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월 지난 모임에서는 로즈마리 래드퍼드 류터의 <가이아와 하느님> 중 제1부 '창조'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1월 모임인 오늘은 고대 신화와 성서 안에 나타나는 ‘갈등’과 ‘징벌’의 상징인 자연재해와 인간재해로 인한 ‘환경파괴’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신앙 안에서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진노로 해석합니다.
유대의 묵시 사상이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이라는 것은 새로운 공부여서 아주 흥미로웠습니다. 자연재해와 팬데믹과 같이 우리의 일상을 파괴하는 질병재해와 그것에 대한 예언으로의 묵시록에 대한 것은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이라 매우 긴장 되는 공부였습니다.
종말론적 현상과 그것의 예언서로 해석되는 다니엘과 요한계시록에 대한 저자의 관점과 근현대의 근본주의자들은 자신의 상황에 그런 현상을 어떻게 적용시키고 있는가도 매우 흥미로운 공부였습니다.
성서의 묵시록과 그것을 해석하는 묵시 종말론적 사상은 그 관점에서 일치되지 않을뿐더러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이 저자의 지적입니다.
그러나 묵시적 사상을 갖게 되는 원인이 무엇인지를 살펴봐야 한다는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상대를 악마화 하는 왜곡된 종말론적 관점은 경계해야 하나 그런 관점에서 약자의 목소리가 들린다고 하니 공존의 지점을 모색해야 하는 우리로서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지구온난화는 결국 종의 멸종으로 이어지고 있고 그것은 서로를 살리는 생명 친화적 종은 죽이고 생명력을 약화시키고 차단하는 해충의 강화를 초래하고 있다니 이 또한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무서운 현실임을 각성시키고 있습니다.
* '하느님'으로 표기하는 것은 저자가 성공회 신학자로 그가 쓴 호칭에 따라서입니다.
“성서 안에는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이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지 못한 것 때문에 하느님으로부터 당하는 파괴의 이미지들이 많다. 에스겔서 7장 1-4절에서는 아예 하느님이 세상을 끝장낼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고 이사야서 24장 3-6절에도 매년 거듭되는 하느님의 징벌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런 모든 종말의 특징들은 세상을 파괴하겠다는 것이 궁극의 목적이 아니라 인간을 회개하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음을 예언자들은 강조한다. 회개하면 다시 풍성한 결실을 맺게 될 것이고 일상은 풍요로 회복될 것이며 적들은 티끌처럼 제압당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보편화 시키면 온 땅의 사람들이 하느님이 통치하시는 시온으로 들어오고 그때는 하느님의 평화와 정의가 온 땅을 덮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곧 세계 전체에 대한 비전이 된다.
이런 묵시 사상적 이야기들은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죄 때문에 악의 지배를 받아 그들이 점점 쇠약해지는 것으로 묘사된다. 때가 되면 하느님이 이런 악의 지배를 종식시키시고 그런 악은 심판하고 멸절하여, 평화와 정의가 구현된 당신의 나라를 세우신다는 것이다.
세계 파괴와 재창조가 미래 역사의 정점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이런 묵시 사상의 새 시대는 중세 말기에 나타나서 17세기 종교 전쟁 기간 동안 계속되었다. 기독교인들은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마지막 것들’의 징조들을 연구하면서 그 안에서 자기 시대의 사건들을 봐라봤던 것이다. 영국 국교회 지지자들이 국회의 청교도 지지자들과 싸웠던 영국의 내전도 이런 강한 묵시적 열정의 결과로 평가된다. 청교도 운동의 좌파 세력의 영향으로 급진적 그룹들이 급격히 증가했고, 그들은 독립신문을 이용하여 묵시적 내용을 담은 소책자를 배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반체제적 운동만이 여성과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들려줬다고 한다. 내전 기간 동안 여성 예언자 캐리(Mary Cary)는 1640년대와 1650년대 영국 정치사를 묵시적으로 해석했다. 모든 영역의 지배자들 왕, 의원, 종교 지도자, 그리고 도시와 군의 공무원들에게 쓴 <때에 알맞은 충고>라는 글에서 캐리는 성서와 하느님 앞에서 그들의 책임을 추궁했다. 권력자들은 가난한 자들의 억압을 중단하고 악을 행하는 자들을 처벌해야하고, 예언자들과 복음 설교자들의 입을 막지 말아야 하며, 하느님은 영국을 원수들로부터 구하여 그 왕국이 정의롭고 거룩한 행위의 열매를 맺기 원한다는 내용이었다.
