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스테리아]8. 19세기를 달군 과학과 종교의 양상 (전경훈)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25-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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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를 달군 과학과 종교의 양상

- 마지스테리아 12・13장 -

 

글ㅣ전경훈
《마지스테리아》 역자


 

윌버포스와 헉슬리 @위키백과

다윈의 진화론이 등장하고 그 유명한 윌버포스-헉슬리의 논쟁이 있었던 19세기 후반은 서구의 제국주의적 확장이 절정을 향해 가던 시기이기도 했다. 서구 열강의 정복 활동을 따라 서구의 종교(그리스도교)와 과학이 전달되는 과정에서 둘 사이의 서로 얽힌 역사는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되었다. 우선은 세계적으로 그리스도교 선교 활동이 펼쳐지는 과정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선교 과정에서 과학과 종교가 얽혀든 역사는 새로운 항로를 발견한 서구 열강의 해외 진출과 거의 동시에 시작되었다. 선교사들은 서구의 신앙만이 아니라 서구의 과학을 비서구 세계에 전달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6세기에서 17세기에 해외 선교를 주도한 예수회 수사들은 특히 중국 황실에 서구 과학을 전달한 것으로 유명하다. 18세기 이후로는 계몽주의를 배경으로 탄생한 복음주의자들이 해외 선교를 주도하면서 과학과 종교가 융합되는 다양한 형태를 보여주었다. 선교사들은 단순히 복음을 선포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교육과 의료 사업을 벌였고, 세계 곳곳의 자연 현상을 관찰하고 연구하면서 스스로 훌륭한 과학자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하기도 했다. 

@AI 생성 이미지

이런 맥락에서 과학과 종교의 이야기는 19세기에 전 지구적 차원에 접어들면서 사실상 서구와 나머지 세계라는 더 큰 이야기의 하위 플롯이 되었다. 과학은 서구의 것이었고, 그래서 새로이 규명된 이 다른 종교들이 과학에 반응하는 방식은 과학을 들여온 서구인들에게 반응한 방식을 따라 형성되는 게 당연했다. 과학은 서구가 비서구 세계를 식민화하는 힘으로 인식되었고, 서구와 비서구 사이에 힘의 차이가 더욱 명확해짐에 따라 비서구 세계에서는 서구의 과학에 대해 비판적이면서도 수용적인 양가적 태도를 갖게 되었다. 서구의 그리스도교-과학이 부도덕하고 제국주의적이라고 비난하는 한편으로, 그리스도교-과학의 요소들을 기존 전통 안에서 찾으려는 경향도 두드러졌다. 이슬람에서는 서구 그리스도교-과학의 원류로서 이슬람의 ‘황금시대’를 재차 강조했고, 인도에서는 힌두교의 우주론을 서구의 창조론에 대응시켰으며, 중국에서는 유교의 ‘격물格物’(사물에 대한 탐구)을 새삼 강조하는 한편 성리학적 우주론을 재발견했다.


그러나 가장 문제가 된 것은 인종주의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당연히 진화론이 놓여 있었다. 19세기말에 이르기까지 서구인들이 비서구인들을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척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진화론은 이를 ‘과학적으로’ 뒷받침하는 듯했다. 그리스도교는 인류 전체가 하나님이 손수 만드신 아담과 이브의 후손이라는 인류일원설을 견지했고, 결국 인류가 단일한 ‘종種’이란 의견을 지지했다. 의사이면서 선구적 민족학자였던 프리처드 같은 사람은 이를 과학적으로 입증하고자 분투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질학의 발전을 통해 이미 약화된 성경의 권위를 비판하며 고고학과 해부학을 바탕으로 인류다원설을 주장하는 이들도 많았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인간을 정의하는 인간의 본질을 둘러싼 논의라는 것이었고, 과학의 문화적 권위가 점증하면서 논의의 영역이 신학에서 과학으로 옮겨 갔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신학에서 과학으로 옮겨 가는 사이에 인간의 본질에 대한 논의는 ‘인간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에서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바뀌었다. ‘누구’라는 물음 안에는 이미 인간이 행위의 주체로서 1인칭의 시각을 지닌 인격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으나 ‘무엇’이라는 물음 안에는 인간 또한 여타 사물과 다름없는 객관적 관찰과 실험의 대상이라는 의미가 깔려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등장한 학문이 인류학이다. 많은 학자가 인간의 본질을 추구하는 동시에 인종 간 차이를 설명하고자 애를 썼다. 연구가 진행될수록, 인류일원설을 지지하면서도 인종 간 내재적 우열을 믿었던 찰스 다윈처럼 진화론에 근거하여 인류의 기원을 밝히고 자연선택이나 성선택이란 개념을 사용하여 인종 간 차이와 우열을 합리화하려는 경향이 강해졌다. 이러한 과정에서 등장한 근원적 문제는 인간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만으로 인간이 ‘누구’인지를 안다고까지 생각하거나, 인간이 ‘누구’이냐는 물음 자체를 잉여적이며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여기게 된 세태였다. 이제 과학과 종교는 인간이 누구 혹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와 이를 판결할 권위가 누구에게 있는가 하는 두 가지 문제를 가지고 대립하고 충돌하게 된다. 


