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르댕 북클럽 후기] "샤르댕 북클럽 이야기" (양우준)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24-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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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대 북클럽

샤르댕북클럽 이야기


글 ㅣ양우준
숨빛 교회/숨빛 배움터(미국 뉴저지) 목사
샤르댕북클럽


@wal_172619, pixabay


1. 전반적인 최근 샤르댕 북클럽 진행 상황

샤르댕 북클럽에서는 “공공신학으로 가는 길”이라는 책”(최경환 저, 도서출판 100)를 가지고 공공 신학에 대해서 최근에 함께 배우고 대화하는 시간을 가져왔습니다. 이를 위해서 오세조 님이 발제를 맡아 주셨습니다.  PPT로 알기 쉽게 발표를 해주셔서 참석자들이 전반적으로 낯설어 하는 공공신학을 잘 소개받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공공신학을 이론적으로 나누다 보니 이 문제를 실천적으로 나눴으면 바람이 생겼습니다. 이를 위해서 모임에 참석하시던 김재상 님으로부터 공공신학의 구체적 사례를 듣는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김재상 님은 이미 학술지(김재상, 김민석 공저, 신학과 사회, 2022, 36[4])에 공공신학 사례 연구를 기고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5월 모임에 소 논문을 가지고 함께 듣고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2. 함께 나누고 느낀 점 

공공신학책 나눔과 그 사례 발표에서 다룬 내용은 이 후기에 자세히 소개하기는 어려워서, 다만 멤버들이 책과 사례의 발제를 듣고 토론에 참여하면서 질문했고 공감했던 것을 주로 이 지면에 나누려고 합니다. 또 참석자들이 모임 때 언급하신 것을 기록해 두지는 못해서 전반적 대화 내용과 분위기를 제가 기억하는 만큼 소개하고자 합니다.   


2.1 공공신학 관련 책 나눔 

다소 생소한 공공신학 관련 책을 가지고 나누면서 먼저 고민한 내용은 ‘공공신학을 어떻게 전통적으로 알려진 신학의 범주 안에 자리 매김시킬까’였습니다. 발제자의  발제 후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고 갔습니다. 몇 가지 질문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신학이라는 이름을 공공 영역까지 갖다 붙임으로, 모든 것을 신학의 이름으로 포장하고 간섭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머리에서 맴도는 신학이 아닌 실천에 힘써야 하는 것(정행, orthopraxis)은 아닌가? 또 고전적으로 여겨지는 하버마스의 공론장 논의가 현재에도 적실한가? 우리 사회에서 공론장이 다양하게 형성되는 곳은 어디인가? 공론장의 예들은 무엇이 있는가? 누가 공론장의 리더 역할을 할 수 있는가? 교회는 공론장에 어떻게 참여하고 있는가? 공공신학은 예전에 등장한 해방신학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굳이 공공신학이라는 분야가 있을 필요가 있는가? 오늘날 공공신학은 사회가 전반적으로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보다 인류가 당면한 보편적 문제 해결을 위해 신학적 이해를 제공한다면, 해방신학은 경제적 또는 사회적으로 불평등하게 억압받고 있는 이들의 생존 그 자체를 위한 신학적 토대를 제공하는 것이 둘 사이의 차이점인가? 공공신학은 기득권층이 경제문제, 기후문제, 이주민 문제 등의 논의에서 주도권을 쥐도록 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닌가? 공공신학과 해방신학은 각각 작동하는 필드가 정말 다른가? 이러한 질문들에 이런저런 모양으로 대화가 오고 갔습니다. 어떤 명쾌한 답을 나누지는 못했지만, (사회 문제의 해답이 많은 경우 그렇듯이) 문제 제기 그 자체가 대화의 소득이 아니었나 싶었습니다.   


@katerinakucherenko, pixabay


2.2 공공신학 관련 사례 나눔

이러한 사고와 논의를 4월 모임에서 나누고, 5월에 김재상 님의  “공공신학으로 보는 교회의 에너지 전환: 가재울 녹색교회 사례” 발제를 함께 들었습니다. 이 주제는 ‘과학과 신학의 대화’에 속한 북클럽이 다룰 수 있는 좋은 경우였습니다. 이 발제의 주제는 기후 위기라는 공공의 현안에 대해서, 사회 안의 한 공동체 단체인 지역 교회가 어떻게 공공 신학적 정신을 가지고 참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한 가지 좋은 예였습니다. 

(이하 2.2.1과 2.2.2는 발제 내용 중에서 발췌)  


2.2.1 서울시가 2012년부터 에너지 자립 마을 사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2022년 현재 참여하는 마을 수가 250곳이 넘습니다. 서대문구 안에만도 17곳에서 이 일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서대문 녹색마을은 2016년부터 이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이곳에 있는 가재울녹색교회는 이 사업이 시작하기 2년전  2014년 교회를 시작했습니다. 그 시작과 함께 교회는 자신의 가장 중요한 교회 책무로 창조 세계의 보전을 모토로 삼았습니다. 가재울녹색교회에서 목회를 하시는 담임 목사님은 설립 이전부터 생협 운동, 환경운동, 참교육 운동, 지역일꾼 세우기, 책읽기 모임, 마을 카페 운영등 다양한 지역 활동을 이미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교회가 속한 마을에서 재생 가능 에너지 사용, 태양광 설치, 절약, 지혜로운 구매 등을 통한 에너지 전환 사업을 시작할 때 적극 이에 참여했습니다.  


