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인식의 물살을 거스르는 연어가 될 수 있을까?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21-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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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인식의 물살을 거스르는 연어가 될 수 있을까?

 


과학에서 말하는 힘(force)의 정의는 물체의 운동 상태나 모양을 변형시키는 원인이다.

 

이 규정을 역으로 보면 사물의 모양뿐만이 아니라 운동 상태, 즉 정지한 물체가 움직이거나 움직이던 물체가 멈춘다거나 혹은 운동하는 물체의 속력이 변하려면 힘이 개입한다는 의미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이 힘이란 바로 신으로부터 오는 것이었다. 모든 운동의 원인을 신이라고 믿었고 신은 부동의 동자이면서 모든 운동의 원인자였다. 이것은 너무나 확고하고 의심할 수 없는 진리였다. 힘의 물리량을 숫자로 양화한다는 것은 17세기 전까지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그렇다면 어떤 인식의 폭탄이 떨어졌길래 힘과 신을 분리하게 되었을까? 어떻게 힘의 크기를 측정하고 계산할 수 있게 된 것일까? 우린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탐색하기 위해서는 코페르니쿠스를 만나 17세기로 돌아가야 한다. 그 당시에 가장 핫한 주제 중의 하나가 바로 힘이었고 역학을 이용해 운동의 법칙을 기술하는 방법이었다. 너무나 중대한 사건을 말하기에 앞서 마른침을 꼴깍 삼키고 손을 비벼보면서 역사의 계보를 파보기로 하자. 힘의 장소가 부동의 동자인 신으로부터 물체 내부로, 물체 내부에서 다시 물체 외부에서 작용하는 힘으로 자리이동 하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느냐 하면 바로 ‘관성’이다.

 

달리는 버스가 갑자기 정차하면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몸이 앞으로 쏠린다. 이 현상은 관성의 원리로 설명된다. 관성이란 갈릴레이에 따르면, 정지해 있거나 등속운동을 하는 물체는 외부에서 힘을 받지 않는 경우 그 상태를 유지하려고 하는 성질이다. 이게 뭐 어때서?라고 묻는다면 곰곰이 생각을 해보시라. 데카르트도 관성을 말하고 갈릴레오도 관성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을 뉴턴은 자신의 제1 운동법칙으로 종합해 낸다. 정지 상태에 있든 운동 상태에 있든 어떠한 물리적 대상도 외부에서 힘이 작용하지 않으면 존재의 상태를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말인즉슨 사물 자체가 스스로를 존속시킬 수 있는 능력을 애초부터 갖고 있다는 의미다.

 

그리고 이것의 의미를 직시하는 순간이 사물과 신의 관계가 균열이 나는 순간이다. 관성의 원리가 물리학에 도입되면서 힘의 원천이 하나님 쪽에서 물체 쪽으로 이동해 버린다. 하나님이 피조세계를 붙들고 있으면서 물리적 실재들을 보존하고 유지하는 창조 활동의 원인자였다가 하나님이 아니라 물체 자체에 스스로를 보전하는 힘이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제 힘의 원인이 하나님에서 물체로 자리이동이 일어났으니 생각해 보라. 모든 운동의 원리는 하나님 없이 설명 가능해진 것이다. 오직 물체들의 특성과 물체들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자연계의 모든 운동을 설명할 수 있게 되고 마는 것이다. 사유의 흐름은 물의 흐름 같아서 역행하기 어렵다.

 

애초에 르네 데카르트는 관성의 원리를 창조를 다루는 하느님의 불변성으로 설명했다. 창조된 모든 사물은 창조자의 계속적인 창조에 의존해 있고, 창조자의 불변성이 창조의 질서 속에 안정성을 가져다주는 토대였다. 그 토대 위에서 사물들은 저마다 창조 질서의 안정성을 보전하려는 경향성을 드러낸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데카르트가 말한 그 하나님의 불변성은, 창조 세계에서 일어나는 어떤 변화들도 사물들 자체 내 힘으로 설명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그 힘의 원천으로 돌리지 못하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다시 말해 고정불변해야 할 하나님이 변화를 일으키면 신의 속성에 어긋나는 것이니 모든 변화는 다른 물체들의 작용을 통해 일어나는 것으로 인식이 흐른다. 예컨대, 누름과 밀침을 통해 서로에게 전달되는 운동 형태로만 물체들이 존재한다고 전제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이로써 관성에 대한 해석에 따라 운동이란 물체들에 내재한 고유한 힘에 의한 것이라는 설명이 가능해지고, 그 결과는 자연법칙을 설명하는 원리였던 제1원인자로서의 하나님 인식은 흐르는 물줄기에서 뒤에 두고 온 이정표가 되어버렸다.

 



 

종교적인 맥락으로 이동해 보면,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하고 있을 무렵, 멜랑히톤과 마틴 루터 모두 성서의 문자적 권위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이를테면 루터는 여호수아가 지구가 아니라 태양을 정지하라고 명령했다는 성서를 더 믿는다고 말함으로써 지동설을 받아들이지 않는 입장을 드러냈다. 18세기 초엽까지 성서적 근본주의와 지동설을 주장하는 새로운 천문학에 대한 반발과 비판이 독일 루터교 신학을 지배했다. 그러나 계몽주의의 물줄기는 이성의 빛으로 합리적이고 설명 가능한 신학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신학자들은 창세기에 기술된 7일간의 창조 기사를 근대적 관점의 과학에 맞추려고 노력하기 위해 관성 같은 기계론적 물리학을 끌어들였다.

 

흐르는 물줄기는 되돌아갈 수 없었다. 데카르트의 사고 속에서 관성의 원리는 하나님에게 의존해 있던 자연과정을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결과를 낳아 버렸으니 말이다. 스피노자가 일찍이 기계론적 자연 설명이 함축하는 바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적인 자연의 활동성을 말하는 결과를 부른다고 예측한 대로 이루어졌다.

 

데카르트가 관성을 피조물들을 그대로 보전하는 하나님의 불변성으로 하나님을 붙들었다 해도 갈릴레오가 죽은 해에 태어난 뉴턴은 그의 저서 프린키피아에서 데카르트와 갈릴레오의 관성의 원리를 하나님에 관한 언급이 들어설 자리가 없이 종합해 낸다. 당연한 인식의 흐름이다. 자연을 구성하는 모든 실재는 더 이상 하나님에게 의존할 필요 없이 물체들과 물체 힘들 간의 상호작용만으로 존재한다는 결론에 도달해 버린 것이다.

 

이렇게 하여 자연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과학과 신학,신앙은 함께였다가 각자의 길로 갈라지게 되었다. 우리의 인식은 물살을 거스르는 연어가 될 수 있을까?




글 | 백우인

과학 커뮤니케이터로, 새물결플러스에서 튜터로 활동하고 있다. 과신VIEW에서는 과학과 예술과 신학이 교차하는 지점을 글로 담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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