한편으로 19세기는 종교와 과학의 관계 자체가 본격적인 논의 주제로 다루어지기 시작한 시기다. 크게 나누어 보자면 양자의 관계를 평화로 보는 이들과 전쟁으로 보는 이들이 있었다. 평화로 보는 이들은 주로 물리학, 화학, 천문학같이 사물과 물질의 물리적 성질과 현상과 법칙을 다루는 물상과학 쪽에 있었다. 종교와 관련해서 물상과학에는 걸려 있는 것이 많지 않았기에 종교와 갈등할 이유가 적었고, 한편으로 생물학에 비해 훨씬 더 전문화되어 논쟁을 좋아하는 일반 대중의 접근이 어려웠으며, 물상과학이 만물에 대해 추구하는 법칙성은 신에 대한 믿음과 융화되기 더 쉬웠기 때문이다. 

제임스 맥스웰(James Clerk Maxwell, 1831-1879) @위키백과

그렇다고 해서 그 평화의 양상이 모두 똑같았던 것은 아니다. 19세기에 가장 중요한 물리학자이자 화학자인 마이클 패러데이의 평화는 종교와 과학을 서로 다른 영역으로 구분해서 얻은 침묵의 평화였다. 패러데이보다 더 큰 업적을 이룬 수리물리학자 제임스 맥스웰은 오히려 자연을 통해 하느님을 우러러보는 자연철학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특히 열역학 제2법칙에 관심을 돌리면서 시간의 비가역적 방향성을 시사하고 우주가 존재하기 시작한 최초의 순간을 언급하며 이를 창조와 연결했다. 하지만 맥스웰은 이렇게 과학과 종교를 연결하는 태도가 과학자 개인의 것이지 사회적 인정까지 받아야 할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았고, 그래서 종교와 과학의 화합을 위해 1865년에 설립된 빅토리아협회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반면에 당대 영국 과학계의 주요 인물이었던 조지 스토크스는 오래전 페일리의 자연신학과 같은 입장을 견지했을 뿐 아니라 이를 더 적극적으로 표명했다. 1885년에 왕립학회 회장으로 선출되는 동시에 빅토리아협회 회장직도 수락할 정도였다. 그는 우주가 신에 의해 직접 설계되고 통제되기보다는 신의 활동인 고정된 자연법칙에 의해 작동한다고 믿었으며, 더 나아가서 인간이 우주의 목적적인 법칙에 맞도록 지어졌다고까지 주장했다. 이는 진화론의 틀 안에서 인간의 본질을 이해할 준비가 되었음을 보여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를 과학 위에 기초하게 될 위험성을 내포했다. 이러한 위험성을 감수하면서 더욱 적극적으로 종교와 과학의 조화를 추구한 것은 윌리엄 톰슨이었다. 열역학법칙을 정리하고 물리학을 통일하는 데 크게 기여한 톰슨은 열역학 제2법칙에서 세계의 창조는 물론 종말의 확증을 보았다. 

