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동물과 함께하는 신앙생활 (이성호)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24-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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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 칼럼
반려동물과 함께하는 신앙생활*
- 동물에 대한 신학자의 시선

글ㅣ이성호

배재대학교 조교수


  최근에 한국 사회에서도 반려동물 문화가 확산되고 있는데 그 주요한 원인은 반려동물 키우는 인구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2021 한국 반려동물 보고서’에 따르면 반려동물을 키우는 가구가 604만 가구로 이는 2019년보다 47만 가구가 증가한 것이다. 반려견은 약 586만 마리이고 반려묘는 211만으로 반려동물 천만 시대를 앞두고 있다.1) 그에 따라 동물 산업도 커지고 동물 관련한 방송 프로그램도 아주 많아졌다. 이렇게 반려동물에게 우호적인 사회문화가 형성되다 보니 전에 보다 동물을 친근하게 느끼고 동물 문제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많아진 듯하다. 당연히 수많은 반려동물 가구 중에는 그리스도인이 존재할 것이고 그래서 반려동물을 키우는 신앙인들은 마음 한구석에 ‘나에게 그토록 소중한 동물은 하나님에게 어떤 존재일까?’, ‘구원의 하나님이 동물도 구원하실까?’와 같은 질문들을 가지게 된다. 왜냐하면 🐈 반려동물을 키우는 분들에게 반려동물은 가족과 같은 존재로  그들과 희로애락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질문들에 답을 찾고자 필자는 동물을 어떻게 바르게 대해야 하는지, 신학적으로 동물이 어떻게 규정될 수 있는지 그리고 동물의 구원을 어떻게 논할 수 있는지 다루고자 한다. 더불어 반려동물들과의 예배나 장례와 같은 실질적인 문제 또한 살펴볼 것이다.


@EBS 홈페이지

  1. (반려)동물과 윤리 

  이제 천만 반려동물 시대가 되었는데 그렇다면 반려동물을 존중하는 마음도 커지고 나아가 동물 자체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을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현실을 보여주는 대표적 통계는 유기 동물의 현황이다. 유실되거나 유기되는 반려견과 반려묘는 2015년 약 8만 2천 마리, 2016년 9만 마리, 2017년 10만 3천 마리, 2018년 12만 천 마리로 점점 증가 추세이다.2) 반려동물을 진짜 가족으로 생각했다면 어떻게 버릴 수 있었을까? 이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반려동물을 키우다 필요가 없어지면 언제든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장난감에 흥미가 떨어지면 쉽게 버리듯이 반려동물도 여전히 버릴 수 있는 애완동물 취급을 받는 것이다. 

  그런데 실은 반려동물을 인간이 사용하고 버리는 물건처럼 취급하는 태도는 굉장히 오래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고 그 대상은 동물 전체에 해당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동물실험과 공장식 축산업이다. 동물들은 인간을 위해 다양한 실험들에 사용되고 있다. 질병 치료용 의약품 개발과 같은 공공선을 위해 동물 실험이 불가피하더라도 되도록 동물실험을 대체(Replacement) 하고 줄이고(Reduce) 동물의 고통을 줄이는 방향으로 실험을 개선(Refinement) 하는 3R 원칙이 이미 1959년에 제시되어 지키도록 권고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2014년에 약 241만 마리의 동물들이 동물실험에 사용되었고 2018년에는 약 372만 마리가 실험에 사용되어 국제사회의 권고와 달리 동물실험의 양이 계속 증가하는 추세다.3) 


