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에는 이상한 마력이 있다. 숫자는 문어의 빨판을 갖고 있거나 욕망으로 펄펄 끓는 마그마임에 틀림이 없다. 그 숫자가 내 의식을 잡아당긴다. 매일 밤.
춤을 추는 마법에 걸린 이야기가 나오는 동화가 있었다. 빨간 구두를 신으면 춤을 추는데, 마법에 걸린 주인공은 아침이 올 때까지 밤새도록 춤을 멈출 수 없다. 걷기를 마치고 돌아오는데 문득 이 동화가 생각이 난다. 나는 춤 대신 걷기 마법에 걸린 것은 아닌지 살짝 두렵다. 정확히 말해 걸음 숫자의 기록을 보면 걷기를 멈출 수 없다. 한발 한발 걸을 때마다 숫자가 증가하는데, 이상하게 내가 걸을 수 있는 한계가 어디일까 궁금해지는 것이다. 과연 숫자를 어디까지 갱신할 수 있는지, 그랬을 때 나는 어떤 상태가 되는지 끝까지 가보고 싶은 충동이 걸음을 자꾸 앞으로 이끈다.
인류는 처음에 손가락의 개수를 사물에 대응시켜서 5와 10까지 세는 것에서 만족하더니 점점 손가락 수보다 더 많은 사물을 수로 나타내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사물에 어떤 수를 대응하던 때만 해도 사물이 가진 특징이 유지되고 있었지만 점차 수량화된 사물은 숫자로 환원되면서 대응물에서 떨어져 나간다. 추상화된 숫자 자체만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자연에서 숫자는 사물의 이름과 특질과 그 사물이 갖고 있는 성질을 모두 탈각시켜 버리는 것이며 수는 모든 것들을 삼키는 거대한 입이 되어 세계의 왕좌 위에 군림하는 것이다.
숫자에 관한 한 뇌는 무조건 반사적이다. 정보가 대뇌로 가기도 전에 척수에서 미리 운동신경이 작동하는 것처럼 즉각적이다. 수로 말해질 때 우리 뇌는 가장 빠르고 잘 이해하니 말이다.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얼마나 가치 있다고 여기는지, 얼마나 좋아하는지, 얼마나 잘 사는지, 얼마나 큰 권력을 갖고 있는지, 얼마나 맛있는지, 얼마나 멋진 분위기인지 우리 뇌는 수에 견주어 질을 추측하고 규정하고 평가한다. 그 수로 인해 우리 뇌는 좋아할지, 기뻐할지, 만족해할지 불만족스러울지도 결정한다. 수와 뇌는 서로 순환하는 벤젠고리가 되어, 수는 뇌를 훈련하고 뇌는 수를 욕망한다. 급기야 수가 욕망하는지 뇌가 욕망하는지 구분 짓기도 어렵게 된다.
수로 환산되지 않는 것들은 모호하다. 수가 없는 곳에는 가치가 들어설 자리를 쉬이 찾을 수 없다. 정의, 사랑, 평화, 감사, 협동, 이런 모호한 것들은 뇌에 피로감을 준다. 사고를 해야 하는 뇌는 이것저것 살피고 고려해야 할 것이 많아 귀찮기만 하다. 뇌는 정신적이고 비수량화 된 것들에는 무질서한 정보의 바다에 표류한다. 뇌는 밀려오는 물살에 간신히 호흡하는 아가미가 된다.
뇌에게 수는 아르키메데스의 점이다. 뇌에 수만 쥐여주면 무엇이든 번역하고 해석할 수 있다. 뇌는 수를 부르고 사람들의 대화는 수로 표현되어야 한다. 수의 사회화 속도에 발맞춰 진화하는 뇌는 수를 통해 세상을 보도록 인간을 길들인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역전이 일어난다. 수는 모든 것의 척도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모든 것들의 척도가 되는 수는 하나의 우상이다. 우상이 된 수는 인간의 이성과 심리를 지배한다. 수는 인간의 뇌를 굴종시킨다. 수 앞에서는 경제적 가치만이 중요하고 정서적 가치는 의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정서적 가치의 운운은 미개한 시대로의 역행이다.
우린 수가 없이는 잠깐도 살 수가 없다. 눈을 뜨자마자 시계의 숫자를 확인하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누구를 만나려고 해도 숫자로 시간을 정하고 좌표로서의 장소를 정하며 물건을 고르고 그에 해당하는 돈을 지불한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서도 교통비가 지불된 숫자를 확인한다. 심지어 어느 곳을 가든지 그곳에 들어가려면 체온의 숫자로 출입 여부를 인증받아야 갈 수 있는 시절도 얼마 전까지 우린 경험한 바 있다. 체온이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이고 그 체온의 숫자에 의해 위험과 안전의 판정을 받았다. 그러니까 우리의 정체성은 오로지 체온의 숫자로만 파악되던 때를 살기도 했던 것이다.
체온이 신분증이던 시절, 얼마나 그 숫자에 서로서로 노심초사했었는지 소름이 끼친다. 결국, 숫자가 경쟁을 부추기고, 욕망에 굶주린 인간들이 들끓는 정글로 세상을 바꾸더니 인간의 존엄성마저 삼키고 그 자리에 숫자가 인간 노릇을 한다. 머지않아 지구가 멸망해도 숫자만 남는 것은 아닐까?
글 | 백우인
감신대 종교철학과 박사 수료. 새물결플러스 <한달한권> 튜터. 신학 공부하면서 과학 에세이와 시를 씁니다.
