23일 일요일 전날의 해질녘으로 판단했다. 이 주장이 킹 제임스 버전 성경의 각주에 실리면서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런데 그의 이런 주장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근본주의적인 입장과는 달리 보아야 한다. 당시에는 고대로부터 전해오는 다양한 문서 기록에 나오는 천문현상이나 사회의 변동 사항 등을 종합적으로 정리해서 역사를 재구성하는 연대학이 유행하던 시기였다. 어셔는 성경만이 아니라 다양한 언어로 전해오는 역사 문헌들을 상세히 살핀 후에 내린 결론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어셔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잘 아는 아이작 뉴턴도 기원전 3988년을 천지창조의 연도로 받아들였다.1)
제임스 어셔 ©National Portrait Gallery, London
이렇게 일부 연대 학자들은 어셔와 같이 매우 상세한 일시를 주장했는데 당시로서는 복잡한 역법 계산과 역사적 추론을 거쳐 이런 결과들을 도출했다. 오늘날 우리가 보기엔 괴상하게 보일지 몰라도 이들의 탐구 자세는 진지했고, 이들이 역사연대표를 작성하는 작업은 현대의 지구과학자들의 진지한 연구활동과 다를 바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적어도 명확한 과정에 의해 도출된 상세하고 정밀한 수치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지질학이 본격적인 연구결과를 내놓기 시작했다. 지구의 지각 안에서 암석이 서서히 변형된다는 암석의 순환 현상은 지구의 나이를 몇 천년이 아닌 이른바 딥 타임(deep time)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수용하게 했다. 한편 19세기 초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지질학자들은 암석들을 연구하면서 그 쌓인 순서를 연속적인 층서 시스템으로 세분하기 시작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지질시대를 누대(aeon), 대(era), 기(period), 세(epoch)로 분류했다. 초기에는 시대 계층의 절대 연대까지 정하지 못했지만 20세기 중반 방사성 동위원소 연대측정법이 개발되면서 지구의 나이가 45억년에 이른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는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전환된 이후 후속된 과학적 탐구로 인해 이젠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태양이라는 은하계 변방의 작은 별에 불과한 태양의 주위를 도는 창백한 푸른 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받아들이게 된 것처럼, 이제는 지구가 몇 천 년 전에 생겨난 젊은 지구가 아니라 45억 년 전에 생성된 오래된 지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인간은 그 오랜 시간 중에서 지극히 최근의 역사에 등장했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런 사실이 하나님이 세상 곧 우주와 지구를 그리고 그 위에서 살아가는 생명체와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우리의 믿음에 영향을 주는 것일까?
성경과 과학이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초기 연대 학자들의 상당수가 성경에서 그 연대기의 출발점을 삼았다는 점과 이런 연대 학자들의 관점이 자연과학자들에게 이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자연세계의 연구로 이어졌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시의 성서학자들은 18세기 지구 역사의 시간척도가 연대 학자들의 가정보다 훨씬 더 길다는 사실을 성서 해석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19세기 지질학자들은 별다른 고민 없이 지질학이 자신들의 신앙 활동과 아무런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 학문으로 간주할 수 있었다. 이에 반해 성서를 몰 역사적으로 취급하며 성서의 기록에 대해 축자적인 해석을 고수하던 사람들은 지적, 문화적 주변부로 밀려나게 되었다.
