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와 존중을 위한 책 읽기
글ㅣ김란희 목사
성서와 여성 북클럽지기
@Unsplash, Joel Muniz
과신대 북클럽 <성서와 여성>은 2021년도 5월에 ‘풍성한 성경 읽기’를 위한 또 하나의 관점이라는 소박한 의지를 갖고 출발했습니다. ‘풍성한 읽기’라고는 하지만 성경의 저자 모두가 ‘남성’이고 그것도 여성이 단독으로 목소리를 낼 수도 없고 사람의 수를 셀 때면 어린이들과 함께 여성은 그 개수에 포함되지도 않던 시절, 그 시절보다 이 전에 가축과 함께 남성의 소유물로 인식되던 그 시절에 쓰인 성경을 여성의 관점으로 본다는 것은 참 쓸쓸한 일인 것 같습니다. 여성도 남성도 아닌 무성의 하나님이시지만 우리들 인식 속에서는 ‘남성’, ‘아버지 하나님’으로 각인되어 있어 성경이 남성중심적이라는 그래서 그것을 감안하고 읽어야 한다는, 그때는 그것이 옳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낭랑한 소리로 설교하기도 쉽지 않은 교회 분위기 속에서 특히 그런 분위기가 강화되어 있는 한국교회에서 이런 읽기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문득문득 회의에 들기도 합니다. 그 생각이 깊어지면 “여성들에게 성경은 무슨 ‘덕’이 있는가?”라는 극단적 생각이 들 때도 더러는 있습니다.
성서와 여성 북클럽에서 첫 번째로 읽은 책이 테레사 포르카데스 이빌라의 <여성주의 신학의 선구자들>였습니다. 저자는 여성주의 신학은 비판신학이고 비판적 연구는 철학적이든 역사적이든 사회적이든 문학적이든 늘 모순의 경험에서 비롯된다고 했습니다. 그 모순은 ‘삶의 체험에서 오는 모순’과 ‘지적인 것에서 오는 모순’ 두 가지로 나뉩니다. 전자는 어떤 삶이 신과의 관계 속에서 겪는 삶의 체험과 그가 물려받은 신 이미지 또는 신학적 해석 사이의 모순, 어떤 사람이 신관의 관계 속에서 겪는 삶의 체험과 그의 종교 전통이 성스럽다고 여기는 경전 구절 사이의 모순으로 볼 수 있고 후자는 물려받은 전통이나 해석의 두 측면 사이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모순과 서로 다른 성경 구절 사이에서 인식할 수 있는 모순 등에서 비롯된다고 합니다. 이런 모순의 경험은 매우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지라도, 마음이 편한 것도 유쾌한 것도 아니며, 우리에게 해결을 향해 나아갈 것을 촉구한다고 합니다. 또한 이런 모순은 흔히 차별이나 불의의 상황으로 인해 일어나기 때문에, 비판적 신학을 해방신학이라고 부르기에 여성주의 신학은 비판신학, 해방신학이라고 했습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떨어진 ‘계엄선포’와 ‘대통령 탄핵’이라는 광폭하게 밀려오는 역사의 파고 앞에서 극단으로 갈려지는 기독교인들의 현실 인식을 보면서, 저자가 말한 ‘모순’의 굉음을 대한민국교회만큼 크게 낼 수 있는지 아주 참담하게 답답합니다. 이런 마당에 여성주의 관점은커녕 그 오랜 세월 그것이 남성중심적으로 쓰인 성경을 그대로 해석해서 읽었다고 했을지라도 신앙생활을 하기 전과 그 생활을 오래 유지하면서 그 숱한 세월 그 숱한 시간 ‘기도’라는 것을 했다면 적어도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은 어렵다고 할지라도 ‘나’ 자신만을 위한 삶에서 ‘우리’를 위한 삶으로 조금은 확장시킬 수 있어야 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기껏 ‘우리’라고 한다면 자기 삶의 조건을 좀 더 나은 것으로 강화시켜 줄 수 있는 가족이나 이익집단에 머물고 있으니, 교회마저 그런 조건의 하나로 확장시켜 나가고 있으니 배려와 절제와 자기 객관화와 타자의 존중으로 점철되는 ‘공공선’에는 못 가고 있다고 봅니다.
