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재판
- 마지스테리아 14장 -
글ㅣ전경훈
《마지스테리아》 역자
기나긴 19세기가 끝나고 20세기에 접어들면서 과학은 더욱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종교는 과학이 발전하는 만큼 그 세력을 잃는 듯했지만, 20세기 초까지도 대다수의 사람은 여전히 종교 안에 머물렀으며, 종교 또한 각종 제도와 기관과 시설을 통해 사회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따라서 과학과 종교의 ‘충돌’ 서사는 20세기 들어서도 계속되었고 여전히 이 서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주제는 진화론이었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미국의 스코프스 재판이다. 19세기 영국 옥스퍼드에서 다윈의 진화론을 두고 벌어진 헉슬리-윌버포스 논쟁의 재현처럼 보이는 이 사건은 20세기에 들어 종교와 과학의 관계가 어떻게 얽혀 들었는지, 또 그것이 어떻게 서술되고 왜곡되었는지, 그리고 여전히 변하지 않는 쟁점은 무엇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존 T. 스코프스, 1925 @wmky.org
우선, 20세기 들어 다윈 사후에 지지부진하던 진화론에 관한 논의가 새롭게 전개되면서 이를 둘러싼 과학과 종교의 갈등이 -특히 미국에서- 다시 점화되는 배경은 크게 여섯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유전과 방사능이 발견되면서 자연선택의 신빙성이 높아졌다. 둘째, 국가에 의한 교육의 확대‧보급으로 과학(특히 생물학)이 일반적인 학교 교과목 중 하나가 되었다. 셋째, 진화론을 포함한 생물학은 순전한 과학 지식 영역에 머물지 않고 ‘생물’인 인간과 사회를 정의하고 이해하는 데 영향을 주었고 특히 사회 문제를 재정의했다. 넷째, 생물학에 의한 사회 문제의 재정의는 결국 사회 문제에 대한 생물학적 ‘치료’를 제시했다. 다섯째, 진정한 의미의 전 지구적 세계사가 전개되기 시작하면서 사회 문제에 대한 국제적 시각이 등장했고 여기서 민족과 인종 간의 생존 투쟁이라는 관념이 형성되었다. 여섯째, 진화론을 바탕으로 한 우생학적 생물학이 도덕성에 끼치는 영향에 대한 우려가 크게 제기되었다. 몇몇 주에서 범죄자, 중독자, 지적장애인, 실업자 등에 대한 강제 불임수술 법이 통과되면서 이러한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다윈주의에 반대하는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고, 대중의 폭넓은 지지를 받던 인민주의자(포퓰리스트)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은 그러한 목소리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세 번이나 선출된 브라이언은 과학 이론으로서 진화론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으나, ‘짐승을 조상으로 받아들이는 데 수반되는 도덕적 타락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진화론을 인정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법을 포기하고 정글의 법을 따르는 것이라 우려했고, 제국주의와 우생학을 부도덕 및 불신앙과 더불어 다윈의 이론에서 열린 쓰디쓴 열매로 보았다. 브라이언은 60대에 이른 1920년대부터 직접적으로 다윈주의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곧이어 기독교 근본주의 지도자들은 학교에서 (우생학으로 연결되는) 진화론을 가르치지 못하게 할 것을 요구했다.

존 T. 스코프스, 1925 @미국의회도서관
이로써 기독교 복음주의가 강한 남부 지역에서는 교육과정에서 진화론을 배제하려는 움직임이 구체화되었고, 1925년 테네시주 의회가 학교에서 (학부모들이 반대하는) 진화론을 가르쳤을 때 벌금을 물리는 진화론 금지법을 통과시켰다. 여론은 이에 찬성하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과 이에 반대하는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둘로 나뉘었다. 마침, 미국시민자유연맹이라는 신생 단체에서는 테네시주의 진화론 금지법을 어겨 기소당한 사람을 변호해 주겠다고 광고하면서 실제로 재판이 ‘기획’되었고, 지역 사업가와 언론인 등이 가세하여 재판을 ‘흥행’시켰다. 테네시주의 소읍인 데이턴이란 곳에서 스코프스라는 교사가 금지된 이론을 가르쳤음을 인정하고 해당 지역 판사가 그에 대해 체포영장을 발부하면서 재판이 시작되었다. 미국시민자유연맹에서 스코프스의 변호를 지원했고 노동자 권리를 옹호하는 뛰어난 연설가로 유명했던 민주당 정치인 클래런스 대로가 자원하여 그의 변호를 맡았다. 검사 쪽에서는 세계그리스도교근본주의협회의 지원을 받아 브라이언을 영입했다. 재판이 시작되기 전부터 신문과 방송을 통한 전국적인 여론전이 펼쳐졌고, 스코프스라는 개인의 테네시주 법률 위반 여부는 물론이고 학문과 표현의 자유라는 문제까지 맹렬한 문화전쟁에 가려 버리고 말았다. 결국 재판은 ‘종교와 과학의 전쟁’처럼 보였다.