이후 생물학자들에 의해 제기된 생명체의 다양성이 진화로부터 나타났다는 진화론의 등장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특별한 종인 인간의 지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이에 대한 여파로 19세기 이후 수면 아래로 사라졌던 젊은 지구 창조론이 다시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주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에 의해 노아 홍수로 인한 대격변이 새롭게 조명되면서 재 점화되었고, 1970년에는 좀 더 분화되면서 이들 주장에 대한 전술의 다각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일부 창조론자는 가까운 과거에 천지창조와 전 세계적인 홍수가 있었다는 증거를 찾는데 집중한 반면, 다른 창조론자들은 전술을 바꾸어 공교육에 있어서 진화론과 동일한 시간을 창조론에 할애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창조론을 진화론의 대안 이론으로 강조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진화론에 못지않게 자신들이 과학적이라는 이미지를 구축하려 했고, 과학적 창조론이라는 타이틀을 창조과학으로 재포장하며 세력을 확산하기 시작한다.2) 창조과학은 무조건적으로 과학을 배척하지 않으며 기원 과학과 경험과학을 분리해서 대응한다. 즉 경험과학은 받아들이면서도 기원 과학은 세계관의 충돌로 보고 배척하는 입장이다.3)
지적설계 이론은 이런 흐름 속에서 등장했는데, 진화론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을 예로 들면서 진화론을 부정한다. 하지만 지적설계 이론 역시 과학적인 증거를 자신들의 견해에 부합하는 것만 조건적으로 취하는 경향으로 인해 과학적이지 않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적설계 창조론자들은 신을 자연화해서 신의 지적 설계를 추론하려고 시도하기 때문에 신을 기계의 일부로 만들어버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4)
이에 대한 대안으로 유신진화론의 입장이 있다. 하지만 유신진화론은 보다 더 생명체의 진화에 대한 이론을 다루기 때문에 지구의 기원을 대상으로 한 이번 글에서는 다루지 않기로 한다. (물론 빅 히스토리라는 큰 틀에서는 서로 연관되어 있다. 하지만 생명의 기원을 다루는 다음번 기사에서 더 자세히 다루어지리라 생각되어 생략한다)
자 이제 정리해 보자.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라는 계시와 과학적 성과들을 어떻게 균형 잡힌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할까? 이것을 위해서는 성경 텍스트에 대한 기본적인 원리를 세우고, 과학과 성경 사이의 관계에 대해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일단 성경은 인간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말은 인간의 언어와 지식의 한계가 하나님의 메시지를 다 담아낼 수 없다는 뜻이다. 또한 텍스트는 그것이 결코 의미한 적이 없는 것을 의미할 수 없다. 성경에서 빅뱅 우주론에 관련된 내용처럼 보이는 부분이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을 가지고 빅뱅 우주론의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성경은 우리를 위해 쓰였지만 우리에게 쓰여 지지 않았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특정 문화와 시대의 한계를 감안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의 연장선상에서 현대의 사고방식을 고대 텍스트에 맹목적으로 부과한다면 잘못된 성경해석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성경의 저자들은 많은 글들을 우리에게 남겼지만 사전은 남기지 않았다. 따라서 주어진 단어의 의미는 그 단어의 용법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5)
우리는 지구의 기원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창조가 창세기에 나온 창조 주간 6일 동안 이루어졌다는 주장을 접했다. 이 6일을 해석하는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다. 각 날들이 짧은 연대로 이루어졌다는 젊은 지구 창조론부터, 지질연대의 장구한 세월을 의미한다는 오랜 지구 창조론에 이르기까지 비록 시간의 척도는 다르지만 하나님의 창조를 그 기원으로 밝힌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창조는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창조세계를 동역자로 계속해서 창조가 일어나도록 관여하시는 계속창조론과 그 창조가 극에 달하는 오메가 포인트를 만나면서 새 창조로 완성되는 순간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창조적 활동은 쉼 없이 달려오고 있다.
과학은 이에 대한 반론이나 걸림돌이 아니라, 과학의 탐구활동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더 풍부하고 폭넓은 시각을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창조와 진화, 성경과 과학은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를 보완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자극으로 자신의 영역에 대한 더 깊은 연구를 촉진할 매개체가 될 수 있다. 이런 기본적인 전제를 가지고 우리는 성경에서 창조를, 지구의 기원을 다시 읽어야 한다.