  한편 현대 공장식 축산업 시스템을 통해 수많은 가축들은 비인도적 환경 속에서 고통스럽게 생활하다 도살장으로 끌려간다. 동물의 가축화가 이루어진 기원은 신석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만큼 오래되었지만 19세기 이전만 해도 가축들은 들판에서 방목되거나 넓은 농장에서 생활하였다. 전통사회에서 가축들은 인간에게 고기와 우유를 제공하기도 했지만 농사의 큰 부분을 차지했기에 소중한 존재로 여겨졌고 여러 종교들의 종교적 상징이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날 가축들은 더 많은 고기를 효율적으로 생산하기 위한 공장의 재료이자 부속품에 불과하다. 대규모 밀집 방식으로 사육되기에 스트레스로 인한 상호 공격을 막기 위해 부리 자르기, 꼬리 자르기 등이 업계의 관행이다. 더불어 밀집 사육을 당하는 가축들은 비위생적이고 감염에 취약한 환경에 노출될 수밖에 없어 축산업자들은 이를 막고자 가축들에게 대량의 항생제를 투여한다.4)          

  17-18세기에는 정말로 동물을 기계로 여겼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동물을 해부하는 연구를 할 때 마취 없이 동물의 배를 갈랐고 동물들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지르는 소리를 기계음이라 여겼다. 그렇지만 당시에도 동물이 해부될 때 내는 소리를 고통의 신음으로 듣고 이를 반대하는 양심적인 사람들이 존재했으며 이들 가운데 상당수의 종교인들이 적극적 역할을 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예를 들어, 1824년에 영국 동물학대방지협회를 창립한 아더 브룸(Arthur Broome)은 성공회 사제였고 매닝(Manning) 추기경이 생체해부 철폐 운동의 적극적 후원자였다.5) 학대받은 말의 이야기를 담은 『검은 말 이야기』를 저술한 것으로 유명한 애나 슈얼과 같은 퀘이커 교도들은 동물실험을 강하게 반대하였다.6)   

  마취 없이 동물을 해부하기도 했던 동물에 대한 과학적 연구는 아이러니하게도 20세기에 들어와 동물들의 숨겨진 능력들을 발견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동물 행동학이라는 분야는 동물들이 인간처럼 희로애락의 다양한 감정을 가지고 있으며 동료 동물들과 사회적 관계 속에서 그들만의 삶을 누리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있다. 이러한 연구는 20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동물권 운동으로 이어졌다. 왜냐하면 동물이 감정을 가졌다는 사실은 동물 실험이나 공장식 축산업 현장에서 동물들이 심한 고통을 느낀다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고 동물 실험과 축산업의 관행이 동물에게 비인도적이고 폭력적 행위라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동물행동학자들과 동물권 철학자들은 동물에게 고통을 받지 않고 살아갈 삶의 권리가 있다고 말한다. 이는 반려동물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 혹자는 가축이나 실험동물에 비해 반려동물이 훨씬 더 나은 배려와 존중을 받는다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여전히 반려동물들은 인간의 필요를 위해 중성화 수술, 꼬리 자르기 등의 신체 변형을 겪고 있고 종의 특성에 맞는 돌봄을 받지 못하고 있다. 약자들의 고통을 들으시는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동물들이 겪는 고통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을 도울 길을 찾아야 한다.        


@Joans Vincent, Unsplash


2. 동물과 구원


  우선 동물의 구원에 대해 말하기에 앞서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이란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동물이 과연 구원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는 사람들은 ‘동물에게는 영혼이 없고 그래서 천국에 갈 수 없다’ 혹은 ‘동물은 의식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가질 능력이 없다’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기독교의 구원을 협소하게 이해한 것이다.  

  사실 구원은 창조와 함께 이해될 필요가 있다. 성서에서 구원은 본래적 창조의 회복이라고 표현되기도 하고 ‘새 창조’라고 말해진다. 이에 대한 다양한 신학적 입장이 있지만 그 복잡한 논의는 제외하고 분명한 점은 창조와 구원은 연결되어 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분명 동물들을 각각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신다. 이는 인간처럼 동물들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옥스퍼드 대학 신학자이자 평생 동물윤리와 동물신학에 헌신한 앤드류 린지(Andrew Linzey)는 동물들에게 창조주 하나님의 “신적 권리(theos-rights)”가 주어져 있다고 말한다.7)  

  노아의 방주 이야기와 출애굽의 이야기는 구원의 하나님을 보여주는 대표적 성서 이야기이다. 그런데 여기서도 방주와 출애굽 무리에 인간뿐 아니라 동물들과 가축들이 포함되었음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자비로운 하나님이 당신의 피조물인 동물들을 구원의 여정에 포함시키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 논리적으로도 더 어색해 보인다.     