흥미로운 점은 브라이언이 대표하는 기소자 편에서는 진화라는 주제 자체에 대한 논의를 배제하면서 피고의 법률 위반 여부만을 따지는 좁고 엄격한 법률적 접근법을 택한 반면, 대로가 대표하는 변호인 편에서는 해당 법률 자체의 정당성을 따지면서 진화론의 진실성과 그리스도교와의 양립 가능성을 논하려 했다는 사실이다. 대로는 공립학교에서 특정 종교의 관점을 확립할 수 없다는 의견을 펼치면서, 더욱이 그리스도교 자체가 여러 교파로 나뉘었고 특히나 근본주의는 세계 전역에 사랑이 아닌 증오를 퍼뜨리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성경은 과학책이 아니며, 오히려 그러하기에 과학과 종교가 양립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브라이언은 인간의 신성한 본성과 그 신뢰성이라는 주제를 바탕으로 논지를 펼치면서 진화론을 비판했고, 하느님의 말씀은 전문가 없이도 평범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기에 학교에서 학생에게 가르칠 내용을 해당 학부모가 정할 수 있고 이를 법률이 뒷받침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재판 마지막 날에 대로가 브라이언을 직접 증인석에 세워 증언하게 하면서 양측의 긴장은 절정에 이르렀다. 대로는 브라이언을 과학에 무지한 근본주의 기독교 신자로 몰았고, 브라이언은 대로가 성경과 신앙을 모독하고 있다고 반발했다. 수많은 언론이 재판 과정을 거의 실시간으로 보도하면서, 어쨌거나 재판은 전국적 흥행에 성공했다.

존 T. 스코프스 재판 중 테네시 법원 절차에 대해 협의 중인 클래런스 대로 변호사, 1925 @TIME
스코프스 재판은 과학과 종교의 충돌이라는 역사에서 윌버폭스-헉슬리 논쟁은 물론 갈릴레오 재판만큼이나 신화화되었다. 신화의 핵심 내용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대로의 냉철한 논리가 브라이언의 근본주의적 무지를 만천하에 드러냈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브라이언이 공개 망신을 당한 탓에 근본주의자들은 하위문화로 축소되었다가 반세기가 지난 뒤 로널드 레이건 정부 아래에서 되살아났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둘 다 실제 사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재판은 대로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벌금을 물림으로써 끝이 났지만, 둘로 나뉜 여론은 봉합되지 않았다. 대로를 비롯하여 스코프스를 옹호한 사람들은 근본주의자들에 대한 도덕적이고 지성적인 승리를 주장했으나, 오히려 즉각적으로는 근본주의와 반反진화론 지지가 급격히 늘었으며 테네시에 이어 남부 여러 주에서 반진화론 법률을 제정하기도 했다. 재판은 신문에서 역사서로, 역사서에서 오락물로 전해졌고, 그 과정에서 이 재판은 근본주의에 대한 자유주의의 승리이자, 신앙에 대한 이성의 승리이며, 종교에 대한 과학의 승리로 자리매김했다. 이 과정에서 재판을 흥행시키려던 기업가와 언론인은 지워지고, 스코프스는 군중 행동의 무고한 피해자가 되었으며, 브라이언은 아무 생각이 없는 반동분자가 되었다. 이로써 20세기 초 미국에서 진화론이 다시 논쟁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중요한 배경은 모두 지워지고 우생학과 얽힌 진화론의 문제는 무시되었다. 결국 문제는 종교와 과학 사이가 아니라 브라이언주의와 과학 사이에 있었으나, 종교와 과학의 전쟁이라는 신화가 이 모두를 흐려 버렸다. 20세기에 시간이 흐름에 따라 브라이언이 테네시주 데이턴에서 결합해 놓았던 것, 곧 진화론과 무신론을 다시 갈라놓기는 정말 어렵게 되었다.
