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하게 말해보는 다른 관점 교회 이야기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23-03-13
조회수 1043





많은 '젊은 층'이 보수적 기독교 신학만을 유일한 기독교로 경험하고, 기독교의 다른 가능성을 상상해보지 못한 채 10대 후반~20대 초반에 '기독교'를 믿는 일을 포기해버린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기독교를 포기할까? 내가 경험한 바로는 먼저 종교적인 질문에 관한 뻔하고 답답한 보수적 기독교의 비과학적인 답안들이 일단 기독교에 대한 매력을 떨어뜨린다. 그리고 얼마 후 보수적 기독교 신학이 만들어내는 인간관계 속 정죄를 경험하고는 기독교를 최종적으로 떠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보수 신학은 당연히 '진정한 보수' 신학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들 중 성서무오주의에 심하게 매료된 사람들은 자신의 극단적으로 보수적인 성경 이해를 제외하고는 모두 이단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마저 있다. 그리고 때로는 그러한 편협한 이해를 주변 사람들에게, 심지어는 주일 학교에서 청소년들에게 가르치기도 한다.


나는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이기 때문에 이 시기의 청소년들이 경험하는 일들이 그들의 자아에 미치는 영향을 잘 알고 있다. 어쩌면 청소년들, 청년들이 별다른 깊은 생각 없이 학교나 교회를 다니고 있다고 생각하는 어른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당연히 청소년과 청년들은 매순간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깊은 의문을 던지며 살아가고 있다. 사람에 따라서 그것을 말로 표현하는 정도는 다 다르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크리스찬 청년, 청소년이 당면한 세계는 현대 세계인데 한국교회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보수적 기독교의 답안은 너무 중세적이고,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이고 마지막으로 혐오적이다.


예를 들어 어떤 한 청소년이 학교에서 과학 시간에 우주의 생성과정에 관해 배우면 창세기의 내용에 관해 의문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어른들은 이러한 의문에 대해 제대로 답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무언가를 답변해주더라도 유사과학 차원의 믿을 수 없는 증거를 답이라고 내어놓는 경우가 많다. 어른 한 명의 말이라면 어찌저찌 넘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청소년들의 불편한 마음에 한국교회는 여지없이 쐐기를 박고 만다. 청소년 예배나 청년 예배에서 창세기를 다룰 때 현대과학인 진화, 지질학, 천문학을 모두 부정하는 창조과학 강사를 부르거나 창조과학의 황당한 동영상을 인용하면서 말이다. 특히 대형교회에서 그런 일이 종종 일어나는데, 청소년들에게는 대형교회가 기독교를 대표한다는 인식이 지배적이기 때문에 정말 위험하다. 강사의 강연과 동영상이 워낙 자극적이다보니 청소년이나 청년들은 웃기도 하고 순간적으로는 즐거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 강연의 내용을 받아들이는 청년과 청소년은 거의 없다. 이 상황에서 특히 그 청소년이나 청년이 이과출신인 경우, 그는 기독교에 진절머리를 치게 될 가능성이 높다. "내 귀에 도청장치가있다."를 기억하는지? 그 순간 이후 그들에게 크리스찬이란 바로 그 사람과 다름 아니게 되는 것이다. '언젠가는 그러한 것이 궁금해지지 않는 순간이 온단다.'와 같은 말로 은근히 그 청년이나 청소년의 불신앙을 지적하고, 한편으로는 자신의 '온전한' 신앙을 자랑하는경우도 있다. 그 경우 그 청년이나 청소년은 정말로 금방 그러한 것이 궁금해지지 않게 될 가능성이 높다. 왜냐면 그 답을 듣고는 기독교를 아예 떠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의문들이 '세계관'에 대한 것이라고 한다면, 한편으로 청소년과 청년들은 '인간관'에서도 기독교적 입장에 의문을 제기한다. 주로 청소년과 청년의 관심이 대상이 되는 것은 동성애자에 대한 기독교의 입장이다. 정체성과 성이 청소년기의 주된 고민거리라는 점에서 이 관심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이미 세계보건기구(WHO)에서 30여년 전에 과학적 발견으로 동성애 성향이 정신질환 목록에서 빠졌음에도 보수 기독교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왜 동성애자가 죄인이에요?"라고 묻는 질문에 보수 기독교인들은 "성경에 그렇게 나와 있으니까."라고 제시한다.


그 순간 기독교인들은 청소년과 청년에게 혐오주의자가 되고, 성경은 혐오주의를조장하는 책이 된다. 한 술 더 뜬 사람들은 어디서 들은 '전환치료'같은 것을 이야기하면서 기독교적 정신치료를 받고 동성애에서 이성애로 돌아온 사람들에 관해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청소년이나 청년은 그 얘기를 해준 어른보다 보통 인터넷 검색을 더 잘 한다. 그래서 정신과 의사들은 '전환치료'를 인간에 대한 심리적학대로 생각한다는 것을 알게되고, 전환치료 피해자모임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며, 오히려 동성애 혐오자에 관한 정신건강 연구야말로 과학적인 연구라는 것을 알게된다.


