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와 아직 사이의 요원한 대화 - '유신진화론과의 대화'를 읽고(김영웅)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24-03-13
조회수 137

이미와 아직 사이의 요원한 대화

신국현 저, '유신진화론과의 대화'를 읽고


글ㅣ김영웅
기초과학연구원 유전체교정연구단 선임연구원
과신대 정회원

©charlesdeluvio, Unsplash


1. 후기에 앞서

먼저 이 리뷰는 세움북스 대표님의 리뷰 요청을 수락한 이후 기증된 책을 읽고 쓴 글임을 밝혀둡니다. 저도 인간인지라 제가 구매하지 않고 기증받은 책을 리뷰할 때에는 냉철한 비판보다는 긍정적인 부분을 좀 더 고려해서 반영하곤 합니다. 감사하게도 이번엔 대표님께서 비판적인 시각도 괜찮다고 말씀해 주셨기에 저는 스스로를 기만하지 않고 조금은 더 객관적이고 조금은 더 냉철하게 이 글을 쓸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리뷰는 어디까지나 저의 주관적인 입장이 반영된 글이라는 점을 숙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 역시 시대의 자식이고, 제 글은 제 안에 자리 잡은 세계관, 사상, 신앙 등에 영향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후기에 앞서 저의 소개를 간략하게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1996년 포항공대 생명과학과에 학부로 입학하여 졸업한 이후 2009년 같은 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2011년 미국으로 건너가 박사후연구원 과정을 끝내고 스탭사이언티스트를 거친 후 2022년 6월에 한국에 들어와 현재 기초과학연구원 유전체교정연구단에서 선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인 실험생물학자입니다. 제가 박사 학위를 받기 위해 연구했던 내용은 분자생물학, 세포생물학, 발생생물학, 마우스 유전학, 혈액학 등이 기반이었고, 그 이후로도 저는 비슷한 영역에서 쉬지 않고 현장에서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과학자인 동시에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저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자 주님이시고 지금도 성령으로 믿는 자 안에서 내주, 인도, 역사하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저는 또한 하나님이 창조주이자 구원자이심을 믿습니다. 이미 왔으나 아직 오지 않은 하나님 나라를 지금도 매일 살아내기 위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사적인 복음에 갇혀 있다가 뒤늦게 복음의 공공성을 깨닫고 교회, 일터, 가정, 그 어느 곳에서도 여호와의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삶, 그리고 말과 이론이 아닌 삶 자체로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아내려고 성령을 의지하며 부단히 애쓰고 있습니다.


2. 후기 

(1) 총평

이 책을 다 읽어내기는 생각보다 어려웠습니다. 난이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이 책은 진지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읽고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쓰였습니다. 이 책이 읽기 어려웠던 이유는 읽는 내내 답답함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시대착오적인 표지 그림에도 불구하고 제목에 쓰인 '대화'라는 단어 때문에 저는 기대를 버리지 않고 인내심을 가지고 책을 끝까지 읽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저의 기대는 기대만으로 끝나버렸습니다.

 다행스러운 건 이 책에서 비신사적인 글은 찾아볼 수 없다는 점입니다. 저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신사적인 자세를 유지합니다. 저자의 훌륭한 인격을 대변하는 점이자 본받을 점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자세가 동등한 상대와 대화할 때의 자세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습니다. 오히려 반은 구구절절 변명하는 것처럼 보였고, 나머지 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교정하고 가르치려는 자세를 고수하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저는 저자를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저자의 글은 마치 핍박받고 비난받았던 과거의 억울함을 풀고자 노력하는 글 같아 보였습니다. 제가 느낀 답답함과 불편함은 아마도 저자의 울분이 많이 작용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자는 시종일관 스스로를 피해자의 위치에 두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과거에 받았던 피해가 부당하기 때문에 그것을 정당화하려는 듯한 의도가 연민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강하게 느껴졌습니다.


