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우리 <성서와 여성>은 4월 모임을 갖고 함께 공부했습니다. 벌써 팥배나무에는 하얗게 꽃이 눈처럼 피고 있고, 길을 걷다 진한 향기에 깜짝 놀라게 되는 수수꽃다리도 한창입니다. 꿀벌 보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지구, 이 아름다움이 언제까지일지 황무함이 현실로 다가오는 때입니다.
도로테 죌레의 <사랑과 노동>은 ‘창조’에 대해, 우리 시대가 안고 있는 문제에 어쩌면 해결안이 될 수도 있는, 조금은 낯설지만 충분히 동의되는 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가급적 많은 이들과 나누고 싶은 귀한 ‘창조’에 관한 해석입니다.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 그가 해석하는 창조신학의 대명제입니다.
“피조 세계의 선함에 대한 찬미는 우리 자신이 살아 있는 표현이고,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니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것은 죽음이고, 이런 죽음 앞에서 삶을 믿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죽음 앞에서 삶을 선택하는 것은 사랑과 노동을 통해 창조의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다. 창조와 그 안에서 우리의 역할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창조와 노동 그리고 사랑이라는 세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 세 개념이 서로 어떻게 연결된다는 것인지도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프로이트는 노동하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건강한 사람이라고 했다. 노동하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창조자와 일치한다. 사랑하고 노동하는 가운데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창조의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고, 하느님과 결합된다. 그런데 계급구조와 잘못된 분업, 성차별적 역할 규정과 같은 우리의 불의한 체계가 창조를 파괴하고 남성중심적인 노동과 성에 의해 지속적인 창조의 가능성을 왜곡시켜 그 결합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저자는 종교와 삶의 관계를 몇 단계로 살핀다. 첫 번째 단계는 저자의 선조들이 누린 단계이다. 선조들의 종교적 감수성은 교회가 사회생활과 정신생활의 중심에 있었던 소도시나 마을의 문화적 풍토 속에서 성장했다. 신화와 전승, 가치와 윤리적 규범은 의문의 여지없이 확고한 전통에 그 근거와 중심을 두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 도시화의 과정에 있던 사회에서는 그 관계가 깨졌다. 그들은 기도하고 교회에 가는 것을 중단했고 종교가 삶에 미쳤던 영향력은 상실되었고 오히려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 비판을 통해 종교적 사회화가 어떻게 인격의 발달을 규정했는지, 그리고 자신들에게 덧씌워진 종교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신이라는 곳’에서 치유될 수 있는지 고민하면서 자신의 종교적 유산을 버리고 세속 도시의 탈기독교적 또는 탈유대교적 주민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행복해진 것은 아니다. 이제 세 번째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는 거룩한 근거, 온전한 근원을 추구한다. 사람들은 의식적으로 종교적 결단을 한다. 이 결단은 선택적인 것이 되었다. 철저히 비판적으로 대결하는 두 번째 단계를 거친 후 결단을 내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교회 및 공동체들과 갈등을 빚게 된다. 이제 어떤 종교적 권위도 자신들이 갖고 있는 믿음의 방식을 규정하도록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자는 두 번째 단계에서 종교적 발전이 시작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유럽의 신학 세대가 그랬듯이 저자도 그리스도에 집중했다고 한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을 이해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겪은 세대들은 아버지, 창조자, 통치자, 보존자로서의 하느님에 대한 단순한 신뢰는 불가능해졌고, 사랑의 힘이 강조된 그리스도에게만 집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온전한 땅의 영성을 향한 신앙의 과정에서 저자는 개인적 구원만이 아니라 창조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고 거기에 우리가 어떻게 참여할 수 있는지 알고 싶었다고 한다. 그것을 깨닫게 해 준 이가 예수 그리스도였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절망에서 희망으로 인도했으며, 그 희망은 우리의 삶에서 우리가 더욱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을 배울 수 있다는 그 희망이었다고 한다.
저자는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면 어디로 갈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생명과 지상의 모든 생명의 근원에 대한 포괄적인 인식이 필요하다고 한다.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확인하는 그 과정에서 다양한 희망의 원천도 찾을 수 있으며, 창조의 선함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다른 사람들과 이 땅에, 지구에 참여하는 길이라고 말한다.
