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과학과 신학의 대화”, 즉, “과학신학” 분야가 최근 신학계에서 가장 관심을 보이고 있는 분야다. 영국 스코틀랜드 지역 대학들을 중심으로 ‘기포드 강연’이 매년 열리는데, 이 강연의 강사로 초청되는 분이 보통 세계적으로 가장 주목받고 있는 학자다. 자연신학을 강조하며 1887/8년부터 시작된 기포드 강연의 강사들 중 일부만 살펴보면, 윌리엄 제임스(『종교경험의 다양성』), 화이트헤드(『과정과 실제』), 베르그송, 존 듀이, 슈바이처, 아놀드 토인비, 불트만, 칼 바르트, 폴 틸리히, 리처드 스윈번, 몰트만, 스탠리 하우어워즈, 앨빈 플란팅가 등의 학자들이 있다. 과학자들 중에도 하이젠베르크, 에딩턴, 닐스 보어 같은 학자들이 강연을 했다. 무엇보다 가장 많은 강연을 한 분야의 학자들은 과학과 신학을 연계해서 공부하는 학자들이다. 이안 바버, 아서 피콕, 존 폴킹혼, 알리스터 맥그라스 등 수많은 과학신학자들이 강연을 했고, 기포드 강연에서 과학신학 분야의 강연을 연구한 책도 출간되어 있다(『신학과 과학의 만남: 기포드 강연을 중심으로』).
과학신학 분야는 진화생물학, 빅뱅우주론 등이 신학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지에 대해 다룰 뿐만 아니라, 나아가 앞으로 도래할 시대, 즉, 가상현실시대, 인공지능시대, 4차 산업혁명시대 등 우리들이 직면할 시대에 대한 신학적 반응들도 다룬다.
(기포드 강연을 만든 아담 기포드 경)
한국 신학대학에서의 과학신학 강의 현황
과학과 신학의 대화가 활발해지면서 신학대학(원)에 과학신학 전공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미국은 GTU를 중심으로, 영국은 옥스퍼드 대학과 에든버러 대학을 중심으로 과학신학 전공자들이 배출되고 있으며, 유럽의 여러 학교들도 점점 “Science and Religion(Theology)”을 하나의 전공 분야로 도입해 가고 있다. 과학과 신학 분야 최대 규모의 학회는 “과학과 신학 유럽 학회(European Society for the Study of Science and Theology)”로 2년에 한 번씩 5박 6일간 유럽에서 개최된다. 또한 아서 피콕이 초대 회장을 지낸 “과학과 종교 포럼(Science and Religion Forum)”은 매년 2박 3일간 영국에서 개최된다. 매년 개최되는 미국종교학회(AAR)에서도 과학신학이 한 분야로 논의되고 있고, 여러 과학신학 센터에서 학회들을 개최하고 있다.
한국 신학계의 경우, 장신대, 서울신대, 한신대, 연세대, 이화여대 등의 대학에서 과학신학 과목들이 조직신학/종교철학 분야에서 개설된다. 특히 감리교신학대학교에서는 10과목 이상 개설된다. 예를 들면, “자연과학과 세계관(전교생 교양필수)”, “과학과 영성”, “과학과 신앙”, “진화론과 기독교”, “자연과학과 신학”, “인간과 미래”, “뇌과학과 종교”,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휴머니즘”, “종교와 과학철학”, “교양과학” 등의 과목들이 종교철학전공을 중심으로 개설되고 있다.
