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이슬람과 유대교의 과학
- 마지스테리아 2・3장 -
글ㅣ전경훈
《마지스테리아》 역자
지난달에 다룬 《마지스테리아》 1장에서는 알렉산드리아의 히파티아 살해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고대 말기에 종교와 과학이 어떠한 관계에 있었는지를 논했다. 저자 스펜서는 흔히 광신적이고 권위적인 종교가 합리적인 과학을 탄압한 대표적 사례로 언급되는 이 사건을 분석한 뒤 결론적으로 이러한 사건은 대개 더 복잡하고 다층적인 권력 갈등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 서구 근대에 이르러서야 오늘날 우리가 아는 것과 같은 종교와 과학 사이의 충돌 서사가 성립되었다는 점, 고대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당대의 과학이라 할 수 있는 자연철학에 대한 입장은 다양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여하튼 과학의 뿌리는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이라 할 수 있고, 이는 헬레니즘 문화와 사상을 바탕으로 고대 세계에 정착하고 확산했다. 그러나 스펜서가 이미 1장에서 지적했듯이 로마제국 말기에는 이미 과학 발전이 정체되어 있었고, 그리스도교의 부상보다는 제국의 몰락에 따른 정치와 사회의 혼돈 때문에 학문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유럽 전역이 이른바 ‘암흑시대’로 접어들었을 때 헬레니즘 문화와 사상을 받아들여 과학을 발전시킨 것은 이슬람 제국의 무슬림과 유대인이었다. 《마지스테리아》 2장과 3장에서는 12-13세기에 이르러 중세 유럽이 안정되기까지 과학을 계승하고 발전시켰던 무슬림들과 유대인들을 다루면서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고찰한다.
오늘날까지 이슬람 과학에 대해서는 의견의 다툼이 있긴 하지만 7세기에서 12세기까지 이슬람 세계가 과학 발전을 주도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아라비아에서 시작된 이슬람 세력은 서유럽의 안달루시아에서부터 인도에 이르기까지 세력을 확장했고,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은 물론 인도의 수학까지 받아들여 수학과 천문학은 물론 의학과 화학 분야에서도 많은 업적을 이루었다. 이 시기 이슬람의 과학을 바라보는 시각은 크게 둘로 나뉘는데, 하나는 이슬람 과학이라는 것이 단지 그리스 과학을 차용한 것에 불과하다는 부정적 시각이고, 다른 하나는 이 시기의 이슬람이 실제로 찬란한 과학 발전을 이루었다는 긍정적 시각이다. 스펜서는 상반된 두 가지 시각 모두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이 시기에 이슬람과 과학의 관계가 실제로 어떠했는지를 살핀다.

꿀로 약을 만드는 모습. 그리스인 의사 디오스코리데스의 《약물에 관하여》의 아랍어 번역본에 실린 삽화. (p.64)
@metmuseum.org
우선, 이슬람 과학이라는 것이 그리스 고전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수용되었고 그 번역자들 또한 대부분 비잔틴제국에서 밀려난 그리스도인들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이슬람 세계가 그것을 인정하고 장려하는 개방적이고 수용적이고 다원적인 태도를 가졌던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더욱이 칼리파들은 곳곳에 도서관을 짓고 천문대를 설치하는 등 과학 발전을 적극적으로 후원했고, 이를 바탕으로 그리스 과학을 넘어서는 이슬람 과학자들이 탄생했다. 이러한 현상은 이슬람 제국들의 수도에만 국한된 것도 아니어서 학자들은 제국 전체를 활동 반경으로 삼았고 이슬람 세계 내 학문적 교류도 활발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외래적이고 합리적인 학문이 종교에 다시 적용되는 데서 발생했다. 이 외래의 학문에 대한 수용이 빠르고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슬람이라는 종교 자체에 대해서는 양가적일 수밖에 없었다. 인과율을 전제로 하는 과학의 법칙성은 신의 전능성과 충돌했다. 또한 자연에 대한 관찰로 얻은 경험적 지식은 쿠란을 통한 계시를 불완전한 것으로 만들 위험이 있었다. 그리고 이슬람 사회에는 이런 문제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을 지닌 다양한 분파들이 존재했고 이슬람 과학의 발전은 이들 사이에서 긴장을 일으켰다. 특히 9세기에 이슬람 과학을 지원한 칼리파 알마문이 합리주의 신학 전통인 무타질라를 지지하면서 미흐나라는 일종의 종교재판을 통해 보수적 종교학자들을 공격한 것은 강력한 역류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10세기 초 신학자 알아샤리는 세상 모든 사건이 매 순간 원자적 차원에서 신이 유발하고 지휘하는 것이라는 우인론을 발전시켰고, 이러한 흐름은 11세기 말 알가잘리로 이어져 인과율은 부정되고 신의 전능한 권위가 더욱 강조되었으며, 14세기 이븐 할둔에 이르면 과학과 종교가 전혀 상관없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물론 과학에 대한 반동이 전체 시대를 관통하는 절대적이거나 일반적 흐름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문제는 이슬람 세계에서는 종교와 정치가 일치하면서 중세 유럽의 대학과 같은 자율적이고 독자적인 학문의 장이 만들어지지 않았기에, 질문을 던지고 서로 다른 의견을 교환하는 환경이 지속적으로 조성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수많은 학교와 도서관이 설립되긴 했으나 어디까지나 칼리파를 비롯한 권력자의 후원으로 생겨난 것이어서 자율성은 물론이고 지속성을 갖기도 어려웠다. 따라서 이슬람 과학은 한때 탁월한 성과를 냈음에도 12세기 이후 갑작스레 쇠퇴했고, 유럽에서와 같은 과학혁명을 일으키지 못했다.
