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생명의 기원에 대한 한 목회자의 관점
글ㅣ정삼희
신도중앙교회 담임목사
과신대 이사, 과신대 목회자모임 지기
얼마 전 과신대 목회자 모임 MT가 있었습니다. 과신대 목회자들이 모이면 정말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러다가 레위기를 중심으로 한 성결법전(holiness code) 가운데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나누는 기준이 무엇인가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대화 중에 구약을 전공하신 분이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 인상 깊었습니다. “어떤 생물이 정결하고 부정하냐의 기준을 정하기 어려운 이유 가운데 하나는 본문이 말하는 그 생물이 정확하게 어떤 생물인지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의 언어와 우리의 언어는 아주 거리가 멀고, 그 사이에는 아주 깊은 해석의 골짜기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생명의 기원에 관해 우리가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창세기 1장을 통해 우리는 생명의 기원에 관한 이런 선언을 들을 수 있습니다.
20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물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고, 새들은 땅 위 하늘 창공으로 날아다녀라" 하셨다. 21 하나님이 커다란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는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고, 날개 달린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22 하나님이 이것들에게 복을 베푸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여라. 새들도 땅 위에서 번성하여라" 하셨다... 24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어라. 집짐승과 기어다니는 것과 들짐승을 그 종류대로 내어라" 하시니, 그대로 되었다. (새번역)
생명의 기원에 관해 성경의 선언은 이 내용이 전부입니다. 하나님께서 종류대로 창조하셔서 복을 주셨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성경은 이 과정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일어났는지는 우리에게 설명해 주지 않습니다. 이 과정을 설명해 주는 것은 과학, 그 가운데서도 생물학입니다.

@Sergei A, Unsplash
과학은 그 속성상 가설을 세워서 실험하거나 현상을 면밀하게 관찰하고 분석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생물학자들은 ‘진화(evolution)’라는 현상을 발견합니다. 무생물만 존재하던 세상에서 아주 단순한 생명체가 만들어졌고, 거기서부터 상대적으로 복잡한 생명체로 점진적인 변화를 거듭해서 오늘날의 생태계가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개별적인 진화의 현상들이 반복해서 타당성을 인정받게 되면서 ‘진화론(evolution theory)’이라는 체계적인 과학 이론이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역사 속에서 이런 과학적 발견과 해석은 성경과 충돌하지 않는 것으로 널리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엄밀히 볼 때 창조와 진화는 서로 충돌하지 않는 개념입니다. 하나는 종교적 언어이고, 다른 하나는 과학적 현상을 설명하는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아주 단순하게 설명하면, “하나님께서 진화를 통해 창조하셨다”라는 고백은 성경의 증언과 충돌하지 않습니다. 프란시스 콜린스로 대표되는, 흔히 ‘유신론적 진화론’이라 불리는 관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문제는 많은 사람이 진화, 진화론과 진화주의(evolutionism)를 하나로 묶는 데서 발생합니다. 진화주의라는 말은 진화에 대한 하나의 철학적 관점입니다. 흔히 ‘무신론적 진화론’이라고 불리는 진화주의는 진화 현상을 무신론적인 입장에서 해석합니다. 리처드 도킨스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가 문제로 삼고 변증을 해야 하는 대상은 ‘유신론적 진화론’이 아니라 ‘무신론적 진화론’입니다. ‘유신론적 진화론’은 오히려 교회가 함께 공부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하는 개념입니다.
그럼 여기서 교회에서 하나님께서 생명을 창조하신 원리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되는 개념 세 가지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첫 번째, 미세조정(fine-tuning)입니다. 알리스터 맥그래스가 『정교하게 조율된 우주(A Fine-Tuned Universe)』에서 설명해 주듯이, 과학자들은 우주가 만들어지고,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등장하는 과정에 필요한 조건들을 설명하는 숫자들 하나하나가 마치 짜 맞춘 것처럼 지극히 정확하게 결정되었음을 규명하였습니다. 이 숫자들 가운데 어느 하나가 아주 조금이라도 바뀌었으면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우리 우주와 인간이라는 생명체는 있을 수 없었으리라는 것이라는 것이 이론적으로 입증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스티븐 호킹은 우주의 첫 팽창 속도가 100억분의 1만큼만 달라져도 생명체는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물질을 이루는 원자가 만들어지고, 그 원자들이 모여 분자를 이루는 과정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그 힘의 균형이 지금과 아주 미세하게, 심지어 10의 20 제곱분의 1, 30 제곱분의 1 만큼만 달라도 지금의 세상도, 우리들의 유전자도 존재할 수 없었다고 계산합니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로저 펜로즈도 생명이 존재하려면 ‘비범한 정도의 정확성’ 또는 ‘정교한 조율’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이렇게 과학적으로 분명한 현상은 창조주의 존재와 창조의 신비를 교회에서 설명할 때 도움이 됩니다. 저는 이런 개념이 창조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면 ‘우연’이고, 창조주의 존재를 인정하면 ‘창조의 섭리’가 된다고, 이 질문은 과학적 질문이 아니라 종교적ㆍ영적 질문이라고 교회에서 설명합니다.
