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스테리아] 7. 19세기 과학과 종교 논쟁의 시작 (전경훈)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25-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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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과학과 종교 논쟁의 시작
- 마지스테리아 10・11장 -

글ㅣ전경훈
《마지스테리아》  역자



이제 [마지스테리아]의 3부로 넘어와 19세기 과학과 종교의 관계가 어떠하였는지를 다룬다. 계몽주의 시대에는 뉴턴의 고전 물리학이 정립되면서 세상 만물이 일률적 법칙을 따라 운동한다는 관념이 확산되었다. 이에 따라 세상을 체계적으로 설계한 창조주를 입증함과 동시에 자연 속 다양한 대상을 연구함으로써 신의 속성을 파악하려는 물리신학‘들’이 속속 등장하여 차츰 화학과 생물학 같은 과학 내 분과학문으로 발전해 나갔다. 하지만 물리신학들에서 출발한 분과학문들이 연구를 거듭할수록 종교의 가르침과 배치되는 사실들이 점점 더 많이 발견되었고, 19세기 들어 종교와 과학은 본격적으로 충돌하기 시작한다. 


19세기에 종교에 타격을 가한 과학의 대표적인 분야는 지질학이었다. 17세기 후반에 시작된 초기 지질학은 성경, 특히 창세기의 내용에 부합하는 지구의 역사를 설명하려 했다. 하지만 지질학 연구가 확장될수록 이제까지 성경에 근거해서 지구의 역사를 추정하던 기존의 통설에 배치되는 사실들만 더더욱 확인되었다. 더구나 19세기 초부터 지질학이 전문화되고 성경 비평 연구가 도입되면서 오히려 변질된 텍스트보다는 지층이라는 객관적 대상이 지구의 역사에 대한 더 믿음직한 문서고 역할을 하리라는 생각이 일반화되었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은 ‘시간’이었다. 오늘날의 지구는 엿새 만에 창조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친 점진적 변화로 형성되었다는 사실이 더욱 확실해졌고, 이로써 지구와 우주의 역사가 상상 불가능할 정도로 늘어났다. 더 큰 문제는 이 때문에 이전까지 우주의 중심에 서 있던 인간의 지위가 크게 흔들렸다는 점이다. 기나긴 우주의 역사에 비하면 인간의 역사는 찰나에 불과했다. 


