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회 콜로퀴움 강의 요약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21-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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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회 과학과 신학의 대화 콜로퀴움, 

“팬데믹 시대,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배울 것은 무엇인가?”

- 강의 요약 -


 

제28회 과신대 콜로퀴움에서는 연세대학교 학부대학 김학철 교수님을 모시고 ‘팬데믹 시대와 복음의 알로스타시스’라는 주제로 강의를 들었습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팬데믹 시대에 타자화를 거부하고 신앙의 본질을 놓치지 않았으며 사랑과 헌신의 본을 보여주었습니다. 오늘날 코로나 팬데믹으로 위기에 놓인 상황 속에서 기독교는 과연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으며 또한 무엇을 보여줄 수 있는지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위기 시대의 편향과 선동 : 부정편향, 도덕감정, 그리고 선동

 

1) 부정편향(negativity bias)

우리나라의 경제와 안보, 정치, 그리고 교회까지 항상 위기라고 하는 이유는 부정적인 정보에 빨리 또는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부정적인 경험을 실제보다 더 부풀려 인지하는 경향 때문입니다.

 

2) 도덕감정

위기 시대에 주목해서 보아야 할 감정은 바로 도덕감정으로 사람이 행동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합니다. 팬데믹 상황에서 가장 눈에 띄게 접하는 도덕감정은 CAD라 불리는 경멸(Contempt), 분노(Anger), 혐오(Disgust) 등의 타인 정죄 감정입니다. 이것은 위기 상황에서 타인에게 죄가 있다고 귀속시키는 부정적 감정입니다. 우리 인간 자체가 원래 부정편향성이 있는데 여기에 위기상황이 더해지면 특정한 도덕감정을 호출하게 됩니다. 그리고 호출된 도덕감정 중에서 타인 정죄 감정이 나오게 되는데 그 핵심적인 감정들이 바로 경멸, 분노, 혐오입니다.

 

부정편향과 타인 정죄 감정은 위기 상황 속에서 증폭되게 되는데 바로 이 인지와 감정의 상태는 이어서 설명할 선동의 통로로 악용이 되는 것입니다.

 

3) 선동

선동의 사전적 의미는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그들의 이익과 원하는 바를 달성하기 위해 타인의 생각과 영향을 주는 행위 전반을 말하며 프로파간다라고 합니다. 부연하면 선동, 즉 프로파간다는 지각을 종용하고 인식을 조종하며 행동을 유도하고 펼치는 이가 원하는 것을 성취하도록 조직적으로 고안된 노력입니다.

 

위기의 상황에서 증폭되는 인간의 인지가 부정인지편향, 도덕 감정 중에 CAD(경멸, 분노, 혐오)가 선동의 통로가 되는 상황은 과거에도 있었지만, 오늘날 더 치명적이게 된 것은 유튜브와 SNS와 같은 도구들 때문입니다.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광범위하게 대량으로 퍼지게 되는 것입니다.

 

왜 인간은 이런 것에 속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휴리스틱과 인지편향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인지적 구두쇠’(Cognitive miser) 경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주어진 상황에서 많은 정보를 한꺼번에 뇌에서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한정된 정보를 단순화해서 직관적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뇌의 핵심 임무는 이성이 아니다. 감정도 아니다. 상상도 아니다. 창의성이나 공감도 아니다. 가장 중요한 임무는 생존을 위해 에너지가 언제 얼마나 필요할지 예측함으로써 가치 있는 움직임을 효율적으로 해내도록 신체를 제어하는 것, 곧 알로스타시스를 해내는 것이다.” 리사 팰트먼 배럿(Lisa Feldman Barrett)이 ‘이토록 뜻밖의 뇌과학’이라는 책에서 한 말이 이와 맥을 같이 합니다.

 

 

2. 성서의 상징세계 : 복음의 알로스타시스 기능

 

마태복음은 전쟁문학입니다. 전쟁문학이란 전쟁과 같은 대규모 재앙, 실향과 지배, 상실, 폭력성 및 파괴성과 악마성, 기근, 극심한 가난, 결여된 인간성, 양도할 수 없는 인간의 가치 등을 소재로 삼아서 전쟁 체험을 직간접적으로 형상화하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AD 67~70년, 유대인들은 그들이 결코 이길 수 없는 로마를 상대로 전쟁을 치릅니다.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고 예루살렘이 온통 파괴되었습니다. 마가복음은 AD 70년에, 마태복음은 AD 80년에 기록된 것으로 전쟁이 얼마지 않아 만들어진 것입니다. 복음서의 저자들은 그러한 전쟁을 겪은 사람들입니다. 즉, 트라우마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는 어마어마한 폭력과 자해, 가해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눈이 나쁜 짓을 하면 빼라, 성욕을 참지 못하면 성기를 잘라버려라, 연자 맷돌을 목에 매고 죽어라 등 폭력을 당한 사람들의 증상이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현실에서 보복을 하지 못하면 문학적 상상이나 종교적 환상 속에서 보복을 하게 되는데 바로 마태복음에 그런 내용이 나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은 상처 당한 사람들의 고통의 고름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의 놀라운 점은 하늘나라와 그와 관련된 본문을 통해 도덕 감정을 다시 승화하여 폭력을 넘어서는 평화와 비폭력의 세계를 워킹스루 즉 헤쳐나간다는 것입니다. 트라우마라는 심리적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두 가지 행동반응을 보입니다. 액팅아웃, 망가지느냐 아니면 워킹스루, 헤쳐나가느냐 인데 마태복음은 후자인 워킹스루를 보여줍니다.

