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아와 하나님> 제 4부 "치유"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22-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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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아와 하나님> 제 4부 "치유"

김란희 (성서와 여성 북클럽 지기)


오늘 “성서와 여성‘ 모임에서는 마지막 4장 “치유”를 끝으로 로즈마리 래드퍼드 류터의 <가이아와 하느님> 공부를 마쳤습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생태학과 여성학의 두 주제들을 깊게 결합하여 여성과 자연에 대한 남성 지배가 문화 이념과 사회 구조 속에서 어떻게 상호 연결되는지를 잘 설명해주었습니다. 현재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와 그 해결을 서구 고전 문화 전통들인 그리스 신화와 헤브루 신화 전반을 두루 살펴 그들이 어떤 문화 안에 현재의 사유체계를 형성하게 되었는지와 그것이 인류 전반에 미친 영향이 무엇인가를 살핀 시사성이 매우 큰 저작이었습니다. 종교의 형성과정과 현시태까지 공시와 통시를 넘나들며 그 광대한 이야기들을 한 권의 책에 담아 주의깊게 이해해야할 정보가 아주 많은 책으로 한 번의 독서로 다 이해하기에는 다소 버거울 수 있는 책입니다. 다시 한 번 꼼꼼하게 살펴보시면 좋은 공부가 될 것 같습니다. 다음은 마지막 “치유” 장에서 요약 발췌한 내용입니다. 우리도 살고 지구도 살릴 수 있는 공간으로 제시되는, “축제와 저항의 공동체”는 매우 인상적으로 다가옵니다. 



“그리스도라는 용어는 메시아, 즉 유대교의 묵시 사상 안에서 하느님의 성도를 복되게 하며, 악의 세력을 물리치고 우주를 새롭게 하기 위한 세계 역사의 마지막에 나타나는 인물로 해석된다. 유대 묵시 사상의 메시아나 기독교 공관복음서의 그리스도는 우주 발생적 로고스와 동일시되는지 않는다. 그러나 바울, 요한복음서, 그리고 헤브루서 안에서 발견되는 좀더 사색적인 기독교 사상에 의하면 구원자인 그리스도와 우주 발생적 로고스는 ‘만물’의 시작과 끝의 일치된 비전 안에서 하나로 결합된다. 



골로새서 1장15-20절을 보면, “그리스도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이시며 만물에 앞서 태어나신 분이십니다. 그것은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 곧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왕권과 주권과 권세와 세력의 여러 천신들과 같은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모두 그분을 통해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만물은 그분을 통해서 그리고 그분을 위해서 창조되었습니다. 만물은 그분을 통해서 그리고 그분을 위해서 창조되었습니다. 그분은 만물보다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속합니다. 그리스도는 또한 당신의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분은 모든 것의 시작이시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최초의 분이시며 만물의 으뜸이 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완전한 본질을 그리스도에게 기꺼이 주시고 그리스도를 내세워 하늘과 땅의 만물을 당신과 화해시켜 주셨습니다. 곧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의 피로써 평화를 이룩하셨습니다”에서 알 수 있다. 



이는 우주론적 로고스를 강조한 것이다. 이런 신적 존재는 하느님의 계시와 우주를 창조하고 유지하는 하느님의 내재적 현존과 우주를 분열시킨 적대감을 치유하고 우주와 하느님을 화해시키면서 세상의 마지막에 다시 나타나시는 신적 힘으로 이해된다. 예수 안에 나타난 신적 인간은 이런 로고스·그리스도와 동일시된다. 십자가의 피를 통해 그분의 구원 행위는 ‘만물’의 시작과 끝에 오시는 한 동일한 신적 존재의 전형적인 명시로 이해된다. 죽은 자 가운데서 최초로 살아나셨으며, 교회인 몸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는 태초에 창조된 우주로부터 분리된 것이 아니라, 이 우주가 최초로 창조되고 이제 회복되어 하느님과 화해하는 원리인 새로운 창조의 힘으로 이해된다. 교회 자체가 우주적으로 이해된다. 교회는 단지 이런 분을 믿는 인간의 집단만이 아니라, 완전히 새롭게 된 우주의 전형적인 공동체라는 것이다.



