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를 받아들인 복음주의자들
글ㅣ김성원
유니버시티 교회 (미국 메릴랜드)
과신대 목회자 모임, 북클럽 과신일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그리스도인에게 생물의 진화는 상당한 도전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얼른 보면 성경에 나오는 창조 이야기와 진화가 들려주는 생물의 이야기는 모순되는 것 같습니다. 이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성경을 믿는 사람은 진화를 배척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진화는 현대 생물학의 모든 분야에서 개념적 토대와 실재적 도구가 되기에, 진화를 부정하는 것은 현대 사회가 의존하는 과학의 상당한 성과를 거부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에 어려움을 주는데, 하나님이 생명의 창조주 시라면 그것의 과학적인 탐구 결과인 진화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사이에는 원리적으로 모순이 없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현대인들을 향한 교회의 복음 전도에도 큰 지장을 가져오는데, 교회가 과학을 거부하는 반지성적인 태도가 부각되기 때문입니다.
@pixabay, spencerwing
그러나 사실은, 성경과 진화 사이에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성경에 대한 해석과 진화에 대한 해석의 충돌 때문일 것입니다. 성경과 진화는 결코 배타적인 관계가 아니며, 이미 많은 신앙의 사람들이 성경과 진화를 모두 받아들임으로써 경험하는 지적 만족감과 풍요로움을 표현하였습니다. 이 주제에 대해 풍부한 자료를 제공하는 바이오로고스 (www.biologos.com) 에서 주도하여 출판한 “진화는 어떻게 내 생각을 바꾸었나”라는 책은 그리스도인 과학자, 신학자, 목회자 등 25명이 개인적으로 어떻게 진화론을 받아들이게 되었는지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 가운데 특히 복음주의 신학자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성경을 신실하게 믿는 것과 진화에 대한 수용이 어떻게 함께 갈 수 있는지를 살펴보면 유익할 것입니다.
@뉴스앤조이, 제임스 스미스
칼빈대학교 철학 교수인 제임스 스미스는, 마크 놀이 쓴 프린스턴 신학의 역사를 통해 개혁신학자들은 진화 과학의 발전을 거부하지 않고 도리어 긍정했다는 것을 배웠다고 말합니다. 벤자민 워필드는 성경무오론의 선봉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진화에 우호적이었습니다. 도리어 과학적 결과를 포괄적이 아니라 임의로 취사선택해서 받아들이는 것은 기독교의 역사에서도 예외적인 현상이었습니다. 칼빈주의에 대한 유명한 강연에서 아브라함 카이퍼는 개혁교회 전통이 과학적 탐구를 경계하지 않고 도리어 촉진했다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 그것은 개혁 신앙이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께 속한다는 고백에서, 과학을 포함한 모든 직업이 소명이라는 것을 강조해 왔던 것과 일관적입니다. 즉 정통 신앙은 편협한 성경 해석을 요구하지 않고, 도리어 다양한 입장들이 정통 기독교 고백과 공유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wiki, 스캇 맥나이트
노던 신학교의 신약학 교수인 스캇 맥나이트는 공룡의 뼈가 인류를 속이기 위해 사탄이 묻은 것이라는 말을 듣고 자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경 연구를 통해서, 자신이 믿는 것을 오직 성경의 증거에 기반하게 하라는 원리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만일 성경 연구에서 그러한 원리가 중요하다면, 자연에 대해서도 같은 원리가 적용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자연의 증거를 편견 없이 검토하였을 때, 그는 결국 진화를 긍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생명의 기원이 성경과 충돌하는 것처럼 보인 것은 사실 그의 성경 읽기 방식과의 충돌이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는 과학적 탐구를 통해 도리어 성경을 겸손하게 읽고 지속적으로 숙고하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과학은 그에게, 과학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음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자신의 선입견을 자연에 강요하지 않고 단지 관찰해야 한다는 것, 오직 증거가 말하게 하고 결정하게 해야 한다는 원리는, 그에게 주어진 증거를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존중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성경과 과학 모두가 주는 유익과 기쁨을 갖게 해 주었습니다.