저자가 말하는 성경의 신앙은 창조신의 활동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 역사적 해방 사건에 근원이 있다. 이집트에서의 이주, 이집트 노예 생활에서의 해방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근본적이고 원초적인 경험이라는 것이다. 출애굽은 근본적인 사건은 역사적으로 열려있는 사건이며, 동일한 전통 안에서 살아가는 후대 사람들에게도 근본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저자는 출애굽 사건을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전통의 근간으로 본다. 그것을 성찰한다는 것은 우주의 창조자로서 하느님이 시작했던 존재론적 과업에 앞서 그 사건을 통해 표현된 역사적 해방의 과업을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역사적 과업과 존재론적 과업은 인간의 자유를 목표로 하며, 또한 이 두 과제는 함께 행동하는 인간들을 필요로 하는 것으로 이것이 본서의 주제 중 하나가 되기도 한다.
하느님이 선택받은 자신의 백성을 위해 구체적인 역사적 순간에, 구체적인 장소와 특별한 상황에서 해방의 능력을 가지고 활동하셨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신앙에서는 하느님과 인간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인이 된다. 저자는 창조 이야기를 인간 현존의 근원을 묻는 존재론적 언어로 출애굽 사건을 해석한 것으로 본다. 세계 안에서 인간 현존의 의미가 문제가 될 때 인간은 자유를 위해 창조되었다는 사실에서 출발해서 존재론적 과제를 다루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존재론적 과제는 인간의 역사적 과제가 파악될 때 비로소 이해가 된다고 한다. 그래서 창세기는 탈출기를 해석한 책이라는 것이다.
출애굽 사건은 유대인들의 종교 의례를 통해 계속해서 기념했던 제의적 기억을 통해 줄기차게 살아있었다. “너희는 너희가 이집트 땅에서 종이었던 것을 기억하라”는 이스라엘의 자유에 대한 역사적 의식을 확보해 주었고, 안식일 제도는 세상을 창조한 후 일곱째 날 하느님께서 안식을 취하셨던 것과 관련하여 이스라엘이 해방된 것과 연결시키고 있다. “너는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를 하였고, 주 너의 하느님이 강한 곳과 뻗은 팔로 너를 그곳에서 이끌어 내었음을 기억하라. 그 때문에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는 것이다.”(신 5:15)
출애굽 전통은 인간이 자유롭게 창조되었으며, 자유야말로 인간의 역사적 과제라는 사실을 온 인류에 알려주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 전통의 계승이 억눌린 자들의 자유를 원하는 하느님에 대해 확고하게 말할 수 있는 ‘역사적 과업’이며, 해방하시는 하느님이 곧 창조자임을 증언하는 ‘존재론적 과업’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창조를 믿을 수 있기 위해 해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억눌린 사람들은 억압자들에 대항하여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하느님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해방 전통과 무관한 창조질서 그 자체는 해방의 힘을 줄 수 없기 때문에 노예와 억압자를 화해시킬 수 없다고 한다.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신학은 창조에 입각해서만 논증하는 신학이었기에 불충분했고, 이데올로기적이라는 사실만을 확인시켜 주었다고 한다. 그런 신학은 역사의 죄악을 밝히는데 소홀했고 삶을 고양시킬 수 없다고 한다. 불의가 지배하는 현실에서 해방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살아가게 만들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창조자 하느님을 빙자해서 성차별과 인종차별 같은 불의한 질서와 지배 구조를 정당화해 온 반복된 역사가 있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성경은 종살이하던 집에서 구원하신 해방자 하느님이 세계 전체의 창조자이시기 때문이다. 