생태 여성 신학과 영성은 생태학적 복지를 위해 필요한 ‘여신’-초월적이기보다 내재적이며, 남성적이기보다는 여성적이고, 지배적이기보다는 관계적이고 상호 작용적이며, 획일적이고 단일 중심적이기보다는 다원적이고 다(多) 중심적인-이 셈족의 유일신론적 전통 안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느님에 정반대라고 가정하는 경향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전통적인 대립에 대한 해결책을 필요로 하는데, 이것은 단순히 서로를 전도시키는 것보다는 더욱 풍부한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하느님은 시계 재조자 같이 세계를 그 안에 있는 기계 장치에 의해 움직이도록 정해 놓고, 내재적인 생명의 힘으로서 세계 안에 결코 참여하지 않으면서, 세계 밖에서 이 세계를 구성하는 분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물리학자들이 물질의 궁극적인 ‘기초 요소들’이나 가장 작은 ‘단순한 단위들’을 탐구하면서 물질을 계속 조사했을 때, 그들은 점점 더 작은 단위들을 발견하게 되면서 이 가설은 부인되었다. 



생태학적 영성은 자아의 무상, 만물의 살아있는 상호 의존, 그리고 공동체 안에 있는 개인의 가치에 기초해야만 한다. 많은 생태학적 영성은 ‘자기(ego)를 버려야’ 한다고 강조해 왔지만, 이것의 문제점은 개인의 가치, 특별히 여성과 같이 개별화된 인격을 거의 인정받지 못했던 자들의 가치를 감소시켰다는 데 있다. 우리는 다른 의미에서 ‘자기를 해방’시켜야 한다. 다른 모든 존재들의 개인적 중심과의 관계 안에서 우리 개인의 존재 중심을 보전해야 하며 동시에 이런 개인적 자아의 무상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자아의 가치와 무상을 받아들일 때, 다른 모든 유기체와의 혈족관계에 대한 새로운 의식으로 깨어날 수 있다고 한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동물과 식물도 한 기간 동안 존재하는 유기적 생명의 살아 있는 중심들이다. 우리 각자의 뿌리는 시들고, 우리의 삶을 유지시키는 유기적 구조가 작용하지 않아 우리는 죽는다. 생명의 중심을 절단한다는 것은 우리의 몸이 유기적 물질로 분해되어 다른 실체들과 같이 분해와 재구성의 순환 속에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농업혁명 이후 자신의 식량 기반을 성장시켜 자신들의 삶을 극대화시킬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어떤 사람들은 또한 휴식과 소비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들의 삶을 극대화하는 법을 배웠다. 인간 공동체 자체는 통제하는 ‘주체’와 착취된 ‘대상’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그렇다고 이전의 모든 것이 아름다웠던 것도 아니다. 그 당시 역사는 이전에 없었던 완전히 새로운 악의 능력에 이르지 못했다. 오히려 자연 안에서 한 가능성, 즉 다른 것에 대하여 어떤 것을 극대화하는 것이 새로운 방법으로 사용되었고, 이것은 이익을 얻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바로잡는 한계를 피할 수 있는 방법으로 조직되어 착취의 대가가 착취된 자에게 주어지게 된 것이다. 



착취체제가 극대점에 이를 때, 비로소 ‘정상’에 있는 사람들이 누리는 삶의 질이 손상되기 시작하며, 따라서 카드로 지은 기초 없는 전체가 넘어지려고 한다는 사실을 그들 스스로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들의 첫 번째  본능은 줄어드는 자원 전체를 가지고 자신들의 안락한 삶의 양식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동시에, 자신들이 지배하는 자들의 착취를 가속화시킴으로써 이런 죽음을 피하는 것이다.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해지는 반면에 부유한 자는 계속 부를 유지하려고 함으로서 환경 파괴는 증가한다. 결국 전체 시스템이 붕괴된다는 것이다. ‘잃어버린 문명’이 소멸될 때와 같이, 더욱 대규모적으로는 ‘로마의 몰락’에서와 같이, 전체 시스템의 이런 붕괴는 이전에도 발생했다. 오늘날 그 차이는 착취 체제가 지구적이며, 따라서 파괴의 가능성도 지구적이라는 것이다. 그 붕괴로부터 우리가 물러날 공간은 없다. 따라서 인간의 종을 멸종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구적 생명 시스템의 대부분을 파괴시킬 수 있는 우리 종의 암적인 급증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명은 지배와 그 지배를 정당화시킨 허위의 문화를 창조했을 뿐 아니라 허위를 폭로하기 위한 비판적 문화와 다른 존재에 대한 사랑을 일깨워 주었던 영성을 창조하여, 선한 공동체를 만드는 자기 한계와 다른 존재의 삶에 대한 존경 사이의 균형을 문화적으로 재구성했다. 우리는 기독교 전통 안에서(다른 사람은 그들 자신의 전통 안에서) 지배와 허위의 문화, 그리고 비판과 사랑의 문화를 다 같이 물려받는다. 우리는 첫 번째 문화의 힘을 폭로하고 저지하기 위하여 두 번째 문화를 구성하고 발전시켜야 한다.



