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t GPT와의 첫만남에 대한 단상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23-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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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tGPT?

2022년이 한달도 채 남지 않았을 무렵이다. 습관처럼 페이스북 화면을 쓸어 올리던 중 한 그룹에 공유된 기사가 눈에 띄었다. 기술 동향에 대한 소식을 쫓아가려고 평소 팔로우하던 그룹이었다. ChatGPT라는 인공지능을 기반으로 한 서비스가 오픈을 했다는 게시물이었다. 인공지능이라는 용어는 예전 부터 들어왔지만 그 성능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서비스라는 점이 흥미로웠다. 링크를 클릭하고 사이트에 접속한 후 간단한 가입을 마치고 로그인을 하니 입력 프롬프트가 놓여 있었다.

 

첫인상은 구글 검색 사이트를 처음 보았을 때의 그것과 매우 비슷했다. 구글의 첫인상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새로운 기술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구글 서비스의 론칭 기사를 보자마자 접속해 보았다. 구글 로고 아래 검색어를 입력하는 검색창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단순함은 텍스트와 광고로 도배되어있는 다른 검색 사이트의 메인 페이지와 확연히 다른 느낌을 제공했다.  그리고 평소처럼 관심있는 주제로 검색어를 입력해 보았다. 결과는 놀라웠다. 마치 내 의도를 알고 있는 듯한 검색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춘추전국 시대와 같던 검색 시장에 새로운 강자가 나타난 것이다. 그 날 이후 내 검색 엔진은 언제나 구글이었다. 나 뿐만 아니라 이제는 모두 구글에서 정보를 얻는 시대가 되었다. 그렇게 인터넷 검색은 구글 제국 아래로 평정되었다. 그런데 구글 천하에 또 다시 전운이 감돌고 있는 것이다.


옛 생각을 뒤로 하고 ChatGPT의 입력창에 무엇을 입력할까 잠시 고민하다 첫 단어를 입력했다.  

“그래도 인공 지능이니까… Hi? 정도가 어떨까?




ChatGPT와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호기심에 이런 저런 질문을 던지고 그 때마다 ChatGPT는 제법 훌륭한 답변을 이어갔다. 구글을 처음 접했을 때의 감탄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야~ 이것 봐라”

 

목사의 최대 관심 중의 하나인 설교에 활용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이런 요청도 해 보았다.


 


이어 각 단락의 개요와 주제,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설교문까지 요청을 해 보았다. 물론 그 때마다 ChatGPT는 실망시키지 않았다. 실망시키지 않았다는 것 보다 놀라왔다는 표현이 더 정직할 것이다. 그러다 문득 좀 더 종합적인 사고가 요청되는 작업을 요청해 보았다. 이런 요청도 척척 처리해 주었다.



“정말 대단한데!”


그동안 구글과 같은 검색 엔진을 통한 검색 작업의 경우 다양한 정보를 취합하고 종합하는 것은 결국 검색자의 몫이었다. 검색 결과는 단지 방대한 정보들을 보여줄 뿐이었다. 마치 도서관의 사서는 내가 원하는 책을 찾아 줄 뿐 그 책을 읽고 이해하고 정리하는 것은 내가 해야하는 일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사서가 요청받은 자료를 찾아주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논문을 써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제 설교 준비로 고생할 일은 없겠군’하는 생각에 얄팍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러나 그 미소는 오래 가지 못했다. 교인들이 굳이 내 설교를 들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곧이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제 ChatGPT만 있으면 교인들도 얼마든지 자신들이 원하는 설교를 직접 만들어 낼 수 있게 된 것이 아닌가. 어디 그 뿐인가. 이미 상용화되어 있는 TTS(Text to Speech)기술과 아바타 기술 그리고 3차원 홀로그래픽, 가상 현실 기술과 결합되면 예수님의 모습을 한 아바타와 함께 갈릴리 호수에서 산상 설교를 들을 수 있게 된것이 아닌가? 그리고 예수님께 직접 질문하고 답변을 들을 수 있다. 신상 상담은 물론 교육, 건강, 법률, 주식 투자 … 이러한 상상에 설마하는 반문이 곧 이어졌지만 기술적으로 모두 이미 가능한 내용들이다. 누가 알겠는가 BTS의 아미들에게는 예수님보다 BTS의 멤버들의 모습을 한 아바타가 설교를 한다면 더 은혜가 된다고 좋아할 수도 있을것이다.


