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미, Dancing together
최영미 작가의 작품 세계는 인간의 존재론에 대한 스케치다. 마네가 그린 〈경마장의 말〉처럼 역동적인 움직임과 속력이 그대로 전해오며 존재의 관능미가 느껴진다. 관능의 사전적 의미에는 생물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기관의 기능, 다시 말해 폐로 호흡하고 눈으로 보고 혀로 맛보고, 코로 냄새 맡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는 등 오관(五官) 및 감각 기관의 작용을 말한다. 작가의 화면에 등장하는 인간들은 생동하는 유기물과 무기물 덩어리로 있되 그 자체가 감각기관의 신경 다발이다.
인간 세포 지도는 사람 몸을 구성하는 세포의 개수, 세포의 종류, 세포의 위치와 상태 그리고 세포의 역사적 계보가 모두 담겨있으며 그 기능도 파악할 수 있다. 최영미 작가의 작품은 직관적으로 내 몸의 세포를, 세포들의 상태와 기분을, 세포들의 관계와 기억을 광학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기분이다. 그런가 하면 어느 때는 단단한 뼈가 감싸고 있는 축축하고 말랑하게 꼬불거리는 뇌를 떠올리게 되었고 꼬불거린 채로 꿈틀거리는 소장과 대장을 몸 밖으로 불러내서는 마치 감정의 처소인 양손으로 만져보게 하였다.
그녀의 작품은 우리의 유전자 안에 새겨져 있으면서도 망각하고 살아가는 우리의 원초적 세계, 이를테면 인간이 되기 이전, 물질과 자연과 인간이 분리되기 이전, 무엇인가로 경계가 지워지고 호명되고 객관화되기 이전, 그저 존재(being)할 뿐 존재자로 되기 이전, 그리하여 어떤 존재자로도 될 수 있는 무한한 가능태 과정(becoming)을 엿보게 한다. 이를테면 우주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수축과 팽창으로 인해 마침내 거대한 폭발이 있던 우주공간으로 우리를 부른다. 또 수축과 팽창하는 우리의 심장은 수축과 팽창의 힘으로 유연하게 움직이는 아메바를, 헤엄치는 물고기를, 날갯짓하는 새의 날개를 떠올리게 한다.
최영미 작가의 예술세계 주인공들은 다자(many)로 이루어진 하나(one)이다. 마치 30조 개의 세포가 모여 하나의 인간을 이루고 있듯이. 이때 세포 하나는 곧 하나의 인간(생명체)과 다르지 않다. 그 자체로 생명활동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원자 같고 모나드 같은 주인공들은 능동적인 힘을 가진 존재, 능동성을 가진 살아있는 것으로서 상호적 영향 관계에 있는 존재라는 의미에서 화이트헤드의 현실적 존재(actual entity), 혹은 제인 베넷의 생동하는 물질 (vibrant matter)이라 하겠다. 다자(many)의 구성원 중 어느 하나(one)에 미세한 요동이 있으면 그 요동은 주변으로 전달되어 잇따르는 요동을 만듦으로써 결과적으로 전체의 변형을 가져온다. 서로 촘촘한 관계의 그물망에 얽혀있어 결코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며 서로의 전경과 배경이 된다.
세포는 코나투스 즉 자신의 존재를 끈질기게 지속하려는 경향이 있다. 세포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물질의 존재방식은 진동이며 이러한 물질은 내재적 활동성인 힘을 갖고 있다. 예컨대 이 힘은 수학과 물리학에서 사용하는 솔리톤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해일이나 태풍, 혹은 신경전달과정에서 볼 수 있는데, 파동(파동 묶음, 펄스)이 주변과 상호작용하면서 스스로 강화하여 사라지지 않고 계속 유지되는 현상이다. 작가의 화면 가득 이 존재의 코나투스가, 물질의 솔리톤이 넘실거린다. 힘과 에너지의 장에서 우리의 정신이 고양되고 상승한다.
칸딘스키에게 무한한 상승은 선이다. 최영미의 곡선에서는 현악기와 목관악기의 멜로디가 들린다. 뭔가 즐거운 일이 일어나고 있거나 곧 일어날 것이다. 사뿐하게 내려놓는 발끝과 손끝은 중력을 밀쳐낸 존재의 부력이 전해온다. 새의 날갯짓이 저리도 자유하고 가벼울까? 존재를 옭아매는 관계의 무거움은 놀이에 몰입한 어린아이의 가벼움으로 전이된다. 곡선에 드러난 그녀의 명암은 밝고 명랑하며 온도는 따뜻하다.그녀의 태도는 긍정이며 그녀의 표정은 찡긋거리는 윙크다. 그녀의 몸짓은 곡선, 곡선의 움직임 속 다채로운 색조는 리드미컬한 율동, 곧 춤이다.