미국 휘튼칼리지의 교수들이 공저한 기원 이론의 한 챕터(기원 이론, 제18장 지구의 역사에 관한 성경 및 신학의 관점)에서는 지구를 인류가 번성하도록 허용한 환경 조건과 자연 자원을 지닌 놀라운 행성으로 정의하면서 성경은 삼위일체의 특성에서 창조세계를 창조하고 지탱하며 이 일에 인간을 관여시키려는 하나님을 계시한다고 언급한다. 저자는 이 챕터의 마지막을 고전적인 찬송가 “영광의 왕께 다 경배하며”로 끝맺고 있는데, 두서없는 이 글의 끝도 이 찬송가의 가사로 대신하고자 한다.
“저 아름답고 놀라운 일이 가득한 이 땅, 다 주의 조화
그 힘찬 명령에 터 잡히나니 저 푸른 바다는 옷자락이라”
_찬송가 67장
_________________
1) 지구의 깊은 역사, 마틴 러드윅, 동아시아, 2021, p.29~31
2) 지구의 깊은 역사, 마틴 러드윅, 동아시아, 2021, p.434~446
3) 창조의 신학, 박영식, 동연, 2023, p.97
4) 창조의 신학, 박영식, 동연, 2023, p.99~107
5) 기원이론, 로버트 C. 비숍, 래리 L. 펑크 외 3명, 새물결플러스, 2023, p.28~29
"저 아름답고 놀라운 일이 가득한 이 땅"
- 지구의 기원에 대하여 목회자의 관점에서 -
글 ㅣ김병국
58포병대대 벧엘교회
과신대 정회원, 목회자모임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네가 어디 있었느냐?”(욥38:4)라는 하나님의 질문에 대해 욥이 그랬듯 우리는 침묵할 수밖에 없다. 기독교인으로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고백하지만 그것을 직접 목격한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 사실을 알 수 있을까? 전통적으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경과 자연이라는 두 책을 통해 그 사실을 계시하신다고 믿어 왔다. 이 입장에서는 성경과 자연이 하나님을 드러내는 서로 다른 접근으로 보기 때문에 서로 대화하거나 서로를 보완할 수 있다고 보았다. 반면 이 두 영역을 완전히 별개의 독립된 영역으로 바라보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이 둘 중 어느 한쪽에만 진리가 있다고 여기며 서로 대립하고 갈등한다고 보는 견해도 존재한다. 그래서 어느 편을 선택할 것인지 양자택일을 강요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 중에서 어떤 입장에 서 있는가? 이 글에서는 지구의 기원 문제에 관해 기독교인으로서 우리가 서야 할 입장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한다.
사실 성경과 과학은 창조와 창조세계에 대해 서로 다른 접근법을 보인다.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선언하며 시작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세기 1:1) 우주와 지구, 그리고 생명과 인간의 기원을 하나님께 두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학의 영역에서 지구의 기원은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지구의 기원에 대한 초기의 학문적 연구는 17세기에 널리 유행하던 연대학의 흐름 속에서 이루어졌다. 연대학은 역사에 대한 연구를 위해 여러 문헌들의 자료를 연구하고 정리해서 시대적 흐름(연표)을 정리하는 방법론을 사용한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영국의 제임스 어셔 감독(1581~1656)일 것이다. 그는 창조의 순간을 기원전 4004년 10월 23일 일요일 전날의 해질녘으로 판단했다. 이 주장이 킹 제임스 버전 성경의 각주에 실리면서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런데 그의 이런 주장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근본주의적인 입장과는 달리 보아야 한다. 당시에는 고대로부터 전해오는 다양한 문서 기록에 나오는 천문현상이나 사회의 변동 사항 등을 종합적으로 정리해서 역사를 재구성하는 연대학이 유행하던 시기였다. 어셔는 성경만이 아니라 다양한 언어로 전해오는 역사 문헌들을 상세히 살핀 후에 내린 결론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어셔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잘 아는 아이작 뉴턴도 기원전 3988년을 천지창조의 연도로 받아들였다.1)
제임스 어셔 ©National Portrait Gallery, London
