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럼 특집] 목회 현장에서는 과학 및 창조론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최현기)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26-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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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주년 기념 포럼 특집

목회 현장에서는 과학 및 창조론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글 | 최현기

포도나무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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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포럼 발제 PPT 자료


01. 목회자로서의 신학적 배경

  나는 장로교회 목회자다. 내가 속한 교단은 매우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신학적 풍토를 가지고 있다. 진화론을 비롯한 현대 과학의 주장도 강하게 배격하는 분위기다. 나는 서울에서 교회를 개척한 지 13년 차가 되었고, 현재 40여 명의 성도와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다. 40대 가정이 중심이 되어 아이들과 함께 예배하는 가족 중심의 작은 교회다.

  개인적인 배경을 잠시 소개하고자 한다. 나는 중고등학교 시절을 대전에서 보냈다. 내가 다니던 교회는 카이스트와 대덕연구단지가 가까워 연구원과 교수들이 많이 출석하고 있었다. 1993년 대전 엑스포가 열릴 즈음, 교회 주보에는 엑스포 인근에 ‘창조과학 전시관’을 건립해 방문객들에게 창조과학을 전하겠다는 광고와 후원 캠페인이 자주 올라왔다. 교회는 전시관 건립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나 역시 전시관 건립을 열렬히 환영했고, 전시관이 세워지자마자 방문했다.

  노아의 방주가 과학적으로 증명되었고 지구의 연대가 성경 문자 그대로 수천 년에 불과하다는 전시 내용은, 나에게 큰 놀라움과 기쁨을 주었다.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부심도 컸다. 이것이 창조론에 대한 나의 첫 경험이었다.


02. 창조과학 강사를 초청하던 시절

  시간이 흘러 목회자가 된 후, 나는 창조과학 책을 탐독하며 열심히 공부했다. 부목사 시절에는 담당하던 청년들을 위해 창조과학회 강사들을 직접 초청해 강의를 열기도 했다. 그 시절 창조과학 세미나는, 세속적이고 진화론적인 질문들로부터 성경을 변증하고 청년들의 신앙을 수호하는 가장 훌륭한 프로그램이었다.

  창조과학은 내가 신학교에서 배웠던 보수 신학의 기조를 완벽하게 지지해 주었다. 또한 궁금증 많은 젊은이에게 지적이고 과학적인 데이터로 답을 주는 것처럼 보였다. 덕분에 나는 성도들의 지적 갈증을 채워주는 ‘생각이 깊고 지적인 목사’로서의 면모를 세울 수 있었다. 설교나 성경공부 때도 창조과학 이론을 인용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마음 한구석이 늘 개운치 않았다. 창조과학의 잣대로는 도무지 설명되지 않는 성경 구절이나 자연계의 현상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성도들에게 그런 질문을 받으면 대답하기 곤란할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결국 과거의 방식대로 대응했다. “이해되지 않더라도 성경의 권위 아래 그냥 받아들이라”며 성도들의 질문을 닫아버린 것이다.


03. 전환점 — 성경 연구에서 시작된 전환

  과학과 창조론에 대한 나의 태도 변화는, 역설적이게도 과학책이 아니라 성경을 연구하면서 찾아왔다. 이전까지 나는 우리 교단의 신학 체계 바깥의 내용들을 학문적으로 검토하기도 전에 ‘교리적 이단성’이라는 프레임으로 배격하고 외면하기 일쑤였다. 그러다 단독 목회를 하면서 성서학을 좀 더 깊이 연구하게 되었다. 성경 본문을 더 정직하고 심도 있게 주해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주석과 역사적 지평들을 직면하게 되었다.

  성경은 21세기의 과학적 사실을 검증하기 위해 기록된 책이 아니었다. 고대 독자들의 눈높이와 문화적 양식 속에서, 온 우주의 통치자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이심을 선포하는 거룩한 문학이자 신학이었다. 창조과학식의 문자주의적 환원주의는 성경을 과학 교과서의 틀에 억지로 짜 맞추려 한다. 그것이 도리어 성경 본연의 광대하고 풍성한 메시지와 권위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는 자각이 들었다. 창조과학으로 해결되지 않던 수많은 성서학적 의문들이, 텍스트의 맥락을 복원하자 비로소 풀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목회적 결단을 내렸다. 내가 마주한 이 정직한 성서 해석의 결과들을 성도들에게 감추지 않고 가감 없이 나누기로 한 것이다.


04. 전 성도와 함께한 과신대, 교회의 비전으로

  성도들에게 무작정 “창조과학은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대안적이고 건강한 신학을 제시하고자, 먼저 나와 아내가 과신대 아카데미 과정을 열심히 듣고 이수했다. 동시에 과신대 목회자 모임에도 참여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과학과 신앙의 관계를 어떻게 올바르게 가르쳐야 할지 배우며 목회의 뼈대를 세워나갔다.