@Amazon.com, 올리버 크리스프
풀러 신학교의 조직신학 교수인 올리버 크리스프는 신앙과 과학의 바람직한 관계에 대해 숙고한 끝에 얻은 세 원리를 소개합니다. (1) 믿음을 통해 이해를 추구한다. (2)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이다. (3) 하나님은 여전히 신비로우시다. 그는 선하신 하나님의 특성을 성경과 자연 모두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성경적 기독교와 진화는 우리의 관점에서 모순되어 보여도 원리적으로 조화됩니다. 형이상학적인 자연주의가 세계를 설명할 때 방향성이 없는 (목적이 없는) 자연선택을 주장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거기서 하나님께 드릴 자리가 없다고 믿는 것은 실책입니다. 앨빈 플란팅가가 지적하는 대로, 성경과 자연은 피상적 불일치에도 불구하고 깊이 공명하는 관계에 있습니다. 물론 세부적인 사항은 우리에게 분명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이 주제뿐 아니라 만사에서 그렇다는 것을 가령 욥기를 통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연선택을 포함한 모든 자연과정을 지정하셨기 때문에, 거기에 목적이 없어 보인다고 해서 무신론으로 빠지는 것은 과학적이 아니라 형이상학적이라고 지적합니다.
@바이오로고스, 짐 스텀프
바이오로고스의 편집장인 짐 스텀프는 휘튼 칼리지의 구약학 교수인 존 월튼을 통해 성경적으로 충족된 진화창조론자가 될 수 있었다고 리처드 도킨스를 페러디해 자신을 표현합니다. 월튼은 창조 기사의 문화적 배경과 현대 독자를 위한 길잡이를 제공하는 영향력 있는 저서들을 여럿 낸 바 있습니다. 그는 성경은 언제나 그것이 기록된 시대와 대화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역사적 맥락은 무시하고, 원 독자들의 이해는 건너뛰고, 나 자신의 시대, 문화, 계획을 성경 안으로 읽어들여야겠어”라는 태도는 믿음이 아니라 오만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리어 성경의 독자는 고대 지중해 세계와 대화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그것을 통해 현대인을 위한 성경의 메시지를 읽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유명한 변증가 C. S. 루이스는 기독교 신앙에서 이성의 중요성을,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두뇌를 포함한 모든 너 자신을 드리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deseret.com, N. T. 라이트
저명한 신약학자 N. T. 라이트는 성경과 과학이 충돌하는 현상이 미국에 특유한 일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는 미국 사회가 겪어 왔던 역사적인 큰 상처들이, 본질은 과학과 종교의 관계가 아니라 정치, 노예제, 인종 문제였음에도 불구하고, 진화냐 성경이냐의 논쟁으로 악화되었다고 말합니다. 그 결과 지혜의 길은 외면되었고 두 문화의 전쟁이 지속되었으며 양측 모두 갈수록 완고해졌습니다. 미국 외의 다른 나라에서는 이런 이슈가 직접적인 정치적 함의를 가졌던 역사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라이트의 이러한 지적은 비슷한 상황에 있는 한국 교회와 사회에도 교훈하는 바가 클 것입니다.
@peacefulscience.org, 대니스 래머로
진화적 창조에 대한 활발한 저자인 대니스 래머로는 젊은 지구론을 증명하기 위해 신학과 생물학 모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매우 지적이고 열정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신학교에서 J. I. 패커의 강의를 들었는데, 뜻밖에도 성경의 창조 기사는 “명백히 그림 언어로 기록되었다”는 선언을 듣고 당황했던 것을 고백합니다. 그는 또한 로렌 윌킨슨이 단호히, 젊은 지구론은 오류라고 단언하는 것을 듣고 또 충격을 받습니다. 나중에 그는“젊은 지구 창조론을 버린다면, 예수에 대한 믿음을 버리는 것인가?”라는 윌킨슨 교수의 질문을 받고 말문이 막혔다고 합니다. 그는 결국 성경을 문자적이 아니라 고대 근동 문화의 배경에서 더 옳고 풍성하게 읽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가령 창세기 1장은 하늘 위에 물이 있고 그 물을 단단한 궁창이 받치고 있는 그림을 보여 줍니다. 하늘의 해와 달과 별은 그 궁창에 놓여 있고 하늘 위의 바다를 떠다니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이것은 과학적인 기술이 아니라, 고대 사람들이 본 하늘의 문학적 표현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래머로는 신학과 과학 모두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후에, 결국 과학은 기독교의 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의 영광을 선포하고 그가 우주와 생명을 어떻게 만드셨는지를 드러내 준다고 말합니다.