세기의 재판
- 마지스테리아 14장 -
글ㅣ전경훈
《마지스테리아》 역자
기나긴 19세기가 끝나고 20세기에 접어들면서 과학은 더욱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종교는 과학이 발전하는 만큼 그 세력을 잃는 듯했지만, 20세기 초까지도 대다수의 사람은 여전히 종교 안에 머물렀으며, 종교 또한 각종 제도와 기관과 시설을 통해 사회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따라서 과학과 종교의 ‘충돌’ 서사는 20세기 들어서도 계속되었고 여전히 이 서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주제는 진화론이었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미국의 스코프스 재판이다. 19세기 영국 옥스퍼드에서 다윈의 진화론을 두고 벌어진 헉슬리-윌버포스 논쟁의 재현처럼 보이는 이 사건은 20세기에 들어 종교와 과학의 관계가 어떻게 얽혀 들었는지, 또 그것이 어떻게 서술되고 왜곡되었는지, 그리고 여전히 변하지 않는 쟁점은 무엇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우선, 20세기 들어 다윈 사후에 지지부진하던 진화론에 관한 논의가 새롭게 전개되면서 이를 둘러싼 과학과 종교의 갈등이 -특히 미국에서- 다시 점화되는 배경은 크게 여섯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유전과 방사능이 발견되면서 자연선택의 신빙성이 높아졌다. 둘째, 국가에 의한 교육의 확대‧보급으로 과학(특히 생물학)이 일반적인 학교 교과목 중 하나가 되었다. 셋째, 진화론을 포함한 생물학은 순전한 과학 지식 영역에 머물지 않고 ‘생물’인 인간과 사회를 정의하고 이해하는 데 영향을 주었고 특히 사회 문제를 재정의했다. 넷째, 생물학에 의한 사회 문제의 재정의는 결국 사회 문제에 대한 생물학적 ‘치료’를 제시했다. 다섯째, 진정한 의미의 전 지구적 세계사가 전개되기 시작하면서 사회 문제에 대한 국제적 시각이 등장했고 여기서 민족과 인종 간의 생존 투쟁이라는 관념이 형성되었다. 여섯째, 진화론을 바탕으로 한 우생학적 생물학이 도덕성에 끼치는 영향에 대한 우려가 크게 제기되었다. 몇몇 주에서 범죄자, 중독자, 지적장애인, 실업자 등에 대한 강제 불임수술 법이 통과되면서 이러한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다윈주의에 반대하는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고, 대중의 폭넓은 지지를 받던 인민주의자(포퓰리스트)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은 그러한 목소리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세 번이나 선출된 브라이언은 과학 이론으로서 진화론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으나, ‘짐승을 조상으로 받아들이는 데 수반되는 도덕적 타락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진화론을 인정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법을 포기하고 정글의 법을 따르는 것이라 우려했고, 제국주의와 우생학을 부도덕 및 불신앙과 더불어 다윈의 이론에서 열린 쓰디쓴 열매로 보았다. 브라이언은 60대에 이른 1920년대부터 직접적으로 다윈주의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곧이어 기독교 근본주의 지도자들은 학교에서 (우생학으로 연결되는) 진화론을 가르치지 못하게 할 것을 요구했다.
존 T. 스코프스, 1925 @미국의회도서관
이로써 기독교 복음주의가 강한 남부 지역에서는 교육과정에서 진화론을 배제하려는 움직임이 구체화되었고, 1925년 테네시주 의회가 학교에서 (학부모들이 반대하는) 진화론을 가르쳤을 때 벌금을 물리는 진화론 금지법을 통과시켰다. 여론은 이에 찬성하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과 이에 반대하는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둘로 나뉘었다. 마침, 미국시민자유연맹이라는 신생 단체에서는 테네시주의 진화론 금지법을 어겨 기소당한 사람을 변호해 주겠다고 광고하면서 실제로 재판이 ‘기획’되었고, 지역 사업가와 언론인 등이 가세하여 재판을 ‘흥행’시켰다. 테네시주의 소읍인 데이턴이란 곳에서 스코프스라는 교사가 금지된 이론을 가르쳤음을 인정하고 해당 지역 판사가 그에 대해 체포영장을 발부하면서 재판이 시작되었다. 미국시민자유연맹에서 스코프스의 변호를 지원했고 노동자 권리를 옹호하는 뛰어난 연설가로 유명했던 민주당 정치인 클래런스 대로가 자원하여 그의 변호를 맡았다. 검사 쪽에서는 세계그리스도교근본주의협회의 지원을 받아 브라이언을 영입했다. 재판이 시작되기 전부터 신문과 방송을 통한 전국적인 여론전이 펼쳐졌고, 스코프스라는 개인의 테네시주 법률 위반 여부는 물론이고 학문과 표현의 자유라는 문제까지 맹렬한 문화전쟁에 가려 버리고 말았다. 결국 재판은 ‘종교와 과학의 전쟁’처럼 보였다.
