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동물은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방영민)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24-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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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동물은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 동물에 대한 목회자의 시선


글ㅣ방영민
부전교회 목사
<책의 숲에서 만나는 하나님> 저자


@eric ward, unsplash


서론

 이전에는 집에서 키우고 기르는 동물을 애완동물이라고 표현하였는데, 이제는 반려동물이라고 부르는 시대가 되었다. 성경에 보면 ‘반려’라는 단어(μέτοχος-눅5:7, 히1:9, 3:1, 6:4, 12:8 φίλος-눅14:10, ἕτερος-마11:16, 20:13)가 동물에게 적용되지 않는데 시대적 상황과 사람들의 마음이 동물을 가족으로까지 생각하는 환경이 된 것이다. 시대적으로는 동물을 반려로 여겨야 할 만큼 삭막하고 거친 시대라는 것이고, 심적으로는 그만큼 인간이 병들고 외롭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 같다.

 교회에도 반려동물을 키우는 성도들이 더 많아지고 있다. 교회도 사회 속에 포함되어 있고 그 사회의 구성원이 교회 안에 들어오는 것이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다 보니 반려동물을 위한 🐕 예배와 기도와 장례 등 성도들의 다양한 요구가 들린다. 반려동물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지, 세례를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신학적 질문도 있다. 펫 호텔, 펫 보험, 펫 여행, 펫 마사지 등이 만들어지듯 교회에도 비슷한 배려를 제공해야 될 것 같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도 전체 인구의 1/4이라는 조사를 본 적이 있다(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의 ‘2023 한국 반려동물 보고서’). 이러한 우리의 현실에서 교회는 반려동물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해야 할지 성경적으로 살펴보는 것은 꼭 필요하고 유익한 일이다. 그래서 본 글에는 ‘동물신학’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고, 반려동물은 과연 구원이 가능한지,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목회적 입장에서 반려동물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고찰해 보겠다.


동물신학

그동안 서구 신학에서 동물은 이성도 없고 영혼도 없으며 감각도 없는 잘 만들어진 기계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하나님 형상’이라는 개념을 통해 동물은 영혼이 없기에 인간만이 우월하고 기본적인 권리를 지닐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다 보니 동물은 상품과 먹이와 노예와 도구로 전락하였다. 성경에서는 동물도 동등한 하나님의 창조물인데 잘못된 우월과 지배의식이 동물을 착취하고 억압해왔다.

그러다 인간의 동물을 향한 학대와 착취와 폭력이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인간의 잔인성이 극에 달했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 가운데 1960년대부터 서구에서 동물의 생존과 복지와 구원에 대한 논의를 하는 ‘동물신학’이라는 연구가 시작되었다. 지금까지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동물도 고통에서 해방시켜주어야 한다고 주장한 ‘피터 싱어’, 동물의 고유한 권리를 설파한 ‘톰 리건’, 동물을 향한 관대함의 윤리를 가르친 ‘앤드류 린지’가 있다. 


 동물신학을 통해 동물과 피조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지금까지 행하여진 인간의 잔인성과 폭력성을 회개하고 동물도 동등한 피조물로 여기며 돌봐야 한다는 인식의 전환이 일어났다. 실제 성경의 창조 명령을 보아도 인간 외에 동식물도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할 명령이 주어졌고, 노아 언약에서도 홍수 이후에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않고 보전하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졌다.

 또한 노아의 방주 안에는 노아의 여덟 식구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동식물이 들어있는 것을 볼 때 동물 또한 하나님의 돌봄과 사랑의 대상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동물신학을 통해 동물 학대와 폭력 등의 잘못된 관행을 바로 잡아 온 피조 세계가 하나님을 에배하고 영광 돌리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동물이 인간의 수준으로 격상되는 근거가 되고 동물에게도 구원이 있다는 것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동물 구원?

 구원이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인간에게 적용되어 죄가 용서되고 성령님의 은혜로 거듭나서 중생인이 되는 것이다. 세상의 방식으로 살던 자가 하나님의 방식으로 살게 되는 것이고, 그리스도 밖에 있던 자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던 자가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던 자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맺어지는 놀라운 은혜가 구원이다. 구원은 중생이고 거듭남이며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반려동물이 가족으로 격상된 이런 시대에 동물에게도 구원이 있다는 주장이 펼쳐지고 있다. 물론 그리스도의 구원은 피조세계를 포함하는 우주적 구원이고 그리스도의 보혈은 온 천지에 덮혀져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와 경륜은 인간을 넘어 온 우주를 포함한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구원과 회복은 다르다는 것이다. 구원은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것이고, 우주적 회복은 동물을 포함한 피조세계에 적용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사후에 천국에 이르게 되면 그곳은 인간만 있지 않고 동물도 있다. 이사야 11장의 샬롬의 상태와 노아의 방주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장면은 새롭게 갱신되고 새롭게 창조된 천국의 모습이다. 이곳에는 동물이 있고 식물이 있고 인간이 있다. 그래서 천국에도 분명히 동물은 존재한다. 그러나 동물은 그리스도의 속죄와 성령님의 역사가 적용되어 구원되어 온 것이 아니라, 우주적 회복의 차원에서 천국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려동물이 구원에 이른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구원이라는 개념은 인격적이며 삼위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에게 주시는 특별한 은총이다. 동물은 회복과 갱신의 대상이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새 창조의 대상이다. 만약에 동물도 구원을 받아야 한다면 식물과 미생물 등 다른 모든 피조물도 구원이 적용돼야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한 회복과 구원이라는 개념과 기준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이 주장이 또 다른 인간의 우월함을 더 강화시켜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런 특별 은총을 받은 인간은 동물의 복지와 회복을 위해 청지기적 사명에 더욱 힘써야 한다. ‘모든 동물은 동등하다’는 것 또한 생명체로서의 생존과 관련된 것이지 종차별주의1)의 철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는 종 차별주의를 없애기 위한 목적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고유함과 특별함을 더욱 일깨워 창조세계를 하나님의 질서대로 회복시켜 나가게 하는 것에 의미가 있다. 