창조에서 하느님의 존재론적 과업을 배제하거나 분리하지 않고 통합할 때 해방신학의 기초가 강화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억눌린 사람들은 더욱 위대한 하느님을 기다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 인식론적 이론적 이점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창조만으로는 그 목표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역사적 과업뿐 아니라 존재론적 과업도 인간의 현존을 위한 자유를 목표로 하고 있으며, 인간의 동역을 필요로 한다. 만인의 해방을 지향하는 창조의 존재론적 구상에 참여하는 일은 출애굽을 수행하는 가운데서만 달성된다고 한다. 모든 생명의 원천에서 나오는 해방의 힘을 단 한 번이라도 경험한 인간 집단과 민족들은 하느님을 독특한 방식으로 찬양하게 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미국의 극우파에 의해 신학은 해방 전통에 근거를 두지 않는 창조신학으로 위험한 이데올로기가 되었으며, 희화화했다고 비판한다. 미국의 ‘창조주의자들’은 성경주의자들로, 그들은 ‘순수한’ 창조 신앙을 대변하며 현대의 자연과학적인 학교교육을 반종교적이라고 배격하는데, 그것은 정신적 몽매로 인한 문자주의적 신앙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신앙은 회상과 희망이 결여된 즉물적이고 냉소적인 것이라고 한다. “너희는 이집트에서 종노릇한 일을 잊지 말라”는 말씀을 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양태는 결과적으로 반유대주의를 드러낼 뿐이며 해방 사건에 대한 기억이 없으니 희망도 없다는 것이다. 이런 신학을 옹호하는 자들에게 세상은 해방에 대한 갈망조차 사라진 이집트의 억압적인 체제일 뿐이다. 해방의 진리를 창조 신앙의 존재론적 구상 속에서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런 신학은 인간의 삶과 사상을 통제하고 자율적 능력을 약화시키는 시도와 결합될 수밖에 없다고 진단한다. 미국 내 ‘도덕적 다수파’의 통속적 신학도 어떻게든 해방에 대한 성경적 동기를 회피하려는 국가주의적이고 종교적인 이데올로기라는 것이다.
창세기 1장의 창조 보도는 바빌론의 문화와 종교에 반한다. 이스라엘은 우주적 정치적 세력들을 신화화하는 바빌론의 종교적 경향에 맞서 창조와 자연, 그리고 그 안에서 인간의 역할에 대한 그 나름의 이해를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수메르 바빌론 창조 신화에 따르면 태초에 무질서한 혼돈이 지배했으며, 많은 신들이 세력 다툼을 벌였다. 가장 강한 신이 다른 신들을 정복하고 승리를 거두어 왕이 되고 패배한 신들은 독립성을 잃고, 그 왕궁의 신하가 되어야 한다. 그 하위의 신들이 자신들의 군주들이 요구하는 바를 실행하게 하기 위해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이다. 인간은 그들의 자유를 위한 노예를 만들어졌던 것이다. 바빌론 창조신화는 이렇듯 사회적 불평등을 위한 각본이었다. 그 문화에서 천문학은 지배 엘리트의 소유물이었고, 점성술은 대중의 종교적 욕구를 충족시켰다. 왕실 가족들은 각자 자신의 별이 있었고, 백성들은 그 별을 숭배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창세기 1장에 따르면 그 별은 더 위대한 신의 창조물이며, 그분은 땅을 밝히고 낮과 밤을 구분하기 위해 별들을 하늘에 등불로 걸어놓으신 분이시다. 하느님은 땅위에 사는 백성들을 위해 그 별을 창조하셨다. 위아래가 완전히 전복되는 내용이다. 창세기 1장의 사제계 문서(1-2, 4a)의 창조 보도는 하느님이 세상과 동일시될 수 없음을 증언하고 있다. 그리스도교는 하느님과 세상을 구분하고 인간 사이에는 위계질서가 없다는 이스라엘의 창조관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하느님과 세계, 인간과 자연을 구분하고 분리한 이 지점에서 그리스도교 전통에 대한 검토와 질문을 해봐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 질문은 ‘창조 신앙과 창조 신학의 어떤 요소들이 해방의 성격을 지니며 도 어떤 요소들이 억압적인 성격을 지니는가?’이다.