과학에서 이미 '밝혀진 것'조차 거부하고, 얼마나 '맹목적'인 믿음을 가졌는지 서로 경쟁하고, 혐오주의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실천하기까지 하고, 그런 생각을 가진사람들끼리 똘똘 뭉쳐 있는데 심지어 젊은 사람까지 적으며 최근에는 정부의 방역조치까지 지키지 않아서 주변에 실질적인 피해까지 준 집단. 이것이 냉정히 평가한 청소년과 청년이 바라보는 기독교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교회 안 나가면 부모님이 슬퍼하니까 교회를 나오는 것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교회 다니는 것 들킬까 불안하면서도, 착해서 몰래 효도하는 마음으로 나오고 있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인 것이다.


국어를 가르치는 고등학교 교사의 입장에서도 한국교회의 이러한 납작한 성경관은 참으로 답답하다. 예를 들어보자면, 단군신화 이야기를 말할 수 있겠다. 학교에서 단군 신화를 가르칠 때 당연히 그 이야기를 '곰과 호랑이가 인간이 되는 법'에 대한 과학적 사실로 가르치지 않는다. 아마 보수적인 신학을 가지신 분도 학교에서 국어 선생이 단군신화를 가르치면서 '곰과 호랑이가 마늘과 쑥을 먹으면 인간이 될수 있다.'고 자기 자식에게 진지하게 가르치면 화를 낼 것이다. 단군 신화의 가치는 우리 민족 이념인 홍익인간, 즉 널리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것에 있는데 그 사람은 국어선생이라는 사람이 그것도 모르냐면서 말이다.


한편 우리 고전 문학에서 <박씨전>이나 <홍계월전>같은 유명한 여성영웅 소설을 가르칠 때도 시대적 배경이 워낙 옛날이다보니 현대의 성인지 감수성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성차별적인 장면들이 나온다. 심지어 주인공인 여성의 행동마저도 현대인들에게는 여성혐오적으로 느껴질만한 점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몇몇 장면이 그 소설에 문자적으로 존재한다고 해서 전체적인 줄거리에서 명백하게 보이는 '여성 인권의 성장'은 절대로 감출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만약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지않고 지엽적인 부분에 집중하여 여성 영웅 소설의 여성관을 왜곡한다면 나는 그 텍스트를 잘못 가르치는 것이며, 진정 중요한 것을 가르치지 않는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과학을 어느 정도 공부하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어쩌면 구체적인 내용들이 잘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국어 선생으로서 바라건대, 우리는 최소한 성경이라는 책과 과학이라는 책을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다. 단군신화와 마찬가지로 창세기는 지구와 생물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려주는 책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해주는 책이다. 또한 여성영웅 소설과 마찬가지로 성경은 적혀있는 그 '글자'보다도 명백하게, 엄혹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도 동시대의 가장 고통받고, 천대받고, 차별받는 이들을 누구보다 사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책인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이 이대로 계속 방치되고 해결되지 않는다면, 아마 기독교는 '소종파'가 되고 말 것이다. 보수적 기독교인들의 신앙이 우리나라에 기독교를 크게 일으켰지만, 그 '이후'가 없었다. 크게 일어났다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에는 기독교 말고도 종교가 크게 일어난 적이 꽤 있다. 하지만 그들 중 다수가 소종파가 되고, 결국에는 없어져 버렸다. 기독교가 점점 소수가 되어가고 있는 것은 무서운 현실이다. 주변을 둘러보면 요새 교회 다니는 ‘젊은 층’ 중 거의 대부분은 가족전도로 조부모에서부터 자식까지 신앙이 이어진 사람들이다. '저희 집안은 3대째 기독교예요.'라는 말. 얼마 전까지는 분명 부럽고 존경스러운 말이었다. 그러나 모두가 그럴 때엔 무서운 말이다. 점점 기독교가 '게토'가 되고 있다는 뜻이니까 말이다. 해결할 방법을 모두 함께 고민하고 실천해야 한다.


먼저는 다양한 이야기와 입장이 교회에서 자유롭게 논의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성도들끼리 조금 새로워 보이거나 들어본 적 없는 입장도 충분히 논의될 수 있는 안전한 공론장이 필요해 보인다. 논의의 과정 속에서 청소년들이 떠올리는 생각들 이 구체적으로 발전될 수 있도록 어른들이 먼저 성경과 과학을 보는 관점을 배우고 전하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현대의 주류 과학을 수용하면서도 기독교를 잃지 않을 수 있는 관점의 공유는 정말로 시급하다. 이공계열 학생의 기독교 이탈이 정말 심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다면 청소년과 청년의 의문은 그때부터는 '불신앙'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스럽게 성경을 바라보는 성숙한 시각을 가르쳐주는 열쇠가 되어 줄 것이다.


부디 기독교가 현대 세계와 화해하고, 그 화해가 청소년과 청년에게도 전해지길 바란다. 우리가 성숙한 답을 가지게 된다면, 기독교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내일을 청소년과 청년에게도 자랑스레 물려줄 수 있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너무나 크기 때문에 나는 지금도 희망을 갖는다.





글 |이상현
더불어숲동산교회 평신도 간사로 섬기며 고등학교에서 국어 교사로 일하고 있다.
학생들에게 과학과 신앙을 잘 가르치고자 고민하고 있다.
3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