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신대 성서와 여성]
김란희 (성서와 여성 북클럽 지기)
2월 모임을 가졌습니다. 공부한 내용은 <가이아와 하느님> 제 3부 "지배와 허위"입니다.
저자는 우리가 책임을 져야만 하는 ‘악’으로서의 죄는 ‘관계의 왜곡’에서 시작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상호의존적인 우리 안에서 어떤 한 부분의 삶과 힘의 권리를 절대화하는 것, 그것이 바로 ‘죄’라고 합니다.
나아가 폭력의 복합적인 순환 속에서 저항 없이 인내하는 것, 그런 힘 아래서 희생당한 자들과 함께 마음을 나누지 않는 것도 죄로 봅니다. 그리고 그런 부정한 힘을 유지시키고 정당화시키는 통제 체제와 허위의 문화를 건설하는 것이야말로 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함께 공부한 내용 중 일부를 나눕니다.
“서구문화전통을 형성시켜 온 악을 명명하는 세 가지 전통들인 헤브루적 견해, 플라톤 · 영지주의 견해, 바울 ·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들이 회복되어 다시 사용할 수 있는 요소들을 지니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지배적 남성의 관점에서 구성되어 여성과 다른 종속된 사람들, 그리고 지구에 대한 지배적 남성들의 폭력적 힘을 정당화시켜 왔다.
이스라엘의 선택의식은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하는 명령을 의미한다. 이런 거룩함을 통해서 하느님의 거룩함에 더욱 가까이 감으로써, 그들은 하느님이 창조와 구원 사역의 중심에 위치하게 된다. 하느님이 세계를 창조한 것은 이 백성들을 위한 것이며, 선택과 거룩함의 명령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땅을 요구하게 만든다. 이스라엘 백성만이 이 땅에 대한 절대적 권리를 갖는다. 그들만이 이 땅을 거룩하게 할 수 있으며, 거기에 사는 오염된 사람들은 특별히 그들의 부정함 때문에, 이 땅에서 추방당해 마땅하기 때문이다. 여호수아서는 이스라엘과 하느님이 관계에 대한 민족 중심적 · 제의적 개념이 가장 극단적인 견해를 보여준다. 그러나 여호수아서의 문제점은 성서의 역사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서를 거룩한 문서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정복한 땅을 잔인하게 식민지화하여 그 거주민들을 근절시키거나 노예화하는 이런 유사한 패턴들을 행하도록 하는 무서운 명령에 있다.
17세기 영국의 청교도들이 아메리카를 점령했을 때 여호수와서의 관점으로 행했고, 19세기에 남아프리카의 네덜란드 청교도들도 줄루족을 그렇게 대했고 20세기에 유대 시온주의자들이 팔레스타인들에 대해 그렇게 했다.
여호수아서와는 대조적으로 구약 성서의 다른 본문들은 올바른 인간관계를 하느님 명령의 핵심으로 본다. 특히 가난한 자에 대한 부당한 대우는 하느님의 진노를 일으키는 죄가 된다. 기원전 8세기 중반에 쓰인 아모스서는 여호수아서의 비도덕적 민족 중심주의와 달리 뚜렷한 변화를 보여준다. 아모스서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분명히 가난한 자와 억압된 자들의 정의를 요구하는 하느님이다. 아모스서에서 이스라엘이 하느님에 대해 갖는 특별한 관계는 특권보다는 책임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의 비윤리적 행위는 더 엄격히 심판을 받고, 그 중의 핵심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범죄이다. 하느님의 주된 요구인 정의를 무시한 자들은 그들이 절기의 순주와 희생 제물을 받칠수록 하느님의 진노는 더욱 커진다. 실제로 아모스서에 의하면 이스라엘이 정의를 어김으로써 그들이 얻은 땅은 취소되고, 그 땅에서 추방될 것이라고 예언된다.
구약 성서의 다른 본문들은 하느님의 심판은 단지 일시적이라고 확신하는 종교적인 민족 중심주의를 지지하는 반면, 아모스의 강한 윤리적 심판주의는 점증하는 보편주의를 향해 나아간다. 요나서는 이스라엘과 그들이 적으로 보았던 주변 사람들에 대한 하느님의 동일한 관심을 확인함으로써, 헤브루적 보편주의가 가장 충만하게 발전된 상태를 보여준다. 하느님은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할 때 즉시 그들을 용서해주며 그들에게 주어졌던 파괴를 보류한다. 그것에 화를 내는 국수주의자 요나에게 하느님은 자신의 모든 창조물에 대한 동등한 관심을 설명하면서, 요나서는 그 절정을 이룬다. 요나서는 악을 ‘악의 길’ 그리고 ‘그들의 손에 있는 폭력’이라고 일반적으로 묘사한다. 하느님은 다정한 정원사처럼 자신의 모든 ‘식물들’을 똑같이 사랑하여 그들을 위해 일하며 그들 모두의 행복을 원하는 보편적 창조자라는 것이 요나서의 핵심이다.