어느 인디언 추장의 말처럼 하느님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실 때 당신의 손을 만물 위에 얹어놓고 만물이 그의 정신으로 충만케 하셨다는 것을, 그 위대한 신비를 우리는 믿는다고 저자는 고백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을 신적이고 거룩한 것으로 여기고 그에 합당한 경외심을 가지고 대하라는 분부를 내리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구 신학은 하느님의 절대적 초월을 부각시키기 위해 창조자와 피조 세계의 분리를 강조했다. 그 분리의 단서는 창세기와 오경 전체에 존재한다고 본다. 오경에 전승된 설화들은 다른 자연신들에 대한 야훼의 우월성을 입증하기 위해 쓰였고, 구약 성경의 다른 모든 부분에서는 세계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이 매우 분명하게 나타나는 데 반해 창조 설화에서는 뒤로 밀려나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중에서도 정통주의 신학은 이러한 반범신론적 경향을 더욱 강화했으며, 결국 하느님과 세상을 완전히 분리시켰고, 그리스도교 안에서 범신론은 이단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모든 생명의 유일한 원천으로서 하느님은 무로부터의 창조자와 동일시되었고, 타자성은 신적 존재의 즉자적 특징이자 대자적 특징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독립성은 신적 존재의 고유한 특징으로 이해되었고, 관계없음이 하느님의 위대함과 영광스러움의 표징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하느님은 비가시적이고 불가해한 창조자가 되었고, 그 분과 우리 사이는 어떤 상호작용도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이 같은 절대적 초월은 ‘관계없음’과 동일한 의미를 갖기에, 고전적인 주류 신학에서 관계없음의 반대인 관계를 갖는다는 것은 약점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절대적 자유를 누리는 초월적 하느님상은 독립적인 왕, 전사, 영웅의 전형과 가부장적 세계관이 투사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흑인 시인 제임스 웰던 존슨은 하느님이 고독해서 세상을 창조했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하느님은 결핍된 존재로서 당신의 고독과 자기 밖에 있는 무엇인가에 대한 갈구로 창조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의 이런 관점은 지배적인 신학 정통과 구별된다. 창세기 1장의 사제계 문서에 따르면 하느님의 활동은 하느님 말씀의 결과이다. 그러나 존슨의 관점은 다르다. 하느님은 자신의 손과 발을 사용하여 만물을 ‘육체노동’을 통해 창조하셨다. 존슨이 쓴 시 작품에서는 야훼계 문서와 사제계 문서의 창조 보도의 다양한 요소가 결합되어 있다. 권위적인 힘과 독립성, 절대 자유를 강조하는 신학과 대조적으로 그의 시는 상대성과 상호성과 모성의 신학으로 가득 차 있다.
하느님은 누군가를 필요로 했고, 그래서 관계를 맺는 능력은 하느님의 본질이고, 사랑의 대상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피조 세계를 관계성 없는 고립의 체계로 파악하는 사람은 피조 세계로부터 그 중심적 요소인 사랑을 박탈한다고 한다. 창조자와 창조, 피조 세계 등의 개념에서 우리가 어떤 의미를 발견하든 그것은 사랑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서구 신학이 어쩌자고 ‘무로부터의 창조’에 대한 가르침은 발전시켰으면서 ‘사랑으로부터의 창조’는 생각하지 못했느냐고 탄식한다. 하느님이 사랑에서부터 세상을 창조하지 않았다면 창조에 대한 모든 개념은 무의미하고 공허해진다.
