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신일다 북클럽
제인 구달의 《창문 너머로》
글ㅣ유희주
시인, 화가
과신일다 북클럽 멤버
하나님을 믿는 교회 울타리 안에 있으면서 많은 목사들과 신앙 동역자들을 만났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믿음의 통로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도 없고 대답을 해 줄 만한 사람도 교회 내에서 찾기 어려웠다. 의문은 불신앙과는 다르다. 교회에서 제공한 하나님에게 다가설 수 있는 징검다리 중 나는 순전하게 세월과 인간의 의심을 견딘 마른 돌을 밟아 보지 못했다. 늘 미끄러워 넘어질 위기에 놓여 있었고 몸의 중심을 잡는 데 집중해야 했다. 경험과 이해의 능력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야 하는 것이 몸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숙명이라면 이미 만들어진 틀 안에서 고착된 사고의 경계를 넘어 지평을 넓히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과학과 신학 모임 중 하나인 미 동부 지역의 [과신일다]를 발견했을 때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를 정확히 보려는 노력이야말로 하나님을 향한 순종의 기본 태도라는 나의 생각을 받쳐줄 잘 마른 징검다리 돌을 찾은 느낌이었다. 이민자를 위한 교회의 기존 체계로는 도저히 하나님의 신비로운 창조에 대한 경외와 감사와 찬양에 접근되지 않았다. 교회 다니는 일이 몸의 습관이 되었다는 것을 느낄 때마다 잘 못 들어선 숲의 미로에 갇힌 느낌이 되곤 했다. 나는 어쩌다 읽은 물리학에 관한 책과 통계학에 관한 수학책을 읽으며 숲을 관통하는 아주 작은 오솔길을 발견했다. 혼자 오솔길을 고요히 오래 걷다가 어디에선가 그 오솔길을 먼저 걷고 있었던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이 나누고 있던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그들은 제인 구달의 "창문 너머로"라는 책을 읽고 토론을 위해 줌이라는 큰 평상에 걸터앉았다. 책을 미처 읽지 못했으니 어깨너머로 책에 관한 대화를 들을 수밖에 없었으나 그들의 대화만으로도 나의 갇혀 있던 호기심은 활발하게 살아나 정제되지 않은 여러 말을 그들의 가지런한 말속에 섞었다.
책은 인간 중심적 사고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요구한다. 현재 가지고 있는 사고의 틀 안에 창문을 만들어 이쪽의 공기와 저쪽의 공기가 섞일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곰베를 향해 제인 구달이 만들어 낸 새로운 창문은 우리들의 사고가 창문 밖으로 나가면 발상 자체가 뒤집어질 수도 있다는 전제를 인정해야 침팬지를 통해 또 다른 세계를 경험한다고 말한다. 제인 구달은 평생을 침팬지를 관찰하며 누적된 정보로 곰베로 향한 창문을 만들었다. 창문 밖에는 인간이 알 수 없는 침팬지의 언어가 있었고 그들의 사회 질서와 감정이 있었다. 권력과 전쟁 그리고 짝짓기 등에 대한 많은 대화가 이어졌다. 그들과 가까이에서 오래 섞여야 침팬지의 생태를 알 수 있다는 부분에서는 기독교 선교의 방법도 이와 비슷한 맥락의 방법이라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의견을 여러 단기 선교의 폐해를 상기하며 조심스럽게 나누었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실적 존재를 찾아가는 과학에 관한 책은 사면이 벽인 관념적 세계에 수많은 사실적 창문을 만든다. 관념의 하나님이 아닌 현실에 실존하는 하나님의 세계를 더 많이 더 넓게 보게 될 가능성을 과학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느끼며 토론 시간 내내 마음이 설레었다. 책의 내용을 설명하는 발제자의 말을 들으며 나는 자연스럽게 책의 내용에 빗대어 인간 사회를 반추해 보았다. 침팬지보다 고등 생물이라 자칭하는 인간의 본성은 침팬지와 크게 다른가? 침팬지의 사회에서 평화로운 상호 작용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과 잔인한 공격성과 동종 포식의 무자비함은 인간 사회와 많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본성을 침팬지처럼 드러내지 않을 뿐 본성이 작동하는 감정선은 침팬지와 다를 바가 없다. 기존의 생각을 비틀어 본다. 고도로 교묘하게 본성을 감추는 능력이 우리가 말하는 “인격”이라는 단어와 등치 되는 건 아닐까? 좀 더 위선적인 사람이 인격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닐까? 불용하거나 불온할 법한 이 생각은 인간이 본성에 갇혀 있음을 인정해야만 복잡한 갈등 구조를 극복할 수 있었던 여러 경험과 맥을 같이 했다. 인간에게만 있는 아름다울 수도 있는 위선은 새로운 사회 구조를 잉태했다. 수평 구조를 지향하는 무리를 연대하는 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인격을 얼마나 믿을 수 있겠는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도 서로 언어의 부피를 다르게 느낀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라고 느낄 수 없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어떻게 침팬지의 언어에 대해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제인 구달이 연구한 침팬지와 인간의 본성에 대해 좀 더 공부해 보아야겠다고 계획을 세운다.