또한 스스로를 한 개인이 아닌 '정통 기독교'를 대변하고 성경을 수호하는 역할을 자처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책에서 저자는 반복적으로 "성경은……", "성경에서는……", "전통적인 관점에서는……", 등의 문구를 사용합니다. 저자가 대화 상대로 가정하는 유신진화론이 야기하는 문제점들(이 문제점들은 이미 숱하게 창조과학 진영의 근본주의적인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 논쟁했던 것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유신진화론자라고 칭해지는 사람들조차도 이 문제점들을 알고 있으며, 이것들이 해결될 수 있는 신학적 해석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는 점입니다)을 낱낱이 나열한 이후 저자의 입장이 그대로 담긴 것이라 생각되는,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근본주의 입장의 성경 해석을 덧붙일 때마다 말이지요. 마치 저자는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정통적인 기독교 신앙을 가질 수 있다고 여기는 듯했습니다. 여기서 비판할 가장 중요한 점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바로 저자가 대화하고 비판하는 상대가 유신진화론이라는 사실입니다. 흥미롭게도 제가 비판할 점들은 모두 표지에 다 나와 있습니다. 이 책은 내용이 아무런 반전 없이 표지와 일맥상통하는 책인 것입니다.


(2) 유신진화론

개인적으로 '유신진화론'이라는 용어 자체가 맘에 들지 않습니다. 마치 유신진화론이라는 분과 학문이 존재하는 듯한 인상을 풍기기 때문입니다. 그런 학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유신진화'라는 용어도 사용을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진화 중 유신진화도 있고 무신진화도 있을 것 같은 불필요한 추측을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과학계에 불필요한 문제점들을 던져버리는 무책임함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그리고 창조과학자들과의 오랜 논쟁을 살펴봐도 충분히 알겠지만, 언제나 문제는 과학의 영역이 아닌 신학의 영역, 즉 성경 해석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있었습니다. 이런 용어의 사용은 한국 기독교 안에 팽배한 잘못된 고정관념, 즉 과학과 신학이 마치 서로 반대되는 것처럼 여기는 풍토를 더 견고히 하는 효과를 낼까 봐 우려가 됩니다. 또한 유신진화론이라는 용어에는 창조라는 의미가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저자도 인정하듯 유신진화론자들은 하나님의 창조를 믿습니다. 무신론자 혹은 유물론자와 전혀 다른 입장인 것이지요. 그러므로 '진화적 창조'라는 용어 사용을 저는 선호합니다. 이미 이것은 제가 과신대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던 몇 년 전에 나왔던 얘기 중 하나입니다. 이런 얘기가 종결되지 않고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현상이 저는 여전히 기이하고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여전히 근본주의자들과의 대화는 이미 왔으나 아직 오지 않은 것 같고, 요원하기만 한 것 같습니다.


©Matt Walsh, Unsplash


진화는 신을 믿든지 안 믿든지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지금도 관찰 가능한 자연 현상일 뿐입니다. 몇 년간 우리를 괴롭혔던 코로나 바이러스의 변종을 진화라는 현상 아니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해마다 접종하는 독감 예방주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 어떤 항생제도 먹히지 않는 슈퍼박테리아를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든, 아직도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있다고 믿든, 선택은 본인의 자유이지만, 그렇게 믿는다고 해서 과연 무엇을 얻고 무엇을 지킬 수 있을지 저는 의문입니다. 저자는 책에서 진화를 거부한다고 단도직입적으로 선포합니다. 저에게는 정말 충격적인 고백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건 중력을 거부한다고 하는 것과 한 치도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를 저자의 용기라고 봐야 할지 뭐라고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또 언급하겠지만, 저자는 아마도 ‘진화’를 거부하는 게 아니라 ‘진화주의’, 그중에서도 ‘진화절대주의’를 거부하는 것이지 않을까 합니다. 즉, 단어 선택을 잘못하신 결과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만약 이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오해와 비난을 받지 않도록 용어 사용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 저자의 불찰일 것입니다. 거부할 대상이나 비판할 대상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대화라는 단어로 옷을 입혀 책을 쓰시다니요. 적어도 이 책은 감정에 호소하는 책이 아니라 지성에 호소하는 책인데 말입니다. 