작품 속 인간은 존재의 내포적 에너지인 강렬도를 주체하지 못해 슬몃슬몃, 얼핏얼핏 춤으로 나온다. 그녀의 주인공의 존재 양태는 춤이며 춤은 곧 정동 affection이다. 예술의 행위는 일종의 놀이이며 작품을 보는 것은 놀이에 참여하는 것이다. 관람자에게 그녀는 춤추자고 유혹한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스케치 같은 초안이다. 앞서서 미리 삶을 연습 해 본적 없이 매 순간 몸으로 직접적이고 생생하게 체험을 한다. 매 순간은 그때마다 단 한 번만 주어지는 것이기에 어떤 선택에 대해 그 선택이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판단할 수 없다. 다만 우연성의 다발이 삶이기에 우린 반복되는 우연에 나가 서 있는 운명이다.
그녀의 주인공들은 천태만상의 포즈를 하고 있다. 천태만상의 다양한 포즈들이 절묘하게 서로가 서로에게 미끄러져 들어가 있으면서 그렇게 상호 내주하는 결합체의 완결로써 하나의 인간을 형성한다. 모여있는 군상들, 그들은 태양의 둘레를 쉼 없이 공전하면서 스스로 자전하는 지구처럼 인간은 혼종적이되 생성 중에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과정으로 존재한다. 과정만이 실재다. 무수히 많은 인간과 사물이, 나와 너들이 빼곡하게 스미고 부대끼며 공생해 버리는 것, 공산하며 공생하는 존재. 우린 그렇게 있다.
그녀의 작품은 인간이 주인공이다. 그녀에게 메타포는 인간이다. 그러니까 그녀는 몸과 정신을 가진 실제 인간을 모방하여 거기에 인간은 관계적 존재라는 환유와 다양한 은유와 상징을 몸짓과 색으로 나타낸다. 흡사 모방(미메시스)를 통해 기억을 불러내는(아남네시스) 의식을 치르고 있는 것만 같다. 망각으로 까막눈이 된 영혼을 부드럽게 흔들기도 하고 강경한 어조로 악센트를 주고 그런가 하면 홍차에 으깬 마들렌향처럼 발랄한 향기로 태초의 그곳을 그리워하게 하여 회귀하도록 유혹한다. 은폐된 사물의 진리가 드러나 존재의 이유와 목적을 살피고 인간 본연의 순수한 생기를 회복하게 한다.
은폐된 진리란 이를테면 어떠한 인간도 홀로 살 수 없고, 우연히 던져진 생명이라 할지라도 저마다 정합적인 충족이유율이 있으며 그 관계 안에서 의미를 발생시켜나가는 존재라는 내용이다. 존재의 피라미드에서 꼭대기에 오르고자 바둥거려도 인간 내면에는 남루한 바닥이 있음을 상기시켜 존재의 평평함을 드러낸다. 다시 말해 우주의 먼지에서부터, 바이러스, 어류, 새, 인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의 고리가 결국 인간의 몸속에 반복되어 새겨져 있음을 그리하여 영원히 반복되고, 부활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녀의 작품은 우리가 망각한 수십억 년 동안 이어져 온 객체적 불멸이라는 인간의 현사실성을 상기시켜 준다.
그녀의 작품은 우리가 살고 있는 언어의 세계인 상징계에서 '나는 인간이다'라는 문장을 흔들어 깨운다. 140억 년 동안이나 잠들어 있다가 화들짝 놀라며 깨어난 표정으로 이 문장은 질문을 던져온다. 나는 누구인가? 인간은 무엇인가? 나의 범주는 어디까지이며 인간의 조건은 무엇인가? '이다'의 존재 방식은 '어떻게'라는 물음을 지시한다. '나는 인간이다'는 이제 '나'라는 인간은 어떻게 존재하느냐는 존재방식에 관한 물음으로 귀결된다.
그녀의 작품은 '인간인 나는, 너는, 우리는 어떻게 존재하는가?'라고 은밀하고 묻고 관능적 체험을 통해 답하게 한다. 인간은 모든 기억이 새겨진 흔적 덩어리이면서 계속해서 흔적을 새기는 중에 있다. 존재 물음 앞에선 인간은 스스로 위안을 얻으며 얼룩지고 눅눅해진 자아가 치유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우린 관계 안에 있을 때에 어떠한 의미로 생성되며 관계는 존재의 증명이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관계의 무거움에 짓눌려 홀로 있기를 바라고, 홀로 있게 될까 봐 두려워하는 존재다. 인간은 따로 또 같이 존재하기를 갈망하는 모순에서 진동하는 존재들이다.
글 | 백우인
감신대 종교철학과 박사 수료. 새물결플러스 <한달한권> 튜터. 신학 공부하면서 과학 에세이와 시를 씁니다.