@Unsplash, Omer Nezih Gerek


지질학이 기존 종교의 가르침에 도전했다면, 같은 시기에 대두한 골상학은 과학이 종교를 대체할 가능성을 보였다. 오늘날에는 골상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완전히 폐기되어 상상하기 어렵지만 당시 골상학은 진지한 학문으로서 대중에게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골상학의 기본 전제는, 생각과 느낌이 뇌의 활동이고 뇌가 물질적 대상이므로 생각과 느낌 역시 물질적 형태를 취하고 물질적 인체에 남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를 발견한다면 철학적이거나 신학적으로 사고할 필요 없이, 온전히 해부학적 관찰만으로 인성을 파악할 수 있다. 골상학은 당대 과학자들에게 진지하게 받아들여졌을 뿐 아니라, 일반 대중 사이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특히 스코틀랜드의 법률가이자 과학자였던 조지 쿰의 『인간의 구성』(1828)은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했다. 쿰은 골상학이 뇌의 참된 물질적 구조와 기능을 규명함으로써 철학자들과 성직자들의 오랜 혼동을 일소하며 인간 능력을 밝혀 준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동물과 달리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 도덕과 지성의 법칙임을 인정하면서도, 그 도덕과 지성의 법칙은 뇌의 물리적 기능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제 윤리는 신의 계시가 아니라 고통과 쾌락을 비롯한 다양한 자연법칙의 영역에 속하게 되었고, 종교의 고유한 역할은 과학이 자연에서 식별해 낸 도덕적 교훈을 긍정하는 데 그치게 되었다. 쿰은 인간의 품성, 지성, 도덕에 관한 참된 과학적 그림을 인식하고 통합하는 ‘새로운 그리스도교 신앙’이 요구된다고 하면서 ‘두 번째 종교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대혁명을 경험한 프랑스에서는 자연과학의 방법론을 인간 사회에 적용하려는 시도가 줄기차게 진행되어 이른바 ‘사회과학’이 탄생했다. 자연이 일률적 법칙에 따라 운동하고, 지구가 일률적 법칙에 따라 형성되고 변화한다면, 인간 사회 또한 그러하리라는 생각이 팽배해졌다. 이런 생각을 대표하는 인물이 생시몽과 그의 제자 콩트다. 생시몽은 인간의 역사가 축적된 지식과 도덕적 진보에 의해 특징지어진다고 결론 내리고 종교, 형이상학, 과학이라는 3단계 과정을 상정했다. 그리고 지구의 궤도나 발사체의 경로를 파악하듯 과학을 통해 인간의 정신, 도덕, 사회, 경제도 파악할 수 있는 시대가 곧 오리라고 믿었다. 생시몽은 종교가 나름대로 쓸모 있는 제도이므로 폐지하기보다는 더 나은 과학적 제도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신新그리스도교』라는 책을 출간했고, 신성을 인성으로, 성직자를 과학자로, 신앙을 과학 지식으로 대체하는, 전면적인 사회 재조직화를 주장했다. 생시몽의 제자이면서 실증주의의 창시자로 알려진 오귀스트 콩트는 가장 복잡한 수준의 현실인 사회 현상에 대한 이해를 목적으로 삼고 사회의 물리학이랄 수 있는 ‘사회과학’을 진정한 실증철학의 지위로 고양할 방법들을 개괄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인간과 사회를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것이야말로 인간 실존 조건을 향상하는 것이라 믿고, 과학은 사회와 개인의 진보와 구원까지 약속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콩트는 과학적 종교로서 인류교라는 새로운 종교를 창립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물론 그의 인류교는 당대에 이미 ‘그리스도교를 뺀 가톨리시즘’ 일  뿐이라는 조롱 어린 비판을 받았지만, 그가 사회과학을 자연과학의 수준으로 올려놓고, 신성이 아니라 인성을 숭배해야 한다는 믿음을 유산으로 남겼다는 것만은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다. 


@ AI 생성 이미지

이러한 배경 속에서 종교와 과학의 충돌을 가장 첨예하게 드러낸 것은 바로 진화론이었다. 개인적으로 무척이나 세심한 편이었던 찰스 다윈은 이제까지 축적된 과학적 발견과 이론을 면밀히 살폈을 뿐 아니라, 본래 성공회 사제를 지망했기에 신학 서적들을 읽고 숙고했다. 그리고 세상 만물이 일률적인 법칙에 종속된다는 사실이 입증되었으니, 생명체 또한 고정된 발생 법칙에 따라 창조되었으리라 믿었다. 그는 신이 세상 만물을 일일이 창조했다기보다 정교한 법칙으로 이루어진 완전한 체계로서 우주를 창조했고, 천문학적 원인들로부터 지질학과 기후변화를 거쳐 유기물의 형태 변화들까지 펼쳐졌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다윈은 잘 알려진 대로 비글호를 타고 신세계를 탐험하는 등 직접 실증적 증거를 수집하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고, 결국 ‘생존경쟁’과 ‘자연선택’이라는 원칙에 따른 생물 종의 진화를 이론화하여 1859년에 『종의 기원』을 출간했다. 이 책은 당대 과학계와 종교계는 물론 사회 전반에 전례 없는 큰 파장을 일으켰고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사실 ‘진화론’ 자체는 다윈 자신의 발명이나 발견은 아니었다. 이미 지질학과 생물학이 발전하면서 오랜 지구의 역사를 통해 생물 또한 그 나름의 법칙을 따라 변화해 왔다는 생각이 형성되어 있었다. 특히 찰스 다윈의 할아버지인 이래즈머스 다윈은 당대에 유명한 자유사상가로서 유물론적 사고를 바탕으로 생물이 신 없이 탄생하여 변화되었다고 생각했다. 또한 다윈이 성공회 사제를 지망하던 당시에 영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던 신학자 페일리는 이성적인 창조주가 정교한 법칙을 따라 세상을 기획하고 창조했다는 자연신학을 전개했다. 찰스 다윈이 이들과 달랐던 점은 진화의 원리를 설명함으로써 진화론을 ‘과학’으로 체계화하고 실증(하고자)했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이미 이 시대에는 산업혁명이 상당히 진척되어 지식과 문화를 소비하는 대중이 등장했고, 이 대중은 종교보다 과학에 관한 책들을 더 많이 읽기 시작했기에, 찰스 다윈은 이전의 어떤 신학자나 과학자보다 (의도치 않게) 더 큰 반향을 일으켰다. 출간 직후 『종의 기원』은 하나의 현상이 되었으며, 다윈은 이미 과학사에서 갈릴레오와 같은 반열에 올라 싸워야 했다. 


