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문위원 칼럼] 간섭이 아닌 존중을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21-06-14
조회수 1242


창조과학과 싸움까지는 아니라도, 그들의 잘못된 성경해석에 맞서고, 그 폐해를 알리는 일을 나름 15년 가량 해왔다. 그 발단은 모 선교단체 목사로 활동하던 시절, 매년 수련회 때마다 창조과학 유명강사들을 불러 강연회를 여는 일을 늘 반대하다 이상한? 목사 취급을 받으면서부터였다.

 

의대생이 주류인 그 선교단체가 그 똑똑한 학생들을 창조과학으로 세뇌시켜 헛똑똑이로 만드는 것이 과연 기독교 선교단체 목사로서 할 일인지 당시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때부터 개인 블로그와 페북 등을 통해 창조과학의 문제점을 알렸다. 그 과정에서 같은 생각을 가진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 중요한 결실이 2015년 가을에 태동된 <과학과 신학의 대화 / 과신대>다.

 

목회자 가운데 나서는 자가 거의 없다보니 나 같은 사람도 과신대 목회자 자문위원을 맡게 되었다. 그동안 내가 특별히 자문한 것이 거의 없음에도, 큰 보람을 느끼는 것은 우종학 대표를 중심으로 지난 몇 년 간 과신대가 꾸준히 노력한 결과, 10여 년 전 창조과학을 맹신하던 한국 교회 분위기가 꽤 많이 바뀌었다는 점이다.

 

그동안 내게 의문을 제시한 이들은 주로 기독교 문자주의/근본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창세기 1장을 근거로 우주가 6일 만에 창조되었고, 그 역사는 6천 년에서 만년 정도라고 주장한다. 빅뱅이론이 말하는 우주 역사 138억 년은 거짓이며, 방사선 동위원소 연대측정도 모두 가짜라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이 모든 생물을 각기 종류대로 지으셨으므로, 진화론은 창조론에 반대하는 무신론자들의 날조라고 믿는다.

 

그런데 요즘은 특이하게도 그런 기독교 문자주의/근본주의와 대척점에 있는 일부 인사들이 내게 의문을 제시한다. 그들이 볼 때, 과신대나 창조과학이나 전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기발한데, 첫째, 오늘날 생존이 어려워진 신학이 과학의 변증을 받아 좀 더 그럴듯하게 포장하려고 과신대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과학이 굳이 신학과 대화할 이유가 있냐는 것이다.

 

글쎄, 신학이 철학/문학의 변증을 받을 수 있을지 몰라도, 과학의 변증을 받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실존주의 철학/문학의 변증을 받은 실존주의 신학이 있기는 하지만, 만유인력 신학이나 양자역학 신학이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다. 과학, 그것도 엉터리 과학의 변증을 받고자 한 사이비 신학이 있긴 하다. 창조과학이다. 오히려 과신대는 성경을 과학으로 설명하고 입증해내려는 시도에 극구 반대한다. 과학으로 변증/분석되는 하나님을 생각해 보라. 하나님의 주성분을 화학식으로 표기하면 어떻게 될까? 그런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라면 이미 정체성을 상실한 기독교다.

 



 

과신대에서 과학은 과학의 길을 가고, 신학은 신학의 길을 간다(흔히 말하는 NOMA/겹치지 않는 교도권). 각자 길을 가던 중에 서로 오해한 부분이 있으면 대화를 통해 이해하고(진화론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론이 아니며, 성경의 비과학적인 부분은 덜떨어진 사고가 아니라, 문학적, 신학적 해석으로 설명이 가능), 길이 워낙 달라서 서로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해서는 간섭하기보다 존중해 준다(가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과학으로 분석할 필요도 없고, 양자역학을 신학적으로 해명할 필요도 없음). 물론 따끔한 충고가 필요한 부분이 있을 때는 서로에게 충고도 마다하지 않는다(인간 유전자 조작에 대한 신학의 경고, 미신적인 신앙에 대한 과학의 경고 등).

 

둘째, 과신대에 참여하는 과학자들은 자기분야 논문을 제대로 쓰지 않고 쓸데없이 신학자들과 어울리는, 말하자면 과학자 같지 않은 수준 낮은 과학자들이라는 것이다. 글쎄, 대부분의 창조과학자들처럼 공학박사나 의학박사도 아닌, 오리지널 자연과학을 전공한 정규 대학교 자연과학분야 교수/과학자들에게 그렇게 함부로 말해도 되는 것인지? 확실한 근거가 없다면, 명예훼손죄로 고소당하고도 남을 일이다.

 

셋째, 과신대는 창세기 1장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근본주의가 아니라고 하지만, 복음서나 고린도전서 15장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창조과학과 똑같은 근본주의 뇌피셜이라는 것이다. 과신대 회원 전원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사실로 받아들인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나를 포함한 상당수가 부활신앙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게(부활에 대한 과학적 증명이 아닌) 부끄러운 일인가? 과학자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직업윤리에 위배라도 되는가?

 

기독교는 지구역사 6천 년을 전하는 종교로 탄생한 게 아니다. 그러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는 사도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것은 오늘날의 교회도 마찬가지다. 물론 일부 기독교인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실제 부활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를 너무도 사랑했던 제자들의 마음속의 부활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다고 과신대에 속하는 모든 과학자, 신학자, 목회자, 성도들이 창조과학과 구별되기 위해, 단지 마음속에 부활한 예수를 믿어야 할까?

 

이게 무슨 과신대=창조과학이라는 등식이 성립된다는 논리인가? 이 대목에서 칼 바르트의 <로마서강해> 서문 한 구절이 떠오른다. “만일 내가 역사비평학적 방법과 옛 성서영감론, 이 두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할 입장이라면, 단연코 나는 후자를 골라잡을 것이다”(바르트는 역사비평학의 정당성과 필요성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문자주의/근본주의자가 아니다. 그가 말하는 것은 역사비평학이 쓸모없다는 게 아니라, 소위 설명이라고 부를 수 없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던, 당시 역사비평에 대한 비판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게 옛 성서영감론/근본주의라면, 나는 기꺼이 거기에 속할 것이다.

  


글 | 이택환 (과신대 자문위원, 그소망교회 목사)

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