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기도 합니다. 과학에 대해서 신학에 대해서 잘 모르던 시절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셨다’라고 하면 마술사가 갑자기 새로운 뭔가를 만들어 내듯 기적적인 창조를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과학을 공부하며 현상 이면의 질서, 원리, 법칙들에 대해서 알게 되면 창조에 대한 생각이 바뀌기도 합니다. 그중 하나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라고 하며 하나님을 부정하는 경우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기적적인 방식으로만 생각해왔기 때문에 자연 속에 일어나는 인과적인 과정에 의한 창조를 하나님의 창조라고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동안 속았다’라고 하거나 ‘하나님은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다른 경우는 하나님께서 자연적 과정을 사용하셔서 창조하신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연법칙의 창조자이자 자연을 다스리시는 분으로 보는 것입니다. 창조를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이 직접적이고 기적적으로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만 고집한다면 이렇게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창조는 지금도 계속 일어나고 있고, 하나님은 자연법칙을 만드시고 그러한 인과적인 관계 속에서 간접적으로도 창조하시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제빵사가 오븐을 이용해 빵을 만드는 비유’를 통해 이 부분을 설명한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빵집에 있는 맛있는 빵들은 제빵사가 밀가루를 반죽해서 오븐으로 구운 것입니다. 기적적 창조는 밀가루가 바로 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창조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븐에 굽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빵도 제빵사의 작품입니다. 하나님은 자연적인 과정을 통해서도 창조하실 수 있고 지금도 여전히 창조하고 계십니다. 과학자들이 하는 일은 창조 세계인 자연을 탐구하며 그 안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밝혀낸 자연적인 과정들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창조의 과정입니다.

신학을 공부를 통해서도 창조에 대한 생각이 바뀔 수 있습니다. 창세기가 언제 쓰였는지, 창세기의 저자가 고려했던 1차 독자는 누구였는지, 고대 근동 지역에 있던 다른 역사적인 문헌들과 창세기는 어떤 관련이 있는지 등에 대해서 이해한다면 문자적인 읽기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강의 가운데 ‘엄마 배꼽에서 나왔어’라는 비유로 이 부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일곱 살 아이에게 자신이 어떻게 태어 났는지를 설명하려면 그 아이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 눈높이에 맞게 설명해야 합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세기의 1차 독자인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해하는 우주는 납작하고 평평한 우주입니다.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고 생각하는 천동설의 우주입니다. 창세기는 그들의 눈높이에 맞게 하나님의 창조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궁창도 나오고 궁창 위의 물도 나옵니다. 이런 상황을 생각하지 않고 창세기를 현대의 과학 교과서처럼 읽으면 문제가 생깁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엄마가 일곱 살에 설명해주신 배꼽 출생을 주장한다면 얼마나 웃기겠습니까? 창세기의 창조 기사는 창조에 대한 신학적인 설명이지 과학적인 설명이 아닙니다. 성경에 대한 이해와 해석은 과학과 신학이 발전하면서 변할 수 있습니다. 창조를 바라보는 관점도 역사적으로 변해왔습니다. 근대 과학의 성립되고 과학 혁명이 일어나며 자연을 이해하는 폭과 깊이가 넓어졌습니다. 신학에서도 고대 근동학이나 고등 비평 등의 연구를 통해 성경을 이해하는 정도가 깊고 넓어졌습니다. 물론 아직도 모르는 부분이 많고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도 많지만 성경과 자연에 대한 이해가 성숙해져 가면서 창조에 대한 이해도 성숙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창조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기도 합니다. 과학에 대해서 신학에 대해서 잘 모르던 시절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셨다’라고 하면 마술사가 갑자기 새로운 뭔가를 만들어 내듯 기적적인 창조를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과학을 공부하며 현상 이면의 질서, 원리, 법칙들에 대해서 알게 되면 창조에 대한 생각이 바뀌기도 합니다. 그중 하나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라고 하며 하나님을 부정하는 경우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기적적인 방식으로만 생각해왔기 때문에 자연 속에 일어나는 인과적인 과정에 의한 창조를 하나님의 창조라고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동안 속았다’라고 하거나 ‘하나님은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다른 경우는 하나님께서 자연적 과정을 사용하셔서 창조하신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연법칙의 창조자이자 자연을 다스리시는 분으로 보는 것입니다. 창조를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이 직접적이고 기적적으로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만 고집한다면 이렇게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창조는 지금도 계속 일어나고 있고, 하나님은 자연법칙을 만드시고 그러한 인과적인 관계 속에서 간접적으로도 창조하시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제빵사가 오븐을 이용해 빵을 만드는 비유’를 통해 이 부분을 설명한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빵집에 있는 맛있는 빵들은 제빵사가 밀가루를 반죽해서 오븐으로 구운 것입니다. 기적적 창조는 밀가루가 바로 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창조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븐에 굽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빵도 제빵사의 작품입니다. 하나님은 자연적인 과정을 통해서도 창조하실 수 있고 지금도 여전히 창조하고 계십니다. 과학자들이 하는 일은 창조 세계인 자연을 탐구하며 그 안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밝혀낸 자연적인 과정들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창조의 과정입니다.
신학을 공부를 통해서도 창조에 대한 생각이 바뀔 수 있습니다. 창세기가 언제 쓰였는지, 창세기의 저자가 고려했던 1차 독자는 누구였는지, 고대 근동 지역에 있던 다른 역사적인 문헌들과 창세기는 어떤 관련이 있는지 등에 대해서 이해한다면 문자적인 읽기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강의 가운데 ‘엄마 배꼽에서 나왔어’라는 비유로 이 부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일곱 살 아이에게 자신이 어떻게 태어 났는지를 설명하려면 그 아이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 눈높이에 맞게 설명해야 합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세기의 1차 독자인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해하는 우주는 납작하고 평평한 우주입니다.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고 생각하는 천동설의 우주입니다. 창세기는 그들의 눈높이에 맞게 하나님의 창조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궁창도 나오고 궁창 위의 물도 나옵니다. 이런 상황을 생각하지 않고 창세기를 현대의 과학 교과서처럼 읽으면 문제가 생깁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엄마가 일곱 살에 설명해주신 배꼽 출생을 주장한다면 얼마나 웃기겠습니까? 창세기의 창조 기사는 창조에 대한 신학적인 설명이지 과학적인 설명이 아닙니다. 성경에 대한 이해와 해석은 과학과 신학이 발전하면서 변할 수 있습니다. 창조를 바라보는 관점도 역사적으로 변해왔습니다. 근대 과학의 성립되고 과학 혁명이 일어나며 자연을 이해하는 폭과 깊이가 넓어졌습니다. 신학에서도 고대 근동학이나 고등 비평 등의 연구를 통해 성경을 이해하는 정도가 깊고 넓어졌습니다. 물론 아직도 모르는 부분이 많고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도 많지만 성경과 자연에 대한 이해가 성숙해져 가면서 창조에 대한 이해도 성숙해질 필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