@기독일보, 리처드 마우
풀러신학교의 전 총장이면서 기독교 철학과 윤리학 교수인 리처드 마우는 우리가 인간 중심적 사고를 벗어나서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사실을 잘 알려주는 시편 104편에서 인간은 다른 피조물에 대한 대목이 다 지난 후 맨 나중에 조금만 나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창조의 각 단계마다 좋다고 하셨던 것을 통해, 인간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께 기쁨이 된다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카톨릭 신학자와의 대화를 통해 그는 복음주의자들이 너무 급한 경향이 있어서 당장 구원과 치유를 받기 원하고, 자신들의 그런 특성에 하나님을 맞추려는 실책을 범하기 쉽다는 것을 배웠다고 합니다. 그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명의 구원자가 되신다는 것을 특이한 방식으로 생물학과 연결시킵니다. 진화에 의하면 인간의 DNA에는 이전 모든 생명 형태의 조상들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인성을 취하실 때 그의 DNA는 모든 피조물과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에 담겨 있는 DNA를 통해 모든 피조물에게 효력이 있게 됩니다.
@Unsplash, Gilley Aguilar
진화를 받아들이는 신앙인들은 이렇게, 그것을 통해 얼마나 신앙이 윤택해지는지를 고백하게 됩니다. 광대한 우주의 규모와 역사를 숙고한다면, 그 커다란 우주 속에서 작디작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놀랍습니다. 칼 세이건은 단지 물리적 크기만을 두고 인간이 보잘것없다고 보았지만, 믿음의 사람은 도리어 이 작은 피조물을 사랑하시고 사귀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고백하게 됩니다. 백억 년 단위의 우주의 역사도, 아무런 목적 없이 우주를 방치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의 사랑하시는 피조물을 위해 오랫동안 인내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시간적 스케일을 알려줍니다. 우리 생각으로는 하나님이 왜 단번에 창조하시지 않았는가 의문을 품을 수 있지만 그것은 단지 인간적인 좁은 안목일 뿐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주와 생명뿐 아니라 우리 각 사람도 어린아이일 때부터 성숙할 때까지 기다려 주십니다.
진화적 창조는 이렇게 과학적으로 풍성한 이해와 성과를 바탕으로, 하나님의 창조를 우주와 자연과 생명의 관점에서 일관적이고 합리적이면서도 신앙과 조화로운 방식으로 설명해 줍니다. 시공간적 한계가 없으신 하나님은 그분의 지혜와 영광을 통해 큰 스케일 안에서 우주와 자연법칙을 만드시고 그것을 생명과 조화로 채워 넣기 위해 진화라는 유려한 방법을 택하십니다. 그리고 인간은 상상할 수도 없는 오랜 기간 동안 그것을 신실하게 보존하시고 모든 중간 과정마다 보기에 좋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동일한 진화의 방법을 사용하여, 그분과 교제하고 그분의 형상을 갖는 특별한 피조물인 인간을 나게 하십니다. 이러한 자연과 생명에 대한 과학적이고 신앙적인 관점은 성경적 기독교와 전혀 모순되지 않습니다. 도리어, 이렇게 창조의 풍성함을 알게 되면 창조주를 더욱 풍성하게 찬양하는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서는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라는 시편 19:1의 말씀에 기반한 찬양의 가사를 허블 망원경이 보내 준 우주의 이미지 위에 슬라이드로 띄워서 온 회중이 보면서 함께 찬송했는데, 너무나 감격스럽게 창조주께 예배드리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물론 진화적 창조가 던져주는 신앙에의 진지한 질문도 있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아담과 하와가 모든 인간의 조상이 되는데,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진화 과학에 의하면 단 두 명의 인간만이 지구에 있었던 때는 없습니다. 아마도 아담과 하와는 많은 인간들 가운데 하나님이 선택하셔서 영적인 교제를 시작하신 첫 번째 커플이었을지 모릅니다. 우리가 세부적인 모든 것을 아직은 다 알 수 없지만, 이러한 관점이 성경의 올바른 이해와 모순되지는 않습니다. 또 다른 질문으로 인간의 죄로 인해 죽음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들 수 있습니다. 진화 과학에 의하면 인간이 있기 이전에 자연과 생명에는 고통과 죽음이 있었다는 사실이 명백하기 때문에, 성경의 내용과 어떻게 조화될 수 있을지 질문하게 됩니다. 