"지금 무슨 세상이 펼쳐지고 있는 것인가?"


처음 ChatGPT를 만나 들뜬 마음에 이것 저것 시험을 해보며 감탄을 하던 나는 모니터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사고력을 갖춘(것 처럼 보이는) 인간이 아닌 존재’를 대면한 것이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느낌이 데자뷰처럼 떠올랐다.  그것은 어릴 적 「멋진 신세계 Brave New World」를 읽었을 때 느꼈던 느낌이었다.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은 과학기술이 가져다 줄 미래 문명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경계심을 DNA처럼 나의 내면에 자리잡게했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읽었던 조지 오엘의 「1984」를 읽으면서도 미래에 대한 암울한 생각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의 자유에 대한 신뢰 때문이었다. 니체가 말하는 ‘힘에의 의지Der Wille zur Macht’의 패러디랄까 ‘자유를 향한 인간의 의지’를 나는 믿고 있다.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의 ‘죄에 대한 극복의지’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주체적 사고 능력을 전제로 하고 있는 믿음이다. 


주체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은 인간적 삶을 위해 필수적인 능력 중 하나이다. 주체적인 사고 능력을 가진 인간만이 문제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해결책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는 지식, 비판적 사고력, 창의성, 자기반성, 개방성 등이 필요하다.

우선, 지식은 어떤 주제에 대해 충분한 지식과 이해가 있어야만 문제를 해결하거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생각할 수 있다. 지식은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기 위한 기반 지식이나 특정 분야에 대한 깊은 이해 등 다양한 형태로 존재할 수 있다. 그 다음으로, 비판적 사고력은 주어진 정보를 분석하고 평가하는 능력이다. 이는 객관적으로 문제를 판단하는 능력으로서, 주관적인 견해나 편견으로부터 벗어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비판적 사고력은 지식과 이해를 바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능력이다. 또한, 창의성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생각하고 새로운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다. 창의성은 기존의 지식과 경험을 활용하여 새로운 아이디어를 도출하는 능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자기반성은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돌아보고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는 자신의 강점과 약점을 파악하고 개선할 수 있는 능력으로, 문제해결 과정에서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는 데 도움을 준다.  개방성은 새로운 아이디어나 견해를 수용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태도이다. 개방성은 다양한 의견과 관점을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는 태도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문제를 해결하거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발전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

이러한 조건들이 모두 갖춰져야 인간은 주체적으로 사고할 수 있다. 인간은 이러한 조건들을 갖추고 이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생각해 내는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 이러한 능력은 개인적인 성공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하거나 혁신적인 발전을 이루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한다.


ChatGPT와의 첫 만남이 나에게 데자뷰를 불러일으킨 이유는 인간의 주체적 사고 능력이 거세될 수도 있겠다는 불길한 예감 때문일 것이다. 이제 인간은 주체적으로 생각할 필요없이 주체적으로 생각해야만 얻을 수 있었던 결과물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굳이 힘들여 지식을 쌓고, 비판적 사고력을 기르고, 창의적 생각을 찾아 밤을 샐 필요도, 빨간 줄이 그어져 있는 답안지를 보며 반성을 할 필요도 없어진 것이다. 물론 지금껏 인터넷 정보에 의존한 수동적 태도는 비판을 받아왔다. 그러나 내가 검색을 통해 보고 있는 정보들은 인간에 의해 수집되고 가공되고 종합된 내용들이었다. 그런데 그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는 것이다. 


메타버스 공간에서 돌아다니고 있는 아바타의 모습들을 보면서도 적어도 그 아바타의 배후에는 실제의 인간이 연결되어있다는 믿음이 존재했다. 아가씨 모습을 하고 있는 아바타에게 다가가서 인사를 하면 실제 주인은 중년 아저씨일지도 모르지만 어찌되었든 대답은 인간이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러한 신념도 사라지게 되었다. 아바타의 배후에 인공지능이 연결되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인공지능에게 명령해서 수 많은 나의 아바타들을 만들어내게 하고 그 아바타들이 메타버스 공간에서 활동을 하게 할 수 있지 않은가. 내가 아바타들을 일일이 관리할 필요도 없다. 어차피 인공지능에게 시키면 될 일이다. 어떤 아바타는 의료 상담을, 어떤 아바타는 댄스 가수를, 어떤 아바타는 열심히 주식 투자를 시킬 수도 있다.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의 커뮤니케이션에 반드시 인간이 매개되고 있다는 믿음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페이스북에 게시물을 올리는 것도 실은 아바타일 수도 있고 거기에 댓글을 달고 좋아요를 누르는 것도 답글을 다는 것도 아바타일 수 있게되었다. 