과학과 관련해 신학을 논한다는 것에 의문을 갖는 분들도 있다. 언뜻 보면 현대 과학과 신학은 상충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현대 수학을 받아들인다면 신앙을 유지할 수 있을까?”라고 질문한다면, 우리들 대부분은 “수학과 신앙이 무슨 관계라고 저런 질문을 할까?”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런 질문은 어떨까? “과학자는 베토벤의 음악이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이 어색하다면, 과학과 신학이 충돌한다는 생각도 어색한 것이다. 왜냐하면 과학과 신학이 다루는 영역이 다르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영역이 다르다는 것을 전제한 후에,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둘 사이의 의미 있는 대화를 해야 한다. 둘 사이의 대화를 통해 서로를 보완할 수 있다. 근대과학의 발전을 이끈 과학자들 대부분이 기독교인들이었으며, 이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는 질서정연하고 내적 합리성이 존재한다고 믿었기에 과학적 탐구를 할 수 있었다. 또한 과학의 발전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려는 것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성경은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당대의 언어로 기록한 책이다. “어떻게” 창조했는지를 논한 책이 아니라, 당대의 사람들이 신으로 숭배했던 “해”와 “달”을 포함하여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함을 드러내는 책이다. 세상의 시작과 끝이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음을 강하게 드러내는 책이다. 앞으로 더 엄밀한 과학 이론이 등장하더라도 이것은 결코 뒤집혀 질 수 없다. 우리는 현대 과학의 도움으로 어마어마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현실감 있게 느끼고, 태초에 창조하신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며 창조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신학대학에서 과학신학을 가르쳐야 하는 이유
창조과학은 기독교인들의 신앙의 깊이를 더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과학이 절대적 권위를 갖는 시대에 과학이 성경을 지지해 준다니,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믿음이 잘못되지 않은 것 같은 안도감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창조과학이 제공하는 거짓 평안에 갇혀 진실을 왜곡할 수는 없다. 복음 전파를 위해서는 세상과 소통해야 하는데, 왜곡된 주장들은 기독교를 세상으로부터 조롱당하게 만들 뿐이다.
창조과학의 주장은 과학적으로도 비판을 받지만, 신학적으로도 문제가 있다. 과학신학을 공부하지 않았더라고 신학대학에서 신학을 제대로 공부했다면, 성경이 과학적 내용을 다루는 과학 교과서가 아니라는 것쯤을 배웠을 것이다. 성경은 과학이 다룰 수 없는 초월적 세계, 영적인 세계, 진리의 세계를 다룬다. 성경이 과학으로 증명되기에 믿을 수 있다면, 성경 말씀이 아니라 최첨단의 과학을 믿으면 된다. 실제로 최첨단의 과학을 신봉하는 종교들도 있다(사이언톨로지, 라엘리안 무브먼트, 크리스천 사이언스 등).
성경을 현대 과학으로 증명할 수도 없지만, 혹시라도 증명이 된다면, 더 큰 신학적 문제가 발생한다. 창세기 1장이 과학으로 증명 가능해서 믿을 수 있다면, 과학으로 증명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훨씬 더 중요한 예수님의 기적과 부활 사건 등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즉 창세기 1장에 과학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과학을 초월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복음의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드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과학적 원리를 통해서, 그리고 때로는 그것을 초월해 역사하신다. 인간이 발견한 과학은 하나님께서 세계를 창조하시고 운영하시는 원리들일 뿐이다. 중력을 만드신 하나님은 물 위를 걷는 것처럼 중력(표면장력)을 초월하실 수도 있고, 질량보존의 법칙을 만드신 하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실 수도 있다. 물론 하나님은 만물을 사랑하셔서 그들에게 자유를 주셨기 때문에, 자유를 침범하는 절대 군주의 모습보다는 설득하시는 방식으로 종종 다가오신다.
또한 창세기 1장이 기록되고 전승되었던 당시에 사람들이 그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문자와 문서가 보편화되지 않았던 당시에는 회당에서 말씀이 낭독될 때 문자에 집착한 것이 아니라, 말씀의 핵심에 주목했다. 문자주의적 이해는 누구나 텍스트를 직접 접하게 되면서 생겨난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문자 자체에 얽매이면, 문자가 말하고자 하는 복음의 본질을 놓치게 된다. 문자가 보편화되지 않은 시대, 현대 과학을 알지 못했던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 경험한 하나님 이야기를, 현대 과학의 관점에서 문자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그들의 관습, 문화, 역사, 세계관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시대착오적인 일이 될 것이다.
이런 성경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는 신학대학에 필수적으로 가르쳐야 한다. 신학생들은 성경과 더불어 과학적 상식들도 충분히 함양해 과학시대에 기독교 신앙을 풀어내는 훈련을 제대로 받아야 한다. 비과학적이며 반과학적인 내용이 믿음이라는 이유로 교회에 울려 퍼져서는 안 된다. 이는 이미 아우구스티누스가 약 1600년 전에 경고한 내용이기도 하다.
나가며
복음이라는 씨앗은 좋은 토양에 뿌려져야 100배의 결실을 맺게 된다. 한때는 토양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그곳의 종교와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했지만, 모든 문화가 교류되는 글로벌 시대, 과학 기술이 주도하는 과학 시대는 과학이라는 토양이 중요하게 부각된다. 신학은 과학과의 대화를 통해야 과학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효율적으로 전할 수 있다.