  그리고 모든 성도와 함께 과신대 기초 교육 과정을 수강하기 시작했다. 가능한 모든 성도가 참여하도록 독려했고, 완주하지 못해도 괜찮으니 한두 번이라도 함께 듣자고 격려하고 권유했다. 사실 대형 교회나 전통적인 조직이 굳어진 환경이었다면 여러 제약 때문에 불가능했을 시도였다. 그러나 우리는 규모가 작은 교회였고, 개척 때부터 쌓아온 목회자와 성도 간의 영적 신뢰가 있었다. 그 덕분에, 어쩌면 모험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과정을 큰 거부감 없이 시작할 수 있었다.

  성도들은 이 과정을 통해 많은 변화를 경험했다. 문자주의의 딱딱한 껍질을 깨고, 이성과 과학적 발견 속에서 도리어 하나님의 광대한 통치를 찬양하는 놀라운 신앙의 자유를 맛보기 시작했다. 자녀 양육에서도 분명한 기준을 세울 수 있게 되어 만족해했다.

  이 여정은 교회의 비전 선언문으로 이어졌다. 처음에 교회의 지향점은 세 가지였다. 그러다 목회 현장에서 성도들을 마주하며 점차 구체화하여 일곱 가지까지 늘어났다. 그 과정에서 다음의 고백이 마지막 일곱 번째 항목으로 추가되었다.

  "포도나무교회는 기독교 근본주의가 지성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취약했음을 인식하여, 독서와 학문을 통해 기독교적 사고를 개발하는 일에 사명을 갖고, 특별히 유사 과학으로 분류되는 창조과학의 주장을 수용하지 않습니다."

  이 선언을 새 가족 교육 교재에 명시했다. 이 선언은 우리 교회를 거쳐 가는 모든 이들과 새로 등록하는 새 가족들에게, 교회가 나아갈 신학적 정체성을 투명하고 정직하게 알리는 이정표가 되었다. 이 비전 선언 덕분에 우리 교회는 맹목적인 반지성주의로 회귀하지 않고, 마음껏 질문하고 학문하는 건강한 신앙의 토양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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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포럼 발제 PPT 자료


05. 과신대 교육 이후, 성도들의 인식 변화

  과신대 10주년 포럼 발제를 준비하면서 교인들과 인터뷰를 했다. 과신대 교육과정을 통해 성경을 보는 눈과 과학을 보는 눈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그리고 자녀 교육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물었다.

  이전에는 대체로 성도들이 성경과 연관된 과학 질문들, 특히 진화와 관련된 질문들을 외면하거나 아예 차단하는 방식으로 대했다. 의심을 믿음 없으므로 여겼기 때문에, 의심하지 않고 그냥 믿는 방식을 고수했다. 이해되지 않으면 아예 생각하지 않는 방식을 택하기도 했다. 하지만 과신대를 통해 성경과 과학을 보는 눈이 새로워지자 마음에 해방감이 생겼다. 성도들은 마음에 가둬 놓았던 질문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과학을 바라보는 시야가 확장되었고, 과학의 연구 결과들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더 다양하고 풍부한 자료들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인상 깊었던 인터뷰 내용 몇 가지를 소개한다.

A 성도는 과학전집 중 진화 관련 내용이 담긴 책을 숨겨두고 자녀들에게 보여주지 않았다고 한다. 일종의 금서가 된 것이다. 아이가 공룡을 좋아하는 것조차 마음의 부담이었다고 한다. 신앙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노아의 방주에 공룡이 타지 않은 이유를 아이들에게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그런데 과신대 이후, 금서였던 과학책을 꺼내 아이와 함께 재미있게 읽었다고 한다. 공룡 서적도 마음껏 읽게 했다. A 성도 자신도 허블 망원경 이야기와 과학 유튜브를 이제는 거리낌 없이 재미있게 본다고 했다. 내용을 다 이해해서가 아니다. 과학을 더 이상 신앙의 적으로 보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과학을 공부한다고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다양한 각도에서 생각할 수 있게 되어 믿음은 견고해졌다.


B 성도는 “이전에는 의심하거나 궁금해하면 믿음이 없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가능성을 열어두게 되었고, 성경도 더 넓게, 세상도 더 넓게 보게 되었다고 한다. ‘질문을 허락받은 것’, 그것이 과신대가 B 성도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이었다.