더 좋은 사회를 향한 비전은 ‘공평’으로 시작되어야 한다. 이것은 남성과 여성 사이의 공평, 지역적으로 인간 집단들 사이의 공평, 세계적으로 인간 공동체들 사이의 공평, 생명 공동체의 한 부분을 이루는 인간과 다른 모든 구성원들과의 공평, 궁극적으로 살아 있는 것들 사이의 공평, 지금 살아 있는 것들과 앞으로 올 것들 사이의 공평을 의미한다.



필요한 것은 여성과 남성의 상호 관계와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여성과 남성 모두의 이중적 변형이다. 여성은 남성이 전통적으로 여성을 희생시켜 획득하는 개별화를 어느 정도 확실히 확보해야 한다. 이런 개별화는 다른 여성이나 종속된 남성의 착취적 지배에 기초해서는 안 되지만, 생명의 근본적인 공동체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하다. 타인과 자기 자신에 대하여 한 인격으로 존재하기 위해, 여성과 남서의 삶의 양식 사이의 분열보다는 상호간의 화해가 필요하다.



그러나 여성보다는 남성의 삶에 더 큰 변화가 요구된다. 남성은 자신의 자기중심적 힘을 타인에게, 특히 자신들이 관계하는 여성에게 확장함으로써 시작하는 자율적 개인주의의 환상을 극복해야만 한다. 남성은 자신들이 지금까지 거의 하지 못했던 것, 심지어 농업 이전의 사회에서도 못했던 음식을 먹이고, 옷을 입히고, 빨래와 청소를 하는 등 일상의 육아와 가사 업무를 정기적으로 해야 한다. 남성이 일상적인 삶의 문화에 완전히 통합될 때에만, 남성과 여성은 함께 더 큰 경제적.사회적.정치적 삶의 제도를 다시 만드는 일을 시작할 수 있다. 남성과 여성은 모두 이런 더 큰 제도를 땅에 있는 그들의 뿌리와 연결시키며, 그리고 이런 제도를 매일 그리고 세대에 걸쳐 지구의 양육과 연결시키는 새로운 문화적 의식과 조직적 구조를 계획하는 일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미국과 이스라엘의 비군사화를 포함하여 세계적인 참된 비군사화가 생태학적으로 진정한 삶을 지속할 수 있는 지구 경제에 필수적이다. 군수 산업의 전환에 대한 실제적인 저항은 기술이나 혹은 경제적인 ‘의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부, 기업 그리고 직업 군인으로 구성된 집단 엘리트들의 권력욕에 있다. ‘인간과 지구의 실제적인 적’은 바로 그들의 권력 체제이다. 이런 파괴적인 권력 체제를 해체시키는 것은 실제적인 ‘전환’, 마음과 의식의 변화를 의미하는 ‘회개’를 필요로 한다. 의식의 변화는 참된 ‘안전’이란 지배적 힘과 전혀 상처받지 않는 불가능한 완전성을 추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약점, 한계 그리고 다른 사람과 지구와의 상호 의존을 받아들이는 데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런 투쟁을 지속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축제와 저항의 공동체가 구성되어야 한다. ‘기초 공동체’란 우리가 이와 더불어 살고 노동하며 기도하는 직접적인 지역 단체를 의미한다. 이런 모든 기능들이 한 기초 공동체 안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 사이에서 반드시 조화를 이루지는 않을 것이다. 대부분은 다양한 단체와 조직 안에서 서로 다른 형태로 협력하게 될 것이다. 이런 지역 공동체들이 갖는 세 가지 연관된 일의 형태들이 있다. 새로운 지구적 생명 의식을 양육하고 상징하는 개인적 치료 요법, 영성, 그리고 집단의식을 형성하고,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는 지역 기관, 가정, 학교, 교회 등 지역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사업을 생태학적 삶을 안내하는 단체로 활용하는 것이고, 현재의 죽음의 체제를 유지시키는 권력 구조를 변화시키는 노력 안에서 지역적, 국가적, 그리고 세계적으로 확대할 수 있는 조직망을 구성하는 것이다.



성서와 여성 4월 모임
4월 26일 화요일 오후 8시 줌
도로테 죌레의 <사랑과 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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