플라톤은 ‘열정’에 포로가 되어 몸을 다스리지 못하는 것, 그것을 악의 근원으로 본다. 열정의 힘에 지배를 받는 영혼은 불변의 진리를 ‘잊어버리거나’ 그 진리를 알지 못해 가변적 견해에 빠지게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과식, 과음, 과도한 성욕, 그리고 선동 정치가와 군중들의 다루기 힘든 격렬한 의견들이 바로 그 증거라는 것이다. 이렇게 됨으로써 영혼은 죽을 때 하늘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능력을 잃어서 윤회의 순환에 빠지게 되는 것이라고 본다.
플라톤은 그의 저서 <티마이오스>에서 영혼이 얼마나 멀리 진리를 보느냐에 따라, 가장 높은 단계인 철학자로부터 외부적, 육체적 일과 관계된 낮은 계급의 사람들 즉 농부, 장인들, 그리고 격렬한 비진리 안에 있는 과격한 상인들, 선동 정치가와 폭군에 이르기까지 여러 단계의 사회적 신분을 취한다. 이런 논의에서 여성에 관한 언급은 전혀 없다. 그에 의하면 악덕은 감정과 욕망, 불균형과 방종의 지나친 상태를 말하며 반면에 덕은 균형과 조화 그리고 다스리는 마음의 온순한 매체로서 작용하는 몸과 감정을 유지하는 통제 상태를 말한다. 영혼과 몸을 다스리는 원리인 마음이 영원한 것, 불변의 진리의 비전과 일치되어 있을 때에만 덕은 가능하며, 반면에 악덕은 그 비전을 잃어버리고 가변성의 반대 원리에 굴복할 때 일어난다. 물질의 토대인 가변성은 악덕과 죽음의 기초가 된다.
유대적인 윤리적 견해는 악을 인간 의지의 자유와 하느님에 대한 불복종이라는 선택의 관점에서, 그리스적 형이상학적 견해는 악을 죽어야 할 운명의 결함 있는 존재의 관점에서 이해한다. 기독교적 가르침 안에서 이런 두 견해의 혼합은 죄와 악에 빠지는 인간의 딜레마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즉 인간은 자신의 죄와 악에 대해 당연히 죄가 있는 반면에, 동시에 인간 자신의 ‘자연적 능력’을 통해서는 이런 함정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바울 신학은 묵시 종말론적 사고와 영지주의적 사고를 혼합한 것이다. 그 신학의 기초는 죄와 죽음의 노예 상태를 말하는 ‘육’을 따라 사는 실존과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남을 통하여 기독교인들을 사랑의 삶과 불멸의 약속으로 해방시키는 영 안에 있는 실존이다.
바울의 사고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가 이런 악의 조건과 자연적 삶을 동일시하여 구원의 삶을 우리 안에 있는 최초의 창조된 잠재성을 근본적으로 초월하는 것으로 보는 데 있다. 바울에 의하면 인간이 하는 죄의 선택은 최초로 죄를 범한 첫 번째 인간인 아담에게도 거슬러 올라감으로써, 아담은 인간의 사악함에 현재의 상태를 가져온 집단적 근원이 된다. 유대율법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우리에게 드러낼 뿐이기 때문에 이런 인간의 사악한 상태에 결코 도움을 줄 수 없다. 율법을 통해 하느님의 명령을 아는 것은 죄의식을 증가시키고 우리를 죄인으로 만들 뿐이다.
바울은 상반되는 실존의 두 형태의 관점에서 타락한 아담에게서 기인된 죄와 죽음의 실존과 그리스도에게서 연유된 선과 영적인 삶의 실존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타락한 삶의 양식의 힘을 부수고 구원의 삶의 양식을 확립한다. 세례를 통해 우리는 아담의 삶의 양식에 대해 죽고 그리스도의 삶의 양식으로 태어난다. 그러나 낡은 아담의 죄의 힘은 여전히 ‘우리의 육’속에 거한다.