그러나 죽음은 그 자체가 우리의 성경 이해에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없고 결국 예수님이 우리를 구속하시는 도구가 된다는 점에서 그 참된 중요성을 갖는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3:8은 한글 번역의 어순에 모호함이 있는데, 많은 번역들을 따라 “창세로부터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이라고 읽는다면 죽음의 근원이 아담이나 다른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에게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 외에, 다른 동물들과의 연속성이 인간의 특별한 지위를 훼손하지 않는지 질문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의 형상은 물질적이고 신체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제하는 인간의 영적인 특권에 있다고 이해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진화에 대해 생각을 바꾸게 된 복음주의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이 책에는 이러한 신학자들의 고백 외에도, 어떻게 성경과 진화에 대해 바르고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했던 여러 지성인들의 생각들이 많이 담겨 있습니다. 그들은 진화를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일 때 도리어 창조주 하나님을 더욱 풍성하게 예배할 수 있었고 성경을 더 올바르게 읽게 되었다는 것을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 주제에 대한 교회의 합당하고 열린 태도가 결국 목회와 복음 전파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가져오게 되리라는 확신을 나누어 줍니다.
한국 교회는 진화에 대해 경직되고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그것이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성경에 대한 믿음을 굳게 지키는 길이라고 생각해 왔던 측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태도는 결국 교회가 비지성적이고 폐쇄되며 과학과 합리성을 거부하는 사회라는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서, 사람들이 교회에 다가오는 길을 막아버리는 심각한 문제를 낳습니다. “지식이 없는 열심은 선하지 않다”라는 잠언 19:2의 말씀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성경의 진리와 자연의 진리는 모두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기에, 그리스도인은 그것 모두를 포용하고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창조를 깊이 향유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먼저 이 문제에 부딪히고 씨름하면서 바람직한 답을 찾아왔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살펴본 이 글이 유익이 되기를 바랍니다.
진화를 받아들인 복음주의자들
글ㅣ김성원
유니버시티 교회 (미국 메릴랜드)
과신대 목회자 모임, 북클럽 과신일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그리스도인에게 생물의 진화는 상당한 도전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얼른 보면 성경에 나오는 창조 이야기와 진화가 들려주는 생물의 이야기는 모순되는 것 같습니다. 이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성경을 믿는 사람은 진화를 배척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진화는 현대 생물학의 모든 분야에서 개념적 토대와 실재적 도구가 되기에, 진화를 부정하는 것은 현대 사회가 의존하는 과학의 상당한 성과를 거부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에 어려움을 주는데, 하나님이 생명의 창조주 시라면 그것의 과학적인 탐구 결과인 진화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사이에는 원리적으로 모순이 없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현대인들을 향한 교회의 복음 전도에도 큰 지장을 가져오는데, 교회가 과학을 거부하는 반지성적인 태도가 부각되기 때문입니다.
@pixabay, spencerwing
그러나 사실은, 성경과 진화 사이에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성경에 대한 해석과 진화에 대한 해석의 충돌 때문일 것입니다. 성경과 진화는 결코 배타적인 관계가 아니며, 이미 많은 신앙의 사람들이 성경과 진화를 모두 받아들임으로써 경험하는 지적 만족감과 풍요로움을 표현하였습니다. 이 주제에 대해 풍부한 자료를 제공하는 바이오로고스 (www.biologos.com) 에서 주도하여 출판한 “진화는 어떻게 내 생각을 바꾸었나”라는 책은 그리스도인 과학자, 신학자, 목회자 등 25명이 개인적으로 어떻게 진화론을 받아들이게 되었는지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 가운데 특히 복음주의 신학자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성경을 신실하게 믿는 것과 진화에 대한 수용이 어떻게 함께 갈 수 있는지를 살펴보면 유익할 것입니다.
