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칼럼🖋] "자유", "체화된 인지", 그리고 "창발"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23-11-15
조회수 813



글을 열며


이번 5회 과신대 포럼은 자유의지와 뇌결정론에 대한 신경과학적, 철학적 입장의 강연을 듣고, 대담으로 이어지는 순서에서 앞선 강연들을 통해 제기되는 질문들을 다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나아가, 인간의 신경생리적인 과정에 수반하는 자유의지의 문제를 신학적 차원에서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지 등도 다뤄보았습니다. 각각의 강연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지점은 “자유”에 대한 철학적 이해와 “인지행위”에 관한 과학적 이해였습니다.





 구체적으로, 김남호 교수님은 자유론에 입각한 관점에서 인간의지의 자유를 특정한 상황에서 외부적 요인의 강요나 결정 없이 A와 B 중의 선택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이나 능력으로 제시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이러한 제안에 대해 저는 신학적 이해 안에서의 자유는 달리 이해되거나 제시될 수 있다는 취지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드렸었습니다: “만약 어떤 인격적 존재가 A와 B 중 하나를 선택할 가능성이 없다면, 다시 말해, 만약 그 존재가 A를 선택할 가능성 밖에 없으나, 열렬히 그리고 적극적으로 그 A를 선택하는 쪽으로 의지력을 발휘한다면 그 존재에게 자유는 없는 것인가?”


이 질문을 드렸던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신학적 차원에서 하나님에게는 악을 선택할 가능성이 전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이 전적으로 자유로운 분이심을 고백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신학적 입장에서의 자유 이해는 앞서 제시되었던 철학적 자유론의 맥락에서의 자유 이해와 조금 다르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신학사 안에서 인간의 자유의지에 관한 논쟁은 대표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펠라기우스 논쟁,”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 논쟁” 등으로 손꼽아 볼 수 있겠습니다. 이 신학 논쟁들은 구원의 실현과 선을 행하는 문제에 있어서 인간의 자유 혹은 자유의지가 얼마나 작용하며, 어떻게 작용할 수 있는가 여부에 관한 것들이었습니다. 이 논쟁들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는 것은 이 칼럼의 취지를 벗어나기 때문에, 혹 관심 있는 분들은 해당 논쟁들이 잘 정리된 신학 텍스트나 자료들을 참고해 주시길 바랍니다. 저는 해당 논쟁들로부터 정립된 한 가지 신학적 이해 정도만 짚어보려고 하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총 없이는 인간의 자유는 불가능하다”는 신학적 자유 이해입니다. 예를 들어, 기독교 전통 밖의 의견으로 정죄된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의지는 악을 향해 경도되어 있지 않다고 보았던 반면, 기독교 전통의 이론적 틀을 정립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원죄로 인한 타락에 의해 인간의 의지는 항상 악을 향해 경도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렇다 보니, 악을 행할 수밖에 없는(non posse non peccare)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만 악을 행하지 않을 수 있는(posse non peccare) 자유를 획득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은총에 기반한 자유는 종말에 가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총에 의해 악을 행할 수 없는(non posse peccare) 자유를 획득하게 되는데, 인간의 종말론적 자유 실현은 본성적으로 악을 행하실 수 없는 하나님의 자유에 참여하게 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신학적 차원에서의 자유는 하나님을 인간 자유의 원초적인 근원으로 상정합니다. 하지만 자유의지에 관한 담론에 있어 저명한 철학자 로버트 케인은 자유를 유전이나 환경, 신이나 운명 등의 기타 원인 없이 행위자 자신의 의지만이 행위의 원인이 되는 것으로 규정하는데, 이러한 맥락의 철학적 자유 이해는 신학적 자유 이해와 다소 구분되어 보입니다.1)


1) Robert Kane, The Significance of Free Will, 1996. 물론 현대 신학적 차원에서 위르겐 몰트만과 같은 신학자들이 제시하는 삼위일체적 하나님의 케노시스 개념을 가지고 논의하거나, 과정신학자들이 담지하고 있는 신적인 힘과 인간의 자유 개념 등을 가지고 본다면 케인의 자유 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게 신학적 자유 이해를 이야기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굳이 구분을 해보자면, 자유의지에 관한 철학적 입장에서의 자유론은 현대신학적 입장에서의 케노시스 바탕의 자유 혹은 피조물적 행위자성 이해와 상응할 수 있으며, 철학적 입장에서의 양립론은 전통신학적 입장에서의 자유 혹은 행위자성 이해와 잇대어 구분하면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칼빈주의-아르미니우스주의의 각각 시조격인 두 인물.  칼빈(좌), 아르미니우스(우)

칼빈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예정' 교리에 대해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2  


 신경과학적 논의에서 김성신 교수님은 인간의 정신적 속성들(e.g., 기억, 의지적 선택)은 신경생리적 과정에 기반하면서도 그 과정으로 단순 환원될 수 없다고 이야기하십니다. 이는 인간에 대한 중요한 통찰인데, 왜냐하면, 대중적으로 널리 공유되어 왔던 신체를 떠날 수 있는 영혼 개념이 실상 지지될 수 없음을 어느 정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김성신 교수님께서 시간 관계상 강연에서 깊이 다루지 못하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체화된 인지(embodied cognition) 개념입니다. 이 개념은 신경과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오, 생물학자 움베르토 마뚜라나 등이 제안한 것입니다. 이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인간의 인지행위는 신체에 상당 부분 의존합니다. 그렇다 보니 인간의 인지행위를 체화된 인지라고 부르며, 그러한 인간의 실존적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 체화된 주체(embodied subject)라는 개념이 널리 통용되고 있습니다.