자신의 의지로는 어쩔 수 없는 남성과 여성, 성소수자로 태어났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장애인 비장애인, 천재와 바보로 태어나기도 합니다.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내 삶의 조건이 이미 결정된 상태에서 우리는 ‘삶’을 시작합니다. 우리는 종종 ‘나의 나됨은 나에 의한 것’이니라는 고백을 하기도 합니다. 그 고백이 진심이라면 우리는 누구도 차별해서도 어느 순간에도 우월에 빠져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은 한순간도 우월에 빠질 만한 이들과 어울리신 적 없고 오히려 억압당하고 차별당하고 사람 수에 들지 못하는 장애인과 과부와 창녀와 아이들과 죄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제 아무리 여성주의 신학이라 해도 이런 예수님의 ‘사랑’을 비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21년도 5월 시작한 성서와 여성은 여성 신학자들의 책을 읽습니다. 남성신학자들의 책도 잘 안 읽는 ‘성경’을 해석한다는, 어떤 관점으로 읽는다는 것조차 우리 한국 교인들에게는 낯섭니다. 목사의 설교를 통해서만 성경을 접하는 것이 대부분이어서 사실 성경의 기원이나 신구약 성경의 관계나 그 구성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분들이 허다합니다. 성경은 ‘한 권’의 책입니다. 그렇기에 저자도 있고 독자도 있고, 해석의 관점도 당연히 있습니다. 그 해석의 극단에 여성주의 관점이 있습니다.
24년도 12월 현재는 무사두베의 <제국 성서 탈식민여성주의>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역시 성서와 여성에서 22년도 읽은 <성서-소피아의 힘>을 쓴 엘리자베스 쉬슬러 피오렌자는 여성주의 신학자의 거장으로 추앙되고 있습니다. 성경을 ‘여성’이 주체가 되어 해석했다는 점에서는 매우 선구적이나 그러나 남아프리카 출신 무사두베의 눈에는 그 역시 서구 백인의 관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무사두베는 여성주의 관점에서 더 확장되어 ‘제국주의’ 관점으로 쓰였다는 것을 발견해 내는 피식민주의자의 관점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런 관점으로 본다면 지상의 낙원으로 이스라엘 민족에게 약속된 ‘가나안’은 너무 슬픈 땅입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다면 가나안 민족 또한 그의 피조물이었음을 부인하면 안 된다고 봅니다.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 예수 그 마음을 품는다면 누구도 함부로 대하면 안 되고 나의 무엇도 ‘자랑’할 것이 없어야 합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한강에게서 그런 면모를 봅니다. 과신대 북클럽 <성서와 여성>은 이렇듯 하나님과 그와 동등한 본체이신 예수님을 나의 주로 고백하면서 그렇게 고백한 이들이 성령의 영감을 통해 완성시킨 ‘성경’을 정직하게 공부하는 모임입니다. 그러나 제한은 있습니다. 여성주의 신학자들이 저자인 성경에 관한 책만 읽습니다. 또한 이 공부의 여정에서 하나님의 피조물인 우리 인간에 대한 연민과 나와 다른 삶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점점 깊어가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이해와 존중을 위한 책 읽기
글ㅣ김란희 목사
성서와 여성 북클럽지기
@Unsplash, Joel Muniz
과신대 북클럽 <성서와 여성>은 2021년도 5월에 ‘풍성한 성경 읽기’를 위한 또 하나의 관점이라는 소박한 의지를 갖고 출발했습니다. ‘풍성한 읽기’라고는 하지만 성경의 저자 모두가 ‘남성’이고 그것도 여성이 단독으로 목소리를 낼 수도 없고 사람의 수를 셀 때면 어린이들과 함께 여성은 그 개수에 포함되지도 않던 시절, 그 시절보다 이 전에 가축과 함께 남성의 소유물로 인식되던 그 시절에 쓰인 성경을 여성의 관점으로 본다는 것은 참 쓸쓸한 일인 것 같습니다. 여성도 남성도 아닌 무성의 하나님이시지만 우리들 인식 속에서는 ‘남성’, ‘아버지 하나님’으로 각인되어 있어 성경이 남성중심적이라는 그래서 그것을 감안하고 읽어야 한다는, 그때는 그것이 옳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낭랑한 소리로 설교하기도 쉽지 않은 교회 분위기 속에서 특히 그런 분위기가 강화되어 있는 한국교회에서 이런 읽기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문득문득 회의에 들기도 합니다. 그 생각이 깊어지면 “여성들에게 성경은 무슨 ‘덕’이 있는가?”라는 극단적 생각이 들 때도 더러는 있습니다.