1840년 미국의 침례파 설교자인 밀러는 세계 종말이 약 1843년에 온다고 외치면서 큰 무리들을 모았다. 다니엘서 8장 14절(그가 내게 이르되 이천삼백 주야까지니 그 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되리라 하였느니라)을 근거로 기원전 457년 예루살렘 도시의 재건축과 예수의 재림 사이에 2300년이 걸릴 것이라고 예언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실현되지 않자 이들은 계속 종말의 날짜를 바꿔가면서 예언도 바꿔갔으나 세상은 아직도 건재하다. 이들 재림론자들은 개신교 천년왕국 신봉자들과 함께 교황과 로마 가톨릭 교회를 적그리스도로 봄으로써, 그들을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적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짐승과 바빌론 제국의 연속이라고 믿었다. 가톨릭 교회뿐 아니라 국가 교회를 설정해 온 개신교 국가들도 사탄의 제국으로 보았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그런 제국에서 제외시켰다. 오히려 미국은 어린 양으로 보아 어린 양의 두 뿔은 미국의 특성이 그리스도의 특성과 부합한다는 사실로 해석했다. 그러나 계시록에서 ‘용처럼 말하는’은 미국이 타락하기 쉽다는 것도 놓치지 않았다. 그것은 일요일을 휴일로 제도화하여 타락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화이트는 참된 안식일을 준수하는 자들에 대한 박해가 최고조에 달하면 그리스도가 재림하여 박해당한 자들을 모두 하늘로 불러 모으고, 그들이 천년 지복을 누리는 동안 땅은 황량하게 파괴된다고 예언했다.
저자는 이런 묵시 사상적 비전들을 무시할 수만은 없다고 본다. 악에 대한 선의 완전한 승리를 확신시키는 이런 주술적인 문제 해결의 방법에 매료될 만큼 이 시대는 극심한 빈부격차, 무기 비축, 핵전쟁과 생태학적 붕괴의 위협에 처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언자적 메시지는 지배 체제에 의해 침묵당하는 계층들에게 지배 체제에 대담하게 대항할 힘을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묵시적 관점을 경계하기도 한다. 그것은 예언자적 저항의 힘은 묵시사상이 지니는 이원론적 사고로 인해 치명적인 순수성을 잃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절대 악과 절대 선, 하느님과 사탄을 의미하는 ‘우리와 그들’은 이런 묵시 사상의 특징인데, 우리는 선과 악을 다른 종류의 것으로 보기보다는 ‘다른 종류의 관계’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근본주의자들은 선과 악을 구체화하여 상대를 악마화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그들은 구체화된 선과 악의 이원론을 종파적, 부족적, 국가적인 적개심과 일치시키고 있다고 한다. 특정한 민족, 특정한 집단만이 하느님의 백성이 되고, 그 안에서만 참 성도가 있다는 식이다. 이스라엘만이 미국만이, 침례교만이 구원이 있고, 다른 민족이나 다른 종교는 악으로 규정하는, 이런 식으로 악의 근절을 다른 인종적, 민족적, 종교적 집단들에 대한 절대화된 적개심과 일치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고의 묵시적 종말론자들은 칼에서 핵폭탄에 이르기까지, 군사 무기를 통한 적의 대학살을 정의의 도구로 미화시킨다. 적들에게 절대화된 악을 투사하여 살해하는 것은 인간에 대해 가질 수 있는 동정의 근원을 차단시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생태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인간은 지구자체의 근원적 생명력을 침해하고, 인간의 힘을 남용함으로써 20세기 말 46억 년에 걸쳐 이루어진 생물권을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시킬 것이라고 예측했다고 한다. 이 책은 1999년에 쓰였다. 과학적 문화는 더 이상 자연과 독립적인 하느님을 상정하지 않고 있고, 우리가 지구를 파괴하면 생명권과 연결되어 있지 않은 어떤 생명력이 지구에 개입하여 지구를 회복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지도 않는다. 