저자의 이력을 보면 충분히 지성을 갖춘 분이라 저는 참 이상하기만 합니다. 물론 저자가 진화를 거부하는 이유는 성경을 수호하고자, 정통 기독교를 유지하고자 하는 숭고한 의지가 반영된 결과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과연 진화를 거부한다고 성경을 수호하고 정통 기독교를 유지할 수 있을지요. 나아가 이런 의문까지 듭니다. 진짜 저자가 수호하고 유지하려는 게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을 믿고 따르는 기독교 신앙인지, 그렇다면 저자의 신앙은 어떤 색깔을 가지고 있는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이것은 책을 읽다 보면 자연스레 알게 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자는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데에 아무런 주저함이 없고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믿으며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권장하는 근본주의 기독교인에 가깝습니다. 또한 과학이라 해놓고 과학계에 논문도 출간하지 못한 채 공식적인 인정도 못 받고 교회 안에서 세미나 형태의 수준에 머물고 있는 유사과학인 창조과학을 두둔하면서 창조과학이 반지성도 아니고 그저 비주류 과학이라고 주장합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건 주류, 비주류 문제가 아닙니다.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과학계에서 목소리 큰 그룹이 힘을 가진다고 생각하시진 않겠지요? 얼마든지 과학적으로 실험이나 관찰 증거를 대고 논문으로 출간하면 창조과학도 정정당당한 하나의 과학으로 대우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창조과학이란 용어 자체부터가 모순이듯 창조과학은 과학이 아니랍니다. 그들의 설명 중엔 과학적 방법론이 불완전한 형태로 군데군데 사용되긴 하지만요.


성경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믿으라고 강요하는 건 건강하지 못합니다. 성경을 언제나 은혜로운 책이자 아무런 모순이 느껴지지 않는 책이라고 믿는 그리스도인은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모든 것을 통달하여 하나님과 비슷한 경지에 올랐거나, 성경을 제대로 읽지도 않고 교회 목사님이 해주시는 말씀만 듣고 아무 생각 없이 주문 외우듯 성경을 읽는 사람. 저는 후자가 압도적으로 많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성경은 제대로 읽게 되면 은혜롭다는 반응 대신 상당히 불편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체적으로 모순되는 부분도 많고 배경 이해가 없으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자와 목회자의 성실한 공부와 연구가 동반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들의 위치는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저는 저자도 이러한 신학자이자 목회자가 되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그러나 이 책에서 저자는 유신진화론자들이 진화론적 개념을 도입하여 아무 문제 없는 성경적 창조 개념을 무리하게 수정하고 난도질한다고 비판합니다. 그리고 덧붙입니다. 유신진화론자들이 성경의 진술대로 하나님께서 이루신 완전한 창조 개념을 믿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상황을 만들었다고요. 여기서 저자가 사용한 '성경의 진술대로’, ‘완전한 창조 개념’이라는 표현은 문자 그대로의 성경 해석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문자적 해석을 저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성경적 창조 개념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지요. 저에겐 저자가 스스로 근본주의자라는 사실을 천명하는 거나 다름없는 부분으로 보였습니다. 이 책은 그러므로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읽어야 한다고 믿는 근본주의 기독교 목사의 세계관이 그대로 반영된 결과물인 것입니다.


과학은 지속해서 발전해 나갑니다. 성경을 기록할 당시에 모르던 과학 지식을 현대 사람들은 훨씬 더 많이 알고 있지요.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면 과학적 지식이 미천한 시대에 쓰인 성경이라 하더라도 그 모든 내용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아시다시피 구약성경이 기록된 시기는 코페르니쿠스가 나타나기 훨씬 전이었지요. 천동설을 믿고 있던 시대였다는 말입니다. 당연히 성경에는 그런 세계관이 반영되어 있었을 겁니다). 저는 바로 여기가 신학이 시대의 발전을 막론하고 항상 필요한 지점이자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과학뿐 아니라 여러 지식적이고 문화적인 부분의 확장에 따른 성경 해석은 과학의 영역이 아닌 신학의 영역에서 이뤄져야 할 몫일 테니까요. 시대가 바뀌면서 달라지는 개념들과 관념들에 부합하면서도 여전히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을 수 있도록 해석을 연구하는 게 바로 신학자의 역할이겠지요. 노예제도가 사라지고 여성들의 인권이 보장되는 이 시대에 바울 서신은 물론 구약의 기록들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고 적용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일 테니까요.