세례가 영적 삶의 새로운 힘을 우리에게 제공하지만, 낡은 아담의 죄의 힘은 여전히 ‘우리의 육’속에 거한다. 세례 받은 자들은 타락과 구원의 시대, 아담의 존재 양식과 그리스도의 존재 양식 사이에서 사는 자들이다. 그들은 새로운 삶의 양식에 맞춰서 ‘육’의 낡은 길을 따라가지 않도록 싸워야 한다.
바울은 이러한 변화의 과정 안에서 제2의 단계를 바라보는데, 이 안에서 육적이며 유한한 삶의 양식은 궁극적으로 파괴되며, 자아는 죄없는 불멸의 존재의 상태로 변화된다. 우리는 선을 행할 능력을 가진 존재로 창조되었지만 악을 선택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 악으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부딪힌 것이다.
세례는 우리들을 선의 원리뿐만 아니라, 불멸의 삶의 원리에 정착시킨다. 따라서 우리는 썩을 유한한 몸을 벗어 버리고 별들과 같이 불멸의 천국의 몸으로 변형되기를 고대한다.
바울이 죄와 죽음, 선과 불멸의 삶을 동일시하고 썩어질 운명에서 벗어난 하늘의 몸을 언급하는 것 안에서, 우리는 바울의 준(準) 영지주의적 우주론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근대 철학의 이층적 우주론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상층에는 ‘빛과 같이’ 영적이고 영속하는 물질의 형태로 만들어진 하늘의 몸들이 있다.
바울은 우리를 종노릇하게 하는 악마적 힘의 개념을 표현하면서 정사, 권세, 그리고 초등학문과 같은 우주론적 단어들을 사용한다. 유대 율법은 이런 악마적 힘들의 경계선 위에서 있는데, 유대 율법의 계명은 영적이지만 그것이 명령하는 것을 행할 영적 능력을 결여하고 있어서, 그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자들은 세상 초등 학문에 종노릇하고 말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는 우리를 종노릇하게 하며, ‘땅에서 연유하는 이 세상적인’ 아담의 삶의 양식에 부합하는 악마적인 영들의 힘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며, ‘하늘’에서 오는 영적 힘과 하나가 되게 한다. 바울은 또한 우주에 대한 이런 악마적 지배가 세계 역사의 한 시기, 즉 아담에게서 시작하여 그리스도가 타락한 힘들을 하느님께 복종시킬 때까지 지속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는 죄에 종노릇한 상태를 현재 ‘세계’의 힘뿐만 아니라, 이 ‘시대’의 힘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은 세례받은 자에게 선행의 힘을 부여하고 불멸의 삶의 힘을 갖게 하여, 그들의 육적인 몸이 부활하여 영적이고 불멸하는 몸으로 변형될 수 있게 할 뿐만 아니라, 우주 자체가 썩어질 ‘노예 상태’로 빠지지 않도록 한다. 그리스도가 피조물을 하느님과 완전히 화해시킬 때 현재 피조물을 지배하는 타락한 힘들은 하느님과 하나가 될 것이며, 우주전체가 해방되어 하늘의 몸이 불멸의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바울에게서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중심이 되는 것은 율법의 준수가 어떤 구원적 차이를 가져온다는 신앙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기독교인들에게 구원이란 계명을 지키는 결과로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앙에 의해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이라는 것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그들을 율법에서 자유롭게 한다.
그렇다고 바울이 도덕률 폐기론자는 아니라고 한다. 우리가 일단 하느님의 생명의 힘에 연합되면,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진실 그리고 절제를 이루는 행위의 길을 걸으며, 그 반대의 길을 피하려고 진정으로 노력해야만 한다고 한다. 바울이 사랑의 관계에 대한 도덕을 힘써 강조하는 것은 그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강한 공동체적 윤리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악의 궁극적 해결책은 자아를 ‘썩어질’ 육적인 몸에서 자유롭게 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구원은 율법과 예언자 안에서 시작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고 교회를 통하여 완성되는 진화적인 한 과정인데, 여기에서 창조물이 화해되어 태초에 세계를 창조했던 ‘로고스’와 ‘영’과 완전한 일치를 이룬다. 이것이 반영지주의 교부들인 순교자 저스틴과 이레니우스가 주장한 ‘우주적 그리스도론’인데, 그들은 물질적 우주가 구원되는 천년 왕국 시대를 믿는 유대교적 신앙의 요소를 강하게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기독교 교사들도 바울과 마찬가지로 죄와 죽음 그리고 구원과 부활한 불멸의 몸을 동일시하는 것을 전제했다.