최영미, Dancing together
최영미 작가의 작품 세계는 인간의 존재론에 대한 스케치다. 마네가 그린 〈경마장의 말〉처럼 역동적인 움직임과 속력이 그대로 전해오며 존재의 관능미가 느껴진다. 관능의 사전적 의미에는 생물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기관의 기능, 다시 말해 폐로 호흡하고 눈으로 보고 혀로 맛보고, 코로 냄새 맡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는 등 오관(五官) 및 감각 기관의 작용을 말한다. 작가의 화면에 등장하는 인간들은 생동하는 유기물과 무기물 덩어리로 있되 그 자체가 감각기관의 신경 다발이다.
인간 세포 지도는 사람 몸을 구성하는 세포의 개수, 세포의 종류, 세포의 위치와 상태 그리고 세포의 역사적 계보가 모두 담겨있으며 그 기능도 파악할 수 있다. 최영미 작가의 작품은 직관적으로 내 몸의 세포를, 세포들의 상태와 기분을, 세포들의 관계와 기억을 광학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기분이다. 그런가 하면 어느 때는 단단한 뼈가 감싸고 있는 축축하고 말랑하게 꼬불거리는 뇌를 떠올리게 되었고 꼬불거린 채로 꿈틀거리는 소장과 대장을 몸 밖으로 불러내서는 마치 감정의 처소인 양손으로 만져보게 하였다.
그녀의 작품은 우리의 유전자 안에 새겨져 있으면서도 망각하고 살아가는 우리의 원초적 세계, 이를테면 인간이 되기 이전, 물질과 자연과 인간이 분리되기 이전, 무엇인가로 경계가 지워지고 호명되고 객관화되기 이전, 그저 존재(being)할 뿐 존재자로 되기 이전, 그리하여 어떤 존재자로도 될 수 있는 무한한 가능태 과정(becoming)을 엿보게 한다. 이를테면 우주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수축과 팽창으로 인해 마침내 거대한 폭발이 있던 우주공간으로 우리를 부른다. 또 수축과 팽창하는 우리의 심장은 수축과 팽창의 힘으로 유연하게 움직이는 아메바를, 헤엄치는 물고기를, 날갯짓하는 새의 날개를 떠올리게 한다.
최영미 작가의 예술세계 주인공들은 다자(many)로 이루어진 하나(one)이다. 마치 30조 개의 세포가 모여 하나의 인간을 이루고 있듯이. 이때 세포 하나는 곧 하나의 인간(생명체)과 다르지 않다. 그 자체로 생명활동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원자 같고 모나드 같은 주인공들은 능동적인 힘을 가진 존재, 능동성을 가진 살아있는 것으로서 상호적 영향 관계에 있는 존재라는 의미에서 화이트헤드의 현실적 존재(actual entity), 혹은 제인 베넷의 생동하는 물질 (vibrant matter)이라 하겠다. 다자(many)의 구성원 중 어느 하나(one)에 미세한 요동이 있으면 그 요동은 주변으로 전달되어 잇따르는 요동을 만듦으로써 결과적으로 전체의 변형을 가져온다. 서로 촘촘한 관계의 그물망에 얽혀있어 결코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며 서로의 전경과 배경이 된다.
세포는 코나투스 즉 자신의 존재를 끈질기게 지속하려는 경향이 있다. 세포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물질의 존재방식은 진동이며 이러한 물질은 내재적 활동성인 힘을 갖고 있다. 예컨대 이 힘은 수학과 물리학에서 사용하는 솔리톤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해일이나 태풍, 혹은 신경전달과정에서 볼 수 있는데, 파동(파동 묶음, 펄스)이 주변과 상호작용하면서 스스로 강화하여 사라지지 않고 계속 유지되는 현상이다. 작가의 화면 가득 이 존재의 코나투스가, 물질의 솔리톤이 넘실거린다. 힘과 에너지의 장에서 우리의 정신이 고양되고 상승한다.
칸딘스키에게 무한한 상승은 선이다. 최영미의 곡선에서는 현악기와 목관악기의 멜로디가 들린다. 뭔가 즐거운 일이 일어나고 있거나 곧 일어날 것이다. 사뿐하게 내려놓는 발끝과 손끝은 중력을 밀쳐낸 존재의 부력이 전해온다. 새의 날갯짓이 저리도 자유하고 가벼울까? 존재를 옭아매는 관계의 무거움은 놀이에 몰입한 어린아이의 가벼움으로 전이된다. 곡선에 드러난 그녀의 명암은 밝고 명랑하며 온도는 따뜻하다.그녀의 태도는 긍정이며 그녀의 표정은 찡긋거리는 윙크다. 그녀의 몸짓은 곡선, 곡선의 움직임 속 다채로운 색조는 리드미컬한 율동, 곧 춤이다.
