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키 17》: 호모 파베르의 역설 (오세조)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25-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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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 17》: 호모 파베르*의 역설


글ㅣ오세조
팔복루터교회 목사


광화문 흥국생명빌딩 앞에 있는 서울의 대표적 공공미술 작품 '해머링맨' @세화미술관

*호모 파베르 Homo Faber
인간의 특성과 본질이 물건이나 연장을 만들어 사용하는 데에 있다고 보는 인간관.


※ 본 글에는 영화에 대한 스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반 대중에게 ‘익스펜더블’(expendable)을 물으면, 보통은 실베스터 스탤론이 감독하고 주연한 할리우드 영화 〈익스펜더블(The Expendables), 2010〉을 생각할 것 같다.1) 봉준호 감독의 새 영화 〈미키 17〉에서도 익스펜더블이 나오는데, 실베스터 스탤론의 익스펜더블과는 전혀 다르다. ‘익스펜더블’을 영어사전에서 찾으면 그 의미가 ‘소모품’ 또는 ‘소모용 병력’이다.


〈미키 17〉의 간단한 줄거리

 〈미키 17(Mickey 17), 2025〉은 복제인간을 소재로 한 에드워드 애슈턴(Edward Ashton)의 과학소설 『미키 7』을 원작으로 봉준호 감독이 각본과 메가폰을 잡은 그의 최신작이다. 이 영화의 줄거리를 요약하면 이렇다. 

  주인공 미키(Mickey)는 친구 ‘티모’(Timo)와 함께 마카롱 가게를 차리기 위해 사채업자에게 큰돈을 빌린다. 하지만 그만 쫄딱 망해서 거액의 빚을 진다. 문제는 돈을 빌려준 사채업자는 자기의 돈을 갚지 않는 경우, 이른바 지구 끝까지 쫓아가서 잡아 산채로 전기톱으로 잔인하게 죽이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런 극한 상황에 주인공 미키는 두려운 사채업자를 피해 친구 티모와 함께 정치인 케네스 마샬(Kenneth Marshall)이 주관하는 ‘행성 니플하임 개척단’에 지원한다. 사채업자에게 영원히 도망치기 위해서 지구를 떠나는 방법을 선택한다. 

그런데 조종 자격을 막 취득한 친구 티모와는 달리 아무런 기술이 없는 미키는 이 개척단에 반드시 선발되기 위해 ‘익스펜더블’에 지원한다. 익스펜더블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말이다. 아마 개척단에 선발되지 않으면 사채업자에게 죽임당할지도 모른다는 극한 상황에서 그가 할 수밖에 없는 최후의 선택이었다. 그런데 미키가 지원한 익스펜더블의 역할은 개척단의 가장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만일 그 과정에서 죽으면 육체는 다시 출력(프린트)되고, 기억은 벽돌 모양의 하드디스크로부터 업로드 되는 이른바 소모품2)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바로 이 부분에 ‘복제인간 기술’이 사용된다. 예를 들면, 니플하임에 도착해서 개척단원들이 행성에 본격적으로 내리기 전, 미키가 가장 먼저 착륙한다. 그리고 큰 호흡으로 니플하임의 대기를 마음껏 들이마신다. 그러나 이런 임무는 니플하임의 대기에 존재하는 바이러스나 미생물에 미키가 고의로 감염되기 위함이다. 당연히 미키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격리된 챔버 안에서 피를 토하며 고통스럽게 죽는다. 마치 실험용 쥐처럼 말이다. 이렇게 미키는 바이러스에 일부러 감염되어 죽고, 다시 출력되기를 반복해서 드디어 백신이 개발된다. 이후 백신을 접종한 다른 단원도 안전하게 니플하임에 착륙해서 본격적인 임무에 투입된다. 

이런 과정에서 미키는 반복되는 죽음과 출력의 사이클에 점점 익숙해진다. 그럼에도 미키에게 죽음은 항상 두렵기만 하다. 하지만 드디어 큰 문제가 발생한다. 바로 ‘미키 17’이3) 니플하임의 원주민 격인 외계생명체 크리퍼와 만난 후 죽을 위기에서 간신히 살아서 돌아와 보니, ‘미키 17’이 죽었을 것이라는 연구단의 가정하에 ‘미키 18’이 이미 출력되어 있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이런 상황을 ‘멀티플’이라고 하는데 문제는 이럴 경우, 규정에 따라 둘 다 영원히 삭제되어야 한다. 물론 하드디스크에 저장된 미키의 기억도 함께 삭제된다. 존재 자체가 우주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이제 ‘미키 17’과 ‘미키 18’은 자기가 살기 위해 다른 자기를 죽여야만 한다. 더욱이 이런 상황 속에 개척단의 지도자인 마샬은 크리퍼와의 전쟁을 선포한다. 