지구를 파괴하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는 인간 우리 자신이 파괴된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것은 지구가 파멸되기 전에 우리 모두가 지구의 공동 창조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적인 이해만을 촉구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의 과제라고 한다. 회개란 온전한 의미에서 인간이 자연 안에서 생명을 유지하며 살기 위해서, 우리의 정신과 문화, 기술과 사회 관계를 전환하는 것을 말한다. 저자는 우리가 빨리 회개하기를 촉구한다. 수천 년에 걸쳐 형성된 잘못된 패턴들을 새롭게 고치고 교정할 수 있는 시간이 우리에게는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저자는 재난이 발생한 후에 그 재난에 반응하는 것만을 학습해왔기 때문에 미래를 예견할 수 있는 선견지명이 우리에게는 없다고 말한다. 정치적 분열과 계급과 성(젠더), 인종적 적대감의 경우 힘있는 자들은 그 대가를 늘어나는 희생자들에게 돌림으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또한 궁극적으로 전달 체계의 그릇된 정보와 분열로 사람들은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할 수 없으며 정보전달 시스템 자체가 모든 사람들이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하기를 바라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의도적으로 혼선을 빚게 만든다고 한다.
저자는 누적되고 있는 위기의 문제를 인구, 식량, 에너지, 오염, 종들의 멸종, 그리고 전쟁이라 항목으로 나누어 고찰한다. 가난이 증가하는 지구적 분열의 모든 문제를 관통한다고 보고 있다. 인구 문제는 식량의 문제와 분리할 수 없고, 그 인구문제는 식량과 에너지의 문제와 분리할 수 없으며, 오염은 가난과 전쟁과 분리할 수 없고, 종의 멸종은 유독성 폐기물과 팽창하는 인구문제와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세계 인구의 힘 있는 소수가 세계 자원의 대부분을 독점하도록 방치하는 현재의 힘의 체제는 증가하는 대중을 비참한 삶의 조건들로, 특히 그들이 삶의 기초가 되는 환경과 파괴적인 관계로 몰아넣는다고 본다. 17세기에서 19세기 폭발적 인구팽창을 겪은 서유럽은 수백만의 인구를 식민지 사업에서 정착민으로 이주시켰고, 중앙 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에서 귀중한 금속들을 약탈하여 산업 혁명에 필요한 자본의 기초를 마련했다. 서구 유럽의 이런 식민지정책으로 전쟁과 강제 이동 혹은 노예화와, 유럽 식민주의자들이 들여온 질병 때문에 막대한 숫자의 원주민들이 고통과 죽음을 당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주의자들이 1550년에 중앙 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에 도착했을 때 8천만이나 되었던 원주민들이 100년 후에는 겨우 1천만으로 줄었다고 한다. 이와 동일한 패턴이 태평양 군도에 있는 원주민들에게도 되풀이 되어 태즈메이니아와 카브리해 군도와 같은 곳에서는 원주민들이 아예 절멸했다고 한다. 이런 구조가 기초가 되어 식민지화된 지역들 안에서는 부와 가난의 관계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현재 가장 우려되는 바는 온실 효과로 인한 남·북의 만년설이 녹아 해수면이 상승되는 것이다. 세계의 많은 인구가 밀집되어 있는 연안의 해수면 상승은 농경지 범람은 물론 도시 자체를 파괴시킬 수 있어 그것이 갖는 파괴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부유한 나라는 제방을 쌓을 수도 있겠지만 가난한 나라들은 그럴 여력이 없어 개인적으로 부유한 사람들만 높은 지대로 이동을 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파멸을 맞게 될 것이다. 저자는 이런 재앙이 일어난다면 그 비극은 기원전 4천 년 고대근동의 도시들을 전멸시켰던 고대 홍수 이야기를 훨씬 능가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기후변화는 세계 산림 지대인 브라질, 중앙아메리카, 열대 아시아와 같은 열대 지역에 있는 다우림의 급속한 파괴로 이어지고 있다. 