푼크툼punctum인 당신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20-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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푼크툼punctum인  당신


글_ 백우인 (bwooin@naver.com)

 


무심하게 스치는 것들,
우리가 무연한 눈으로 스치는 사물은 '이것'이다. 지각되기 전의 사물이기에 헤겔은 단지 즉자존재인 '이것'이라고 말한다. 내 의식 안으로 들어올 때에라야 비로소 대자존재가 되며 내 눈앞의 타자가 된다.

들뢰즈에게는 사물과 '마주침'을 통해 타자가 되고 샤르트르에게는 나를 응시하는 대상의 눈쯤 되겠다. 이런 타자들은 롤랑 바르트에게 있어서 스투디움에 다름 아니다. 그러니까 숲길 사진을 보고 맛있는 독일 음식 사진을 보면서 대부분의 사람들과 그럭저럭 비슷하게 받아들이는 것 말이다.

걷고 싶은 산책길, 어디에 있는 음식점인지, 한 번쯤 '가보고 싶다', '먹어보고 싶다' 등의 나른한 욕망과 잡다한 흥미를 느끼게 하는 것들. 분별없는 취향에서 밋밋하게 부유하는 길들여진 느낌과 감정을 일으키는 사진과 같다. 이런 타자는 우리의 마음이 오목하지도 볼록하지도 않아서 감각의 온도가 냉랭하다. 냉기가 강렬함을 삼킨 시선은 헐벗고 생기가 없다.


그러나 사랑의 대상인 타자는 화살이다.


마치 나를 꿰뚫기 위해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일방적이고 당당한 반면 그를 사랑하는 주체는 수 없는 낙인이 새겨진다. 사랑의 대상은 감각이 뇌까지 가기도 전에 심장에 작은 점으로 박혀, 심장을 찌르는 점이다. 


뇌에 구멍을 내어 버릴만큼  충격적인 것이어서 그 충격은 문명화로부터 퇴화시킨다. 언어가 가난해지는 것, 언어를 아무리 만들어 내어도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어 나는 그 사랑의 대상을 '푼크툼'punctum이라 부르고 싶다. 


사랑의 대상은  트라우마다. 


다른 이들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유독 그 대상은 내게  패인 상처를 만들어 그곳으로 침입해서는 오래오래 상흔이 되어버리는 존재다. 


사랑의 대상은 주관적인 주이상스다.


그는 애매하고 모호하게 강렬한 기호를 방사한다.그러기에 사랑의 대상이 갖는 코드는 해독할 수 없어 언제나 미끄러지고 더듬거리는 주체를 만든다. 새로운 문법을 만들어 의미를 전달하는 사랑의 대상은 난해한 코드 가운데에서  관능적인 향기와 쾌락인 주이상스로 끊임없이 다가온다. 


사랑의 대상은 온통 얼굴이다.


표현되고 읽혀지고 해석되고 이해되어져야 하는 얼굴이 된다. 그의 모든 것들, 예컨대 눈빛, 입모양, 손의 움직임과 걸음 걸이 등 모든 것들은 표정을 갖고 있고 의미를 드러내고 있기에 '얼굴'로 작동한다. 커져있는 동공과 가늘게 주름진 눈가, 귀쪽으로 올라가 있는 입꼬리와 느릿느릿 걸음과 스칠때마다 전율하는 손끝은 '사랑의 현재성'을 보여주는 '얼굴'인 것이다. 


사랑의 대상은 시간과 공간의 주인공이다. 


우리의  시간을 찰나처럼 지나가게도 하고 영원 속으로 이끌기도 하고 부재로 인해 천만 년처럼 긴긴 시간으로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다시 태어나게 하고, 매번 현재의 나이보다 더 어려지게 한다. 어디를 가든 그곳은  그 대상이 이미 차지하고 있으며 누구를 만나도 그들과 공재한다. 특별한 시공간을 점령하는 독재자가 바로 사랑의 대상이다. 


사랑의 대상은 격렬한 섬광이다.


우리들의 심장을 수축하다 못해 사라져 버리게도 하고 팽창하다 못해 터져 버리게도 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불안과 충족 사이에서 감정이 파도를 타게 한다. 어깨에 힘을 뺀채 무방비 상태가 되게 만들고서는 이때다 싶게 섬광처럼 나의 시선을 붙잡는다.


사랑의 대상은 치명적인 우연성이다. 


그대는 푼크툼(punctum), 순간적으로 꽂혀버릴 만큼 강렬하다. 단번에 모든 감각세포들의 역치를 넘어서게 하는 강렬한 자극, 그 지점에서 끊임없이 전율케 하는 정신의 파계다. 그리하여 그대를 사랑하는 주체가 용해되다 못해 사라지고 싶게 만드는 존재다. 우리는 대체 사랑의 대상인 타자의 무엇을 사랑하는 것일까?


위르겐 몰트만은 그의 성령론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던진 질문 “내가 하느님을 사랑할 때 나는 무엇을 사랑하는 것입니까?”에 대한 답변을  다음과 같이 변주한다.


“내가 하느님을 사랑할 때, 나는 육체의 아름다움과 활동들의 리듬과 눈들의 광채와 포옹들과 느낌들과 냄새들과 형형색색의 이 창조의 소리들을 사랑합니다. 나의 하느님 당신을 내가 사랑할 때, 나는 모든 것을 껴안고 싶습니다. 당신의 사랑의 피조물들 속에서 나는 나의 모든 감각들을 가지고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내가 만나는 모든 것 안에서 나를 기다립니다.”


사랑의 대상을 향한 우리의 심장을 이토록 적나라하게 옮길 수있을까? 푼크툼인 그대를 향한 고백이 이렇게 조곤조곤 귀엣말처럼 달콤할 수 있을까? 어떻게 이런 고백이 가능할까? 성경에는 우리가 사랑하는 그분을 이렇게 증언한다.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는 그분은 하나님이다(행 17:28). 하나님은 “모든 것 위에 계시고 모든 것을 통하여 계시고 모든 것 안에 계시는 분이다. ἐπὶ πάντων καὶ διὰ πάντων καὶ ἐν πᾶσιν”(엡 4:6)
 


 

사랑하는 대상은 우리의 좁아터진 마음으로 부터 이끌어 넓고 깊은 사랑의 영역으로 이끌뿐만 아니라 곤궁에 처해있을 때에 막다른 길목에서 건져내주신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모든 종류의 사랑의 원형이며 그 모습으로  새롭게 방향 짓는다. 하여 우리의 입술은   사랑의 대상을 향해 이러한 찬양이 절로 나온다. 


"하느님 경험은 삶의 경험들을 더 깊게 하였고, 그것을 위축시키지 않았습니다. 하느님 경험은 삶에 대한 절대적 긍정을 일깨우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느님을 사랑할수록, 나는 더욱 더 여기에 있고 싶습니다. 내가 보다 더 직접적이며 전체적으로 여기에 있으면 있을수록, 나는 더욱 더 살아계신 하느님을, 삶의 무한한 원천을, 삶의 영원을 느낍니다.” _ 위르겐 몰트만


회갈색 차가운 계절이 왔다.


오늘 내가 만난 하나님은 냉기도는 가슴을 따뜻하고 포근포근하게 감싸는 분이시다. 오감을 깨워 그분을 더욱 생생하게 느끼길 갈망한다. 하나님에겐 당신이 푼크툼이다. 몰트만의 사랑의 고백이 오늘 우리들의 고백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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