부모와의 관계에서도 태어나기 전부터 부모에게 사랑받는 존재로 기다려졌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세상에 대한 근원적인 신뢰를 갖는다고 한다. 그러나 부모의 사랑에 의한 기다림으로 세상에 태어났다는 믿음이 없는 사람이 갖는 세상에 대한 신뢰는 찾아보기 어렵다고 한다. 우리가 갖는 인간다운 자긍심과 인간다운 품위는 자신이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창조신화에서의 하느님은 우리를 기다리고 우리를 필요로 하고 있다. 지배적 신학과는 반대로 신비주의 신학의 근저에도 하느님과 영혼이 서로 의존하는 깊은 경지가 흐르고 있다고 한다. 하느님이 ‘나를’ 창조하셨다는 믿음은 내 생애의 시간을 넘어 심원한 시간에 하느님이 나를 원하셨다고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절대적 타자성에 대한 신학적 전제에서 비롯되는 두 번째 결과는 땅과 우리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현대 자연과학이 발전시킨 현실개념은 하느님과 세계는 두 개의 분리된 실재로 만들었다. 자연은 그 모든 거룩한 성격을 상실했으며, 세속적 실재로서 자연은 자기 안에 근거를 두고 있고, 기껏해야 진화의 이전 단계를 가리킬 뿐 하느님은 없다. 땅은 거룩함과는 상관없는 단순한 객체가 되었다. 객체로 생각한다는 것은 이용 가능한 대상으로 본다는 것이고, 그것은 습관적인 억압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저자의 견해이다. 자연에 대한 제국주의가 성립된다는 것이다. 신학이 자연 세계를 과학에 넘겨준 결과, 과학은 점점 더 실재와 창조 사이의 관련성을 무시했으며,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창조 신앙은 우주의 단순한 사실성, 우주의 순수한 ‘사실’을 인정하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알맹이 없는 창조 신학은 세상이 창조되었다고 증언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모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느님이 전적인 타자라면, 세계는 하느님 없는 장소가 되고, 거룩한 것, 신적 현실은 더 이상 세계 안에 존재하지 않게 된다. 경외심과 두려움의 근거가 없어지고, 내재성을 결여한 초월은 인격적으로 우리와 아무 관계가 없는 것으로, 세계와 우리의 관계를 규정하지도 못하는 무의미한 교리적 주장으로 전락할 뿐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신학이 당면한 가장 긴급한 과제는 종교적 유산의 해방적 요소들의 재발견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오늘날 새로운 하느님 상에 대한 연구를 가장 창조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교 전통의 억압적 요소들로 인해 가장 심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다. 여성신학자들은 이러한 노력의 선봉에 있다고 저자는 본다.
하느님의 절대적 초월성에 대한 서구 신앙의 세 번째 부정적인 결과는 인간의 역할과 관련이 있다. 성경의 창조신화는 땅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강조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짐승들이나 그 외 자연과 구별되는 존재로 묘사되고, 동식물과의 차이가 지나치게 강조된다. 그 결과 동식물들이 인간과 동일하게 갖고 있는 것들에 대해 의식하지 못하게 되었고, 그와 함께 생명에 대한 경외감도 사라졌다. 우리는 동식물과 같이 공기, 물, 빛, 먹이에 의해 살아간다. 이건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의 생존을 위한 근본적인 필요조건들이다. 그렇다면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동식물들과 공동운명체라는 것이다. 인디언 추장의 말처럼 땅이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땅에 속한 것이다. 우리가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하나 됨을 깨달을 때 피조 세계 앞에서 겸손한 태도를 회복할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하느님의 전적인 타자성이라는 신학적인 개념은 우리를 이 땅에서 낯선 자로 만든다. 그 개념은 지배와 권력의지를 위한 전제가 되기 때문이다.
고전적인 그리스도교의 창조 교리는 세 가지 억압적인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느님의 전적인 타자성과 남자와 여자, 짐승들과 온 땅에 대한 ‘그의’ 지배, 단순한 사실들로만 이루어진 무신의 세계, 세속화된 세계를 이용할 줄만 알고 자연 속에서 하느님의 거룩한 실재를 경건하게 예배할 줄 모르는 인간의 지배가 그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연에 대한 제국주의적 태도이다. 이런 태도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창조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발전시키지 못한다면 현재 맞고 있는 생태계 문제 해결은 요원하다. 창조신학은 어떻게 우리가 땅을 더욱 사랑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어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이제는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사이의 관계에 대해 새로운 이해가 필요하고, 절대적이고 독재자적인 창조자의 자유 개념을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라틴어 도미너스(dominus)와 그리스어 퀴리오스(kyrios)는 봉건적인 전제 군주를 나타내는 말이다. 하느님과 세상 사이의 관계를 이렇게밖에 설정할 수 없는 것인지 저자는 묻는다. 저자는 전통적 창조신학이 만들어 놓은 이런 개념을 해체하는 시도로 과정신학과 여성신학, 유물론적 성경 해석을 제시한다.
과정신학은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사이의 관계를 달리 이해해 보려는 시도이다. 알플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와 그의 후계자들인 과정신학자들은 살아 움직이고 성장하는 모든 것을 실체가 아닌 과정으로 파악한다. 하느님도 역동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과정적 사고는 창조의 궁극적인 범주로 ‘존재’를 중시하는 고전적인 서구 철학의 지배적인 경향을 수정한다. 이런 관점은 현실이 우연적이고 우발적으로만 서로 관련되어 있다는 불가해한 실체들로 이뤄졌다는 전제에 문제를 제기하고, 자기 안에 근거를 둔 하느님, 자유롭고 임의적인 결정에 따라 자의적으로 자기 이외의 것과 관계를 맺는 하느님 ‘그 자체’에 대한 고전적 개념도 극복한다.