C 성도는 처음에는 창조과학 세미나 강의가 상당히 타당하다고 느꼈다. 그런데 직장 동료가 “그건 사이비 과학”이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과신대에 문을 두드렸다. 지금은 아이에게 “하나님이 진화의 방법으로 창조하셨을 수도 있어”라고 말한다고 한다. 동네 독서모임에서 한 회원이 기독교는 진화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지적했을 때도, “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창조과학이 아닌, 현재의 과학적 연구 결과를 수용하는 기독교인들도 많이 있다”고 답변할 수 있어 좋았다고 한다.


06. 목회 현장이 과신대에 던지는 숙제

  동시에 성도들은 인터뷰 과정에서 정직하고 날카로운 질문도 던졌다. “목사님, 창세기 본문을 문자 그대로 보지 않는다면, 신약성경에 나오는 초자연적인 기적들이나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은 어디까지 문자적으로 믿고 해석해야 합니까?” 이는 신앙적 경계선에 대한 혼란이었다. 더불어 무신론 과학자들이 쓴 대중 과학 서적에서 종교가 인간의 창작물이라는 주장을 마주할 때 찾아오는 영적 흔들림도 솔직하게 고백했다.

  특히 성도들은 목회 현장에 중요한 숙제를 던졌다. "과학자들의 설명은 너무 전문적이고 과학적이어서 일반인들은 용어도 어려울 때가 있고, 정작 성경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설명이 없어서 흥미가 떨어집니다.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성경 본문을 펴놓고 우리가 오해했던 성경 구절들을 하나씩 쉽게 풀어주는 교육'입니다." 

  한마디로, 과학의 세부 내용을 아는 것보다 생각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작업이 핵심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은 사실 과학자들이 아니라 현장의 목회자들이 직접 감당해야 할 몫이다.

  성도들의 소감은 나에게 두 가지를 말해 주었다. 하나는 “과신대가 실제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과신대를 통해 생각의 패러다임이 바뀌었고, 자녀 교육이 바뀌었으며, 삶의 태도가 달라졌다. 동시에, 아직 과신대가 채워주지 못하고 있는 자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 자리는 성경 해석의 경계를 함께 걸어줄 ‘목회자의 언어’, 그리고 신앙이 흔들릴 때 붙잡아 줄 ‘신학적 돌봄’으로 채워야 한다. 과학의 언어만큼이나 목양의 언어가 필요하다. 나는 이것이 앞으로 과신대가 더 깊이 고민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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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포럼 발제 PPT 자료


07. '이미, 그러나 아직'의 긴장

  생태학 용어 중에 ‘에코톤(Ecotone)’이라는 개념이 있다.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갯벌이나 숲과 들판이 만나는 완충지대처럼, 두 개의 서로 다른 생태계가 교차하는 접경지대를 의미한다. 에코톤은 두 영역을 명확히 구분 짓는 경계선이다. 동시에 양쪽의 특성이 융합되어, 지구상에서 가장 경이로운 생물학적 다양성과 풍요로움이 번성하는 거룩한 생명의 공간이기도 하다. 만약 어느 한 쪽 생태계가 자신의 영역만을 주장하며 다른 쪽을 완전히 집어삼키려 한다면, 에코톤은 파괴되고 결국 양쪽 다 죽게 될 것이다.

  나는 과학과 신학 사이에도 목회적인 ‘에코톤’이 존재한다고 본다. 따라서 신앙의 이름으로 과학을 정죄하거나, 과학의 이름으로 신학을 난도질하는 양극단의 폭력을 거부해야 한다. 두 거대한 세계가 만나는 접점에서는 필연적으로 긴장과 모호함, 그리고 불안이 발생한다. 목회자는 이를 섣불리 닫아버리지 않고 기꺼이 인내하며 견뎌내야 한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속성, 즉 ‘이미 임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Already, but not yet)’ 거룩한 긴장 관계와 맞닿아 있다.

  현재 한국 교회의 수많은 목회 현장은 여전히 창조과학이라는 낡은 패러다임에 갇혀 있다. 혹은 갈등이 두려워 과학이라는 주제를 강단에서 아예 지워버리는 침묵의 회피를 선택한다. 그러나 목회자는 정직하게 자신의 한계를 시인해야 한다. 그리고 성도들의 손을 잡고 에코톤의 경계선으로 걸어나가 함께 대화하고 배워가야 한다. 그럴 때 성도들의 신앙은 비로소 반지성주의의 늪을 벗어나 훨씬 더 견고하고 투명해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내가 섬기는 교회 현장에서 한 가지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과학은 신앙의 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광대한 창조 세계를 더 깊고 풍성하게 찬양하도록 돕는 눈부신 도구”라는 사실이다. 이 창조적 긴장 사이에서 인내와 소망으로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이어갈 때, 하나님의 신비로운 은총이 그곳에 머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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