이렇게 일부 연대 학자들은 어셔와 같이 매우 상세한 일시를 주장했는데 당시로서는 복잡한 역법 계산과 역사적 추론을 거쳐 이런 결과들을 도출했다. 오늘날 우리가 보기엔 괴상하게 보일지 몰라도 이들의 탐구 자세는 진지했고, 이들이 역사연대표를 작성하는 작업은 현대의 지구과학자들의 진지한 연구활동과 다를 바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적어도 명확한 과정에 의해 도출된 상세하고 정밀한 수치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지질학이 본격적인 연구결과를 내놓기 시작했다. 지구의 지각 안에서 암석이 서서히 변형된다는 암석의 순환 현상은 지구의 나이를 몇 천년이 아닌 이른바 딥 타임(deep time)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수용하게 했다. 한편 19세기 초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지질학자들은 암석들을 연구하면서 그 쌓인 순서를 연속적인 층서 시스템으로 세분하기 시작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지질시대를 누대(aeon), 대(era), 기(period), 세(epoch)로 분류했다. 초기에는 시대 계층의 절대 연대까지 정하지 못했지만 20세기 중반 방사성 동위원소 연대측정법이 개발되면서 지구의 나이가 45억년에 이른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는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전환된 이후 후속된 과학적 탐구로 인해 이젠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태양이라는 은하계 변방의 작은 별에 불과한 태양의 주위를 도는 창백한 푸른 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받아들이게 된 것처럼, 이제는 지구가 몇 천 년 전에 생겨난 젊은 지구가 아니라 45억 년 전에 생성된 오래된 지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인간은 그 오랜 시간 중에서 지극히 최근의 역사에 등장했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런 사실이 하나님이 세상 곧 우주와 지구를 그리고 그 위에서 살아가는 생명체와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우리의 믿음에 영향을 주는 것일까?
성경과 과학이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초기 연대 학자들의 상당수가 성경에서 그 연대기의 출발점을 삼았다는 점과 이런 연대 학자들의 관점이 자연과학자들에게 이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자연세계의 연구로 이어졌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시의 성서학자들은 18세기 지구 역사의 시간척도가 연대 학자들의 가정보다 훨씬 더 길다는 사실을 성서 해석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19세기 지질학자들은 별다른 고민 없이 지질학이 자신들의 신앙 활동과 아무런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 학문으로 간주할 수 있었다. 이에 반해 성서를 몰 역사적으로 취급하며 성서의 기록에 대해 축자적인 해석을 고수하던 사람들은 지적, 문화적 주변부로 밀려나게 되었다.
이후 생물학자들에 의해 제기된 생명체의 다양성이 진화로부터 나타났다는 진화론의 등장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특별한 종인 인간의 지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이에 대한 여파로 19세기 이후 수면 아래로 사라졌던 젊은 지구 창조론이 다시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주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에 의해 노아 홍수로 인한 대격변이 새롭게 조명되면서 재 점화되었고, 1970년에는 좀 더 분화되면서 이들 주장에 대한 전술의 다각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일부 창조론자는 가까운 과거에 천지창조와 전 세계적인 홍수가 있었다는 증거를 찾는데 집중한 반면, 다른 창조론자들은 전술을 바꾸어 공교육에 있어서 진화론과 동일한 시간을 창조론에 할애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창조론을 진화론의 대안 이론으로 강조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진화론에 못지않게 자신들이 과학적이라는 이미지를 구축하려 했고, 과학적 창조론이라는 타이틀을 창조과학으로 재포장하며 세력을 확산하기 시작한다.2) 창조과학은 무조건적으로 과학을 배척하지 않으며 기원 과학과 경험과학을 분리해서 대응한다. 즉 경험과학은 받아들이면서도 기원 과학은 세계관의 충돌로 보고 배척하는 입장이다.3)
지적설계 이론은 이런 흐름 속에서 등장했는데, 진화론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을 예로 들면서 진화론을 부정한다. 하지만 지적설계 이론 역시 과학적인 증거를 자신들의 견해에 부합하는 것만 조건적으로 취하는 경향으로 인해 과학적이지 않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적설계 창조론자들은 신을 자연화해서 신의 지적 설계를 추론하려고 시도하기 때문에 신을 기계의 일부로 만들어버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4)
