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럼 요약] 신학은 죽음을 어떻게 말하는가?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25-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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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은 죽음을 어떻게 말하는가?


강연자ㅣ김정형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교수



신학은 죽음을 어떻게 정의하는가? 참 어려운 질문입니다. 저는 죽음에 대해서 다섯 가지 질문에 답하는 것으로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1. 모든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3단 논법은 말합니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나는 사람이다. 그러니 나도 죽는다. 하지만 이건 대전제를 기본으로 하고 있는데 '사람은 죽는다'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예외가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모든 사람이 정말 죽을까?라는 의문을 가지고 성경을 펼쳐보면 안 죽은 사람이 몇 명 있습니다.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데려갔다고 합니다. 또 엘리야는 회오리 바람 가운데 하늘로 올라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민수기에 보면 고라의 자손들은 산 채로 스올(죽은 사람들의 나라)로 내려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기록들을 보면 '모든 사람이 꼭 죽는다'는 원칙이 깨어집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이 세 사건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사라졌습니다. 달리 말하면 어찌되었건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영원히 존재하는, 영원히 사는 인간은 없습니다.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 영원히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2. 최초의 인간은 불멸의 존재였다?

태초의 사건으로 가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십니다. 먹는 날에는 죽을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반면 사탄은 무엇이라 합니까? 너희가 이것을 먹어도 절대로 죽지 않는다고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처럼 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먹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나요? 아담과 하와가 죽었습니까? 아니요.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그럼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신 것인가요? 사탄이 진실을 말한 것인가요? 사탄의 말도 다 옳지는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처럼 된 것은 아니니까요. 도대체 아담과 하와는 죽었나요? 죽지 않았나요? 생물학적으로는 죽음을 명쾌히 설명할 수 있는데 신학에서는 생각보다 명쾌하지 않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교부들의 주장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한 교부들은 죽음을 죄와 관련시킵니다. 죄 때문에 죽음이 왔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지 않았을 때는 영원히 사는 존재, 불멸의 존재였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죄를 짓기에 아담과 하와 이후의 모든 인류는 불멸의 가능성이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지 않아야 한다는 가정은 의미가 없습니다. 

좀 다른 이야기를 해 봅시다. 과학적 발견과 관련된 사실입니다. 약 350만년전 오스트랄로피테쿠스로 알려진 루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흔히 우리가 아담과 하와를 호모 사피엔스로 이야기하는데, 그럼 루시는 이보다 훨씬 이전에 존재했던 어떤 유인원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루시는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존에 주장했던 것 -죄 때문에 죽음이 들어왔다. 죄가 온 우주에 퍼졌다. 아담 한 사람의 죄 때문에 온 우주에 죽음이 존재했다.- 이런 생각은 너무 단순합니다. 우리는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3. 죽음은 죄에 대한 벌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왔고 예수님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은혜가 임했다.”고 선언합니다. 그래서 당연히 죄의 대가로 죽음이 왔다고 말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 본문을 앞 뒤 문맥 속에서 살펴보면 꼭 그런 의미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담으로 인해 죄가 들어왔다고 하지만 바울은 또 설명하기를 각 사람은 자기 죄 때문에 죽는다고 합니다. 해석의 다양성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여기 성경이 말하는 죽음이란 무엇일까? 생물학적 죽음일까? 아니면 영적 차원의 죽음일까, 우리는 질문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단순히 생물학적 죽음만을 말하지 않고 영적 차원의 죽음도 이야기합니다. 즉 하나님과의 단절을 성경은 죽음으로 정의합니다. 이런 죽음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요?

성경적 근거에서 우리는 죽음의 양상을 다양하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나의 죄 때문에 내가 죽는 경우도 있지만, 나의 죄 때문에 타인이 죽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살인이나 전쟁입니다. 분명 내가 살인이라는 죄를 짓는데 죽는 것은 내가 아니라 타인입니다. 죄와 죽음은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대일로 반응하는 것도 아니고 상당히 다양하게 얽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4. 죽음은 두려움과 극복의 대상이다? 