영화 <미키 17> 캐릭터 포스터


누구를 살인죄로 고소해야 하는가?: 자아 정체성의 문제

  앨런 메니코바(Alan Manikova)는 이 〈미키 17〉의 등장인물로서 영화에서 사용되는 ‘복제인간 기술’을 개발한 연구단의 일원이다. 문제는 그(A)가 사이코패스로서 복제인간 기술이 윤리위원회에 의해 법으로 허용되기 전, 이미 자기 자신을 두 명(B, C)이나 복제해 메니코바 A가 노숙인을 살해할 때, 메니코바 B는 이 살인사건을 위한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어린이 과학행사에 참여한다. 결국 경찰이 이를 파악해서 메니코바 A와 B를 모두 체포한다. 하지만 전혀 예측하지 못한 또 다른 메니코바 C가 노숙인을 또 살해한다. 마침내 메니코바 A, B, 그리고 C 모두는 체포되지만, 윤리위원회와 경찰은 ‘과연 메니코바 A, B, C 중 누구에게 살인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을 물어야 할까’라는 법적이며 매우 철학적인 난제에 직면하게 된다. 결국 영화에서는 이런 상황을 어떤 한 기자가 ‘멀티플’ 살인사건이라고 명명하는 것으로 ‘멀티플’이라는 용어가 소개된다. 영화에서는 윤리위원회가 이 사건을 기점으로 복제인간 기술을 지구에서는 원천 금지한다. 

  하지만 정치인 케네스 마샬이 아주 제한적인 상황에서 이 복제인간 기술을 사용하는 것을 추진함으로써 이 기술은 폐기되지 않고 결국 살아남는다. 그리고 앞서 소개한 “익스펜더블은 ‘지구 밖에서만’ 출력하되, 그 운용 과정에서 멀티플이 발생하면 태어난 순서를 불문하고 그 대상 모두를 모조리 말소하겠다.”라는 약속으로 니플하임의 개척단에 지구에서는 금지된 이 복제인간 기술을 사용하게 된다. 이런 배경으로 익스펜더블에 지원한 주인공 미키는 복제인간 기술로 죽고, 출력되기를 반복한다. 


인간복제 기술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고통까지 줄이지는 않는다.

  사실 주인공 미키의 반복되는 죽음과 출력의 도움으로 개척단은 행성 니플하임에 비로소 정착할 수 있게 된다. 대표적인 예가 백신의 개발 과정에서의 미키의 고통스럽고 반복적인 희생이다. 미키는 다시 출력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음에도 죽는다는 것은 그에게 매번 두렵고 또한 익숙하지 않다. 왜냐하면 인간복제 기술은 인간이 죽음 앞에서 느끼는 고통과 두려움까지는 감소시키지는 않기 때문이다. 반면 미키 주변의 대부분 인물은 미키의 죽음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 그저 다시 출력될 수 있는 계약 조건의 고용된 소모품일 뿐이다. 이런 이유로 주변 동료들은 아무렇지 않게 미키에게 다가와서 “미키, 죽는 건 어떤 기분이야?”라고 무심하게 묻는다. 동료로서의 공감과 미키의 희생에 대한 고마움은 전혀 없다. 마치 기독교인이 예수가 인간의 죄를 대속하여 죽은 그의 공로에는 관심이 많으나, 정작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당한 죽음에 대한 공포와 고통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즉 인간복제 기술은 한 인간을 다시 살릴 수는 있을지언정, 인간이 느끼는 고통, 두려움까지 줄여주지는 못한다. 오히려 ‘복제하면 그만이지’라는 무덤덤함을 느끼게 한다. 반면 니플하임의 원주민이자, 외계 생명체인 크리퍼는 자기들과는 아무 연관이 없는 외부인 미키를 죽음의 위기로부터 살려준다. 필자는 여기서 성경에서 고엘로 대표되는 나그네 보호 의무를 이행한 선한 사마리아인이 생각난다.


@<미키 17> 예고편


미키 17과 18의 차이: 인간은 기술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을까?