토머스 헨리 헉슬리(Thomas Henry Huxley, 1825-1895) @ 위키백과

물상과학과 달리 인간을 포함하는 생물학에서는 종교와 과학이 전쟁 중에 있었고, 이를 상징하는 인물은 당연히 토머스 헉슬리였다. 헉슬리는 진화론에 대한 적대적 반응에 고무되어 1864년에 X클럽이라는 과학자들의 모임을 열고 종교에 구속되지 않은, 순수하고 자유로운 과학에 전념하고자 했다. 이들이 추구한 것은 종교 자체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에서 종교의 권한과 영향을 완전히 배제하려는 것이었다. X클럽은 이후 30년 동안 유지되며 유력한 과학자들을 배출했고, 영국 과학계를 완전히 지배하지는 못했어도 과학계에서 성직자들을 배제함으로써 과학을 종교의 권위로부터 독립시키는 데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X클럽의 입장을 가장 첨예하게 드러낸 사람 중 하나가 아일랜드의 물리학자 존 틴들인데, 그는 1874년 영국과학진흥협회 회장 취임 연설에서 다윈의 진화론을 단호히 옹호하면서 자연의 원자에서 인간의 사유에 이르는 현실에 대한 종합적인 유물론적 설명을 제시하려 했다. 이는 성공회와 가톨릭은 물론 스토크스 같은 과학자로부터도 폭발적인 반발을 불러오기도 했다.

존 틴들(John Tyndall, 1820-1893) @ wikipedia

그런데 이러한 틴들의 생각은 미국의 화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존 드레이퍼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드레이퍼는 인간 역사도 자연 현상처럼 법칙을 따른다고 믿었고, 이는 일종의 역사적 결정론으로 흘렀다. <유럽의 지적 발전의 역사>(1862)에서 유럽 지성사가 유년기와 아동기에서 출발해 청년기와 장년기를 거쳐 노년기에 이른다고 보았던 그는 10년 뒤 <종교와 과학 충돌의 역사>를 집필했다. 그는 마치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보일의 법칙으로 정형화하듯이 인간 지성의 팽창하는 힘과 신앙의 내리누르는 힘이 길항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 책은 미국과 영국에서 대중적으로 크게 성공했고 여러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어 유럽 전체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20년 뒤 앤드루 화이트가 10년에 걸쳐 연재하여 완성한 대작 <그리스도교 세계 내 과학과 신학의 전쟁사>는 종교와 과학의 관계를 충돌과 갈등으로 보는 시각이 과학계는 물론 대중적으로도 팽배했음을 보여준다. 


물론 과학과 종교의 전쟁조차 늘 일률적이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이를테면 헉슬리조차 ‘참된 과학과 참된 종교는 쌍둥이 자매’라고 할 만큼 종교적이었다. 그는 과학이 자신에게 ‘하느님의 의지에 전적으로 투항한다는 그리스도교의 개념에서 체현된 위대한 진리를 가장 높고 강한 방식으로 가르쳐주는 것 같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는 종교를 충분히 존중했고, 과학과 종교 사이의 반목이란 순전히 꾸며낸 것이라 보았다. 다만 그가 주장한 것은 과학과 종교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오만한 신학적 교의가 과학에 간섭하는 것을 반대하는 만큼이나 과학이 철학적이고 실존적인 문제에 대해 떠드는 것도 반대했다. 틴들은 종교가 인간 본성 안에 깊이 박혀 있는 것이어서 어떠한 무신론적 추론도 인간의 마음에서 종교를 몰아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으며, 실제로 종교가 감당해야 할 영역이 있다고 믿었다. 다만 틴들 또한 독선적인 종교의 교의에 반대하며 자유로운 사고를 지지했다. 이러한 입장은 드레이퍼와 화이트의 역사서에 깔려 있는 테마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정도를 달리하긴 했지만, 진리에 대해 경건한 태도를 견지하는 순수한 종교를 추구하며 과학과 독단적 신학 사이의 전쟁을 기술했다. 이들은 종교를 배척하기보다는 종교를 개혁하고자 했다. 프랑스의 에르네스트 르낭은 이와 같은 작업을 이슬람에 대해 전개하면서 이슬람의 황금시대가 가능했던 것은 주류 이슬람보다 덜 광신적이고 덜 조직적인 일종의 이슬람 프로테스탄티즘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마지스테리아>의 저자 스펜서는 헉슬리, 드레이퍼, 화이트, 르낭 등이 설파한 과학과 종교의 전쟁은 조금씩 그 양상은 다르지만, 여러 면에서 종교의 전쟁들에서 일어난 마지막 경련 같은 것이고 당대의 과학은 독단적 종교의 여전히 꿈틀거리는 몸통에 꽂힌 단검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발생한 진짜 피해자는 종교가 아니라 역사였다. 복잡하고 다층적인 과학과 종교의 역사‘들’이 획일적인 충돌의 단일한 서사로 축소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과 종교의 충돌에 관한 거의 모든 신화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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