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칼럼🖋] 기후위기시대 - 한국에 필요한 새로운 꿈과 그 걸림돌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23-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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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른 이후로 나는 세계 이곳저곳에서 살아왔다. 고국 땅을 떠나 산 세월이 그리 적지는 않다. 그런 경험을 하고 나서 한국에 다시 와 지내고 있는데, 그래서인지 이곳의 계절이 그간 어떻게 변했는지,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는 감각이 다른 한국인들보다는 조금 더 있다고 생각한다. 몸으로 아는 앎과 감각이라는 것도 있는 것이다.


 폭염과 추위 사이, 잠시 열린 꿈결 같은 시간대에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지만, 재 한국인화 된 나는 이미 몸으로 알고 있다. 지금을 즐기면서도 서둘러 긴 혹한기에 대비해야만 한다는 것을. 이 땅에서는 그래야 한다는 것을 몸이 알아서 내게 말해준다. 24절기가 찾아올 때마다 라디오에선 한로다, 상강이다, 입동이다, 또 뭐다 라며 잘도 떠들어대지만, 기후변화 시대에 절기라는 것이 얼마나 실효성 있겠는가. 폭염 아닌 여름은 이제 생각하기 어렵고, 약 한 달 정도 지속되는 ‘몽유도원’ 같은 이 시간이 지나면 혹한의 긴 시간대가 이곳을 점령한다. 언제 끝날지 모를 시간이 끝도 없는 터널처럼 이어지다가 “기후변화의 시대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한탄이 잦아들 무렵이 오면, 겨우 겨우 봄이 찾아올 것이다. 실로 기적 같은 사건이지만, 그 봄은 가을만큼이나 빨리 우리 곁을 떠난다. 그렇게 된 것도 최근의 일은 아니다. 이 짧은 꿈이 끝나면, 우리는 또 냉풍기가 가동되는 21세기의 냉동 동굴 안으로 기어들어가 지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리의 진짜 집이 마을, 도시, 국토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구 안에 있다는 감각이 깨어날 만도 하다. 기후변화로 인해 집이 지구에 너무나 가까워졌다는 점. 이것은 어쩌면 기후변화가 인류에게 준 거의 유일한 선물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깨달음의 계기는 대개는 불행의 경험이다. 지난 봄 산불로 집을 잃은 강릉 사람들의 불행, 지난 여름 수해로 고생한 경상북도 예천 사람들의 불행, 충청북도 청주(오송) 지하차도에 갇혀 죽어간 이들의 불행, 수해 실종자 수색에 나섰다가 이승과 연을 끊고 만 고(故) 채수근 상병의 불행도 여기에 속한다.


 물론, 이러한 불행은 올해에도 어김없이 전 지구에서 일어난/일어나고 있는 불행이라는 빙산 가운데 하나의 작은 조각일 뿐이다. 한국에서 올 여름 폭염은 6월 말, 7월 초에야 시작되었지만 동남아나 인도, 중동, 남유럽, 미국 등지에서는 이미 5월 말, 6월 초부터 폭염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얼마나 뜨거웠던 것일까? 과연 나사(NASA)의 고다드 우주 연구소(GISS)는 놀라운 측정 결과를 발표했다. 1880년 세계 기온 기록이 시작된 이래 2023년 여름이 가장 뜨거운 여름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여름은 앞으로 수십 년 간 찾아올 여름 가운데에서 가장 시원한 여름일 가능성이 크다!) 한편, 미국의 해양대기청(NOAA)은 올해 지금까지 미국이 겪은 극한적 기후 사건이 총 23건에 달하며, 피해액이 역대 최고라고 밝혔다. 물론, 이 23건의 사건 가운데에는 최소 115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그 피해액이 5조 원이 훨씬 넘을 것으로 보이는 하와이 마우이 섬의 산불 피해도 포함돼 있다. 하지만 올해 (적어도 지금까지는) 가장 큰 고통을 겪은 나라는 캐나다라고 봐야 한다. 지난 3월부터 시작된 캐나다의 산불은 지금까지(지금 이 순간에도 불타고 있다!) 약 18만 평방 킬로미터에 이르는 면적(캐나다 숲의 약 5%)을 태웠는데, 이로 인해 발생한 탄소는 500메가톤에 육박하는 것으로 측정되고 있다. 영향을 받은 주는 10개의 주, 3개의 준주, 즉 전 국토로 각지에서 숱한 이재민이 발생했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각종 데이터는 문제의 완화가 아니라 악화를 한결 같이 지시한다. 매년 9월이면 최대 해빙 면적을 보이며 해빙의 몸집을 키우는 남극에서 올해는 역대 최저치의 해빙 면적(1696만㎢)이 관측되었다. 해빙 용해 시점도 1981~2010년의 30년간엔 그 평균 시점이 9월 23일이었지만, 올해는 2주 빠른 시점인 9월 10일인 것으로 관측되었다. 내가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현재, 하와이 마우나 로아 관측소에서 측정된 이산화탄소 농도는 418.21ppm인데, 안정적인 기후 조건의 지표로 제시된 350ppm을 훨씬 웃도는 수준임은 말할 것도 없다. 슬픈 일이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는, 지구의 바다는 계속해서 가열되고 있는 것이다.