두 번째, 계속적 창조 (creatio continua)입니다. 박영식 교수는 자신의 책 『창조의 신학』에서 창조주의 창조를 ‘태초의 창조 (creatio originalis)ㆍ계속적 창조 (creatio continua)ㆍ새 창조 (creatio nova)’로 구분해서 이해하고 설명하는 틀이 이미 17세기 종교개혁자들의 정설이었음을 밝힙니다. 성경은 첫 장은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성경의 마지막 장면은 그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신다고 선언합니다. 그 사이에도 하나님은 이 세상을 계속 창조하고 계시고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들을 만들어 가고 계시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가고 계신다는 성경의 설명은 교회가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 대한 이해를 넓고 깊게 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Majharul Islam, Unsplash
세 번째, ‘씨앗 원리’(Rationes seminalis)입니다. 기원 문제를 다루는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 『기원이론(Understanding Scientific Theories of Origins)』에 따르면, 아우구스투스가 ‘씨앗’이라는 비유를 통해 하나님께서 창조 세계에 부여하신 잠재력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이 아이디어를 현대적으로 확장시킵니다.
아우구스투스의 아이디어에 대한 맥그래스의 현대적인 확장은 확실히 생명의 기원을 위한 창조세계의 기능의 완전성 개념과 궤를 같이한다. 그는 생명이 없는 물질에 내재된 생명을 지지하는 화학적 속성들을 “창발적(emergent)”이라고 보고 “발아에 적절한 환경 상태를 기다리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잠자고 있는 씨앗 이미지는 특정한 화학적 속성들이 적절한 상황하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이해하기에 유익한 비유”라고 주장한다. 이는 창조 세계의 기능의 완전성과 그것이 어떻게 신적인 목적을 성취할수 있는지에 관해 생각하는 또 다른 방식이다.

@Thom Milkovic, Unsplash
개인적인 경험 하나를 나눕니다. 1992년 여름 장마철의 어느 밤이었습니다. 당시 수의학과 3학년 학생으로서 기초 생물학에 관심이 많았던 저는 실험실에 앉아 DNAㆍRNA 복제 과정에 관한 문제를 풀고 있었습니다. 학부생 수준에서 푸는 문제는 아니었지만, 평생 기초 의학을 연구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풀어내려고 문제를 붙들고 있던 저는 순간 창조주가 실존함을 고백하게 됩니다. 사실 저는 청소년 때 ‘창조냐 진화냐’라는 질문에 대한 교회의 설명에 부족함을 넘어서는 거짓을 느끼고 창조주와 교회에 대한 반감을 품은 상태로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그랬던 제가 DNAㆍRNA 복제 과정에서 창조주의 존재를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저는 과학과 신앙 사이의 “대화 입장이 세계에 대한 과학적 이해가 종교적 신앙의 영역을 확장시킬 수 있고, 신앙적 관점은 과학적 발견의 의미를 깊게 이해하도록 도울 수 있다”라는 존 호트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교회는 ‘창조’와 ‘진화’가 대립 개념이 아니라는 설명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많은 목회자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있고, 그렇게 해석하지 않으면 성경의 권위가 무너진다는 두려움 때문에 ‘창조 과학’이라는 쉬운 답을 선택합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의 우주관과 맥을 같이 하는 것처럼 보였던 ‘천동설’이 ‘지동설’로 대치되었다고 해서 창조주에 대한 교회의 고백은 약화되지 않았습니다. 저명한 조직신학자 다니엘 밀리오리의 말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활동의 기간과 단계와 과정에 대해 우리의 과거의 가정이 아무리 광범위하게 수정된다 하더라도, 이것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우리 신앙의 중심적 주장에는 본질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교회, 특별히 목회자들이 과학에 대한 막연한 거부 반응과 두려움, 그리고 지적 탐구에 대한 게으름을 버리고 더욱 적극적으로 성경을 통해 계시된, 그리고 과학을 통해 고백 되는 창조 신학, 창조 신앙을 공부하고 소통하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한 분이신 하나님을 저는 믿나이다. 전능하신 아버지, 하늘과 땅과 유형무형한 만물의 창조주를 믿나이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생명의 기원에 대한 한 목회자의 관점
글ㅣ정삼희
신도중앙교회 담임목사
과신대 이사, 과신대 목회자모임 지기
얼마 전 과신대 목회자 모임 MT가 있었습니다. 과신대 목회자들이 모이면 정말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러다가 레위기를 중심으로 한 성결법전(holiness code) 가운데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나누는 기준이 무엇인가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대화 중에 구약을 전공하신 분이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 인상 깊었습니다. “어떤 생물이 정결하고 부정하냐의 기준을 정하기 어려운 이유 가운데 하나는 본문이 말하는 그 생물이 정확하게 어떤 생물인지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의 언어와 우리의 언어는 아주 거리가 멀고, 그 사이에는 아주 깊은 해석의 골짜기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생명의 기원에 관해 우리가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창세기 1장을 통해 우리는 생명의 기원에 관한 이런 선언을 들을 수 있습니다.