성서와 여성 북클럽에서 첫 번째로 읽은 책이 테레사 포르카데스 이빌라의 <여성주의 신학의 선구자들>였습니다. 저자는 여성주의 신학은 비판신학이고 비판적 연구는 철학적이든 역사적이든 사회적이든 문학적이든 늘 모순의 경험에서 비롯된다고 했습니다. 그 모순은 ‘삶의 체험에서 오는 모순’과 ‘지적인 것에서 오는 모순’ 두 가지로 나뉩니다. 전자는 어떤 삶이 신과의 관계 속에서 겪는 삶의 체험과 그가 물려받은 신 이미지 또는 신학적 해석 사이의 모순, 어떤 사람이 신관의 관계 속에서 겪는 삶의 체험과 그의 종교 전통이 성스럽다고 여기는 경전 구절 사이의 모순으로 볼 수 있고 후자는 물려받은 전통이나 해석의 두 측면 사이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모순과 서로 다른 성경 구절 사이에서 인식할 수 있는 모순 등에서 비롯된다고 합니다. 이런 모순의 경험은 매우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지라도, 마음이 편한 것도 유쾌한 것도 아니며, 우리에게 해결을 향해 나아갈 것을 촉구한다고 합니다. 또한 이런 모순은 흔히 차별이나 불의의 상황으로 인해 일어나기 때문에, 비판적 신학을 해방신학이라고 부르기에 여성주의 신학은 비판신학, 해방신학이라고 했습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떨어진 ‘계엄선포’와 ‘대통령 탄핵’이라는 광폭하게 밀려오는 역사의 파고 앞에서 극단으로 갈려지는 기독교인들의 현실 인식을 보면서, 저자가 말한 ‘모순’의 굉음을 대한민국교회만큼 크게 낼 수 있는지 아주 참담하게 답답합니다. 이런 마당에 여성주의 관점은커녕 그 오랜 세월 그것이 남성중심적으로 쓰인 성경을 그대로 해석해서 읽었다고 했을지라도 신앙생활을 하기 전과 그 생활을 오래 유지하면서 그 숱한 세월 그 숱한 시간 ‘기도’라는 것을 했다면 적어도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은 어렵다고 할지라도 ‘나’ 자신만을 위한 삶에서 ‘우리’를 위한 삶으로 조금은 확장시킬 수 있어야 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기껏 ‘우리’라고 한다면 자기 삶의 조건을 좀 더 나은 것으로 강화시켜 줄 수 있는 가족이나 이익집단에 머물고 있으니, 교회마저 그런 조건의 하나로 확장시켜 나가고 있으니 배려와 절제와 자기 객관화와 타자의 존중으로 점철되는 ‘공공선’에는 못 가고 있다고 봅니다.
자신의 의지로는 어쩔 수 없는 남성과 여성, 성소수자로 태어났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장애인 비장애인, 천재와 바보로 태어나기도 합니다.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내 삶의 조건이 이미 결정된 상태에서 우리는 ‘삶’을 시작합니다. 우리는 종종 ‘나의 나됨은 나에 의한 것’이니라는 고백을 하기도 합니다. 그 고백이 진심이라면 우리는 누구도 차별해서도 어느 순간에도 우월에 빠져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은 한순간도 우월에 빠질 만한 이들과 어울리신 적 없고 오히려 억압당하고 차별당하고 사람 수에 들지 못하는 장애인과 과부와 창녀와 아이들과 죄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제 아무리 여성주의 신학이라 해도 이런 예수님의 ‘사랑’을 비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21년도 5월 시작한 성서와 여성은 여성 신학자들의 책을 읽습니다. 남성신학자들의 책도 잘 안 읽는 ‘성경’을 해석한다는, 어떤 관점으로 읽는다는 것조차 우리 한국 교인들에게는 낯섭니다. 목사의 설교를 통해서만 성경을 접하는 것이 대부분이어서 사실 성경의 기원이나 신구약 성경의 관계나 그 구성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분들이 허다합니다. 성경은 ‘한 권’의 책입니다. 그렇기에 저자도 있고 독자도 있고, 해석의 관점도 당연히 있습니다. 그 해석의 극단에 여성주의 관점이 있습니다.
24년도 12월 현재는 무사두베의 <제국 성서 탈식민여성주의>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역시 성서와 여성에서 22년도 읽은 <성서-소피아의 힘>을 쓴 엘리자베스 쉬슬러 피오렌자는 여성주의 신학자의 거장으로 추앙되고 있습니다. 성경을 ‘여성’이 주체가 되어 해석했다는 점에서는 매우 선구적이나 그러나 남아프리카 출신 무사두베의 눈에는 그 역시 서구 백인의 관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무사두베는 여성주의 관점에서 더 확장되어 ‘제국주의’ 관점으로 쓰였다는 것을 발견해 내는 피식민주의자의 관점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런 관점으로 본다면 지상의 낙원으로 이스라엘 민족에게 약속된 ‘가나안’은 너무 슬픈 땅입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다면 가나안 민족 또한 그의 피조물이었음을 부인하면 안 된다고 봅니다.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 예수 그 마음을 품는다면 누구도 함부로 대하면 안 되고 나의 무엇도 ‘자랑’할 것이 없어야 합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한강에게서 그런 면모를 봅니다. 과신대 북클럽 <성서와 여성>은 이렇듯 하나님과 그와 동등한 본체이신 예수님을 나의 주로 고백하면서 그렇게 고백한 이들이 성령의 영감을 통해 완성시킨 ‘성경’을 정직하게 공부하는 모임입니다. 그러나 제한은 있습니다. 여성주의 신학자들이 저자인 성경에 관한 책만 읽습니다. 또한 이 공부의 여정에서 하나님의 피조물인 우리 인간에 대한 연민과 나와 다른 삶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점점 깊어가고 있음을 고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