자연, 죄, 죽음의 운명, 그리고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은 4세기 말과 5세기 초에 살았던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르침 안에서 세련되게 발전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서방 교회에서 바울의 신학적 인간학의 위대한 해석자이기도 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플라톤주의의 존재론적 일원론의 도움을 입어 이런 이원론을 거부했다. 신플라톤주의에 의하면, 존재의 근원은 오직 하나로서 모든 존재는 하느님에게서 나온다. 인간의 영과 몸은 본질적으로 선하지만, 비신적으로 창조된 존재라는 것이다. 선하게 창조된 인간은 자유의지를 부여받았다. 자유의지는 선이나 악의 선택을 가능하게 하는데, 악의 선택은 반대적 힘에 의해 추진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에 대항하는 비존재의 비합리적인 선택이라고 한다. 따라서 악은 선의 결핍이나 부정으로 정의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타락된 본성을 넘어서는 신의 은총의 선물을 통해서만 자신의 의지를 변형시킴으로써, 그는 궁극적으로 성적 행위와 욕망을 포기하고 독신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이런 견해 때문에 기독인들은 결혼을 하위의 덕의 상태로 이해했으며, 성행위 안에서 여성을 남성의 죄적인 성적 욕망의 피난처로서 인식함으로써, 생식을 위해서만 정당하게 ‘사용될’ 수 있다고 보는 여성에 대한 도구적 견해가 함축적으로 생겨나게 되었다. 놀랍게도 여기에서 성을 사랑의 관계의 포현으로 보는 어떠한 견해도 없다는 것이다. 자연적으로 종속된 여성은 자신들을 자기 남편의 의지에, 혹은 권위를 가진 다른 남성들에게 더욱 복종함으로써 구원받을 수 있으며, 구원받은 남성은 여성과의 성적 관계를 피함으로써 자신들의 구원받음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죄에 대한 윤리적이며 형이상학적 이해, 즉 죄를 불복종과 유한성으로 보는 고전적 기독교의 죄의 개념은 서구 세계에 혼합된 유산을 남겼다. 이런 죄의 이해는 우리가 잃어버린 무구와 덕을 쉽게 회복할 수 있다는 낙관적인 주장만으로 가볍게 취급될 수 없다는 강력하고 설득력 있는 분석이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깊은 문제점을 가진 유산으로, 참회함으로서 악을 극복할 뿐 아니라 악을 정당화하는 데 공헌해 온 유산이기도 하다. 우리가 이것에서 긍정적인 것들을 표현해 내어 새로운 형태로 재생 이용하기 이전에, 우리는 기독교적 견해의 이런 문제점을 제거해야만 한다.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에 책임이 있다는 견해는 기독교인에게 지탱할 수 없는 죄책감의 부담을 준다. 인간이 처한 죽음의 운명을 비극으로 보든 아니면 자연적인 것으로 이해하든, 죽음의 운명은 죄도 아니고 죄의 결과도 아니다. 이런 죽음의 운명을 자연적 조건으로 받아들이며-우리는 지구상의 다른 존재들과 이런 운명을 공유한다. 구원을 이런 유한적 한계 안에서 삶의 충만함으로 이해하는 묵시적 종말론 이전의 헤브루적 견해는 생태학적 삶에 더욱 근거한 윤리이다.
죽을 운명의 유한한 삶을 악이나 죄의 열매로 평가하는 것은 지구를 회피하는 윤리와 영성에 이바지해왔다. 사실 이런 윤리와 영성은 지구를 소홀히 하고 인간과 식물과 동물의 공통성을 부인하며, 유한하지만 새로워 질 수 있는 삶의 일상적 과정을 유지시키는 일을 멸시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해왔다. ‘불멸의’ 삶과 비교하여, 유한하지만 새로워질 수 있는 이런 삶을 죄와 죽음으로 평가함으로서, 우리는 삶과 죽음의 현실을 뒤집어 놓았다. 따라서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현실적 삶보다 죽음의 운명으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하는 죽음을 선호하게 되었다.
거룩한 것과 속된 것,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 불멸의 삶과 유한한 삶의 구별은 죽은 몸들을 부패시키는 생명 주기의 죽음의 측면과 성과 생식의 생명의 흐름을 두려워하는 관계를 만들었다. 이런 공포의 패턴은 성과 인종의 사회적 차별 정책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으며, 또한 생명 주기의 죽음과 분해의 측면을 건설적으로 통합시키지 못하는 것을 의미하여 따라서 폐기물이 새로운 유기물을 위한 물질보다는 유해한 독극물이 되게 한다. ‘오염’과 반대되는 청결의 영역 안에서 자신을 구원하고자 하는 이런 노력은 오히려 오염을 야기시킨다.
