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인간의 공생으로 그리는 미래 세상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22-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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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인간의 공생으로 그리는 미래 세상

『인공지능 시대, 인간을 묻다』를 읽고


『인공지능 시대, 인간을 묻다』 / 박일준 지음 / 동연 펴냄 / 204쪽 / 1만 3000원


4차 산업혁명에서 예상되는 변화는 과학과 기술의 결합인 테크노사이언스를 기반으로 한다. 청소 로봇, 섹스로봇, 자율주행 자동차 등 노동의 주체와 노동의 형태 및 노동력의 범위에  커다란 변화는 이미 우리 일상생활에 침투해있다. 강인공지능의 등장을 예견하고 있는 전문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들의 존재는 우리 인간에게 인간성과 인간의 능력에 점점 도전과  위기의식을 갖게 한다. 인간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또 인공지능은 우리 인간처럼 발전하며 급기야는 인간을 넘어서 인간을 지배하기에 이르게 될까? 심정적으로 모호하고 두려운 현대인들에게 『인공지능시대, 인간을 묻다』는 포스트 휴먼시대에 인간은 과연 어떤 존재론적 인식이 있어야 하며 혼종적 인간인 우리가 인공지능과 어떠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궁극의 혜안을 제시한다.

2015년, 세계경제포럼 회장 클라우스 슈바프는 제4차 산업혁명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했다. 제4차 산업혁명이란 3차 산업혁명을 기반으로 디지털, 바이오와 물리학 사이의 모든 경계를 허무는 융합 기술 혁명이다. 제4차 산업혁명에는 인간 대신 기계가 더 효율적인 노동을 하게 되어 생산성이 증가하고, 관련 일자리가 생겨나는 등 여러 긍정적인 측면들이 있다. 하지만 인공지능과 기계가 인간이 설 자리를 빼앗거나(단순노동직/사무직의 실업) 공격할 수도 있다는 부정적인 전망도 존재한다. 또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 미디어에서 그리는 미래 세상은 디스토피아Dystopia적인 경우가 많다. 과학 기술은 극도로 발전했지만, 소수 상류층이 그것을 독점하고, 일반적인 시민들은 철저히 억압당하며 착취당하는 내용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이런 창작물들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 풍경을 묘사한 것임에도, 자본주의 논리로 작동되는 현대에 기반해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현실적이다.

제4차 산업혁명 이후의 세계를 우려하고, 기술 발전의 부정적 측면을 다룸으로써 미디어를 접하는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워 주는 것이 창작자들의 의도일 것이다. 이러한 기술 발전의 양면성을 인지하고 디스토피아가 도래하지 않도록 올바른 방향으로 기술을 이끄는 것이 인류가 당면한 과제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변화하는 시대에 맞는 새로운 인문학적 성찰과 담론이 선행되어야 한다.

 


종교철학자인 저자(박일준)는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경쟁이 아닌 협동과 공생 정신을 제시한다. 끝없는 경쟁과 획일적인 기준을 가진 교육 시스템은 다중지능 개념을 제시한 하워드 가드너가 말했듯 규격에 맞지 않는 사람을 배제하고 지능적 다양성을 억압한다. 이러한 교육 시스템은 개혁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변화하는 환경에 맞게 대처하려면 서로 다른 지능들이 협동하고 공생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인간 사이의 경쟁뿐만이 아니라 인간과 기계의 대결 구도에 대해서도 비판한다. 경쟁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자연히 ‘인간 대 기계’의 이분법적 논리로 사고하고 있다. 현미경이나 망원경 등의 도구가 발명되면서 육안으로는 볼 수 없었던 것을 보게 된 것처럼, 인류는 기술의 발달에 따라 인식 범위를 확장할 수 있게 되었다. 저자는 이러한 도구나 기계, 인공지능은 결국 인간이 만들어 낸, 인간으로부터 온 것임을 지적하며 인간 대 기계의 구도는 성립될 수 없다고 말한다.
 

