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복음'을 삶의 진리로 여기며 살아간다. 이전에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의 불공평함 때문이었다. 선한 사람도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니, 당시의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나에게 믿음이 생겼던 계기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서였을까? 아니다. 나의 회심은 예수님이 대속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일이 나를 위해서라고 느껴졌을 때다. 그 사이의 인과관계는 6개월간 한 목사님의 설교를 꾸준히 들었던 일뿐이다.
<헤아려본 믿음>의 레이첼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 의심한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의 선하심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그분의 선하심을 측정하는 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는 것으로 그 초점이 바뀐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판단하는 주체-의역하자면 삶의 주인-가 '나'에서 '하나님'으로 이동한 것이다. 나도 회심 이후 비슷한 경험이 있다. 바로 '십자가의 도'를 가장 뛰어나고 앞선 진리로 여겨, 말씀을 기준 삼아 일이나 현상을 판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선과 악,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주체는 오직 하나님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셨고, 주인을 바로잡자 비로소 나는 자유해질 수 있었다. 이번에도 이 깨달음은 빌립보서 3장 바울의 고백을 묵상하며 생긴 '세상의 지식을 많이 알아가는 것이 오히려 저주는 아닐까?'라는 내면의 작은 질문이 아담의 선악과(the fruit of the tree of knowledge) 사건으로 이어지며 역시 별다른 인과관계없이 얻어졌다.
어떤 일의 정확한 인과관계를 알기 위해서는 관련된 모든 정보가 필요하지만, 우리는 수렴해갈 뿐 모두 알 방도는 없다. 각자의 수많은 변수들로 채워진 경험을 토대로 제한된 정보 안에서 판단할 뿐이다. 이는, '우리의 삶이 세상에 질문을 유발할 만큼 영감을 주지 않는 한, 기독교를 변호하려는 우리의 답변은 아무리 최선일지라도 언제나 쓸모없이 울리는 꽹과리 소리와 같다'라고 한 레이첼의 생각과 그 맥을 함께 한다.
하나님은 창조하신 '우리'를 아들을 내어주는 방법으로 책임을 지셨다. 오직 우리를 향한 초월적 사랑만 있을 뿐이다. 흔히 우리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사실을 들어 우리가 예언자들의 시대에 살았다면 그러지 않았을 거라고, 당시 바리새인은 지금의 종교인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중심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했을 것인지 보다 우리가 선과 악을 기준으로 판단해 나갈 때 끊임없이 누군가를 정죄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 그리고 이것만으로는 의미 있는 변화를 이끌어낼 수 없다는 사실 아닐까?
우리는 아는 것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아는 만큼 살아낼 힘이 없다. 그리고 아는 대로 살아내지 못하는 것은 그 영역의 주인이 아직 나이기 때문에 그렇다. 각자의 분야에서 모든 경우의 수를 헤아려 대응하고자 하지만, 설령 그렇게 하더라도 본질이 해결되지 않으면 정신은 버텨낼 재간이 없다. 기껏 한다 해도 일곱 번 용서하는 정도다. 불이 뜨겁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우리는 만지지 않듯이, 길가 밭이든 돌짝밭이든 가시떨기든 복음의 씨앗이 심겼을 때 성령의 열매가 맺고 우리는 비로소 옥토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다.
글 | 백원기
이혜련의 남편이자 성현, 가은, 시은, 예은이의 아빠이다.
나는 '복음'을 삶의 진리로 여기며 살아간다. 이전에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의 불공평함 때문이었다. 선한 사람도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니, 당시의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나에게 믿음이 생겼던 계기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서였을까? 아니다. 나의 회심은 예수님이 대속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일이 나를 위해서라고 느껴졌을 때다. 그 사이의 인과관계는 6개월간 한 목사님의 설교를 꾸준히 들었던 일뿐이다.
<헤아려본 믿음>의 레이첼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 의심한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의 선하심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그분의 선하심을 측정하는 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는 것으로 그 초점이 바뀐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판단하는 주체-의역하자면 삶의 주인-가 '나'에서 '하나님'으로 이동한 것이다. 나도 회심 이후 비슷한 경험이 있다. 바로 '십자가의 도'를 가장 뛰어나고 앞선 진리로 여겨, 말씀을 기준 삼아 일이나 현상을 판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선과 악,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주체는 오직 하나님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셨고, 주인을 바로잡자 비로소 나는 자유해질 수 있었다. 이번에도 이 깨달음은 빌립보서 3장 바울의 고백을 묵상하며 생긴 '세상의 지식을 많이 알아가는 것이 오히려 저주는 아닐까?'라는 내면의 작은 질문이 아담의 선악과(the fruit of the tree of knowledge) 사건으로 이어지며 역시 별다른 인과관계없이 얻어졌다.
어떤 일의 정확한 인과관계를 알기 위해서는 관련된 모든 정보가 필요하지만, 우리는 수렴해갈 뿐 모두 알 방도는 없다. 각자의 수많은 변수들로 채워진 경험을 토대로 제한된 정보 안에서 판단할 뿐이다. 이는, '우리의 삶이 세상에 질문을 유발할 만큼 영감을 주지 않는 한, 기독교를 변호하려는 우리의 답변은 아무리 최선일지라도 언제나 쓸모없이 울리는 꽹과리 소리와 같다'라고 한 레이첼의 생각과 그 맥을 함께 한다.
하나님은 창조하신 '우리'를 아들을 내어주는 방법으로 책임을 지셨다. 오직 우리를 향한 초월적 사랑만 있을 뿐이다. 흔히 우리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사실을 들어 우리가 예언자들의 시대에 살았다면 그러지 않았을 거라고, 당시 바리새인은 지금의 종교인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중심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했을 것인지 보다 우리가 선과 악을 기준으로 판단해 나갈 때 끊임없이 누군가를 정죄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 그리고 이것만으로는 의미 있는 변화를 이끌어낼 수 없다는 사실 아닐까?
우리는 아는 것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아는 만큼 살아낼 힘이 없다. 그리고 아는 대로 살아내지 못하는 것은 그 영역의 주인이 아직 나이기 때문에 그렇다. 각자의 분야에서 모든 경우의 수를 헤아려 대응하고자 하지만, 설령 그렇게 하더라도 본질이 해결되지 않으면 정신은 버텨낼 재간이 없다. 기껏 한다 해도 일곱 번 용서하는 정도다. 불이 뜨겁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우리는 만지지 않듯이, 길가 밭이든 돌짝밭이든 가시떨기든 복음의 씨앗이 심겼을 때 성령의 열매가 맺고 우리는 비로소 옥토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다.
글 | 백원기
이혜련의 남편이자 성현, 가은, 시은, 예은이의 아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