기계가 인간과 유사한 지능을 가졌는지를 판단하려는 목적에서 기획된 튜링 테스트가 불과 100년도 되지 않아 이제는 이 대답을 기계가 한 것인지를 알아낼 수 있는 테스트가 요청되게 되었다.


“과연 이 게시글은 인공지능이 한 것일까? 인간이 한 것일까?”


남태평양의 휴양지에서 선셋을 즐기고 있는 동안 나의 아바타들이 열심히 유투브의 슈퍼챗을 모아 내 계좌로 송금하는 시대가 멀지 않았다면 소설 쓰고 있다고 핀잔을 받을까? 


선교사들이 보급한 근대 스포츠를 보면서 아랫것들 시키면 되지 뭣하러 저렇게 뛰어 다니는 지 모르겠다고 혀를 찼다던 조선의 양반들이 떠올랐다. 


“뭣하러 밤새 고민해? ChatGPT한테 시키면 되지!”


땀흘리는 일들은 모두 아랫것들에게 시키던 조선은 제국주의의 식민지가되었다. 주체적 사고능력을 거세 당한 인류가 자신도 모르게 어떤 제국의 노예로 전락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막연한 불안감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과연 인류는 인간으로서의 고유성을 지켜낼 수 있을까. 통장에 잔고만 보장된다면 생각하는 능력을 기꺼이 넘겨주고 배부른 돼지로서의 삶에 행복을 찾지는 않을까? 행복의 정의마저도 ChatGPT에게 묻는 것은 아닐까?


미우라 아야코는 소설 ⌜빙점氷點⌟에서 인간에게 삶의 의욕을 포기하게 만드는 특이점 즉, 빙점이 있다고 말한다. 소설 속에서 요코라는 인물은 자신의 유서에서 바로 이 빙점에 도달했다고 고백한다. 이 빙점을 넘어서는 순간 그녀는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제 안에 죄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 저는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을 잃어버렸습니다. 어떤 일을 당해도 저는 결코 마음이 비뚤어지지 않았습니다. 요코라는 이름 그대로 이 세상의 빛처럼 밝게 살려고 한 저는 어머니가 보기에는 화가 날 정도로 배짱 좋은 계집아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요코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힘차게 살아온 요코의 마음에도 빙점氷點이 있었다는 것을. 제 마음은 얼어붙었습니다. 요코의 빙점은 ‘죄인의 자식’이라는 데 있었습니다. 저는 이제 남 앞에서 얼굴을 들 수 없습니다. 아무리 작은 어린아이 앞에서도."


물과 얼음은 그 구성 성분은 동일하지만 액체와 고체라는 상태의 변화로 말미암아 새로운 물성을 나타낸다. 빙점인 0℃를 기점으로 이전과 이후는 완전히 다른 물리적 성질을 갖게 된다. 액체에 적용되던 법칙이 더 이상 고체에 적용되지 않는 것이다. 인간 사회에도 빙점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인간의 멈출 줄 모르는 직진 본능이 결국 우리를 빙점으로 이끌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그 빙점에 도달하는 순간 모든 것이 일순간 굳어져버리게 되는 것은 아닌지.


몇 년 전 한 앵커가 스마트폰의 발전과 그 부작용에 대한 주제의 뉴스를 마무리하며 던진 코멘트가  떠올랐다. 


“우리는 어쩌면 삐삐에서 멈추었어야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까지 써놓고 보니 너무 부정적인 방향으로만 생각이 흐른 것 같다. 그러나 ‘새로운 기술은 언제나 긍정적인 측면과 함께 부정적인 측면을 가져다 주었다. ChatGPT 역시 두 가지 요소가 모두 존재할 것이다. 긍정적인 측면은 잘 활용하고 부정적인 측면은 주의하자’라는 식의 클리셰로 첫 인상을 정리하기가 어려웠다. 지우려 해도 자꾸만 성경의 한 구절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마태복음 8:32)




글 | 박성준
학부에서 공학을 전공하고 이후 신학을 했다.
과학과 신학의 대화 모색에 관한 논문을 썼고 목회 현장에서 이를 위해 애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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