작품 속 인간은 존재의 내포적 에너지인 강렬도를 주체하지 못해 슬몃슬몃, 얼핏얼핏 춤으로 나온다. 그녀의 주인공의 존재 양태는 춤이며 춤은 곧 정동 affection이다. 예술의 행위는 일종의 놀이이며 작품을 보는 것은 놀이에 참여하는 것이다. 관람자에게 그녀는 춤추자고 유혹한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스케치 같은 초안이다. 앞서서 미리 삶을 연습 해 본적 없이 매 순간 몸으로 직접적이고 생생하게 체험을 한다. 매 순간은 그때마다 단 한 번만 주어지는 것이기에 어떤 선택에 대해 그 선택이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판단할 수 없다. 다만 우연성의 다발이 삶이기에 우린 반복되는 우연에 나가 서 있는 운명이다.
그녀의 주인공들은 천태만상의 포즈를 하고 있다. 천태만상의 다양한 포즈들이 절묘하게 서로가 서로에게 미끄러져 들어가 있으면서 그렇게 상호 내주하는 결합체의 완결로써 하나의 인간을 형성한다. 모여있는 군상들, 그들은 태양의 둘레를 쉼 없이 공전하면서 스스로 자전하는 지구처럼 인간은 혼종적이되 생성 중에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과정으로 존재한다. 과정만이 실재다. 무수히 많은 인간과 사물이, 나와 너들이 빼곡하게 스미고 부대끼며 공생해 버리는 것, 공산하며 공생하는 존재. 우린 그렇게 있다.
그녀의 작품은 인간이 주인공이다. 그녀에게 메타포는 인간이다. 그러니까 그녀는 몸과 정신을 가진 실제 인간을 모방하여 거기에 인간은 관계적 존재라는 환유와 다양한 은유와 상징을 몸짓과 색으로 나타낸다. 흡사 모방(미메시스)를 통해 기억을 불러내는(아남네시스) 의식을 치르고 있는 것만 같다. 망각으로 까막눈이 된 영혼을 부드럽게 흔들기도 하고 강경한 어조로 악센트를 주고 그런가 하면 홍차에 으깬 마들렌향처럼 발랄한 향기로 태초의 그곳을 그리워하게 하여 회귀하도록 유혹한다. 은폐된 사물의 진리가 드러나 존재의 이유와 목적을 살피고 인간 본연의 순수한 생기를 회복하게 한다.
은폐된 진리란 이를테면 어떠한 인간도 홀로 살 수 없고, 우연히 던져진 생명이라 할지라도 저마다 정합적인 충족이유율이 있으며 그 관계 안에서 의미를 발생시켜나가는 존재라는 내용이다. 존재의 피라미드에서 꼭대기에 오르고자 바둥거려도 인간 내면에는 남루한 바닥이 있음을 상기시켜 존재의 평평함을 드러낸다. 다시 말해 우주의 먼지에서부터, 바이러스, 어류, 새, 인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의 고리가 결국 인간의 몸속에 반복되어 새겨져 있음을 그리하여 영원히 반복되고, 부활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녀의 작품은 우리가 망각한 수십억 년 동안 이어져 온 객체적 불멸이라는 인간의 현사실성을 상기시켜 준다.
그녀의 작품은 우리가 살고 있는 언어의 세계인 상징계에서 '나는 인간이다'라는 문장을 흔들어 깨운다. 140억 년 동안이나 잠들어 있다가 화들짝 놀라며 깨어난 표정으로 이 문장은 질문을 던져온다. 나는 누구인가? 인간은 무엇인가? 나의 범주는 어디까지이며 인간의 조건은 무엇인가? '이다'의 존재 방식은 '어떻게'라는 물음을 지시한다. '나는 인간이다'는 이제 '나'라는 인간은 어떻게 존재하느냐는 존재방식에 관한 물음으로 귀결된다.
그녀의 작품은 '인간인 나는, 너는, 우리는 어떻게 존재하는가?'라고 은밀하고 묻고 관능적 체험을 통해 답하게 한다. 인간은 모든 기억이 새겨진 흔적 덩어리이면서 계속해서 흔적을 새기는 중에 있다. 존재 물음 앞에선 인간은 스스로 위안을 얻으며 얼룩지고 눅눅해진 자아가 치유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우린 관계 안에 있을 때에 어떠한 의미로 생성되며 관계는 존재의 증명이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관계의 무거움에 짓눌려 홀로 있기를 바라고, 홀로 있게 될까 봐 두려워하는 존재다. 인간은 따로 또 같이 존재하기를 갈망하는 모순에서 진동하는 존재들이다.
글 | 백우인
감신대 종교철학과 박사 수료. 새물결플러스 <한달한권> 튜터. 신학 공부하면서 과학 에세이와 시를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