이에 대한 대안으로 유신진화론의 입장이 있다. 하지만 유신진화론은 보다 더 생명체의 진화에 대한 이론을 다루기 때문에 지구의 기원을 대상으로 한 이번 글에서는 다루지 않기로 한다. (물론 빅 히스토리라는 큰 틀에서는 서로 연관되어 있다. 하지만 생명의 기원을 다루는 다음번 기사에서 더 자세히 다루어지리라 생각되어 생략한다)
자 이제 정리해 보자.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라는 계시와 과학적 성과들을 어떻게 균형 잡힌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할까? 이것을 위해서는 성경 텍스트에 대한 기본적인 원리를 세우고, 과학과 성경 사이의 관계에 대해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일단 성경은 인간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말은 인간의 언어와 지식의 한계가 하나님의 메시지를 다 담아낼 수 없다는 뜻이다. 또한 텍스트는 그것이 결코 의미한 적이 없는 것을 의미할 수 없다. 성경에서 빅뱅 우주론에 관련된 내용처럼 보이는 부분이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을 가지고 빅뱅 우주론의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성경은 우리를 위해 쓰였지만 우리에게 쓰여 지지 않았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특정 문화와 시대의 한계를 감안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의 연장선상에서 현대의 사고방식을 고대 텍스트에 맹목적으로 부과한다면 잘못된 성경해석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성경의 저자들은 많은 글들을 우리에게 남겼지만 사전은 남기지 않았다. 따라서 주어진 단어의 의미는 그 단어의 용법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5)
우리는 지구의 기원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창조가 창세기에 나온 창조 주간 6일 동안 이루어졌다는 주장을 접했다. 이 6일을 해석하는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다. 각 날들이 짧은 연대로 이루어졌다는 젊은 지구 창조론부터, 지질연대의 장구한 세월을 의미한다는 오랜 지구 창조론에 이르기까지 비록 시간의 척도는 다르지만 하나님의 창조를 그 기원으로 밝힌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창조는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창조세계를 동역자로 계속해서 창조가 일어나도록 관여하시는 계속창조론과 그 창조가 극에 달하는 오메가 포인트를 만나면서 새 창조로 완성되는 순간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창조적 활동은 쉼 없이 달려오고 있다.
과학은 이에 대한 반론이나 걸림돌이 아니라, 과학의 탐구활동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더 풍부하고 폭넓은 시각을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창조와 진화, 성경과 과학은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를 보완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자극으로 자신의 영역에 대한 더 깊은 연구를 촉진할 매개체가 될 수 있다. 이런 기본적인 전제를 가지고 우리는 성경에서 창조를, 지구의 기원을 다시 읽어야 한다.
미국 휘튼칼리지의 교수들이 공저한 기원 이론의 한 챕터(기원 이론, 제18장 지구의 역사에 관한 성경 및 신학의 관점)에서는 지구를 인류가 번성하도록 허용한 환경 조건과 자연 자원을 지닌 놀라운 행성으로 정의하면서 성경은 삼위일체의 특성에서 창조세계를 창조하고 지탱하며 이 일에 인간을 관여시키려는 하나님을 계시한다고 언급한다. 저자는 이 챕터의 마지막을 고전적인 찬송가 “영광의 왕께 다 경배하며”로 끝맺고 있는데, 두서없는 이 글의 끝도 이 찬송가의 가사로 대신하고자 한다.
“저 아름답고 놀라운 일이 가득한 이 땅, 다 주의 조화
그 힘찬 명령에 터 잡히나니 저 푸른 바다는 옷자락이라”
_찬송가 6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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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구의 깊은 역사, 마틴 러드윅, 동아시아, 2021, p.29~31
2) 지구의 깊은 역사, 마틴 러드윅, 동아시아, 2021, p.434~446
3) 창조의 신학, 박영식, 동연, 2023, p.97
4) 창조의 신학, 박영식, 동연, 2023, p.99~107
5) 기원이론, 로버트 C. 비숍, 래리 L. 펑크 외 3명, 새물결플러스, 2023, p.2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