굳이 저 자신을 분류하자면, 저 역시 유신진화론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저는 진화를 신을 믿든 안 믿든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지금도 관찰 가능한 자연 현상이기 때문에 저 역시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사람이고, 과학으로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고 그럴 수조차 없을 것 같지만, 기원 (생명의 기원과 인간의 기원) 문제에 대해 진화가 내포하는 의미와 성경 해석과의 불일치들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동시에,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자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영적인 사실을 믿는 믿음을 잃지 않기 위해 이러한 불일치를 풀어줄 수 있는 신학적 해석을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반지성적이지 않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 유신진화론자에 속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자가 비판하는 유신진화론이라는 상대는 그 의미가 굉장히 모호합니다. 그 이유는 전적으로 저자의 무분별한 용어 사용 때문으로 보입니다. 저자는 진화, 진화론, 진화주의, 이 세 가지 단어의 차이를 잘 모르거나 애써 무시하는 듯합니다. 저자가 책에서 유신진화론이라고 뭉뚱그려 비판하는 대상은 근본주의 기독교의 여집합 정도로 여겨도 무방하다 싶을 정도입니다. 저자가 사용하는 유신진화론은 진화절대주의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기도 합니다. 저자는 실제로 유신진화론자들은 진화론을 절대적이고 우주적인 법칙으로 믿고, 하나님이 일으키신 기적들을 한낱 신화나 설화로 치부한다고 비방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이유가 단순히 진화론을 보존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앞서 밝혔듯이 저 자신도 유신진화론자이지만 저는 진화론을 절대적인 법칙으로 보지 않습니다. 저자는 도대체 어떤 사람들을 향해 비판을 가하고 있는 것일까요? 특히 기원에 대해서는 진화라는 현상을 연구하는 진화론이 그 어떤 것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기원 문제는 진화라는 현상으로 설명할 수 없고 나아가 과학의 영역을 벗어나는 문제입니다. 존재에 대한 문제는 철학이나 신학의 영역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나, 존재하지 않는 용어이지만, 경도된 진화주의자 혹은 진화절대주의자들 중엔 저자가 지적한 것처럼 믿고 행동하는 사람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세상엔 한쪽으로 치우친 사람들도 소수 존재하니까요. 그렇게 존재할지 안 할지도 모르는 일부의 치우친 부류를 저를 포함한 모든 유신진화론자들에게 대입하여 일반화시키며 비방하는 건 올바른 대화의 자세가 아닐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저자가 정의한 유신진화론이 야기하는 여러 신학적, 논리적 문제점들은 유신진화론자들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앞서 얘기했듯이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결해 나가기 위해서는 그 문제점들을 야기한 진화라는 현상을 눈 가리고 아웅 하듯 거부할 게 아니라 있는 건 있다고 인정하고 수용한 이후 기존의 성경 해석과 다른 여러 교리들에 대한 해석을 어떻게 해나가야 할지 서로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면서 끊임없이 겸손한 자세로 연구에 임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이런 연구는 과학을 똑바로 이해한 신학자들의 역할이 클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이러한 일을 감당해 줄 신학자가 등장하여 과학과 신학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해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자가 그런 사람이면 얼마나 좋을까요. 


(3) 표지그림

표지그림을 보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원숭이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사람이 된다는 메시지를 담은 저 그림은 이미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폐기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대착오적인 그림인 것이지요. 이젠 다윈의 진화론을 아무도 저 그림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윈은 한 번도 원숭이가 사람이 되었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원숭이와 사람 사이에 대를 거듭해서 올라가다 보면 공통조상이 존재할 거라고 예측했을 뿐입니다. 물론 증명한 것도 아니고 관찰한 것도 (증명 및 관찰 불가입니다. 엄청나게 긴 세월 간 일어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니었습니다. 다만, 본인이 관찰한 결과들을 바탕으로 합리적인 가설을 세우고 부분적으로 증명을 했을 따름입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불완전한 이론 맞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한낱 상상력으로 치부하는 건 과학이 어떤 학문인지 어떻게 작동하는지 전혀 모르는 사람의 말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저자는 책 속에서 그렇게 말합니다. 과학자로서 저는 모욕을 느꼈습니다).