이 지역에서 발생하는 산림벌채는 주로 목재를 얻고 가축을 기르기 위한 땅을 개간함으로써 발생한다는데 이 과정에서 아직 연구되지 않은 풍부한 생명의 다양성이 파괴되고 있다고 한다. 열대 지방의 산림 지대는 그 지역들에 습기를 제공하는 커다란 비구름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산림의 제거는 그 지역을 가뭄과 사막화의 지대로 만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 45년 동안에 수십만 종의 식물과 동물들이 멸종되었으며, 2000년까지 지구에 사는 종들의 20퍼센트인 수백만 종의 동식물이 없어질 것으로 예고됐다. 현재 2022년 1월17일자 파이네셜뉴스에서 1500년 이후 국제학술지 ‘바이오지컬리뷰’를 인용하면서 동식물 200만 종의 생물 중 최대 13%에 해당되는 26만종이 멸종되었다고 한다. 종의 멸종은 진화를 통해서 서서히 일어나고 진화의 역사 안에서 집단의 멸종시기가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인간의 팽창이 다른 생명들을 파괴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인간의 편의를 위한 산업사회가 내뿜는 오염물질에 의해 산성비와 오존층의 고갈, 대기와 수질 오염 등이 여러 가지 식물들을 감소시키고 파괴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다 안으로 유입된 유독성 폐기물은 산호초와 같은 해양 동식물을 파괴하고 있다. 종이 파괴되는 주요 원인은 동물과 식물의 자유로운 삶을 위한 서식지를 파괴하는 인구 팽창에 그 주요 원인이 있다고 본다.
이제 우리는 관심사가 되어야 하는 것은 인간 중심적이며 생명 중심적인 것에 두어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멸종되는 각 종은 유일한 형태의 생물학적 삶이 영원히 끝나며, 결코 다시 회복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짧은 기간에 생물학적 진화의 많은 장들이 닫혀지는 것은 생물권 전체의 상호 유지를 지속시켜 주는 생물학적 다양성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한 종이 멸종할 대 단지 한 종뿐만이 아니라 상호 의존적인 식물, 동물, 그리고 곤퉁들의 전체 집단이 제거됨으로써, 결국 전체가 붕괴된다고 한다. 창조적인 상호 작용의 큰 능력을 지닌 많은 종들이 열악한 환경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소수의 강한 종들, ‘잡초’와 ‘해충’의 종들로 대체된다고 하니 매우 위험한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해충인 바퀴벌레와 바랭이류의 잡초들은 복합적인 생명 공동체를 대체하여 강한 식물과 곤충들을 증식하여 좀더 섬세한 생명의 조직들이 다시 소생하지 못하도록 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군사주의가 지구를 황폐화시키고 있다는 것은 두 말할 것도 없다.
핵폭탄이 터진 지역은 다시는 회복될 수 없다. 1메가톤의 핵폭탄만 가지고도 미국, 캐나다, 그리고 멕시코 대륙에 이르는 지역에서 식량 보존, 의약품, 난방, 조명 그리고 교통이 의존하는 전기 장치를 모두 폭발시킬 수 있었다. 1990년대 분석이니 2022년은 지금은 그 상황이 또 다달라졌을 것이다.
21세기는 인간의 실험과 그것을 지탱해 온 생명권은 심각한 상태에 놓여 있다. 지구의 동식물을 희생시키는 인구 폭발, 대기와 수질 오염, 그리고 토양에 대한 환경 피해, 늘어나는 가난한 집단의 고통, 부유한 엘리트들이 지구 자원으로부터 부정한 혜택을 유지하기 위한 세계적 군사화, 이와 같은 파괴의 ‘네 기수들’은 서로 결합된 일련의 비극적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가장 심각한 것은 이 중에서 가장 힘 있는 집단들이 자신들의 사업을 지탱시켜주는 것이라면 그것이 지구에 어떤 해를 끼쳐도 중단할 의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정의와 지구상에서 지속 가능한 생명 공동체를 조화시키기 위한 투쟁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요약발췌
다음 모임 공지
2월 22일 화요일 오후 8시
주제 지배와 허위
김란희 (성서와 여성 북클럽 지기)
#과신대_성서와_여성
#로즈마리 래드퍼드 류터
#남천
김란희 (성서와 여성 북클럽 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