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육 통일체의 전인적 존재로 지음 받은 인간 (이강문)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24-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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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육 통일체의 전인적 존재로 지음 받은 인간

영혼의 기원에 대한 한 목회자의 관점


글ㅣ이강문
강북바른교회 담임목사 / 교육학 박사
과신대 목회자모임


@Tim Marshall, Unsplash


영혼의 기원에 대한 질문은 인간의 기원과 맥을 같이 하여,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인간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근원적 질문입니다. 영혼의 기원에 대한 문제는 편의상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형이상학적, 신학적 이해이고, 다른 하나는 성경적 이해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인간은 무엇보다 존귀한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창세기 1-2장의 말씀에 기인합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26-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2:7)


이 말씀에 따르면, 인간의 몸은 땅의 흙으로 지음 받지만, 인간의 영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집니다. 이 말은 인간의 몸은 동물의 진화 과정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인간의 영혼이나 영은 그럴 수 없다는 뜻일까요? 하나님은 흙으로 빚은 인간의 몸에 생명의 영을 불어넣음으로써 인간의 영혼을 창조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초기 교부들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되었다는 말씀이 창조자에 의해 직접 주어지는 인간의 영혼을 표현한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영혼이 인간의 몸에 어떻게 들어오는가에 대해서는 ‘영혼 선재설, 영혼 창조설, 영혼 유전설’ 이렇게 크게 세 가지 주장이 있습니다. 


우선 ‘영혼 선재설’은 인간의 영혼이 육체보다 먼저 존재하고 있다가 육체가 수태 또는 출생할 때 인간의 몸 속으로 들어온다는 주장입니다. 이는 플라톤적 유형의 오리게네스의 주장입니다. 그에 따르면 영혼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고 몸보다 선재하였는데 영혼이 죄를 범함으로써 그 형벌로 몸에 덧입혀졌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리스 교부들은 이러한 견해를 거부하였는데, 사실 이 견해는 주후 6세기에 가서 공식적으로 단죄되었습니다. 육체보다 먼저 존재하는 영혼이 죄를 지은 결과 모든 인간에게 죄와 사망이 찾아왔다는 이러한 주장은 성경의 가르침과도 어긋납니다. 성경은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롬 5:12).


그리스 교부들 사이에서 우세했던 이론은 ‘영혼 창조설’입니다. 이는 개개인의 영혼이 몸 속으로 주입되는 순간에 하나님에 의해 독립적으로 창조된다는 주장입니다. 영혼이 육체에 들어가는 시기는 어머니의 몸 속에 태아가 생길 때이거나, 아이가 태어날 때 또는 이 두 시점 중의 어느 때일 것이라 말합니다. 암브로시우스나 제롬 같은 서방 교회의 저술가들은 이와 같은 견해를 지지했습니다. 이에 따르면 몸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지만 영혼은 하나님께서 직접 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모든 사람은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죄인이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는데(시 51:5) 하나님께서 타락한 영혼을 창조하셨다면, 하나님이 죄의 창시자라는 비난을 면키 어렵게 됩니다. 사람의 영혼이 죄와 관계없이 깨끗하게 창조됨으로 아담의 죄가 그 후손에게는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는 펠라기우스의 이단적 주장도 영혼 창조설을 지지하였으며, 가톨릭의 입장이기도 합니다. 


@Louis Hansel, Unsplash


마지막으로 부모로부터 몸과 영혼을 함께 물려받는다는 영혼 유전설은, 테르툴리아누스가 가장 먼저 주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대체적으로 영혼 유전설에 기울어져 있었는데, 각각의 영혼은 부모의 영혼으로부터 발생된다고 보았습니다. 인간은 최초의 부부로부터 타락한 본성, 즉 죽음과 죄악을 상속받았기 때문에, 부모로부터 몸과 영혼을 함께 물려받는다는 영혼 유전설은 원죄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적 개념과 잘 부합되는 것 같습니다. 영혼이 인간의 몸에 어떻게 들어오는지에 대한 세 가지 주장 중에서 영혼 유전설은 루터파 신학자들과 대부분의 개신교 신학자들이 가장 많이 지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유전설에 기울어져 있으면서도 이 문제에 대해서 결코 마음을 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성 예로니모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고민을 전합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7)는 말씀과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창2:2)는 말씀, 그리고 사도 바울이 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5:12)는 말씀 사이에 어떤 모순은 없는 것인지 문제를 제기하면서, 자기가 이 문제에 대해서 어느 것이 옳은지 잘 모르겠다고 솔직하게 고백하였습니다. 


