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과 실재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20-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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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과  실재

이런 것들이 있다.
가을에 단풍나무와 낙엽이.
비 오는 날에 우산이.
교실에 책상이.

  

만일 위의 말을 믿는다면 그대는 속았다. 왜냐하면 이것은 구라이기 때문이다. 왜냐고? 구라라고 말하는 나를 되려 구라쟁이라고 한다면, 그대는 진정 구라인 줄도 모르고 단단히 속아온 것이며 이것은 '찐'이다

 

'책상이 교실에 있다'라고 하면 마치 그 책상은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 같다. 내일도 변함없이 있을 것이며, 어쩌면 우리는 교실에 책상이 있다는 것을 당연시 여기면서 영원히 교실에는 책상이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대체 교실에 책상이 왜 '있는가'를 우린 묻지 않는다.

 

텅 빈 교실일 수도, 복도에 있는 의자일 수도, 운동장에 있는 의자일 수도 있다는 사실은 가려진 채 교실은 책상과 짝을 이루어 교실에는 저절로 책상이 있다로 여긴다. 교실에 책상이 있다는 것은 교실에 대한 하나의 전제이고 배경이다. 이제 우리에게 교실은 책상이 있는 교실만이 현실에서의 실재라고 생각한다.

 

책상 위에 사과 2개와 오렌지가 1개가 있다고 치자. 과일이라는 이름아래 사과 2개와 오렌지 1개는 3이라는 숫자로 묶인다. 이것은 2+1=3이라는 연산에 의해 산출된 것으로 3이라고 표현되는 순간, 책상은 없는 것이 되고, 게다가 사과와 오렌지는 없고 숫자 3만 의미를 갖게 된다.

 

의자가 3개 있다고 할 때의 숫자 3과 과일이 3개 있다고 할 때의 숫자 3은 같은 의미로, 단지 3개가 있음을 나타내며 거기엔 의자라든가 사과, 오렌지는 가려진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실제 세계에 3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믿어 버린다.

 

교실에 책상이 존재한다는 것, 2와1을 더하면 3이라는 것, 화이트헤드는 이것을 추상이라고 말하며, '잘못 놓인 구체성의 오류'라고 말한다. 화이트헤드가 보기에 수학의 언어는 극도의 추상이며 수학을 언어로 사용하는 과학 또한 추상이다. 왜냐하면 사과가 부사인지 홍옥인지 골드메달리온인지 홍로인지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으며 사과의 맛과 모양과 상태도 말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사과에 담긴 누군가의 에피소드도 전혀 말해주지 않는다. 말하자면 3 이외의 것은 버려져야 할 잉여이며 불순물이다.

 

게다가 우리 생활세계에는 '더 한다'는 의미는 애초에 없다. 애초부터 사과도 없었다. 그냥 사과라고 이름붙인 물체가 제각각 어딘가에 있을 뿐인데 우린 습관적으로 합해서 숫자 3이라고 덧씌운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린 추상에 의해 구축된 것이 마치 실제 우리가 살고 있는 생활세계인 것처럼 믿고 있다고 화이트헤드는 지적한다. 다시 말해 이 세계는 동일성과 보편성 안에서 움직이는 무미건조하고 냉랭한 차이들로 선이 그어져 있고 그 안에 있는 우리는 창백하게 탈색된 좀비가 되어 선의 안과 밖의 존재로 규정된다. 



스티븐 제이 굴드는 생물학의 영토에서 어떻게 잉여와 불순물을 만들고 제거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이를테면, 르네의 식물분류를 생각해 보라. 다윈의 자연선택을 생각해 보라.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단계로 진화했다는 진화론을 보라. 과학은 목록을 정해놓은 서랍에 생물들을 하나하나씩 분류해 넣는 형국이고, 그 서랍의 목록에 해당되지 않으면 버려 버리고, 목록에 부합해도 공간이 부족하다 싶으면 버려 버린다.

 

생물학은 만들어 놓은 어떠한 기준과 동일성에 근거해서 개개의 생물들 사이에 차이를 만들고 분류한다. 그러면 우리는 실제 우리의 생활 세계가 그러한 생물들과 법칙이 딱 들어맞는 곳이라고 믿는다. 일반성과 법칙성을 벗어나는 특이하거나 혹은 사소한 개체는 이단 시 된다. 그리하여 정죄 하듯이 제거해 버린다. 일반성과 법칙성에 부합하는 수많은 개체들은 너무 쓸데없이 많아 개체로서의 의미가 없는 잉여적 존재가 되어 버려진다.

 

과학은 이처럼 일반성과 법칙성을 위해, 이 세계에 존재하는 것들을 주변화시키고 소수성으로 몰아세울 뿐만 아니라 사소한 것들을 잉여라고 이단이라고 낙인찍어서 배제시키고 소멸시켜왔다. 또한 우리는 이렇게 추상과 실재 사이를 동일시하고 살아왔다.

 

굴드는 현동적인(동일성을 전제하지 않은 순수한) 차이와 개체들의 독특성과 고유성을 보자고 말한다. 그가 생명을 우연성으로 설명하는 태도에 대해서 나는 반대 입장이지만 그러나 이 세계는 다양한 생명체가 살아 숨 쉬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매력을 발산하고 그 자체로 멋진 생명들이 어우러진 곳이라는 주장에는 동의한다.

 

어떠한 본질적인 것이 있다는 혹은 동일한 것이 있다는 전제 하에 경계 밖으로 밀려난 것과 경계 안에 있는 것들 사이에는 처음부터 위계적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체제와 구조가 존재하는 것들에게 바로미터를 정해놓은 것뿐이다. 그러나 그러한 전제는 대단한 힘을 발휘한다.

 

그 힘이란 예컨대 피라미드 같은 위계구조를 만들어 경쟁을 부추기고 갈등과 대립을 조장한다. 억압과 예속과 착취의 연결고리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도구와 수단으로 삼는다. 이것이 바로 '존재의 사슬'이 작동시킨 메커니즘이다. 본질적인 것은 없다. 우린 실재를 드러내고자 하는 강밀도의 크기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 차이는 개체들에게 고유성과 독특성을 부여해 주기에, 어느 것 하나 저울 위에서 가벼운 것이 없다.

 

 

글_ 백우인 (bwooi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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