 

반려동물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반려동물이 가족이 된 시대 속에서 반려동물을 위한 장례식을 요청하고 세례까지 요구하는 일들이 있다. 실제 그런 사례들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고, 함께 예배드리는 공간을 만들어 달라는 요청도 있다. 목회적 차원에서 바른 지도와 가르침이 반드시 필요하다. 반려동물을 향한 애정과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성경에 어긋나고 하나님의 질서를 무시하며 또 다른 성도에게 불편을 주는 것이라면 깊이 고민해야 한다.


우선 예배는 인간이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예식이다. 그런데 그런 정신과 사상이 담겨있는 예식에 동물을 위한 장례식까지 만든다는 것은 거룩한 예식을 모욕하는 행위이다. 장례식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자가 죽은 후 부활한다는 것을 믿음으로 드리는 것인데, 동물에게 그러한 은혜가 있다고 믿으며 장례식을 인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다. 가족과 함께 간단히 기도하는 것으로 애도할 수는 있겠지만 목사를 모시고 장례식까지 하는 것은 너무 과한 처사인 것 같다.

아울러 동물 세례까지 요청하는 경우가 있다. 세례는 삼위 하나님의 은혜로 베풀어지고 자신의 죄를 자백함과 동시에 주님을 주인으로 영접하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의식이다. 그런 거룩하고 신비한 예식에 동물이 과연 참여할 수 있을까? 오히려 이런 성례에 동물까지 포함시켜야 한다는 것은 예식을 불경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자신에게 위로와 기쁨을 주는 반려동물을 축복해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언약자손에게 베풀어 주시는 이 놀라운 은혜가 동물에게까지 주어지는 것은 불경한 일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식물 세례, 미생물 세례 등 모든 생명체에게까지 세례를 베풀어야 되지 않을까?


 얼마 전 뉴스엔조이를 통해 강원도 홍천에 동물과 함께 예배하는 교회(‘동물과 함께하는 교회’(임소연 목사))가 있다는 기사를 보았다. 동물이 과연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할 수 있을까? 동물과 식물은 그들의 존재와 방식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생존하는 것이지 예배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럼에도 인간이 드릴 수 있는 예배에 동물도 함께하여 예배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 수 있을까? 동물이 말씀을 이해하여 감동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기로 결단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예배에는 그런 회개와 회심과 회복이 일어나는 시간인데 동물에게 과연 그런 역사가 나타나는가? 동물도 교회에 와야한다면 또 다른 생명체들도 교회에 와야하지 않겠는가?


결론

 그동안 인간이 동물을 하대하고 학대하며 먹이와 기계로 여기며 살아왔다. 그 정도가 얼마나 심했으면 동물과 피조 세계의 신음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되어 그들의 억울함이 해소되는 것 같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인간에게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피조 세계에도 관심이 있고 피조 세계의 아픔에도 동참한다는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동물신학이 연구되어진 것은 고무적인 일이고 동물의 생존과 복지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은 중요한 사명이다.


 그러나 동물에게도 구원이 있다는 주장으로 나가는 것은 신학적인 오류가 있는 해석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은총이지 동물에게까지 열려있는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동물은 우주적 회복과 관련되어 있지 그리스도의 속죄와 성령님의 역사가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동물뿐만 아니라 식물과 미생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창조물이 다 구원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동물은 갱신과 회복적 차원이지 구원의 대상이 아니다. 

또한 반려동물의 장점과 긍정적인 역할은 인정한다. 그러나 너무 인간의 수준으로 끌어올려서 성례까지 참여시켜야 한다는 것은 비성경적인 것이다. 반려동물을 통한 심적인 위로와 안정을 누릴 수 있겠지만 인간 이상의 수준으로 대우하는 것은 절제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제사장이고 청지기로서 피조 세계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고 힘써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고유한 사명이 신음하는 피조 세계까지 확장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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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종차별주의 : 어떤 종에 속한 개체가 다른 종에 속한 개체보다 더 우위에 있거나 열등하다고 판단하는 것. (두산백과)




* 편집자 주 : 동물의 구원에 대한 상이한 관점은 저자의 의견을 존중하여 그대로 실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해석과 관점은 독자들에게 맡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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