@1870년 더 피리어드(The Period)에 실린 토마스 헨리 헉슬리 캐리커쳐, 위키미디어

1860년 6월, 진화론을 둘러싼 공개적인 논쟁의 무대가 열렸다. 하지만 세심했던 다윈은 직접 논쟁에 나설 수가 없었고, 오히려 더 열렬한 진화론자였던 그의 친구 토머스 헉슬리가 그를 대신해 무대에 올랐다. 헉슬리에 맞서는 인물은 옥스퍼드 대학 출신의 성직자이자 뛰어난 자연철학자인 새뮤얼 윌버포스 주교였다. 두 사람의 대결은 당대에 지성계는 물론 일반 대중으로부터도 엄청난 관심을 받았을 뿐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갈릴레오 재판에 상응하는 역사의 전설로 남았다. 특히 윌버포스가 헉슬리를 향해 당신은 할아버지와 할머니 둘 중 어느 쪽으로 유인원의 자손이 되느냐고 물었을 때 헉슬리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주교를 조상으로 두느니 유인원을 조상으로 두는 편이 더 낫겠노라고 응수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이야기가 실제 논쟁이 있었던 때로부터 한 세대가 지나 과학과 종교의 ‘전쟁’이라는 서사가 힘을 받기 시작한 1890년대부터 등장하여 확산되었다는 사실이다. 프로테스탄트 쪽에서 가톨릭의 독단에 맞서기 위한 근거로 갈릴레오 재판을 이용했던 것과 거의 같은 방식으로 반종교적 작가들이 그리스도교에 맞서기 위한 근거로 헉슬리-윌버포스 논쟁을 사용했던 것 같다.


최근 새로 발견된 정확한 기록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논쟁의 핵심은 두 가지 문제로 요약된다. 하나는 인간의 존엄에 관한 것이었다. 다윈의 책 자체는 인간에 관해 그리 많은 내용을 담고 있지 않았지만, 그의 진화론이 이제까지 세계의 중심이자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의 지위를 무너뜨린다는 점은 명확했다. 인간과 다른 동물의 차이는 단계적 차이에 불과하며, 인간의 정신과 사고는 신적 속성을 받은 영혼에 속한 것이 아니라 뇌의 작용과 기능에 지나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 권위에 관한 것이었다. 헉슬리가 보기에 진화론은 실증적 과학의 영역에서 전문적인 과학자들이 다루어야 할 문제이지 성직자나 군중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정확한 기록에 따르면 유인원 조상에 관한 윌버포스의 농담조 질문에 대한 헉슬리의 응답은 종교와 성직자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과 과학자를 그로부터 구분하여 옹호하려는 것이었다. 즉 종교와 과학은 서로 구분되는 영역이며 과학의 문제는 권위 있는 과학자들이 다루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요컨대 둘의 대결은 단순히 종교와 과학의 충돌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 혹은 세계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위치에 관한 논쟁이었으며, 과학의 문제를 결정할 수 있는 권위에 관한 논쟁이었다. 적어도 후자의 문제에서 헉슬리는 성공을 거둔 듯 보인다. 이후 한 세대가 지난 1890년대에 영국과학진흥협회에서 다양한 분과들을 주재하는 성직자 수는 마흔 명에서 세 명으로 줄었다. 이러한 사실은 이제 과학이 마침내 신학이라는 부모에게서 떠났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전자의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남았고, 이후 종교와 과학의 계속되는 논쟁의 핵심 주제가 된다. 이런 맥락에서 헉슬리-윌버포스 논쟁은 확실히 과학과 종교의 얽힌 역사에서 하나의 이정표가 되었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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