필자는 과학신학이 수천 년간 이어진 기존의 신학 담론들을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성경을 통해, 그리고 수천 년간의 신학적 논의들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을, 과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언어로 전하자는 말이다. 과학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는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지만, 과학과 신앙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무신론의 공격으로 인해 넘어진 사람들에게 과학신학의 담론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제대로 증언하는 큰 힘이 될 것이다.
이 분야를 접할 수 있는 책들은 최근 수십 년간 많이 출간되었다. 그 중 필자가 번역한 두 책을 간단히 소개한다면, 『창조의 본성: 과학과 성서 사이에 다리 놓기』와 『과학시대의 신앙』이 있다. 대부분의 책들이 ‘과학과 신학’의 대화에 초점을 둔 반면, 『창조의 본성』은 과학과 ‘성서’에 초점을 두었고, 『과학시대의 신앙』은 과학과 ‘신앙’에 초점을 두고 있다. 후자가 좀 더 읽기 수월할뿐더러 여러 흥미로운 주제들을 담고 있어서 더 추천할 만하다. (후자의 책은 ‘과신tube 채널’과 ‘과학과신학연구소’ 채널에서 필자의 강의 영상으로 만날 수 있다.)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우리들은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처럼, 율법 없는 자들에게는 율법 없는 자들처럼,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처럼 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고전 9:22)”해야 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과학을 바탕으로 무신론을 주장하는 ‘과학주의’에 빠져가고 있다. 앞으로 한국교회는 계속해서 과학기술의 발전이 야기하는 여러 문제들 앞에 놓이게 될 것이다. 생성형AI(ChatGPT), 인공지능, 메타버스, 4차 산업혁명, 인간복제 등 앞으로 제기될 여러 주제들에 대해 신학계와 교계가 적극적으로 대화에 임할 때, 기독교는 한국사회에 계속해서 영향력 있는 종교가 될 것이다. 필자도 이 시대에 어떻게 복음을 전할 것인지 더욱 고민하고, 기도하고, 연구할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들을 유튜브 채널 “과학과신학연구소”를 공유할 것이다.
글 | 장재호
감리신학대학교 종교철학 교수
서론
“과학과 신학의 대화”, 즉, “과학신학” 분야가 최근 신학계에서 가장 관심을 보이고 있는 분야다. 영국 스코틀랜드 지역 대학들을 중심으로 ‘기포드 강연’이 매년 열리는데, 이 강연의 강사로 초청되는 분이 보통 세계적으로 가장 주목받고 있는 학자다. 자연신학을 강조하며 1887/8년부터 시작된 기포드 강연의 강사들 중 일부만 살펴보면, 윌리엄 제임스(『종교경험의 다양성』), 화이트헤드(『과정과 실제』), 베르그송, 존 듀이, 슈바이처, 아놀드 토인비, 불트만, 칼 바르트, 폴 틸리히, 리처드 스윈번, 몰트만, 스탠리 하우어워즈, 앨빈 플란팅가 등의 학자들이 있다. 과학자들 중에도 하이젠베르크, 에딩턴, 닐스 보어 같은 학자들이 강연을 했다. 무엇보다 가장 많은 강연을 한 분야의 학자들은 과학과 신학을 연계해서 공부하는 학자들이다. 이안 바버, 아서 피콕, 존 폴킹혼, 알리스터 맥그라스 등 수많은 과학신학자들이 강연을 했고, 기포드 강연에서 과학신학 분야의 강연을 연구한 책도 출간되어 있다(『신학과 과학의 만남: 기포드 강연을 중심으로』).
과학신학 분야는 진화생물학, 빅뱅우주론 등이 신학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지에 대해 다룰 뿐만 아니라, 나아가 앞으로 도래할 시대, 즉, 가상현실시대, 인공지능시대, 4차 산업혁명시대 등 우리들이 직면할 시대에 대한 신학적 반응들도 다룬다.