무엇인가와 관계를 맺는 것은 하느님에게 본질적인 것이며, 우연적이거나 부수적인 특징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르틴 부버는 “태초에 관계가 있다”고 했다. 하느님에게는 ‘관계’가 결코 우연적인 요소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도 우연적이거나 우발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현실로 서로 연결된 과정들과 사건들, 경험들로 이루어진 총체적 관계라는 것이다. 과정사상은 양극적인 언어로 현실을 기술한다. 잠재성과 현실성, 변화와 영속, 상대성과 절대성, 생성과 존재가 그것이다. 하느님이 자기 안에 머물러 있는 변함없는 하느님이라면, 그의 잠재성은 현실화될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 모든 작용은 상호작용이며 모든 관계는 상호 관계라는 것이 과정 사상의 원리이다. 어떤 신적 행위나 인간적 행위도 그 자체 안에서, 또는 자기 자신 안에서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항상 우리를 사랑한다. 하느님은 자신에게 충실하며 언제나 자신을 넘어선다는 이 두 가지는 자신의 사랑을 늘 새롭게 제공함으로써 실증되고 입증된다. 하느님에게서 변함없는 것은 사랑이고 그것은 결코 정적인 것이 아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모든 가능성을 알지만 우리가 어떤 가능성을 실현할지는 모른다. 하느님은 우리의 능력을 알고 있고, 우리의 능력이 실현되기까지 기다려주고 우리의 자유를 위한 여지를 남겨놓는다. 그의 사랑은 상호작용을 통해 계시되며, 그 상호작용을 통해 세계는 하느님의 몸이 된다는 것이다. 모든 생물은 다른 생명들과 접촉하고,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하느님께 영향을 미치며, 하느님은 우리를 통해 경험하신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역사의 피안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이 역사 안에, 그리고 그 역사를 통해 살며 활동하신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서 토마스 아퀴나스, 루터, 칼뱅을 거쳐 바르트까지 서구 신학에서 전통적 유신론은 하느님의 능력을 강제력으로, 강제적인 권능으로 보았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런데 정말 하느님의 능력이 타자에게 강제적으로 그와 어떤 협력없이 행사하는 그런 것이냐고 묻는다. 저자는 하느님의 능력은 강제적이고 일방적인 영향력의 행사가 아니라 우리를 설득하고 마음을 이끄는 그런 능력을 발휘하는 분으로 우리는 그것을 증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꺼이 긍정하도록 우리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내적인 매력의 힘을 갖고 계시다는 것이다.
강제력의 하느님은 가부장적 하느님이시다. 여성신학도 창조자와 피조물, 힘 있는 자와 힘없는 자 사이의 전통적 신학적 분열을 극복하고자 한다고 저자는 평가한다. 우리의 사명은 “인류라는 상호적인 관계에 있어서나 하느님이라는 관계 능력 자체에 대해서 우리 현존의 피조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전통적인 창조신학에서 볼 수 있었던 것과 같은 권력에 대한 예속에서 해방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예속이 아니라 결속이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규정할 때, 우리는 사랑과 정의의 힘으로 창조적이고 동반적으로 하느님과 함께 일할 수 있다고 한다. 여성신학자 헤이워드는 신적인 것을 무상황적이고 비관계적인 것으로 해석하려는 고전적이고 신정통주의적인 경향에 반대한다. 여성신학은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물음에 새롭게 답하며, 이제까지 신학을 독점했던 남성들의 힘에 대한 환상에서 신학을 해방시킨다고 한다. 예수는 그의 삶과 죽음을 통해 권세와 지배권력을 포기하고 다른 능력을 보여주었다. 저자는 이런 예수를 통해 하느님의 능력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모든 능력을 ‘전적인 타자’에게 귀속시키는 정통주의 사상은 예수와 무관한 것이며, 이는 극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헤이워드는 ‘권세’와 ‘능력’을 선하고 설득적인 힘과 악하고 강제적인 힘 사이로 구분한다. ‘능력’은 힘을 나누기 위해, 다른 사람이 참여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지만, 권세는 어떤 한 사람이나 집단에게 힘이 독점되어 있어 악착같이 지키고 옹호해야 할 특권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나누는 힘만이 선하다고 말한다. 