유한하지만 새로워질 수 있는 삶을 무시하는 것은 출산을 하는 여성을 경시하는 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유대 전통과 그리스 전통은 죄와 죽음, 불순함과 유한성의 근원의 책임을 여성에게 전가시키는 복잡한 기독교적 책임 전가에 공헌했다. 여성을 비난하는 이런 전통은 초기 기독교 안에서 남성과 여성 관계의 평등적 견해가 시험적으로 시작되는 것을 막아 버렸다. 여성의 ‘자연적’ 종속이 다시 정당화될 뿐 아니라, 죄와 죽음의 근원을 여성의 반항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봄으로써, 여성을 끝없이 희생시키는 것이 정당화된다. 여성을 통하여 ‘남성’은 자신의 ‘최초의 자연적’ 불멸성을 상실했다.
남성이 자신의 잃어버린 ‘불멸성’을 붙잡기 위하여 부정해야만 하는 ‘죽어야 할 운명의 타자’인 여성을 부정하는 것은 다른 희생집단으로 확장된다. 종교적, 사회적 성적 그리고 인종적 민족적 ‘외래인들’은 경건한 자와 사악한 자,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구별하는 동일한 이원론적 렌즈를 통해 판단되어 왔다. 정복이나 집단 학살을 초래하는 파괴는 ‘하느님의 사람들’의 순수성과 힘을 위협하는 외래인들을 취급하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정당화되어 왔다.
유한성과 구별되는 ‘죄’의 중심적 문제는 다른 사람들과 지구를 착취하기 위해 자유를 남용하는 것이며, 따라서 생명을 유지시키는 기본적 관계를 파괴하는 것이다. 생명은 생명적 관계에 의해 유지되는데, 이런 관계성 안에서 전체는 상호 의존 안에서 상호 한계를 통해 충만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 생명 공동체의 한 부분이 다른 부분들을 희생시켜서 자신을 높이려 할 때, 생명은 착취된 것들 때문에 감소된다. 궁극적으로 착취자들은 자신들의 삶의 기반도 역시 파괴시킴으로서, 사악한 적의와 폭력이 확장되는 순환이 발생되는 것이다.
죽음의 운명의 삶으로부터 도피하려는 기독교의 윤리적 노력과 기독교 윤리가 죄와 죽음의 책임을 착취적 폭력의 희생자에게 투사시키는 것 안에서, 저자는 죄에 대한 기독교적 정의가 폭력의 이런 순환을 피하기보다는 조장하는 데 힘써 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의 기독교적 유산으로부터 생태학적 정의의 윤리를 위해 회복하여 쓸 수 있는 요소들이 분명히 있다고도 말한다. 이런 요소들 중의 하나는 사람들 사이의 부정한 관계와 이런 관계가 지구에 끼치는 파괴적 영향을 악으로 보는 헤브루적인 악의 이해이다. 회개는 억압적 힘의 체제에 의해 희생된 사람을 특별히 옹호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해방 신학들의 요구인, ‘가난한 자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의 근원이다.
우리는 바울과 아우구스티누스적 전통에서 자기 자신의 이익과 욕망에 반해 행동하는 분열된 자아에 대한 심오한 실존론적 인식을 이끌어 낸다. 유전된 죄의 개념 안에서, 우리는 또한 악이란 단지 개인적 결정들의 총합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우리는 죄 없는 완전히 깨끗한 상태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의지에 부정적 편견을 갖게 하는 문화적.사회적 조직의 역사적 체계를 물려받는다. 선을 택하는 우리의 자유는 유한성의 유동적 한계에 의해 제한될 뿐 아니라, 선으로 가장하는 허위와 불의의 유산에 의해 왜곡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생물학적인 책임을 물을 수도 없으며, 동시에 우리 자신이 완전히 결백하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이런 전체 현실에 필수적인 한 부분이다. 우리는 많이 희생당한 사람들과 동정적 연대를 필요로 할 뿐 아니라, 그런 불의로부터 우리가 어떻게 혜택을 받아 왔는지를 사실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모든 악을 해로운 ‘외계인(aliens)’
에게 병적으로 투사하는 것을 피하려고 의도적으로 노력함으로
써만, 우리는 더욱 충만한 생명과 덜 유독한 폭력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관계의 조직들을 재구성하는 것을 시작할 수 있다.” 제3부 요약발췌문 중에서. <<가이아와 하느님>>, 로즈마리 래드퍼드 류터
다음 모임은 3월 29일에 있습니다
공부할 주제는 본서의 마지막 장 "치유"에 관한 것입니다.


김란희 (성서와 여성 북클럽 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