(기포드 강연을 만든 아담 기포드 경)
한국 신학대학에서의 과학신학 강의 현황
과학과 신학의 대화가 활발해지면서 신학대학(원)에 과학신학 전공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미국은 GTU를 중심으로, 영국은 옥스퍼드 대학과 에든버러 대학을 중심으로 과학신학 전공자들이 배출되고 있으며, 유럽의 여러 학교들도 점점 “Science and Religion(Theology)”을 하나의 전공 분야로 도입해 가고 있다. 과학과 신학 분야 최대 규모의 학회는 “과학과 신학 유럽 학회(European Society for the Study of Science and Theology)”로 2년에 한 번씩 5박 6일간 유럽에서 개최된다. 또한 아서 피콕이 초대 회장을 지낸 “과학과 종교 포럼(Science and Religion Forum)”은 매년 2박 3일간 영국에서 개최된다. 매년 개최되는 미국종교학회(AAR)에서도 과학신학이 한 분야로 논의되고 있고, 여러 과학신학 센터에서 학회들을 개최하고 있다.
한국 신학계의 경우, 장신대, 서울신대, 한신대, 연세대, 이화여대 등의 대학에서 과학신학 과목들이 조직신학/종교철학 분야에서 개설된다. 특히 감리교신학대학교에서는 10과목 이상 개설된다. 예를 들면, “자연과학과 세계관(전교생 교양필수)”, “과학과 영성”, “과학과 신앙”, “진화론과 기독교”, “자연과학과 신학”, “인간과 미래”, “뇌과학과 종교”,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휴머니즘”, “종교와 과학철학”, “교양과학” 등의 과목들이 종교철학전공을 중심으로 개설되고 있다.
과학과 관련해 신학을 논한다는 것에 의문을 갖는 분들도 있다. 언뜻 보면 현대 과학과 신학은 상충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현대 수학을 받아들인다면 신앙을 유지할 수 있을까?”라고 질문한다면, 우리들 대부분은 “수학과 신앙이 무슨 관계라고 저런 질문을 할까?”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런 질문은 어떨까? “과학자는 베토벤의 음악이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이 어색하다면, 과학과 신학이 충돌한다는 생각도 어색한 것이다. 왜냐하면 과학과 신학이 다루는 영역이 다르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영역이 다르다는 것을 전제한 후에,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둘 사이의 의미 있는 대화를 해야 한다. 둘 사이의 대화를 통해 서로를 보완할 수 있다. 근대과학의 발전을 이끈 과학자들 대부분이 기독교인들이었으며, 이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는 질서정연하고 내적 합리성이 존재한다고 믿었기에 과학적 탐구를 할 수 있었다. 또한 과학의 발전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려는 것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성경은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당대의 언어로 기록한 책이다. “어떻게” 창조했는지를 논한 책이 아니라, 당대의 사람들이 신으로 숭배했던 “해”와 “달”을 포함하여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함을 드러내는 책이다. 세상의 시작과 끝이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음을 강하게 드러내는 책이다. 앞으로 더 엄밀한 과학 이론이 등장하더라도 이것은 결코 뒤집혀 질 수 없다. 우리는 현대 과학의 도움으로 어마어마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현실감 있게 느끼고, 태초에 창조하신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며 창조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신학대학에서 과학신학을 가르쳐야 하는 이유
창조과학은 기독교인들의 신앙의 깊이를 더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과학이 절대적 권위를 갖는 시대에 과학이 성경을 지지해 준다니,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믿음이 잘못되지 않은 것 같은 안도감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창조과학이 제공하는 거짓 평안에 갇혀 진실을 왜곡할 수는 없다. 복음 전파를 위해서는 세상과 소통해야 하는데, 왜곡된 주장들은 기독교를 세상으로부터 조롱당하게 만들 뿐이다.
창조과학의 주장은 과학적으로도 비판을 받지만, 신학적으로도 문제가 있다. 과학신학을 공부하지 않았더라고 신학대학에서 신학을 제대로 공부했다면, 성경이 과학적 내용을 다루는 과학 교과서가 아니라는 것쯤을 배웠을 것이다. 성경은 과학이 다룰 수 없는 초월적 세계, 영적인 세계, 진리의 세계를 다룬다. 성경이 과학으로 증명되기에 믿을 수 있다면, 성경 말씀이 아니라 최첨단의 과학을 믿으면 된다. 실제로 최첨단의 과학을 신봉하는 종교들도 있다(사이언톨로지, 라엘리안 무브먼트, 크리스천 사이언스 등).