과학에서 하는 예측은 문학적 상상력과 다릅니다. 오히려 기존의 관찰과 실험 결과를 기반으로 할 수 있는 과학의 아름다운 본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수학을 사용해서 표현하기도 하지요. 그래서 뉴턴의 방정식 같은 수학공식이 아름답다고 표현하곤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예측은 틀릴 가능성을 언제나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예측이 틀렸다고 해서 과학은 실망하지 않습니다. 그 예측을 했던 과학자는 실망할 수 있겠지만 말이지요. 과학은 언제나 그랬듯이, 새롭게 얻은, 예측과 다른 관찰 혹은 실험 결과를 포함하여 새로운 예측을 하게 됩니다. 이런 반복은 종교나 사상과 무관한 가치중립적인 과학의 정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윈의 진화론도 이런 식으로 이해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즉, 원숭이와 사람의 공통조상을 본 적도 없고 증명한 적도 없지만, 여러 다른 관찰 결과들을 종합하여 미루어 예측해 보면 그 공통조상이 존재할 거라고 말하는 게 바로 과학인 것입니다. 결코 무신론을 지지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거부하거나 무시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완전히 증명되지 않은 이론을 절대적이고 우주적인 법칙인 것처럼 오도하여 모든 가치관과 세계관에 접목시킨다면 그것은 과학절대주의 혹은 과학지상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불건전한 사상 혹은 철학으로 봐야 적절할 것입니다. 이건 이미 과학의 영역을 벗어나게 되는 것이지요. 건강한 유신진화론자라면 기원 문제에 대해서는 과학이 설명할 수 있는 경계까지만 말하고 그 이상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말할 것입니다. 개인의 믿음이 반영된다면 확신에 차서 무엇인가를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과학이 아닌 개인의 믿음이지요. 언급했다시피 새롭게 밝혀진 과학적 사실, 현상들에 반응하여 성경 해석을 수정해야 하는 건 과학자가 아닌 신학자의 몫입니다.


표지그림이 바로 이런 현상의 단적인 예로 볼 수 있습니다. 표지그림은 과학이 아닌 과학주의, 진화나 진화론이 아닌 진화주의가 만들어낸 허상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 그림을 비판하는 건 좋습니다만, 이 그림 때문에 과학이나 진화, 혹은 진화론을 비판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저는 이 그림을 이 책의 표지그림으로 선택한 의도가 궁금합니다. 저자나 출판사는 과연 무엇을 얻기 위해 이 그림을 선택했던 것일까요? 단지 공부 부족은 아니었을지 의문입니다. 대화라는 단어는 이런 면에서도 부적절하네요.


(4) 대화

책 제목에 등장하는 '대화'라는 단어는 책 내용과 무관합니다. 대화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책을 다 읽은 저에게 제목을 의뢰했다면, 저는 '근본주의 기독교인의 유신진화절대주의에 대한 비판'이라고 제안했을 것 같습니다. 저자는 무분별한 유신진화론이라는 용어의 반복적 사용으로 실재하지도 않는 유령을 상대로 소송을 걸고 자기를 공격했다고 비방하고 더 이상의 공격을 막기 위해 친절한 말들로 비판 및 교정하려고 애쓰며 그 해결책으로 문자적으로 성경을 읽는 근본주의 기독교를 강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자가 대화라는 단어에 집착하는 이유는 근본주의나 창조과학 관련된 사람들에 대해 존중하는 마음으로 신사적으로 대우해 달라는 표현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5) 잘못된 지식으로 인한 모순