@뉴스앤조이, 제임스 스미스
칼빈대학교 철학 교수인 제임스 스미스는, 마크 놀이 쓴 프린스턴 신학의 역사를 통해 개혁신학자들은 진화 과학의 발전을 거부하지 않고 도리어 긍정했다는 것을 배웠다고 말합니다. 벤자민 워필드는 성경무오론의 선봉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진화에 우호적이었습니다. 도리어 과학적 결과를 포괄적이 아니라 임의로 취사선택해서 받아들이는 것은 기독교의 역사에서도 예외적인 현상이었습니다. 칼빈주의에 대한 유명한 강연에서 아브라함 카이퍼는 개혁교회 전통이 과학적 탐구를 경계하지 않고 도리어 촉진했다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 그것은 개혁 신앙이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께 속한다는 고백에서, 과학을 포함한 모든 직업이 소명이라는 것을 강조해 왔던 것과 일관적입니다. 즉 정통 신앙은 편협한 성경 해석을 요구하지 않고, 도리어 다양한 입장들이 정통 기독교 고백과 공유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wiki, 스캇 맥나이트
노던 신학교의 신약학 교수인 스캇 맥나이트는 공룡의 뼈가 인류를 속이기 위해 사탄이 묻은 것이라는 말을 듣고 자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경 연구를 통해서, 자신이 믿는 것을 오직 성경의 증거에 기반하게 하라는 원리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만일 성경 연구에서 그러한 원리가 중요하다면, 자연에 대해서도 같은 원리가 적용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자연의 증거를 편견 없이 검토하였을 때, 그는 결국 진화를 긍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생명의 기원이 성경과 충돌하는 것처럼 보인 것은 사실 그의 성경 읽기 방식과의 충돌이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는 과학적 탐구를 통해 도리어 성경을 겸손하게 읽고 지속적으로 숙고하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과학은 그에게, 과학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음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자신의 선입견을 자연에 강요하지 않고 단지 관찰해야 한다는 것, 오직 증거가 말하게 하고 결정하게 해야 한다는 원리는, 그에게 주어진 증거를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존중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성경과 과학 모두가 주는 유익과 기쁨을 갖게 해 주었습니다.
@Amazon.com, 올리버 크리스프
풀러 신학교의 조직신학 교수인 올리버 크리스프는 신앙과 과학의 바람직한 관계에 대해 숙고한 끝에 얻은 세 원리를 소개합니다. (1) 믿음을 통해 이해를 추구한다. (2)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이다. (3) 하나님은 여전히 신비로우시다. 그는 선하신 하나님의 특성을 성경과 자연 모두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성경적 기독교와 진화는 우리의 관점에서 모순되어 보여도 원리적으로 조화됩니다. 형이상학적인 자연주의가 세계를 설명할 때 방향성이 없는 (목적이 없는) 자연선택을 주장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거기서 하나님께 드릴 자리가 없다고 믿는 것은 실책입니다. 앨빈 플란팅가가 지적하는 대로, 성경과 자연은 피상적 불일치에도 불구하고 깊이 공명하는 관계에 있습니다. 물론 세부적인 사항은 우리에게 분명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이 주제뿐 아니라 만사에서 그렇다는 것을 가령 욥기를 통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연선택을 포함한 모든 자연과정을 지정하셨기 때문에, 거기에 목적이 없어 보인다고 해서 무신론으로 빠지는 것은 과학적이 아니라 형이상학적이라고 지적합니다.
@바이오로고스, 짐 스텀프
바이오로고스의 편집장인 짐 스텀프는 휘튼 칼리지의 구약학 교수인 존 월튼을 통해 성경적으로 충족된 진화창조론자가 될 수 있었다고 리처드 도킨스를 페러디해 자신을 표현합니다. 월튼은 창조 기사의 문화적 배경과 현대 독자를 위한 길잡이를 제공하는 영향력 있는 저서들을 여럿 낸 바 있습니다. 그는 성경은 언제나 그것이 기록된 시대와 대화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역사적 맥락은 무시하고, 원 독자들의 이해는 건너뛰고, 나 자신의 시대, 문화, 계획을 성경 안으로 읽어들여야겠어”라는 태도는 믿음이 아니라 오만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리어 성경의 독자는 고대 지중해 세계와 대화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그것을 통해 현대인을 위한 성경의 메시지를 읽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유명한 변증가 C. S. 루이스는 기독교 신앙에서 이성의 중요성을,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두뇌를 포함한 모든 너 자신을 드리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deseret.com, N. T. 라이트
저명한 신약학자 N. T. 라이트는 성경과 과학이 충돌하는 현상이 미국에 특유한 일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는 미국 사회가 겪어 왔던 역사적인 큰 상처들이, 본질은 과학과 종교의 관계가 아니라 정치, 노예제, 인종 문제였음에도 불구하고, 진화냐 성경이냐의 논쟁으로 악화되었다고 말합니다. 그 결과 지혜의 길은 외면되었고 두 문화의 전쟁이 지속되었으며 양측 모두 갈수록 완고해졌습니다. 미국 외의 다른 나라에서는 이런 이슈가 직접적인 정치적 함의를 가졌던 역사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라이트의 이러한 지적은 비슷한 상황에 있는 한국 교회와 사회에도 교훈하는 바가 클 것입니다.