생물학적으로 보면 죽음은 자연스러운 현상인데 신학적으로 보면 죽음은 무언가 극복해야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죽음은 사라져야 할 원수’라고 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되면 다시는 죽음이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 예수님도 죽음을 두려워하시는 것 같아요. 이 잔을 내게서 옮겨 달라고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데 왜 죽음을 두려워하셨을까요? 그런 의문이 듭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사도 바울은 오히려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입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말합니다. 이런 점을 보면 바울은 죽음을 더 나은 곳으로 가는 관문으로 여깁니다. 죽음을 꼭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진 않습니다. 

관련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부활과 연관 지어 생각합니다. 사실 예수님도 죽으셨지만 이틀 정도만 죽음에 머무르셨고 부활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죽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요한복음의 말씀이나, 사도 바울의 말씀 즉 죽지 않으면 더 나은 것으로 살아나지 못한다는 것을 보면, 부활이라는 것은 죽음 없는 영생이 아니라 죽음을 통한 영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5. 그리스도인은 사후 세계를 믿는다?

그리스도인은 당연히 사후 세계를 믿는다고 말하지만, 이스라엘 신앙과 별개로 고대 이집트 세계나 그리스 세계에서도 사후 세계를 말합니다. 오히려 영육 이원론은 그리스 철학에서 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하기를, 흙으로 사람을 만들고 생기를 불어넣으니 생령, 즉 생명체가 되었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영과 혼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통일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죽은 사람은 스올에 간다는 구절이 있는데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악인만 가는 것이 아니라 의인도 스올로 갑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사무엘입니다. 악인도 의인도 스올 즉 땅으로 가는 것으로 말합니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서 악인만 가는 곳이 스올이고, 의인은 하늘로 간다는 믿음이 생성됩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무언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것이 사실은 없습니다. 

또 하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의 사후 세계는 죽음과 부활 사이에 집중된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부활은 마지막 주님이 오실 때 몸의 부활입니다. 따라서 '죽음과 부활 사이에 어디를 가는가'가 쟁점입니다. 즉 중간상태가 있다는 점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연옥설, 수면설, 절멸설 등 다양하게 존재합니다. 

궁극적으로는 부활입니다. 이것을 굳이 말하자면 ‘사후 세계 이후의 삶’(life after afterlife)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중간상태에 대해서는 성경은 크게 신경쓰지 않습니다. 부활 이후의 삶에 중점을 둡니다. '잠 잔다'고 표현된 중간상태가 무엇이든 간에 성도는 부활 할 것이고 부활 이후에 영원한 삶을 누립니다. 여기서 부활은 단지 영혼의 부활이 아니라 몸의 부활인 것이죠. ‘몸의 부활은 시간의 연장인가? 시간 외의 삶인가?’ 이런 점도 사실상 쉽지 않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죽음을 이야기할 때 기억해야 할 것은 부활과 관련해서입니다. 즉 죽음 이후에 부활이 있습니다. 부활의 관점에서 우리의 삶을 바라보고 죽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전에 우리는 이 땅에서 살다 죽고, 죽으면 소위 천당에 간다고 배웠습니다. 그렇기에 이 땅에서 삶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부활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봅니다. 이 땅에서의 삶과 부활의 삶이 연속성을 가진다고 믿는 것입니다. 몸이 부활할 것이기 때문에 이 땅에서의 삶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에는 분명히 손과 발에 못자국이 있었고, 허리에는 창자국이 있었습니다. 이 땅에서의 몸이 연속성을 가집니다. 그렇다면 우리 또한 이 땅에서의 삶을 함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부활은 저 너머에서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시작되는 것임으로 이 땅에서의 삶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신학적으로 죽음은 끝이 아니라 부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내용 요약ㅣ김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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