흥미로운 점은 브라이언이 대표하는 기소자 편에서는 진화라는 주제 자체에 대한 논의를 배제하면서 피고의 법률 위반 여부만을 따지는 좁고 엄격한 법률적 접근법을 택한 반면, 대로가 대표하는 변호인 편에서는 해당 법률 자체의 정당성을 따지면서 진화론의 진실성과 그리스도교와의 양립 가능성을 논하려 했다는 사실이다. 대로는 공립학교에서 특정 종교의 관점을 확립할 수 없다는 의견을 펼치면서, 더욱이 그리스도교 자체가 여러 교파로 나뉘었고 특히나 근본주의는 세계 전역에 사랑이 아닌 증오를 퍼뜨리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성경은 과학책이 아니며, 오히려 그러하기에 과학과 종교가 양립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브라이언은 인간의 신성한 본성과 그 신뢰성이라는 주제를 바탕으로 논지를 펼치면서 진화론을 비판했고, 하느님의 말씀은 전문가 없이도 평범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기에 학교에서 학생에게 가르칠 내용을 해당 학부모가 정할 수 있고 이를 법률이 뒷받침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재판 마지막 날에 대로가 브라이언을 직접 증인석에 세워 증언하게 하면서 양측의 긴장은 절정에 이르렀다. 대로는 브라이언을 과학에 무지한 근본주의 기독교 신자로 몰았고, 브라이언은 대로가 성경과 신앙을 모독하고 있다고 반발했다. 수많은 언론이 재판 과정을 거의 실시간으로 보도하면서, 어쨌거나 재판은 전국적 흥행에 성공했다.
존 T. 스코프스 재판 중 테네시 법원 절차에 대해 협의 중인 클래런스 대로 변호사, 1925 @TIME
스코프스 재판은 과학과 종교의 충돌이라는 역사에서 윌버폭스-헉슬리 논쟁은 물론 갈릴레오 재판만큼이나 신화화되었다. 신화의 핵심 내용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대로의 냉철한 논리가 브라이언의 근본주의적 무지를 만천하에 드러냈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브라이언이 공개 망신을 당한 탓에 근본주의자들은 하위문화로 축소되었다가 반세기가 지난 뒤 로널드 레이건 정부 아래에서 되살아났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둘 다 실제 사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재판은 대로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벌금을 물림으로써 끝이 났지만, 둘로 나뉜 여론은 봉합되지 않았다. 대로를 비롯하여 스코프스를 옹호한 사람들은 근본주의자들에 대한 도덕적이고 지성적인 승리를 주장했으나, 오히려 즉각적으로는 근본주의와 반反진화론 지지가 급격히 늘었으며 테네시에 이어 남부 여러 주에서 반진화론 법률을 제정하기도 했다. 재판은 신문에서 역사서로, 역사서에서 오락물로 전해졌고, 그 과정에서 이 재판은 근본주의에 대한 자유주의의 승리이자, 신앙에 대한 이성의 승리이며, 종교에 대한 과학의 승리로 자리매김했다. 이 과정에서 재판을 흥행시키려던 기업가와 언론인은 지워지고, 스코프스는 군중 행동의 무고한 피해자가 되었으며, 브라이언은 아무 생각이 없는 반동분자가 되었다. 이로써 20세기 초 미국에서 진화론이 다시 논쟁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중요한 배경은 모두 지워지고 우생학과 얽힌 진화론의 문제는 무시되었다. 결국 문제는 종교와 과학 사이가 아니라 브라이언주의와 과학 사이에 있었으나, 종교와 과학의 전쟁이라는 신화가 이 모두를 흐려 버렸다. 20세기에 시간이 흐름에 따라 브라이언이 테네시주 데이턴에서 결합해 놓았던 것, 곧 진화론과 무신론을 다시 갈라놓기는 정말 어렵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