@peacefulscience.org, 대니스 래머로
진화적 창조에 대한 활발한 저자인 대니스 래머로는 젊은 지구론을 증명하기 위해 신학과 생물학 모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매우 지적이고 열정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신학교에서 J. I. 패커의 강의를 들었는데, 뜻밖에도 성경의 창조 기사는 “명백히 그림 언어로 기록되었다”는 선언을 듣고 당황했던 것을 고백합니다. 그는 또한 로렌 윌킨슨이 단호히, 젊은 지구론은 오류라고 단언하는 것을 듣고 또 충격을 받습니다. 나중에 그는“젊은 지구 창조론을 버린다면, 예수에 대한 믿음을 버리는 것인가?”라는 윌킨슨 교수의 질문을 받고 말문이 막혔다고 합니다. 그는 결국 성경을 문자적이 아니라 고대 근동 문화의 배경에서 더 옳고 풍성하게 읽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가령 창세기 1장은 하늘 위에 물이 있고 그 물을 단단한 궁창이 받치고 있는 그림을 보여 줍니다. 하늘의 해와 달과 별은 그 궁창에 놓여 있고 하늘 위의 바다를 떠다니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이것은 과학적인 기술이 아니라, 고대 사람들이 본 하늘의 문학적 표현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래머로는 신학과 과학 모두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후에, 결국 과학은 기독교의 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의 영광을 선포하고 그가 우주와 생명을 어떻게 만드셨는지를 드러내 준다고 말합니다.
@기독일보, 리처드 마우
풀러신학교의 전 총장이면서 기독교 철학과 윤리학 교수인 리처드 마우는 우리가 인간 중심적 사고를 벗어나서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사실을 잘 알려주는 시편 104편에서 인간은 다른 피조물에 대한 대목이 다 지난 후 맨 나중에 조금만 나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창조의 각 단계마다 좋다고 하셨던 것을 통해, 인간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께 기쁨이 된다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카톨릭 신학자와의 대화를 통해 그는 복음주의자들이 너무 급한 경향이 있어서 당장 구원과 치유를 받기 원하고, 자신들의 그런 특성에 하나님을 맞추려는 실책을 범하기 쉽다는 것을 배웠다고 합니다. 그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명의 구원자가 되신다는 것을 특이한 방식으로 생물학과 연결시킵니다. 진화에 의하면 인간의 DNA에는 이전 모든 생명 형태의 조상들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인성을 취하실 때 그의 DNA는 모든 피조물과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에 담겨 있는 DNA를 통해 모든 피조물에게 효력이 있게 됩니다.
@Unsplash, Gilley Aguilar
진화를 받아들이는 신앙인들은 이렇게, 그것을 통해 얼마나 신앙이 윤택해지는지를 고백하게 됩니다. 광대한 우주의 규모와 역사를 숙고한다면, 그 커다란 우주 속에서 작디작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놀랍습니다. 칼 세이건은 단지 물리적 크기만을 두고 인간이 보잘것없다고 보았지만, 믿음의 사람은 도리어 이 작은 피조물을 사랑하시고 사귀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고백하게 됩니다. 백억 년 단위의 우주의 역사도, 아무런 목적 없이 우주를 방치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의 사랑하시는 피조물을 위해 오랫동안 인내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시간적 스케일을 알려줍니다. 우리 생각으로는 하나님이 왜 단번에 창조하시지 않았는가 의문을 품을 수 있지만 그것은 단지 인간적인 좁은 안목일 뿐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주와 생명뿐 아니라 우리 각 사람도 어린아이일 때부터 성숙할 때까지 기다려 주십니다.