한편,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의 원류가 되는 유일신 신앙을 가졌던 유대인들은 소수민족에 불과했음에도 이슬람 세계 안에서나 중세 유럽의 그리스도교 세계 안에서나 과학 발전에서 독특하고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세기에 활동한 알렉산드리아의 필론의 예에서 보듯 유대인들은 일찍부터 히브리어 성경과 그리스 철학을 조화시키고자 노력했다. 특히 창세기 해석에서 그리스의 철학을 끌어다 썼고 창조주를 로고스 개념과 연결시켜 이해하기도 했다. 이슬람 세계에서는 다수의 유대인이 의사로 활동했고, 수학과 천문학에서 걸출한 학자들을 배출했다. 특히 이슬람 제국의 전역에 흩어져 사는 소수민족답게 여러 언어에 능통한 인물이 많아서 그리스 고전들을 아랍어로 번역하거나 이슬람 학술서들을 히브리어나 유럽어로 번역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중세 후반 유대인 지성계에 우뚝 선 인물이 바로 마이모니데스다. 코르도바에서 태어난 마이모니데스는 이슬람 세계의 격랑 속에서 여러 지역을 거쳐 결국 카이로에 정착하여 의사로 활동하며 파티마 왕조의 궁정에 출입하는 동시에, 유대인 공동체 수장으로 임명되어 유대교 율법을 해석하고 판결했다. 그가 쓴 《미슈네 토라》는 이후 유대교 법리학의 시금석이 되며 《방황하는 자들을 위한 안내서》는 아리스토텔레스로 대표되는 그리스 철학과 신앙의 조화를 추구했다. 그는 경험을 앎의 원천으로 중시하고 이성적 판단을 강조하면서 자연철학을 포함하는 철학이란 모두 성경의 계시된 진리를 이해하기 위한 하녀라고 주장했다. 성경에 대한 축자적 이해를 반대했고, 경험과 추론을 통해 알게 된 지식과 성경이 모순되는 것으로 여겨질 땐 성경을 잘못 읽은 것이라고 보았다. 요컨대 그는 과학은 명백히 중요한 앎의 수단이라고 단호히 긍정하면서 형이상학의 보조적인 학문으로 보았다.

모세 벤 마이몬(마이모니데스)의 《방황하는 자들을 위한 안내서》의 한 페이지 (p.92) @wikimedia
유대인 학자들 사이에서 그리스 철학이 수용되고 많은 유대인 과학자가 배출되었으며, 마이모니데스가 신앙과 이성 사이의 균형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탈무드가 대표하는 유대교의 성경 해석 전통이 본래부터 매우 개방적이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성경 안에 서로 상충하는 내용이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성경이 열린 책으로 남아 있기를 바랐다. 유대교 안에서도 성경을 해석하는 다양한 입장들이 존재했고 그리스 철학의 도입과 적용은 그런 다양한 입장들 가운데 하나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또한 세상 만물이 하나님의 창조물이라고 보는 유대교의 관점은 고대의 다른 종교들과 달리 세상을 탈신비화하는 데 일조했고, 그리스의 자연철학을 사물에 담긴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받아들이는 여지를 만들었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경우에도 이성과 논리의 그리스 철학이 신앙에 적용될 때 발생하는 갈등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특히 이슬람의 쿠란이 갖는 권위에 영향을 받은 유대인들은 기존의 탈무드의 개방적 해석보다는 더욱 확실하고 강력한 해석을 요구하기도 했다. 게다가 현실적으로 유대인들의 공동체에서는 토라와 율법이 구성원들을 안으로 잡아당기는 구심력으로 작용한 데 반해 자연철학은 그들을 밖으로 끌어당기는 원심력으로 작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자연철학에 대한 의구심은 늘 자리하고 있었고, 마이모니데스 같은 위대한 학자이자 지도자인 인물에 대한 비판도 없지 않았다.