20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물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고, 새들은 땅 위 하늘 창공으로 날아다녀라" 하셨다. 21 하나님이 커다란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는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고, 날개 달린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22 하나님이 이것들에게 복을 베푸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여라. 새들도 땅 위에서 번성하여라" 하셨다... 24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어라. 집짐승과 기어다니는 것과 들짐승을 그 종류대로 내어라" 하시니, 그대로 되었다. (새번역)
생명의 기원에 관해 성경의 선언은 이 내용이 전부입니다. 하나님께서 종류대로 창조하셔서 복을 주셨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성경은 이 과정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일어났는지는 우리에게 설명해 주지 않습니다. 이 과정을 설명해 주는 것은 과학, 그 가운데서도 생물학입니다.
@Sergei A, Unsplash
과학은 그 속성상 가설을 세워서 실험하거나 현상을 면밀하게 관찰하고 분석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생물학자들은 ‘진화(evolution)’라는 현상을 발견합니다. 무생물만 존재하던 세상에서 아주 단순한 생명체가 만들어졌고, 거기서부터 상대적으로 복잡한 생명체로 점진적인 변화를 거듭해서 오늘날의 생태계가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개별적인 진화의 현상들이 반복해서 타당성을 인정받게 되면서 ‘진화론(evolution theory)’이라는 체계적인 과학 이론이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역사 속에서 이런 과학적 발견과 해석은 성경과 충돌하지 않는 것으로 널리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엄밀히 볼 때 창조와 진화는 서로 충돌하지 않는 개념입니다. 하나는 종교적 언어이고, 다른 하나는 과학적 현상을 설명하는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아주 단순하게 설명하면, “하나님께서 진화를 통해 창조하셨다”라는 고백은 성경의 증언과 충돌하지 않습니다. 프란시스 콜린스로 대표되는, 흔히 ‘유신론적 진화론’이라 불리는 관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문제는 많은 사람이 진화, 진화론과 진화주의(evolutionism)를 하나로 묶는 데서 발생합니다. 진화주의라는 말은 진화에 대한 하나의 철학적 관점입니다. 흔히 ‘무신론적 진화론’이라고 불리는 진화주의는 진화 현상을 무신론적인 입장에서 해석합니다. 리처드 도킨스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가 문제로 삼고 변증을 해야 하는 대상은 ‘유신론적 진화론’이 아니라 ‘무신론적 진화론’입니다. ‘유신론적 진화론’은 오히려 교회가 함께 공부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하는 개념입니다.
그럼 여기서 교회에서 하나님께서 생명을 창조하신 원리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되는 개념 세 가지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첫 번째, 미세조정(fine-tuning)입니다. 알리스터 맥그래스가 『정교하게 조율된 우주(A Fine-Tuned Universe)』에서 설명해 주듯이, 과학자들은 우주가 만들어지고,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등장하는 과정에 필요한 조건들을 설명하는 숫자들 하나하나가 마치 짜 맞춘 것처럼 지극히 정확하게 결정되었음을 규명하였습니다. 이 숫자들 가운데 어느 하나가 아주 조금이라도 바뀌었으면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우리 우주와 인간이라는 생명체는 있을 수 없었으리라는 것이라는 것이 이론적으로 입증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스티븐 호킹은 우주의 첫 팽창 속도가 100억분의 1만큼만 달라져도 생명체는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물질을 이루는 원자가 만들어지고, 그 원자들이 모여 분자를 이루는 과정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그 힘의 균형이 지금과 아주 미세하게, 심지어 10의 20 제곱분의 1, 30 제곱분의 1 만큼만 달라도 지금의 세상도, 우리들의 유전자도 존재할 수 없었다고 계산합니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로저 펜로즈도 생명이 존재하려면 ‘비범한 정도의 정확성’ 또는 ‘정교한 조율’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이렇게 과학적으로 분명한 현상은 창조주의 존재와 창조의 신비를 교회에서 설명할 때 도움이 됩니다. 저는 이런 개념이 창조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면 ‘우연’이고, 창조주의 존재를 인정하면 ‘창조의 섭리’가 된다고, 이 질문은 과학적 질문이 아니라 종교적ㆍ영적 질문이라고 교회에서 설명합니다.