하느님의 힘이든 사람의 힘이든 지배에 이바지하는 것은 악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창조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과정신학과 여성신학뿐 아니라 철학적 유물론에서도 발견하고 있다. 철학적 유물론은 물질에 대해 진지하다. ‘관념론적’ 해석과는 달리 유물론적 성경해석은 신체성과 사회가 진지하게 취급된다고 한다. 철학적 유물론의 관점에서 실재는 동적인 물질이며, 이 실재를 해명하는 데 다른 원리는 필요치 않다고 한다. 철학적 유물론자들은 물질, ‘재료’ 또는 신체성을 살아 있는 운동으로 이해하며, 그 운동 과정의 창조적인 힘을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노동과 사랑이라는 지상적 현상에 비추어 창조를 해석하려는 저자의 시도도 철학적·유물론적 해석의 한 예라고 한다. 하느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육신이 되었고, 우리는 몸으로 살아있는 존재이다. 독일어에서 ‘몸’은 생명과 관계가 있고, ‘육체’는 통제하고 지배할 수 있는 물체의 개념이라고 한다. 몸은 곧 ‘나’, 존재의 범주이지만, 육체는 소유와 지배의 범주에 속한다는 것이다.
저자의 ‘몸의 신학’을 학습하기 위해서는 “나는 흙으로 만들어졌다”, “땅이 인간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땅에 속해 있다”, “땅은 주의 것”이라는 명제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인간이 흙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인간의 가능성은 제한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고, 흙으로 만들어졌다. 우리는 하느님이 원하고 계획한 존재며, 그가 필요로 하고 또 그에게 유용한 존재로 태어났다는 것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우리 삶에 대한 최대의 확신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흙으로, 먼지로 만들어졌다는 것도 우리의 고백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자기 이해가 갖는 이런 양극단성은 우리의 피조성에 대한 긍정이 이것을 모두 포괄하지 않는 한 해소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역사는 ‘먼지’, ‘흙’이라는 지상적 요소와 이 두 요소가 함축하는 두 가지 기본적인 차원 즉 신체성과 사회성을 도외시해왔다는 것이다. 몸은 고통과 욕망을 느끼게 하고, 이 지상의 ‘삶’이 ‘좋은 것’만이 아님을 알게 해 준다. 그런데 관념적인 영성은 욕망을 지닌 이런 몸을 부정함으로써 우리는 지상의 삶이 좋은 것만이 아님을 해결하려고 하니 그건 잘못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관념적 영성이야말로 플라톤의 이원론에 의한 영성의 적으로 본다. 플라톤의 [파이돈]에서는 신체의 영역을 위계적 체계의 가장 낮은 단계로 격하시켜 왜곡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몸을 멸시한다면 우리의 감정을, 그리고 우리 자신을 감각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잃게 되는 것이며,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도 포기하는 것이라는 저자는 말한다. 우리가 흙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우리가 처음부터 사회적 존재임을 의미하는 것이며, 우리가 서로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인간존재의 본질적 특징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위해 만들어졌으며, 서로를 향해 창조되었으며, 우리의 사회적 실존은 피조 세계의 선함이 증언되고 의심되고 확증되는 자리라는 것이다.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요약발췌, <사랑과 노동>



5월 모임은 31일, 화요일 오후 8시 줌
#과신대_북클럽
#북클럽_성서와 여성
#사랑과 노동
#도로테 죌레
오늘 우리 <성서와 여성>은 4월 모임을 갖고 함께 공부했습니다. 벌써 팥배나무에는 하얗게 꽃이 눈처럼 피고 있고, 길을 걷다 진한 향기에 깜짝 놀라게 되는 수수꽃다리도 한창입니다. 꿀벌 보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지구, 이 아름다움이 언제까지일지 황무함이 현실로 다가오는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