진화적 창조는 이렇게 과학적으로 풍성한 이해와 성과를 바탕으로, 하나님의 창조를 우주와 자연과 생명의 관점에서 일관적이고 합리적이면서도 신앙과 조화로운 방식으로 설명해 줍니다. 시공간적 한계가 없으신 하나님은 그분의 지혜와 영광을 통해 큰 스케일 안에서 우주와 자연법칙을 만드시고 그것을 생명과 조화로 채워 넣기 위해 진화라는 유려한 방법을 택하십니다. 그리고 인간은 상상할 수도 없는 오랜 기간 동안 그것을 신실하게 보존하시고 모든 중간 과정마다 보기에 좋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동일한 진화의 방법을 사용하여, 그분과 교제하고 그분의 형상을 갖는 특별한 피조물인 인간을 나게 하십니다. 이러한 자연과 생명에 대한 과학적이고 신앙적인 관점은 성경적 기독교와 전혀 모순되지 않습니다. 도리어, 이렇게 창조의 풍성함을 알게 되면 창조주를 더욱 풍성하게 찬양하는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서는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라는 시편 19:1의 말씀에 기반한 찬양의 가사를 허블 망원경이 보내 준 우주의 이미지 위에 슬라이드로 띄워서 온 회중이 보면서 함께 찬송했는데, 너무나 감격스럽게 창조주께 예배드리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물론 진화적 창조가 던져주는 신앙에의 진지한 질문도 있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아담과 하와가 모든 인간의 조상이 되는데,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진화 과학에 의하면 단 두 명의 인간만이 지구에 있었던 때는 없습니다. 아마도 아담과 하와는 많은 인간들 가운데 하나님이 선택하셔서 영적인 교제를 시작하신 첫 번째 커플이었을지 모릅니다. 우리가 세부적인 모든 것을 아직은 다 알 수 없지만, 이러한 관점이 성경의 올바른 이해와 모순되지는 않습니다. 또 다른 질문으로 인간의 죄로 인해 죽음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들 수 있습니다. 진화 과학에 의하면 인간이 있기 이전에 자연과 생명에는 고통과 죽음이 있었다는 사실이 명백하기 때문에, 성경의 내용과 어떻게 조화될 수 있을지 질문하게 됩니다. 그러나 죽음은 그 자체가 우리의 성경 이해에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없고 결국 예수님이 우리를 구속하시는 도구가 된다는 점에서 그 참된 중요성을 갖는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3:8은 한글 번역의 어순에 모호함이 있는데, 많은 번역들을 따라 “창세로부터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이라고 읽는다면 죽음의 근원이 아담이나 다른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에게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 외에, 다른 동물들과의 연속성이 인간의 특별한 지위를 훼손하지 않는지 질문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의 형상은 물질적이고 신체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제하는 인간의 영적인 특권에 있다고 이해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진화에 대해 생각을 바꾸게 된 복음주의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이 책에는 이러한 신학자들의 고백 외에도, 어떻게 성경과 진화에 대해 바르고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했던 여러 지성인들의 생각들이 많이 담겨 있습니다. 그들은 진화를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일 때 도리어 창조주 하나님을 더욱 풍성하게 예배할 수 있었고 성경을 더 올바르게 읽게 되었다는 것을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 주제에 대한 교회의 합당하고 열린 태도가 결국 목회와 복음 전파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가져오게 되리라는 확신을 나누어 줍니다.
한국 교회는 진화에 대해 경직되고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그것이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성경에 대한 믿음을 굳게 지키는 길이라고 생각해 왔던 측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태도는 결국 교회가 비지성적이고 폐쇄되며 과학과 합리성을 거부하는 사회라는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서, 사람들이 교회에 다가오는 길을 막아버리는 심각한 문제를 낳습니다. “지식이 없는 열심은 선하지 않다”라는 잠언 19:2의 말씀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성경의 진리와 자연의 진리는 모두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기에, 그리스도인은 그것 모두를 포용하고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창조를 깊이 향유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먼저 이 문제에 부딪히고 씨름하면서 바람직한 답을 찾아왔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살펴본 이 글이 유익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