  신약에 오면 예수를 통해 드러난 구원 이해는 ‘하나님 나라’ 사상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때때로 ‘하나님 나라’의 한자식 표현인 ‘천국’에 대한 기존 통념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성서의 이해가 오해될 때가 많은 것 같다. 하지만 신약의 ‘하나님 나라’의 원문 뜻을 그대로 옮기면 ‘하나님의 다스림’(the reign of God)이 된다. 우리가 그토록 외우는 주기도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오도록(come)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다. 바울 사도가 예수님의 부활이 첫 열매라고 말한 것처럼(고전 15:23) 기독교가 믿는 구원의 최종 모습은 몸의 부활이다. 이를 통해 볼 때 하나님 나라는 인간이 죽은 후에 몸은 사라지고 그 영혼만이 가는 세계가 아니다. 이는 기독교 사상이 아니라 그리스 철학 사상에 가까운 것이다. 오히려 구원이 완성되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 하나님의 다스림이 온전히 이루어지고 몸의 부활이 이루어지는 새로운 창조 세계라 해석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하나님이 다스리는 새로운 창조 세계에 동물들은 포함이 될 수 있는가? 대답은 긍정적이다. 앞에서 언급한 노아의 방주와 출애굽 이야기 외에도 구원과 연관되는 말씀에 동물이 포함되는 성서 말씀들은 생각보다 많이 존재한다. 대표적인 예들을 살펴보자. 먼저 골로새서 1장에서 바울 사도는 우주적 그리스도를 찬양하면서 17절에서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라고 고백한다. 여기서 우리는 우주 만물을 지탱하고 지키는 하나님을 발견한다. 또한 바울 사도는 로마서 8장 22절에서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다고 쓰고 있다. 여기서 만물의 정의상 동물이 당연히 포함될 수밖에 없음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동물은 그리스도가 보호하는 존재일 뿐 아니라 탄식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열망하는 존재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마지막 사례는 이사야 11장 말씀이다. 여기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강대국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된 세상을 초식 동물들과 육식동물이 함께 어울리고 어린아이와 동물들이 뛰노는 세계로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이 말씀을 기독교의 종말론적 새 창조(New Creation) 관점에서 본다면 이 땅에 임할 하나님 나라는 인간과 동물이 서로 평화롭고 조화롭게 어울리는 세상이라고 볼 수 있다. 만일 인간만이 구원받는 통상적인 생각을 따라 하나님 나라를 상상해 보면 어떠한 모습일까? 동물은 물론이고 식물, 산, 강, 바다도 없이 인간만이 가득한 세상이 과연 조화롭고 아름다울까? 이사야 선지자의 비전이 훨씬 더 풍성하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3. 동물과 함께 드리는 예배 및 장례 예배

  사랑하는 가족과 예배를 드리는 것은 자연스러울 뿐만 아니라 신앙적으로 권면할 일이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에는 코이노니아(친교)로서의 교회와 같은 공동체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려동물을 가족으로 생각하는 성도들이 반려동물과 함께 예배드리고 싶은 마음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예수님은 당시에 아직 덜 된 인간으로 존중받지 못했던 아이들을 반겨주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는 어린아이와 같은 자라고(막 10:15) 말씀하셨다. 아마 예수님은 반려동물에게도 똑같은 말씀을 하시지 않을까?  '동물들이 내게 나아오는 것을 막지 마라. 그들도 내가 창조하고 내가 사랑하는 자녀들이다'라고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반려동물과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 한국교회에는 아직 그러한 사례가 많지 않으니 반려동물 문화가 정착된 지 오래된 서구 기독교의 사례를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대표적인 사례는 동물 축복식(A Service for the Blessing of Animals)이다. 이 축복식은 세계의 여러 기독교 종파들의 교회들에서 세계동물의 날이자 동물과 자연들의 성인으로 불리는 성 프란시스코 기념일인 매년 10월 4일에 거행된다. 목회자는 성도들이 데리고 온 동물들(주로 반려동물들)을 축복해 주는 의식을 진행한다. 