남극 빙하의 감소 추이 그래프  지속적인 감소를 보여준다. 더얇게, 더좁아진다. (자료제공 :NASA)


북극 해빙의 변화 1979(좌)과 - 2022년(우) (자료제공 : NASA)



전 세계의 기온 변화, 1884년(위쪽)부터 가장 최근인 2022(아래)까지  (자료제공 : NA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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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그러거나 말거나 이곳의 기후행동은 보잘 것 없기만 하다. 기후위기가 진짜 우리의 문제라고 우려하는 사회적 목소리는 결코 적지 않지만, 기후위기에 진지하게 대처하는 행동은 국가/지자체 차원에서도, 시민사회 차원에서도 그 효과가 적이 의문스러운 수준에 머물고 있다. 쏟아지는 위험 경고와 미미한 행동 간의 이 간극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거대한 틈은 무엇 때문에 발생하는 것일까? 크게 네 가지가 원인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우선, 과학과 실감 간의 간극이라는 전 세계인에게 공통되는 사안이 있다. 과학적 지식을 통해 이해하게 되는 기후변화의 현실은 오직 기후충격을 통해서만 우리 인간에게 실감된다. 문제는 홍수, 호우, 산불, 태풍 같은 기후충격이 (시공간적으로) 간헐적으로만 경험된다는 점이다. 누구도 언제나 기후충격을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또 어디서나 기후충격이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이곳에서 발생한 지난 여름의 수해는 몇 개월이면 까맣게 잊히고, 현재 발생 중인 기후재난은 한국 밖 다른 나라의 일이기 쉽다. 이러한 시공간적 간헐성 탓에 우리의 실감은 쉽게 허물어지고, 충격을 받았을 때 가까워졌던 학과 실감의 거리는 다시금 벌어지고 만다.


 한국에서는 이런 일이 보다 쉽게 일어나는데, 그건 한반도가 오랫동안 기후충격의 사각지대나 다름없는 지역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2018년 50일 폭염 이후 기후변화를 실감하는 이들이 꽤 늘었지만, 이웃나라 중국과 일본이 수해(태풍, 홍수)로 고통 받는 동안에도 한국만은 기이하게 안전한 쪽이었고 산불 피해 규모 역시 상대적으로 소소한 수준이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다행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불행이 아닐 수 없다. 피해가 적으니 천만다행이지만, 현 세대의 탄소 감각을 무디게 하니 미래세대로서는 불행 중 불행이다.


 둘째, 인간 뇌의 특정 성향이 문제다. 정보처리이론(Information Processing Theory)에 의하면, 우리의 뇌는 반복된 자극/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이 없는 경우, 그 자극/문제를 무시하는 방향으로 해당 정보를 처리하는 경향이 있다. 기후변화라는 정보가 우리의 뇌를 자극한 지는 10년이 훌쩍 넘지만, 이를 속 시원히 해결하는 해법이 선명히 보이지 않는 것이 현실 아닌가. 그렇다면 자꾸만 이 사안을 뒷전으로 미루거나 마주하기를 회피하는 대중의 심리는 사실 이해할 만한 것이다.