  〈미키 17〉에서는 〈에어리언 4〉에서 죽은 리플리를 되살리기 위해 복제인간 기술을 사용하다가 실패했던 끔찍한 다른 실험체의 잔재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즉 이 영화에서 복제인간 기술은 이 기술을 다룬 다른 영화에서와는 달리 거의 완벽하다. 완성도가 매우 높은 기술이다. 그럼에도 영화에서 미키가 출력될 때 한 연구원이 실수로 미키의 기억을 업로드하는 선을 건드려 순간 선이 뽑히고, 연구원이 뽑힌 이 선을 다시 즉시 꽂지만, 이 작은 차이 때문인지 ‘미키 17’과 ‘미키 18’의 성격이 조금 달라진다. 이런 점에서 〈미키 17〉은 기술이 아무리 완벽할지라도 그 기술을 사용하는 사람의 부주의로 인해 복제마다 예기치 못한 오차나 결함이 있을 수 있음을 우리에게 시사한다. 즉 인간은 기술을 만들고, 자기가 만든 기술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다고 상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는 것을 나타낸다. 이런 점에서 “사람이 그 본성에 따라 기술을 만들지만, 기술도 사람을 만든다.”라는 호모 파베르의 역설4)이 떠오른다.


잘못된 지도자의 폐해 

  한편 이 영화에서 개척단의 지도자 케네스 마샬은 무능하고 악한 정치인이다. 아니, 그는 거의 인간말종이다. 즉 기술의 유효성을 떠나 기술을 이용하는 사회에서 잘못된 리더십이 발휘될 때 그 폐해는 매우 엄청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인간복제 기술의 장단점을 논하기 전, 이를 이용하는 그 사회구조가 민주적이지 않고 악할 때 인간에게 매우 유용한 기술도 오히려 나쁘게 사용될 수 있음을 우리에게 시사한다. 여기서 우리는 한스 요나스(Hans Jonas, 1903~1993)가 기술이 가진 힘에 주목한 ‘책임의 원칙’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개척단의 지도자 케네스 마샬과 일파 마샬 @<미키 17> 예고편


나샤의 사랑과 지도력의 교체

  임무 중의 죽음과 출력의 반복에 미키는 아마 정신병에 걸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극한 정신적 상황에 미키를 지탱하게 하는 힘은 그의 여자 친구인 나샤(Nasha)의 사랑이다. 아마 봉준호 감독은 나샤의 사랑을 통해 인류를 존재하게 하는 근원적인 원동력은 과학과 기술의 대단한 힘이 아니라 바로 인간의 ‘사랑’임을 알려주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특별히 나샤는 영화의 후반부에 개척단의 중요한 최종 결정 기구인 위원회의 위원장이 되는데, 이는 지도력이 전통적인 지도자로 대표된 백인 남성에서 여성이며 유색인종에게 넘어가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인간중심주의의 극복을 의미하는 것 같다. 결국 나샤의 주관하에 위원회의 만장일치로 인간복제 기술을 상징하는 인쇄기계를 ‘미키 17’이 자기의 손으로 폭파한다. 지구뿐 아니라, 지구 외에 극한 상황에서도 인간복제 기술의 마침표를 찍는다.


사족: 벌레와의 공존, 공생

  〈미키 17〉은 인간복제 기술 외에도 우리가 고민할 주제를 많이 다룬다. 예를 들면, 필자는 이 영화를 보면서 벌레와 전쟁을 벌이는 영화 〈스타쉽 트루퍼스(Starship Troopers), 1997〉5) 가 생각났다. 우주 식민 지배를 두고 인간과 벌레가 싸우는 전쟁 이야기가 이 영화의 주요 줄거리이다. 이 영화에서는 인간과 벌레 중 한쪽이 반드시 멸종해야 비로소 끝이 난다. 하지만 〈미키 17〉의 결말은 인간과 벌레의 공존, 공생이다. 최근 대두되는 동물권의 확장을 생각나게 한다. 이는 아마 이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또 다른 교훈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필자의 마음 한구석에는 아메리카 원주민 인디언과 백인의 전쟁이 떠오른다. 혹시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으로 다시 당선되어서일까? 그리고 어휘력이 떨어져 아내인 일파 먀살(Yifa Marshall)이 전하는 표현을 그대로 따라 하는 케네스 마샬을 보고 있노라면, 어떤 대통령의 이미지가 겹친다. 그저 필자의 기우(杞憂)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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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베스터 스탤론의 영화 〈익스펜더블〉의 영어 제목은 〈The Expendables〉로 정관사 ‘The’와 복수를 나타내는 접미어 ‘s’가 붙는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그냥 〈익스펜더블〉로 소개되었다.

2) 봉준호 감독의 표현을 빌리면 ‘산업재해 전문’이다.

3) 미키가 17번째 출력되었다는 의미이다.

4) 손화철, 『호모 파베르의 미래』, (아카넷, 2020), 232.

5) 로버트 A. 하인라인의 소설 『스타쉽 트루퍼스』를 바탕으로 1997년 폴 버호벤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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