@https://m.kmib.co.kr/view.asp?arcid=0924331842, 국민일보

  하지만 실질적으로 교회 현장에서 적용할 때는 여러 가지 고려해야 할 부분들이 있을 것 같다. 우선 반려동물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싶다면 지속적으로 교회에 의견을 표시하고 요청할 필요가 있다. 성도들로부터의 목회적 요구가 있을 때 목회자들도 보다 진지하게 고민하게 될 것이다. 다만, 반려동물이 없는 성도들의 동의도 필요하다. 예를 들어, 동물 알레르기가 있는 성도나 동물을 두려워하는 성도들이 있을 수 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일이 교회 공동체 내 반려동물문화 정착에 도움이 될 것이다. 한편, 반려 동물들의 입장도 생각해 봐야한다. 반려 종의 특성이나 해당 반려동물의 심리적 상태에 따라 일부 반려동물들은 예배에서 낯선 이들과 함께 있는 것을 불안해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각 교회 상황 따라 독립된 공간에서 반려동물 가족 성도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도 방법일 수 있겠다.

  반려동물이 죽게 되면 함께 살던 이들은 인간 가족을 잃어버린 것처럼 상실감이 매우 크다. 심지어 ‘펫로스 증후군(pet loss syndrome)’이라고 불리는 우울증에 빠질 위험도 있다고 한다. 장례예배가 가지는 중요한 목회적 의미는 가족을 잃은 성도를 위로하는 일이다. 반려동물 장례도 그러한 목회적 차원에서 필요하다. 반려동물을 떠나보낸 이들도 장례 예배를 통해 신앙적 위로를 받고 삶의 의미를 되찾아 부활의 소망을 가져야 한다. 사회에서는 이미 반려동물장례사, 반려동물 화장장 및 납골당 등의 반려동물 장례문화가 정착되어가고 있다. 그러므로 신앙적 차원뿐만 아니라 실질적 차원에서도 한국 교회 상황에 맞는 반려동물 장례예식과 예문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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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글은 이성호, “반려동물과 함께하는 신앙생활이 궁금합니다,” 『길을 찾다』, 감리회목회자모임 새물결 편저, 서울: 메이킹북스, 2022, 109-119를 수정한 것임을 밝힌다.  

1) 황원경, 손광표, “2021년 한국반려동물 보고서,” (KB 금융지주 경영연구소, 2021), 6-7.  

2)  김영은, “[그래픽] 유실·유기동물 수 추이” 연합뉴스, 2019년 7월 22일.
https://www.yna.co.kr/view/GYH20190722000900044 (2022년 8월 7일에 접속).  

3)  박영석, “[그래픽] 동물실험 사용동물 수 추이” 연합뉴스, 2019년 6월 26일.
https://news.v.daum.net/v/20190626142448203?f=o (2022년 8월 7일에 접속). 

4) 마고 드멜로, 『동물은 인간에게 무엇인가』, 천명선, 조중헌 옮김 (서울: 공존, 2018), 182-185.    

5) 앤드류 린지, 『같은 하나님의 피조물: 동물신학의 탐구』, 장윤재 옮김 (대전: 대장간, 2014), 85. 

6) 마고 드멜로, 『동물은 인간에게 무엇인가』, 247. 

7) 앤드류 린지, 『같은 하나님의 피조물: 동물신학의 탐구』, 87. 




* 편집자 주 : 동물의 구원에 대한 상이한 관점은 저자의 의견을 존중하여 그대로 실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해석과 관점은 독자들에게 맡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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