저자는 진화의 가장 첫 부분에서 발생하는 사건이 변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 변이 없이는 어떠한 진화론적 사건 (혹은 변화)도 일어날 수 없다는 걸 인정합니다. 변이가 생기기 위해서는 유전자가 존재해야 하고, 유전자가 존재한다는 말은 이미 생명체가 존재하고 있다는 말이므로, 저자는 진화가 무에서 유, 혹은 무생물에서 생물을 견인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저자는 진화론으로 생명의 기원 혹은 인간의 기원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혹은 성경과 반대되기 때문에 거부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저자는 자가당착에 빠져있는 것이지요. 생물 진화의 시작점은 기존 생물이지 무생물이나 무가 아닙니다. 진화는 생물의 기원을 설명하지 못하고 설명하려 시도한 적도 없습니다. 그것을 시도한 것은 진화 혹은 진화 이론이 아닌 진화주의일 뿐입니다. 또한 진화가 마치 신을 대신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모든 현상을 다 설명하는 우주적인 법칙이라도 되는 것처럼 만드는 무신론자들의 철학 혹은 사상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저자는 진화론이 생명의 기원을 설명할 수 있는 도구일 수도 있다는 전제를 깔고 그것을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진화는 기원을 설명하지 못하고 그러려고 시도한 적도 없습니다. 저자는 가상의 적을 만들고 진지하게 싸우고 있는 꼴입니다. 이 점이 독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주범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진화는 관찰 가능한 현상이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으며, 진화 이론은 그 현상과 현상 이면의 기적을 연구하고 설명하려는 학문인 반면, 진화주의는 과학이 아닐뿐더러 학문이라 할 수도 없는 무신론자들의 썰 일뿐입니다. 저자가 무분별하게 사용하고 있는 진화론이라는 개념은 진화 혹은 진화 이론 혹은 진화 과학이 아니라 진화주의라는 유령인 것입니다. 저자가 반복적으로 지칭하는 유신진화론자는 유신진화론자라기보다는 유신진화주의자 혹은 유신진화절대주의자라고 해야 옳아 보입니다. 저는 유신진화론자라고 할 수 있겠지만 유신진화주의자는 아닙니다. 아마도 저 같은 유신진화론자가 대부분일 것입니다. 


계속해서 저자는 진화론이 무신론을 대변하는 것처럼 우연과 목적 없음을 통해 생명의 기원을 설명하는 법칙이자 기독교를 위협하는 적그리스도인 것처럼 말합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저자가 주야장천 대적하는 실체는 진화론이 아니라 진화절대주의인 것으로 보입니다. 과학이 아닌 철학이요 사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화라는 과학을 배격하는 듯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전적으로 저자의 잘못으로 보입니다. 즉시 수정하고 사과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과학이 밝혀내거나 증명한 것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진리가 아닙니다. 그럴 수조차 없습니다. 다만 그 시공간 안에서의 최선의 합리적인 설명일 뿐입니다. 과학자들이 밝힌 사실들은 언제나 더 정확하고 더 완전한 것으로 수정 및 대체될 여지를 갖습니다. 정치에 영향받지 않고 과학이 신뢰를 받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도 바로 이런 과학의 자정작용에 있다는 생각입니다. 유일하거나 절대적인 게 아니라 최선은 언제나 갱신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저자가 사용하는 진화론이라는 단어를 진화주의 혹은 진화우월주의나 진화절대주의라고 바꾼다면 책의 대부분에서 나는 잡음을 상당히 줄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저자가 저지른 가장 큰 우는 철학이나 사상에 속하는 진화주의를 과학에 속하는 진화 혹은 진화 이론, 진화 과학으로 대치했다는 점, 그래서 엉뚱하게도 성경 혹은 기독교와 과학 사이의 거리를 더 좁히기는커녕 더 벌여놓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윈의 진화론으로 파생한 진화절대주의에 반대한다고 애초부터 밝히고 이 책을 썼더라면 저는 이 책을 읽지 말라고 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게 됐습니다. 다만 저자의 미흡함과 자가당착에 심심한 위로를 보낼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를 무신론이나 유물론 혹은 유신진화절대주의로부터 지켜내려고 하는 저자의 마음은 충분히 공감합니다. 다만, 그런 마음을 저자가 사용한 대화라는 단어가 무색해지지 않는 방향으로 사용할 수 있는 신학자이자 목사님이 되어주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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