두 번째, 계속적 창조 (creatio continua)입니다. 박영식 교수는 자신의 책 『창조의 신학』에서 창조주의 창조를 ‘태초의 창조 (creatio originalis)ㆍ계속적 창조 (creatio continua)ㆍ새 창조 (creatio nova)’로 구분해서 이해하고 설명하는 틀이 이미 17세기 종교개혁자들의 정설이었음을 밝힙니다. 성경은 첫 장은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성경의 마지막 장면은 그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신다고 선언합니다. 그 사이에도 하나님은 이 세상을 계속 창조하고 계시고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들을 만들어 가고 계시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가고 계신다는 성경의 설명은 교회가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 대한 이해를 넓고 깊게 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Majharul Islam, Unsplash
세 번째, ‘씨앗 원리’(Rationes seminalis)입니다. 기원 문제를 다루는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 『기원이론(Understanding Scientific Theories of Origins)』에 따르면, 아우구스투스가 ‘씨앗’이라는 비유를 통해 하나님께서 창조 세계에 부여하신 잠재력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이 아이디어를 현대적으로 확장시킵니다.
아우구스투스의 아이디어에 대한 맥그래스의 현대적인 확장은 확실히 생명의 기원을 위한 창조세계의 기능의 완전성 개념과 궤를 같이한다. 그는 생명이 없는 물질에 내재된 생명을 지지하는 화학적 속성들을 “창발적(emergent)”이라고 보고 “발아에 적절한 환경 상태를 기다리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잠자고 있는 씨앗 이미지는 특정한 화학적 속성들이 적절한 상황하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이해하기에 유익한 비유”라고 주장한다. 이는 창조 세계의 기능의 완전성과 그것이 어떻게 신적인 목적을 성취할수 있는지에 관해 생각하는 또 다른 방식이다.
@Thom Milkovic, Unsplash
개인적인 경험 하나를 나눕니다. 1992년 여름 장마철의 어느 밤이었습니다. 당시 수의학과 3학년 학생으로서 기초 생물학에 관심이 많았던 저는 실험실에 앉아 DNAㆍRNA 복제 과정에 관한 문제를 풀고 있었습니다. 학부생 수준에서 푸는 문제는 아니었지만, 평생 기초 의학을 연구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풀어내려고 문제를 붙들고 있던 저는 순간 창조주가 실존함을 고백하게 됩니다. 사실 저는 청소년 때 ‘창조냐 진화냐’라는 질문에 대한 교회의 설명에 부족함을 넘어서는 거짓을 느끼고 창조주와 교회에 대한 반감을 품은 상태로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그랬던 제가 DNAㆍRNA 복제 과정에서 창조주의 존재를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저는 과학과 신앙 사이의 “대화 입장이 세계에 대한 과학적 이해가 종교적 신앙의 영역을 확장시킬 수 있고, 신앙적 관점은 과학적 발견의 의미를 깊게 이해하도록 도울 수 있다”라는 존 호트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교회는 ‘창조’와 ‘진화’가 대립 개념이 아니라는 설명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많은 목회자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있고, 그렇게 해석하지 않으면 성경의 권위가 무너진다는 두려움 때문에 ‘창조 과학’이라는 쉬운 답을 선택합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의 우주관과 맥을 같이 하는 것처럼 보였던 ‘천동설’이 ‘지동설’로 대치되었다고 해서 창조주에 대한 교회의 고백은 약화되지 않았습니다. 저명한 조직신학자 다니엘 밀리오리의 말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활동의 기간과 단계와 과정에 대해 우리의 과거의 가정이 아무리 광범위하게 수정된다 하더라도, 이것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우리 신앙의 중심적 주장에는 본질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교회, 특별히 목회자들이 과학에 대한 막연한 거부 반응과 두려움, 그리고 지적 탐구에 대한 게으름을 버리고 더욱 적극적으로 성경을 통해 계시된, 그리고 과학을 통해 고백 되는 창조 신학, 창조 신앙을 공부하고 소통하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한 분이신 하나님을 저는 믿나이다. 전능하신 아버지, 하늘과 땅과 유형무형한 만물의 창조주를 믿나이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