"우리 시대, 이 신화적 시대에 우리는 모두 키메라들, 즉 이론화되고 가공된 기계와 유기체들의 혼종들이다. "
- 도나 해러웨이, 사이보그 선언문 中


많은 사람들은 포스트휴먼 혹은 트랜스휴먼 시대는 아직 오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포스트휴먼’은 20세기 초부터 이미 여러 영화나 소설 속에 등장하고 있었다. 포스트휴먼은 첨단 기술과 결합하여 성능이 향상된 인간을 말한다. 창작물 속의 포스트휴먼의 예시로 최첨단 수트를 입고 활약하는 아이언맨이나, 전신이 사이보그인 가제트 형사 등을 들 수 있다. 접두사 -post는 ‘탈-’, ‘이후의’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Post-human, 즉 인간 이후의 시대에는 생물학적 인간에 국한되지 않는 새로운 인간에 대한 정의가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포스트휴먼 시대의 사람들은 다중적으로 연장되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을 사용할 때, 우리는 물리적으로 한 자리에 있으면서도 정신은 가상의 공간을 돌아다닌다. 정신이 신체와 연결된 장치들을 매개로 외부로 연장되는 것이다. 이를 앤디 클라크는 ‘연장된 정신 extended mind’이라고 표현한다. 이렇듯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다중적인 시공간을 살아가는 현 인류는 뉴턴 물리학의 시공간만으로는 규정할 수 없다. 연장된 정신이라는 논제는 자아의 경계를 생물학적 인체로 설정하는 기존의 접근법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한다.

클라크는 자아란 그 심층에서부터 비생물적 외부 도구를 그 일부로 포함하는 탄력적이면서 개방적인 시스템이라고 보았다. 기계와 인간이 융합된 존재, 기계-인간의 '혼종 hybrirds'들은 데카르트적인 인간 자아가 아닌 잡종적이며 유동적인 자아 개념을 갖게 된다. 혼종적 존재의 출현은 생명을 규정하던 경계들을 새롭게 개편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불어, 혼종적 존재론은 인종이나 성별, 외적인 신체 특징의 해체를 부른다. 사이보그는 인간/비인간(기계)의 이분법에서 비인간, 배타성의 대상이 되는 타자의 위치를 가지고 있다. 이는 제국주의/식민주의에서의 약자와 맥락을 같이 한다. 이 사이보그를 인간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들은 인간/비인간, 또는 강자/약자 이분법의 경계를 허물 수 있다.



저자는 인간이 가진 여타의 생물종들이나 기계들과의 차별점은 유연성을 지닌 협동력이라고 꼽는다. 그리고 이런 협동의 구심점은 종교였다고 한다. 유발 하라리가 말하는 ‘호모 데우스 Homo Deus’는 신이 된 인간을 의미한다. 호모 사피엔스들이 영원한 행복과 불멸을 위해 인간 자체를 변환시키거나 외장 도구들과 직접 통합됨으로써 호모 데우스로 업그레이드된다. 하라리는 기근과 전쟁, 질병이 어느 정도 통제가 가능한 21세기의 인간들의 목표는 신성을 달성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세속화됨에 따라 신 중심의 세계로부터 인간이 지배하는 인간 중심의 세계로 이동하게 되었는데, 이는 곧 신의 완전한 부재를 뜻하지는 않는다. 이전에는 신이 보편적인 윤리와 도덕의 초월적 토대였다면, 지금의 신은 개인의 내면에 내재화되어 ‘자기만의 신’이 되었다. 자신만을 위한 내적인 기준(신)을 구축한다는 것이다.

포스트휴먼 시대를 대하는 올바른 자세는 서로를 존중하며 타자에게 공감하는 기독교의 평등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기계 취급을 받던 평범한 사람들에게 존엄한 인권을 부여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근대에 인간의 노동력으로 움직이던 산업을 비인간 기계로 대치할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되면서라고 말한다. 약자(비인간화된 존재)의 편에 서서 공생을 도모하는 기독교 정신의 필요성을 다시금 느꼈다.




글 | 노은서

과학과 신학에 관련된 책들을 읽으며 공부하고 서평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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