사실 유대인 지성계에서 다양한 의견들이 교류되고 뛰어난 과학자들이 배출될 수 있었던 것은, 흩어진 소수민족의 종교인 유대교가 그리스도교나 이슬람과 달리 중앙집권적이고 체계적인 제도와 기관을 만들 수 없었기에 가능했던 측면도 크다. 그리고 그것은 마이모니데스 이후 유대인 지성계가 퇴조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유대인 학자들의 활동은 이슬람 세계가 그리스의 학문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기에, 전반적으로 이슬람 세계가 퇴조하면서 이슬람 과학도 쇠퇴하고 이슬람 신학이 보수화되면서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중세 말로 갈수록 이슬람 세계는 물론 그리스도교 세계에서도 유대인 공동체의 존립 자체가 위협을 받으면서 유대인 과학자들도 자취를 감추게 된다.
요컨대 스펜서는 유럽이 암흑기에 접어들었던 동안 이슬람과 유대교 안에서 과학이 발전했던 과정을 고찰하여 정리했고, 그 안에서 과학과 종교가 맺었던 관계 또한 단편적이거나 일률적이지 않았음을 역설한다. 한편으로, 이슬람과 유대교 모두 종교 내적인 필요에 의해 그리스의 자연철학을 수용하고 그것을 더욱 발전시켰고, 경전의 해석과 신학에 적용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의 자연철학이 계시된 진리와 상충하며 일으키는 긴장과 위협을 의식하여 이성과 신앙을 분리하고자 시도했고, 더 나아가서 계시에 반하는 주장을 비판하고 처벌하기도 했다. 어느 지역, 어느 시대에 어느 한 쪽의 흐름이 절대적이었던 적은 없으며, 어느 한 쪽의 흐름이 우세해지는 경우에도 거기에는 여러 가지 역사적 요인들이 함께 작용했다. 이러한 통찰을 염두에 둔다면 다음 장부터 본격적으로 다루는 그리스도교와 과학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중세 이슬람과 유대교의 과학
- 마지스테리아 2・3장 -
글ㅣ전경훈
《마지스테리아》 역자
지난달에 다룬 《마지스테리아》 1장에서는 알렉산드리아의 히파티아 살해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고대 말기에 종교와 과학이 어떠한 관계에 있었는지를 논했다. 저자 스펜서는 흔히 광신적이고 권위적인 종교가 합리적인 과학을 탄압한 대표적 사례로 언급되는 이 사건을 분석한 뒤 결론적으로 이러한 사건은 대개 더 복잡하고 다층적인 권력 갈등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 서구 근대에 이르러서야 오늘날 우리가 아는 것과 같은 종교와 과학 사이의 충돌 서사가 성립되었다는 점, 고대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당대의 과학이라 할 수 있는 자연철학에 대한 입장은 다양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여하튼 과학의 뿌리는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이라 할 수 있고, 이는 헬레니즘 문화와 사상을 바탕으로 고대 세계에 정착하고 확산했다. 그러나 스펜서가 이미 1장에서 지적했듯이 로마제국 말기에는 이미 과학 발전이 정체되어 있었고, 그리스도교의 부상보다는 제국의 몰락에 따른 정치와 사회의 혼돈 때문에 학문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유럽 전역이 이른바 ‘암흑시대’로 접어들었을 때 헬레니즘 문화와 사상을 받아들여 과학을 발전시킨 것은 이슬람 제국의 무슬림과 유대인이었다. 《마지스테리아》 2장과 3장에서는 12-13세기에 이르러 중세 유럽이 안정되기까지 과학을 계승하고 발전시켰던 무슬림들과 유대인들을 다루면서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고찰한다.
오늘날까지 이슬람 과학에 대해서는 의견의 다툼이 있긴 하지만 7세기에서 12세기까지 이슬람 세계가 과학 발전을 주도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아라비아에서 시작된 이슬람 세력은 서유럽의 안달루시아에서부터 인도에 이르기까지 세력을 확장했고,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은 물론 인도의 수학까지 받아들여 수학과 천문학은 물론 의학과 화학 분야에서도 많은 업적을 이루었다. 이 시기 이슬람의 과학을 바라보는 시각은 크게 둘로 나뉘는데, 하나는 이슬람 과학이라는 것이 단지 그리스 과학을 차용한 것에 불과하다는 부정적 시각이고, 다른 하나는 이 시기의 이슬람이 실제로 찬란한 과학 발전을 이루었다는 긍정적 시각이다. 스펜서는 상반된 두 가지 시각 모두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이 시기에 이슬람과 과학의 관계가 실제로 어떠했는지를 살핀다.