2.2.2. 2019년 현재, 온실가스 배출량의 75%를 차지할 정도가 된 이산화탄소의 발생을 줄이기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화석연료를 대체할 수 있는 대체 에너지를 개발하는 ‘에너지 전환’ 이 필요하고, 이와 함께 참여, 소유, 리더십, 에너지 전환을 통한 이익의 공유 등의 ‘공동체 에너지’ 형성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공동의 관심과 방향 가운데 가재울녹색 교회는 ‘창조세계의 보존’이라는 신학적 가치를 가지고 이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이후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서 마을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신뢰를 토대로 그 지역 사회 안에 다른 이슈가 발생하여 공론장이 열릴 때, 이곳에 참여를 요청받기도 했습니다. 한 예로, 그 지역 학교에 교육 관련의 예민한 문제가 발생하여 학교와의 대화가 필요할 때, 마을 주민이 교회의 목회자를 대표자를 세우기도 했습니다. 가재울녹색교회는 마을의 사회적 자본으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2.2.3 이러한 사례 연구를 들으면서, 북클럽 멤버들은 한 교회가 종교를 통해 사회 안에 또 다른 벽을 만들지 않고, 일반 주민과 함께하는 공론장에 참여하고, 나가서 실질적으로 그 안에서 리더역할을 하게 된 요인들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러 논의가 있었지만, 현재 기억나는 것은 세 가지입니다. 우선 교회의 인도자가 공공의 유익을 위하는 데에 의식이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이 먼저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돌보며, 하나님이 나라를 이루고자 앞장서서 공공의 일을 섬긴다면 교회 공동체가 참여하기가 수월하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이 교회가 공공의 일을 추진할 때, 교회 용어가 아닌, 지역 주민들과 소통 가능한 언어를 사용하였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풍토에서만 사용하는 종교적 언어, 때로는 상투적 언어를 삼가고 일상의 언어로 소통하는 것입니다. 셋째, 에너지 전환 운동을 통해 나오는 이익을 지역 주민들에게 투명하게 공개하고 그 수익 배분과 사용을 분명히 하는 것이었습니다.     



3. 나가며 -  개인적 소감

 우선 저는, 이러한 기후 위기 대처와 같은 공공의 일에 교회가 참여하는 것이 특별하게 여겨지는 상황이 안타깝게 느껴졌습니다. 원래 교회가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이 어려움에 부닥친 누구에게나 좋은 이웃이 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만드신 지구를 돌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데, 이제는 교회가 그러한 일을 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 되었다는 것이 씁쓸했습니다. 이미 사회에서는 경제적 약자와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협동조합, 지역 화폐 운동, 에너지 전환 운동을 하는데, 교회는 이것을 이해하고 따라가는 데도 벅차고 대로는 무관심과 냉대까지 보이는 것 같습니다. 물론 교회 개별 구성원이 사회의 각 영역에서 그러한 하나님 나라 살림을 묵묵히 감당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겠지만, 선한 일에 공동체 단위로서 참여하는 것이 필요하다면, 교회가 먼저 나서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필요하지 않나 싶었습니다. 사회 안에서 같이 사니까요. 하나님의 세상이니까요. 

 둘째로, 무엇인가 교회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형성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성경의 관심은 사람 그리고 피조물, 나아가 세계와 우주인데, 오늘날 교회는 건물에 갇히고 조직 논리에 갇혀 생존과 양적 성장이라는 틀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내 주변과 세계 곳곳에서 위기에 처한 이들 그리고 기후의 문제와 같은 공공의 문제에 대해 사회에 각성을 자극하는 모임이 교회였으면 좋겠는데, 교회는 경계 짓기, 두려움 조성, 흩어짐 방지에만 에너지를 쏟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폄하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두려움에 사로잡혀 자기 안으로 움츠러들고 공공과 세계를 생각하지 않고 스스로 창살 안에 갇힌 교회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힌 죄수의 신분임에도 오히려 감옥 밖의 이들을 더 걱정하고,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우주적 통치를 고대하던 그 광활한 의식이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최근에 새롭게 시작한 교회와 배움터에서 공공의 문제에, 그것이 기후 문제이든 또는 다른 문제이든, 관심과 에너지를 모아야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샤르댕북 클럽을 통해서 과학과 신학에 대해서 조금 더 나은 의식 전환을 하게 되어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모임을 통해 생각을 자극해주신 북클럽 회원분들과 부족한 글을 읽어 주신 모든 분에게 감사를 드리며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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