 인간의 정신과 인지 행위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그녀의 신체에 일차적으로 귀속되어 있으며, 그녀가 지금까지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몸담아온 그녀의 환경,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에 어느 정도 귀속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특정한 시점 t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는 데 작용하는 우리의 성향, 습관, 성품 등은 진공상태의 우리 영혼의 결정이 아닌 우리 신체에 각인되어 온 신경학적인 패턴에 어느 정도 의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어느 정도” 의존되어 있다는 말은 해당 시점에서의 우리의 선택이 오롯이 우리의 과거 행위들과 우리의 신체에 의해서만 결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 정신과 신체 사이의 유기적 연관성은 우리가 읽고 해석해온 성서 안에서도 발견될 수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3장 43절 같은 경우는 마치 우리가 죽는 즉시 우리의 영혼이 빠져나와 이 세계를 초월해 있는 어떤 공간으로 이동하는 듯한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 같지만, 인간의 정신을 주로 표현해 온 신약성경의 헬라어 프쉬케는 신체를 떠날 수 있는 어떤 것을 가리킨다기 보다 신체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인간의 어떤 측면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일례로, 신약학자 H. D. 맥도널드는 이 프쉬케가 “인간, 사람, 마음, 진심” 등으로 번역되어 왔으며, 이는 한 사람의 생명을 가능케 하는 핵심원리 혹은 특별한 정신적 요소이기는 하지만 신체성과 유기적 연관성 안에서 파악되어야 하는 개념이라고 지적합니다.2)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날 신경과학이 밝혀주는 체화된 주체로서의 인간 이해를 성서적 인간 이해와 상응하는 것으로서 받아들이고, 이러한 이해 안에서 우리의 정신 혹은 영혼 개념 등을 재정립해야 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2) H. D. McDonald, The Christian View of Man, 1981.


신경과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오(좌)와 생물학자 움베르토 마투라니(우)

   



 3 


두 분 교수님의 강연을 통해 상정된 개념 혹은 문제 가운데 우리가 깊이 있게 다루지 못한 개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창발” 개념입니다. 창발 혹은 수반 등으로 명명된 이 현상은 자연계 내 상위속성이 하위속성에 기반함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하위속성만으로 환원될 수 없는 어떤 것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주로 화학적 속성, 생물학적 속성, 정신적-문화적 속성 등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예를 들어, 물 분자들이 군집을 이루게 되면 이들은 물 분자의 구성 요소들인 수소 원자와 산소 원자들이 분리되어 있을 때는 나타나지 않던 속성, 곧 무엇인가를 젖게 하는 속성을 가지게 됩니다. 이러한 속성은 화학적 창발로 볼 수 있겠습니다. 생물학적 속성은 자기보존과 자기복제 정도로 들 수 있겠습니다. 생물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생명체의 가장 기본 단위는 세포인데, 이는 세포를 구성하는 핵산이나 아미노산, 단백질 등이 분리되어 존재할 때는 보여주지 않던 현상을 보여줍니다. 그것이 바로 세포의 자기보존 과정(혹은 행위)이나 자기복제 과정이겠습니다. 이러한 현상들은 분명 그것들을 구성하는 구성물질들을 기반으로 하고는 있으나, 그 구성물질들이 분리되어 각각 존재할 때는 나타나지 않던 현상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특정한 구조나 패턴을 이룬 채 존재하게 되면 나타나는 속성과 현상인 것이지요.


  인간의 정신도 이러한 창발 현상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두뇌를 구성하는 신경세포들과 시냅스 연결, 그리고 이 사이를 오고 가는 전기신호와 화학물질들은 그것 자체로 떼어놓고 보면 정신적 속성을 가진 것으로 볼 수 없지만, 그것들이 집합적으로 일련의 구조와 패턴을 가지게 되면 그로부터 인간의 정신 현상은 나타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러한 창발 혹은 수반 현상을 주제로 우리는 대담 순서에서 재미있는 논의를 나눌 수 있었지만 그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다음번 포럼이나 콜로퀴움에서 이러한 부분들을 다룰 수 있다면 영미권에서 신학과 과학의 대화에 참여해 왔던 낸시 머피(Nancey Murphy), 필립 클레이튼(Philip Clayton), 아써 피콕(Arthur Peacocke) 등의 학자들이 논의했던 내용을 바탕으로 이번 포럼에서 다뤘던 자유의지와 인간 정신의 문제를 조금 더 심도 있게 다룰 수 있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창발 문제는 하나님의 세계 안에서의 섭리 행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도 맞닿는 측면이 있다고 생각해서 과신대가 다뤄야 하는 중요한 주제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아무쪼록 다음 포럼이나 콜로퀴움에서 이 주제를 가지고 오늘 나눴던 이야기들을 계속해서 이어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때까지 과학과 신학 사이의 대화를 깊이 있게 진전시켜 나가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글 | 정대경

숭실대학교 교목실, 과신대 연구이사

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