성경을 현대 과학으로 증명할 수도 없지만, 혹시라도 증명이 된다면, 더 큰 신학적 문제가 발생한다. 창세기 1장이 과학으로 증명 가능해서 믿을 수 있다면, 과학으로 증명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훨씬 더 중요한 예수님의 기적과 부활 사건 등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즉 창세기 1장에 과학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과학을 초월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복음의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드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과학적 원리를 통해서, 그리고 때로는 그것을 초월해 역사하신다. 인간이 발견한 과학은 하나님께서 세계를 창조하시고 운영하시는 원리들일 뿐이다. 중력을 만드신 하나님은 물 위를 걷는 것처럼 중력(표면장력)을 초월하실 수도 있고, 질량보존의 법칙을 만드신 하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실 수도 있다. 물론 하나님은 만물을 사랑하셔서 그들에게 자유를 주셨기 때문에, 자유를 침범하는 절대 군주의 모습보다는 설득하시는 방식으로 종종 다가오신다.
또한 창세기 1장이 기록되고 전승되었던 당시에 사람들이 그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문자와 문서가 보편화되지 않았던 당시에는 회당에서 말씀이 낭독될 때 문자에 집착한 것이 아니라, 말씀의 핵심에 주목했다. 문자주의적 이해는 누구나 텍스트를 직접 접하게 되면서 생겨난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문자 자체에 얽매이면, 문자가 말하고자 하는 복음의 본질을 놓치게 된다. 문자가 보편화되지 않은 시대, 현대 과학을 알지 못했던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 경험한 하나님 이야기를, 현대 과학의 관점에서 문자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그들의 관습, 문화, 역사, 세계관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시대착오적인 일이 될 것이다.
이런 성경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는 신학대학에 필수적으로 가르쳐야 한다. 신학생들은 성경과 더불어 과학적 상식들도 충분히 함양해 과학시대에 기독교 신앙을 풀어내는 훈련을 제대로 받아야 한다. 비과학적이며 반과학적인 내용이 믿음이라는 이유로 교회에 울려 퍼져서는 안 된다. 이는 이미 아우구스티누스가 약 1600년 전에 경고한 내용이기도 하다.
나가며
복음이라는 씨앗은 좋은 토양에 뿌려져야 100배의 결실을 맺게 된다. 한때는 토양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그곳의 종교와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했지만, 모든 문화가 교류되는 글로벌 시대, 과학 기술이 주도하는 과학 시대는 과학이라는 토양이 중요하게 부각된다. 신학은 과학과의 대화를 통해야 과학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효율적으로 전할 수 있다.
필자는 과학신학이 수천 년간 이어진 기존의 신학 담론들을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성경을 통해, 그리고 수천 년간의 신학적 논의들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을, 과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언어로 전하자는 말이다. 과학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는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지만, 과학과 신앙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무신론의 공격으로 인해 넘어진 사람들에게 과학신학의 담론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제대로 증언하는 큰 힘이 될 것이다.
이 분야를 접할 수 있는 책들은 최근 수십 년간 많이 출간되었다. 그 중 필자가 번역한 두 책을 간단히 소개한다면, 『창조의 본성: 과학과 성서 사이에 다리 놓기』와 『과학시대의 신앙』이 있다. 대부분의 책들이 ‘과학과 신학’의 대화에 초점을 둔 반면, 『창조의 본성』은 과학과 ‘성서’에 초점을 두었고, 『과학시대의 신앙』은 과학과 ‘신앙’에 초점을 두고 있다. 후자가 좀 더 읽기 수월할뿐더러 여러 흥미로운 주제들을 담고 있어서 더 추천할 만하다. (후자의 책은 ‘과신tube 채널’과 ‘과학과신학연구소’ 채널에서 필자의 강의 영상으로 만날 수 있다.)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우리들은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처럼, 율법 없는 자들에게는 율법 없는 자들처럼,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처럼 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고전 9:22)”해야 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과학을 바탕으로 무신론을 주장하는 ‘과학주의’에 빠져가고 있다. 앞으로 한국교회는 계속해서 과학기술의 발전이 야기하는 여러 문제들 앞에 놓이게 될 것이다. 생성형AI(ChatGPT), 인공지능, 메타버스, 4차 산업혁명, 인간복제 등 앞으로 제기될 여러 주제들에 대해 신학계와 교계가 적극적으로 대화에 임할 때, 기독교는 한국사회에 계속해서 영향력 있는 종교가 될 것이다. 필자도 이 시대에 어떻게 복음을 전할 것인지 더욱 고민하고, 기도하고, 연구할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들을 유튜브 채널 “과학과신학연구소”를 공유할 것이다.
글 | 장재호
감리신학대학교 종교철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