 

폭력적인 자해와 가해의 피로 얼룩진 마태복음서의 또 다른 부분에 평화와 비폭력, 용서, 나눔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태공동체가 트라우마를 헤쳐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부정편향, 타인 정죄의 도덕 감정, 인지편향을 드러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항상성을 유지하려고 하는 노력을 동시에 하고 있습니다. 즉, 고통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신앙으로 워킹스루 하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기체가 자기 내부에 대한 항상성을 유지하는 것을 뜻하는 ‘호메오스타시스’라는 용어 보다는 외부 개념이 들어가는 ‘알로스타시스’를 사용한 이유입니다.

 

알로스타시스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라고 하는 기쁜 소식이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도덕 감정의 항상성을 유지하도록 우리를 돕습니다. 또한, 부정편향의 폭주를 제어하고 심판과 더불어 회복을 말하며 저주와 동시에 복을 선언할 수 있는 능력을 선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위기의 시대에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약자의 처지에서도 도덕 감정과 인지편향에 치우치지 않고 항상성을 유지하며 상황에 매몰되지 않는 종교 본연의 성찰과 비판정신, 초월 기능을 발휘하게 합니다. 종교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 현재 상황에 매몰되지 않고 현재를 성찰할 수 있는 능력과 비판 능력, 초월, 그리고 다른 세상을 꿈꿀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하는 것이라면 기독교 신앙은 팬데믹 시대에 이런 것에 공헌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팬데믹과 기독교 대응 역사

 

‘타자화’, 그리고 ‘희생양 만들기’는 위기를 가짜로 해결하는 두 가지 방식입니다. 우선, 타자화는 나와 다른 사람을 양분하고 그 차이를 극대화하는 것을 일컫습니다.

 

“불경건한 갈릴리 사람들이 자기들 가난한 사람을 지원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가난한 사람들까지 지원한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후 기독교가 로마가 기독교화되고 커질 때 율리아노스 황제가 로마의 전통신앙으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남긴 말입니다. 이것은 당시 기독교인들이 타자화 당하는 것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타자화 자체도 거부했다는 의미입니다. 물과 먹을 것 나누고, 타자화를 거부하는 기독교의 중심 메시지가 매우 혁신적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이 타자화 거부가 윤리적으로 나쁘니까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 근원에 타인의 고통에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타자화를 넘는 신앙은 AD 165년 안토니우스 역병과 AD 251년 키프로스 역병 등 두 차례의 팬데믹에서 보여주었습니다. 사망률 30~50% 상황에서 말입니다.

 

다음으로 희생양 만들기입니다. 희생양은 속죄 의식에 사용되는 제의적 희생물입니다. 대제사장이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에 관계를 악화시킬 수 있는 모든 것을 제의에 사용되는 동물에 떠넘기고 희생물은 사회구성 전체에 의해 전체를 대체하고 전체에게 바쳐진다는 매커니즘에 의거해서 광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희생양 제의의 매커니즘은 공동체에 발생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개인 혹은 소수 집단에 책임을 돌리고 그들에게 폭력을 가하여 위기 상황에 심리적인 해결을 도모하는 폭력적인 합의를 의미합니다.

 

유럽에 흑사병이 창궐했을 때 유대인들이 흑사병의 원인이고 그들이 우물에 독을 탔다고 주장한 것이 희생양 만들기의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일본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사건은 이와 일맥상통합니다. 시간차는 500년인데 방법은 동일합니다. 1348년, 교황 클레멘스 6세는 “유대인은 무죄다”라는 교서를 발표합니다. 구해줄 이유가 없었음에도 종교 본연의 기능을 발의한 것입니다. 이는 위기의 시대에 모두가 희생양 만들기를 할 때 개신교가 취해야 할 자세로서 우리가 배워야 할 부분입니다. 상황에 매몰되지 않고 성찰하고 비판적 정신을 가지며 현재 상황을 초월하려고 하는, 그리고 초월할 수 있다고 하는 그런 신앙적 자세입니다.

 

한국 초기 기독교의 성장도 성소와 이성과 양심의 세 가지 기둥을 통해서 팬데믹 위기에 대처했고 우리나라에 콜레라가 발생했을 때 한국 개신교의 대응은 과학적 이성과 기독교적 박애주의 근간에 있는 신앙적 의연함이 한국 사회에 기여했던 바입니다.

 

코로나 팬데믹은 정말 심각한 위기입니다. 이런 위기가 빚은 여러 고통은 인간의 부정편향과 타인 정죄, 도덕감정, 선동, 휴리스틱과 인지편향에 우리를 더욱 몰아왔습니다. 이런 때 일수록 기독교는 복음의 알로스타시스로 상황에 매몰되지 않고 위기에 공헌해야 할 것입니다.


 




 글 | 김완식 기자 (comebyhere@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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