꿀로 약을 만드는 모습. 그리스인 의사 디오스코리데스의 《약물에 관하여》의 아랍어 번역본에 실린 삽화. (p.64)
@metmuseum.org
우선, 이슬람 과학이라는 것이 그리스 고전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수용되었고 그 번역자들 또한 대부분 비잔틴제국에서 밀려난 그리스도인들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이슬람 세계가 그것을 인정하고 장려하는 개방적이고 수용적이고 다원적인 태도를 가졌던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더욱이 칼리파들은 곳곳에 도서관을 짓고 천문대를 설치하는 등 과학 발전을 적극적으로 후원했고, 이를 바탕으로 그리스 과학을 넘어서는 이슬람 과학자들이 탄생했다. 이러한 현상은 이슬람 제국들의 수도에만 국한된 것도 아니어서 학자들은 제국 전체를 활동 반경으로 삼았고 이슬람 세계 내 학문적 교류도 활발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외래적이고 합리적인 학문이 종교에 다시 적용되는 데서 발생했다. 이 외래의 학문에 대한 수용이 빠르고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슬람이라는 종교 자체에 대해서는 양가적일 수밖에 없었다. 인과율을 전제로 하는 과학의 법칙성은 신의 전능성과 충돌했다. 또한 자연에 대한 관찰로 얻은 경험적 지식은 쿠란을 통한 계시를 불완전한 것으로 만들 위험이 있었다. 그리고 이슬람 사회에는 이런 문제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을 지닌 다양한 분파들이 존재했고 이슬람 과학의 발전은 이들 사이에서 긴장을 일으켰다. 특히 9세기에 이슬람 과학을 지원한 칼리파 알마문이 합리주의 신학 전통인 무타질라를 지지하면서 미흐나라는 일종의 종교재판을 통해 보수적 종교학자들을 공격한 것은 강력한 역류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10세기 초 신학자 알아샤리는 세상 모든 사건이 매 순간 원자적 차원에서 신이 유발하고 지휘하는 것이라는 우인론을 발전시켰고, 이러한 흐름은 11세기 말 알가잘리로 이어져 인과율은 부정되고 신의 전능한 권위가 더욱 강조되었으며, 14세기 이븐 할둔에 이르면 과학과 종교가 전혀 상관없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물론 과학에 대한 반동이 전체 시대를 관통하는 절대적이거나 일반적 흐름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문제는 이슬람 세계에서는 종교와 정치가 일치하면서 중세 유럽의 대학과 같은 자율적이고 독자적인 학문의 장이 만들어지지 않았기에, 질문을 던지고 서로 다른 의견을 교환하는 환경이 지속적으로 조성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수많은 학교와 도서관이 설립되긴 했으나 어디까지나 칼리파를 비롯한 권력자의 후원으로 생겨난 것이어서 자율성은 물론이고 지속성을 갖기도 어려웠다. 따라서 이슬람 과학은 한때 탁월한 성과를 냈음에도 12세기 이후 갑작스레 쇠퇴했고, 유럽에서와 같은 과학혁명을 일으키지 못했다.
한편,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의 원류가 되는 유일신 신앙을 가졌던 유대인들은 소수민족에 불과했음에도 이슬람 세계 안에서나 중세 유럽의 그리스도교 세계 안에서나 과학 발전에서 독특하고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세기에 활동한 알렉산드리아의 필론의 예에서 보듯 유대인들은 일찍부터 히브리어 성경과 그리스 철학을 조화시키고자 노력했다. 특히 창세기 해석에서 그리스의 철학을 끌어다 썼고 창조주를 로고스 개념과 연결시켜 이해하기도 했다. 이슬람 세계에서는 다수의 유대인이 의사로 활동했고, 수학과 천문학에서 걸출한 학자들을 배출했다. 특히 이슬람 제국의 전역에 흩어져 사는 소수민족답게 여러 언어에 능통한 인물이 많아서 그리스 고전들을 아랍어로 번역하거나 이슬람 학술서들을 히브리어나 유럽어로 번역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중세 후반 유대인 지성계에 우뚝 선 인물이 바로 마이모니데스다. 코르도바에서 태어난 마이모니데스는 이슬람 세계의 격랑 속에서 여러 지역을 거쳐 결국 카이로에 정착하여 의사로 활동하며 파티마 왕조의 궁정에 출입하는 동시에, 유대인 공동체 수장으로 임명되어 유대교 율법을 해석하고 판결했다. 그가 쓴 《미슈네 토라》는 이후 유대교 법리학의 시금석이 되며 《방황하는 자들을 위한 안내서》는 아리스토텔레스로 대표되는 그리스 철학과 신앙의 조화를 추구했다. 그는 경험을 앎의 원천으로 중시하고 이성적 판단을 강조하면서 자연철학을 포함하는 철학이란 모두 성경의 계시된 진리를 이해하기 위한 하녀라고 주장했다. 성경에 대한 축자적 이해를 반대했고, 경험과 추론을 통해 알게 된 지식과 성경이 모순되는 것으로 여겨질 땐 성경을 잘못 읽은 것이라고 보았다. 요컨대 그는 과학은 명백히 중요한 앎의 수단이라고 단호히 긍정하면서 형이상학의 보조적인 학문으로 보았다.