 셋째, 한국은 에코모더니즘이 기승을 부리는 곳이라는 점을 언급해야겠다. 한편으로 기후위기를 진정으로 걱정하고 대비하려는 흐름도 있지만, 이곳의 주류와 다수는 결코 그 흐름과 함께 하고 있지 않다. 챗 GPT 같은 신기술에 온 나라가 들썩들썩하고, 끊임없이 쏟아지는 신형 휴대폰에 열광하며, 인공위성의 성공적 발사를 한 점 의심의 시선 없이 자축하고, 2030 부산 엑스포를 기대하는 심리를 생각해보라. 이러한 욕망의 거대한 강물은 기후위기 같은 문제도 언젠가는 테크놀로지가 해결하리라는 식의 에코모더니즘과 당연히 정서적 친화성을 보인다. 문제는 바로 이런 식의 하이테크 개발 과정 자체가 다량의 탄소배출 과정이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이 모든 과정이 실은 ‘제 살 깎기’라는 자명한 현실을, 이 욕망의 강물에 휩쓸린 그 누구도 똑바로 바라보려 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왜 그런 걸까? ‘한국의 도약’이라는 오래된 꿈 때문이라는 것이 나의 진단이다. 이곳의 초라함이 만천하에 드러나기 시작한 1880년대부터 이 땅의 꿈이 되어온(1905년 경 부터 1945년까지 약 40년에 이르는 피억압 기간에 이 꿈은 결코 꺾을 수 없는 절대적 꿈이 되고 만다.) 한국(조선)의 세계 도약이라는 꿈. 누구도 욕보일 수 없는(치욕의 역사가 너무 길었다!) 국가로의 도약이라는 이 꿈 그 자체를 손가락질 할 수야 없겠지만, (전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신속한 경제성장, 탈 가난의 역사 자체를 우리 자신이 평가절하하거나 비아냥거릴 수도 없겠지만) 그 꿈을 이루는 과정에서 야기된 생태환경 파괴의 흑 역사에 눈을 감는 태도 역시 결코 용인될 수는 없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지난 10월 6일 국회에서 가덕도 신공항 건설공단 법안이 상정되었을 때 법안에 반대표를 던진 의원은 재적의원 242명 가운데 단 6명에 불과했다. (찬성 223, 기권 13) 자연을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더 개발하고 성장해야 한다는, 결코 국회의원 집단에만 국한될 수 없는 한국의 집단적 망상을 이 표결이 여실히 보여주고 있지 않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러한 망상이 결코 한국민족 특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산천을, 자연을 함부로 대하고 파괴하는 행위는 사실 자연친화적인 삶을 좋은 삶으로 여겼던 예맥족(한국민족)의 오래된 정신과 마음새에 비추어볼 때 극히 반한국적인 것이라는 사실에 눈떠야 한다. 더욱이 세계의 한국 인정이라는 꿈 역시 이미 달성한 꿈이지 않은가! (얼마나 인정받아야 성이 차겠는가!) 그러니, 이제 부디 새로운 꿈을 꾸자. 지구가 입을 열어 인류에게 다른 삶을 촉구하고 있는 현실에 (다른 세계인들과 함께) 진심으로 귀 기울이며, 다른 문명으로 나아가는 새로운 꿈을 부디 꾸자.


 그러나 이러한 꿈의 변경, 꿈의 탈바꿈은 이곳에서 결코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진실 된 기후행동을 가로막고 있는 네 번째 걸림돌 때문이다. 무엇일까? 더 많은 상품의 생산과 유통과 소비를 매개로 제 규모를 키우는(성장시키는) 자본주의에 너무도 깊이 매몰된 일상적 삶이 바로 그것이다. 상품의 과생산과 과소비가 기후변화를 일으키는 주범에 속하기에, 자본주의와 사랑에 빠진 신체와 기후행동은 당연히 상극의 관계에 놓인다. 이탈로 칼비노(Italo Calvino)의 소설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는 ‘레오니아Leonia’라는 이름의 가상의 도시가 등장한다. 이 도시에는 한 가지 특이점이 있는데, 도시 거주자들이 새것을 광적으로 즐기는 이들이라는 사실이다. 매일 아침 이들은 새 옷(신상품)을 입고, 최신모델 냉장고에서 새로운 캔 음식을 먹고, 최신형 라디오에서 나오는 최신 뉴스를 들으며 산다. 더 특이한 것은 이것들의 유효기간이 단 하루라는 것이다. 매일 아침 보도에는 어제 나온 폐기물들이 실린 폐기물 차량이 대기하고 있는 것이다. 매일 새로운 것을 경험하게 해주는 청소부들은 당연히 천사 같은 대접을 받는다. 문제는 이렇게 폐기된 사물들의 운명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레오니아 시민들은 ‘폐기물로 이루어진 파괴 불가능한 요새’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구축하게 된다. 결국 이 요새는 도시 외곽에서 도시를 포위해서는 “산맥처럼 사방에서 도시를 압도”한다……. 이것은 그저 소설 속 이야기일 뿐일까? 이곳의 레오니아를 구할 방도는 칼비노의 레오니아 이야기에 이미 담겨 있다. 




글 | 우석영

철학자, 《기후위기행동사전》 공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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