숫자에는 이상한 마력이 있다. 숫자는 문어의 빨판을 갖고 있거나 욕망으로 펄펄 끓는 마그마임에 틀림이 없다. 그 숫자가 내 의식을 잡아당긴다. 매일 밤.
춤을 추는 마법에 걸린 이야기가 나오는 동화가 있었다. 빨간 구두를 신으면 춤을 추는데, 마법에 걸린 주인공은 아침이 올 때까지 밤새도록 춤을 멈출 수 없다. 걷기를 마치고 돌아오는데 문득 이 동화가 생각이 난다. 나는 춤 대신 걷기 마법에 걸린 것은 아닌지 살짝 두렵다. 정확히 말해 걸음 숫자의 기록을 보면 걷기를 멈출 수 없다. 한발 한발 걸을 때마다 숫자가 증가하는데, 이상하게 내가 걸을 수 있는 한계가 어디일까 궁금해지는 것이다. 과연 숫자를 어디까지 갱신할 수 있는지, 그랬을 때 나는 어떤 상태가 되는지 끝까지 가보고 싶은 충동이 걸음을 자꾸 앞으로 이끈다.
인류는 처음에 손가락의 개수를 사물에 대응시켜서 5와 10까지 세는 것에서 만족하더니 점점 손가락 수보다 더 많은 사물을 수로 나타내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사물에 어떤 수를 대응하던 때만 해도 사물이 가진 특징이 유지되고 있었지만 점차 수량화된 사물은 숫자로 환원되면서 대응물에서 떨어져 나간다. 추상화된 숫자 자체만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자연에서 숫자는 사물의 이름과 특질과 그 사물이 갖고 있는 성질을 모두 탈각시켜 버리는 것이며 수는 모든 것들을 삼키는 거대한 입이 되어 세계의 왕좌 위에 군림하는 것이다.
숫자에 관한 한 뇌는 무조건 반사적이다. 정보가 대뇌로 가기도 전에 척수에서 미리 운동신경이 작동하는 것처럼 즉각적이다. 수로 말해질 때 우리 뇌는 가장 빠르고 잘 이해하니 말이다.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얼마나 가치 있다고 여기는지, 얼마나 좋아하는지, 얼마나 잘 사는지, 얼마나 큰 권력을 갖고 있는지, 얼마나 맛있는지, 얼마나 멋진 분위기인지 우리 뇌는 수에 견주어 질을 추측하고 규정하고 평가한다. 그 수로 인해 우리 뇌는 좋아할지, 기뻐할지, 만족해할지 불만족스러울지도 결정한다. 수와 뇌는 서로 순환하는 벤젠고리가 되어, 수는 뇌를 훈련하고 뇌는 수를 욕망한다. 급기야 수가 욕망하는지 뇌가 욕망하는지 구분 짓기도 어렵게 된다.
수로 환산되지 않는 것들은 모호하다. 수가 없는 곳에는 가치가 들어설 자리를 쉬이 찾을 수 없다. 정의, 사랑, 평화, 감사, 협동, 이런 모호한 것들은 뇌에 피로감을 준다. 사고를 해야 하는 뇌는 이것저것 살피고 고려해야 할 것이 많아 귀찮기만 하다. 뇌는 정신적이고 비수량화 된 것들에는 무질서한 정보의 바다에 표류한다. 뇌는 밀려오는 물살에 간신히 호흡하는 아가미가 된다.
뇌에게 수는 아르키메데스의 점이다. 뇌에 수만 쥐여주면 무엇이든 번역하고 해석할 수 있다. 뇌는 수를 부르고 사람들의 대화는 수로 표현되어야 한다. 수의 사회화 속도에 발맞춰 진화하는 뇌는 수를 통해 세상을 보도록 인간을 길들인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역전이 일어난다. 수는 모든 것의 척도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모든 것들의 척도가 되는 수는 하나의 우상이다. 우상이 된 수는 인간의 이성과 심리를 지배한다. 수는 인간의 뇌를 굴종시킨다. 수 앞에서는 경제적 가치만이 중요하고 정서적 가치는 의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정서적 가치의 운운은 미개한 시대로의 역행이다.
우린 수가 없이는 잠깐도 살 수가 없다. 눈을 뜨자마자 시계의 숫자를 확인하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누구를 만나려고 해도 숫자로 시간을 정하고 좌표로서의 장소를 정하며 물건을 고르고 그에 해당하는 돈을 지불한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서도 교통비가 지불된 숫자를 확인한다. 심지어 어느 곳을 가든지 그곳에 들어가려면 체온의 숫자로 출입 여부를 인증받아야 갈 수 있는 시절도 얼마 전까지 우린 경험한 바 있다. 체온이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이고 그 체온의 숫자에 의해 위험과 안전의 판정을 받았다. 그러니까 우리의 정체성은 오로지 체온의 숫자로만 파악되던 때를 살기도 했던 것이다.
체온이 신분증이던 시절, 얼마나 그 숫자에 서로서로 노심초사했었는지 소름이 끼친다. 결국, 숫자가 경쟁을 부추기고, 욕망에 굶주린 인간들이 들끓는 정글로 세상을 바꾸더니 인간의 존엄성마저 삼키고 그 자리에 숫자가 인간 노릇을 한다. 머지않아 지구가 멸망해도 숫자만 남는 것은 아닐까?
글 | 백우인
감신대 종교철학과 박사 수료. 새물결플러스 <한달한권> 튜터. 신학 공부하면서 과학 에세이와 시를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