모세 벤 마이몬(마이모니데스)의 《방황하는 자들을 위한 안내서》의 한 페이지 (p.92) @wikimedia
유대인 학자들 사이에서 그리스 철학이 수용되고 많은 유대인 과학자가 배출되었으며, 마이모니데스가 신앙과 이성 사이의 균형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탈무드가 대표하는 유대교의 성경 해석 전통이 본래부터 매우 개방적이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성경 안에 서로 상충하는 내용이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성경이 열린 책으로 남아 있기를 바랐다. 유대교 안에서도 성경을 해석하는 다양한 입장들이 존재했고 그리스 철학의 도입과 적용은 그런 다양한 입장들 가운데 하나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또한 세상 만물이 하나님의 창조물이라고 보는 유대교의 관점은 고대의 다른 종교들과 달리 세상을 탈신비화하는 데 일조했고, 그리스의 자연철학을 사물에 담긴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받아들이는 여지를 만들었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경우에도 이성과 논리의 그리스 철학이 신앙에 적용될 때 발생하는 갈등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특히 이슬람의 쿠란이 갖는 권위에 영향을 받은 유대인들은 기존의 탈무드의 개방적 해석보다는 더욱 확실하고 강력한 해석을 요구하기도 했다. 게다가 현실적으로 유대인들의 공동체에서는 토라와 율법이 구성원들을 안으로 잡아당기는 구심력으로 작용한 데 반해 자연철학은 그들을 밖으로 끌어당기는 원심력으로 작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자연철학에 대한 의구심은 늘 자리하고 있었고, 마이모니데스 같은 위대한 학자이자 지도자인 인물에 대한 비판도 없지 않았다.
사실 유대인 지성계에서 다양한 의견들이 교류되고 뛰어난 과학자들이 배출될 수 있었던 것은, 흩어진 소수민족의 종교인 유대교가 그리스도교나 이슬람과 달리 중앙집권적이고 체계적인 제도와 기관을 만들 수 없었기에 가능했던 측면도 크다. 그리고 그것은 마이모니데스 이후 유대인 지성계가 퇴조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유대인 학자들의 활동은 이슬람 세계가 그리스의 학문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기에, 전반적으로 이슬람 세계가 퇴조하면서 이슬람 과학도 쇠퇴하고 이슬람 신학이 보수화되면서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중세 말로 갈수록 이슬람 세계는 물론 그리스도교 세계에서도 유대인 공동체의 존립 자체가 위협을 받으면서 유대인 과학자들도 자취를 감추게 된다.
요컨대 스펜서는 유럽이 암흑기에 접어들었던 동안 이슬람과 유대교 안에서 과학이 발전했던 과정을 고찰하여 정리했고, 그 안에서 과학과 종교가 맺었던 관계 또한 단편적이거나 일률적이지 않았음을 역설한다. 한편으로, 이슬람과 유대교 모두 종교 내적인 필요에 의해 그리스의 자연철학을 수용하고 그것을 더욱 발전시켰고, 경전의 해석과 신학에 적용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의 자연철학이 계시된 진리와 상충하며 일으키는 긴장과 위협을 의식하여 이성과 신앙을 분리하고자 시도했고, 더 나아가서 계시에 반하는 주장을 비판하고 처벌하기도 했다. 어느 지역, 어느 시대에 어느 한 쪽의 흐름이 절대적이었던 적은 없으며, 어느 한 쪽의 흐름이 우세해지는 경우에도 거기에는 여러 가지 역사적 요인들이 함께 작용했다. 이러한 통찰을 염두에 둔다면 다음 장부터 본격적으로 다루는 그리스도교와 과학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