이렇듯 영혼에 대한 신학적 이해에서 지배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해석은 형이상학적 해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형이상학적 해석에 따르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본질이나 속성을 가리키는데, 여기에 따라 인간이 만들어졌으니,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본질이나 속성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내재해 있는 하나님의 본질이나 속성은 무엇일까요? 형이상학적 해석에 따르면, 인간에 내재해 있는 하나님의 본질은 영혼 혹은 정신이라고 본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교 교부들은 영혼과 육체 같은 플라톤적이고 이원론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인간을 설명하였지만, 이원론이 성경적 인간학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강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이들은 마니교의 이원론을 배격하고 인간을 영혼과 육체로 분리하여 설명하던 것을 다시 통합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용어 사용의 한계로 인해 이원론적 도식을 완전하게 청산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성경적 관점에서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분리되는 존재가 아닌 영육 통일체의 전인적 존재입니다. 창세기의 인간 창조 기사를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고 말씀합니다(창2:7).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하나님의 입김을 불어넣어서 생령, 곧 ‘살아 있는 존재’, 혹은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네페쉬’를 영어성경에서는 living soul 혹은 living being이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즉 살아 있는 혼, 살아 있는 영, 산 영, 사람입니다. 

네페쉬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아주 다양하게 번역됩니다. 영혼이라고 한 곳도 있고, 살아 있는 존재, 생명, 자아, 사랑, 정열, 식욕, 감동, 마음, 혼, 성품 등 쓰이는 곳에 따라 굉장히 다양하게 번역을 해서 혼란스럽기까지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 철학의 이원론적 영향으로, 인간은 물질적인 육체 외에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네페쉬라는 단어는 ‘인간의 전 존재’를 의미합니다. 몸과 정신 뿐만 아니라 나의 여러 특성들, 인격체로서의 나의 특징들, 혹은 나의 능력이나 소유 같은 것들을 다 합쳐서, 총체적인 한 인간의 존재를 네페쉬라고 부릅니다. 이렇듯 성경은 인간을 영혼과 육체로 나누어 보거나(이분설), 영•혼•육으로(삼분설) 분리해서 이해하지 않고, 영육 통일체의 전인적 존재로 이해합니다. 

이러한 이해는 네페쉬의 다른 용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물고기와 공중의 새들을 창조하실 때, 동물들도 히브리어 ‘네페쉬’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네페쉬란 단순히 인간에게만, 혹은 인간의 영혼에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창세기 1:20,21,24에서 ‘네페쉬’란 표현은 ‘생령’으로 번역되지 않고 단지 ‘생물’로 번역되었습니다. 다른 피조물의 경우, 그 원문은 ‘네페쉬’인데, ‘생물’이란 말로 번역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그리스적 관점에서 영혼(네페쉬)은 몸보다 훨씬 고등한 부분으로 몸과는 별개의 실체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나는 히브리적 관점에서 보면, 그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생물’ 곧 ‘살아 있는 존재’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생령이 된지라”(창2:7)의 히브리어 원문인 ‘네페쉬 하야’는 인간의 유기적 통일성을 강조하는 전인적 표현이 분명합니다. 


성경은 인간이나 동물이나 모두 ‘살아 있는 존재로서의 생명체’로 부릅니다. 그렇다면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동물에게도 생명의 숨이 있기는 하지만(창7:22), 하나님이 생명의 숨을 동물에게 불어넣어 주셨다는 기록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생명체 중에서 오직 사람에게만 특별히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동물을 포함한 모든 생물체와 사람의 차이점입니다. 사람은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생명체’가 되기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생명의 숨’을 필요로 하는 존재입니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존재입니다. 성경은 영혼이 파괴될 수 없는 실체이기에 영혼의 불멸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인간은 피조된 존재이며, 따라서 창조주께 의존해야만 존재를 지속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본래적인 불멸성’을 소유한 존재가 아닌, ‘부여된 불멸성’을 소유한 존재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인간은 동물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근대 철학 이후, 영혼에 대한 형이상학적 개념은 서서히 뒤로 물러가게 되고, 그 자리를 ‘마음, 정신, 의식’같은 개념들이 대체하여 왔습니다. 이제는 영혼에 대한 형이상학적 논의 대신 마음, 정신, 의식에 대한 인식론적 논의가 주요 흐름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일정한 실체로서의 영혼이 아니라 인식론적 능력이나 기능으로서의 마음, 의식을 주요 관심으로 다룹니다. 이처럼 외향적인 사유들이 전면에 나서면서 인간도 자연과학적 분석의 대상이 되었지만, 이로 인해 인간의 고유하고 섬세한 측면은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기도 합니다. 인간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는 한쪽 측면만의 노력으로는 온전할 수 없습니다. 철학이나 심리학, 뇌과학과 신학 등 포괄적이면서 섬세한 탐구는 여전히 필요하고, 그런 의미에서 신학과 과학은 언제든지 대화해야 합니다. 


[참고문헌]

J.N.D. 켈러. (2004). 고대기독교교리사. 박희석 역. 크리스챤다이제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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