@Unsplash, Fabiana Rizzi
우리가 인식하지 못해도 하나님이 계신 것처럼, 우리가 알지 못해도 모든 피조물에게는 그들만의 질서가 각각 있을 것이다. 제인 구달이 평생을 바쳐 파악한 침팬지의 세계조차 아주 작은 부분일 것이므로 그 누구도 완전하게 다 알 수는 없다. 암막이 쳐진 것을 들어내고 가능한 한 과학적 증명 과정을 함께 느끼고 알아가려는 사람들을 기독교 사회 내에서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기쁘다. 숲의 미로에 홀로 갇혀 있다고 생각하던 나는 고독한 또 다른 동반자들을 만난 듯 기쁘다. 거리낌 없이 마음속에서 생성되는 의문을 대화로 나눌 수 있는 모임에서 책을 통해 과학과 신학의 연결고리를 찾는 과정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숨이 쉬어진다. 제인 구달의 “창문 너머로”가 침팬지의 사회를 알게 한 것처럼 앞으로도 수많은 창문들이 나의 벽에 생기기를 바란다.
과신일다 북클럽
제인 구달의 《창문 너머로》
글ㅣ유희주
시인, 화가
과신일다 북클럽 멤버
하나님을 믿는 교회 울타리 안에 있으면서 많은 목사들과 신앙 동역자들을 만났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믿음의 통로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도 없고 대답을 해 줄 만한 사람도 교회 내에서 찾기 어려웠다. 의문은 불신앙과는 다르다. 교회에서 제공한 하나님에게 다가설 수 있는 징검다리 중 나는 순전하게 세월과 인간의 의심을 견딘 마른 돌을 밟아 보지 못했다. 늘 미끄러워 넘어질 위기에 놓여 있었고 몸의 중심을 잡는 데 집중해야 했다. 경험과 이해의 능력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야 하는 것이 몸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숙명이라면 이미 만들어진 틀 안에서 고착된 사고의 경계를 넘어 지평을 넓히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과학과 신학 모임 중 하나인 미 동부 지역의 [과신일다]를 발견했을 때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를 정확히 보려는 노력이야말로 하나님을 향한 순종의 기본 태도라는 나의 생각을 받쳐줄 잘 마른 징검다리 돌을 찾은 느낌이었다. 이민자를 위한 교회의 기존 체계로는 도저히 하나님의 신비로운 창조에 대한 경외와 감사와 찬양에 접근되지 않았다. 교회 다니는 일이 몸의 습관이 되었다는 것을 느낄 때마다 잘 못 들어선 숲의 미로에 갇힌 느낌이 되곤 했다. 나는 어쩌다 읽은 물리학에 관한 책과 통계학에 관한 수학책을 읽으며 숲을 관통하는 아주 작은 오솔길을 발견했다. 혼자 오솔길을 고요히 오래 걷다가 어디에선가 그 오솔길을 먼저 걷고 있었던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이 나누고 있던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그들은 제인 구달의 "창문 너머로"라는 책을 읽고 토론을 위해 줌이라는 큰 평상에 걸터앉았다. 책을 미처 읽지 못했으니 어깨너머로 책에 관한 대화를 들을 수밖에 없었으나 그들의 대화만으로도 나의 갇혀 있던 호기심은 활발하게 살아나 정제되지 않은 여러 말을 그들의 가지런한 말속에 섞었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실적 존재를 찾아가는 과학에 관한 책은 사면이 벽인 관념적 세계에 수많은 사실적 창문을 만든다. 관념의 하나님이 아닌 현실에 실존하는 하나님의 세계를 더 많이 더 넓게 보게 될 가능성을 과학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느끼며 토론 시간 내내 마음이 설레었다. 책의 내용을 설명하는 발제자의 말을 들으며 나는 자연스럽게 책의 내용에 빗대어 인간 사회를 반추해 보았다. 침팬지보다 고등 생물이라 자칭하는 인간의 본성은 침팬지와 크게 다른가? 침팬지의 사회에서 평화로운 상호 작용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과 잔인한 공격성과 동종 포식의 무자비함은 인간 사회와 많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본성을 침팬지처럼 드러내지 않을 뿐 본성이 작동하는 감정선은 침팬지와 다를 바가 없다. 기존의 생각을 비틀어 본다. 고도로 교묘하게 본성을 감추는 능력이 우리가 말하는 “인격”이라는 단어와 등치 되는 건 아닐까? 좀 더 위선적인 사람이 인격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닐까? 불용하거나 불온할 법한 이 생각은 인간이 본성에 갇혀 있음을 인정해야만 복잡한 갈등 구조를 극복할 수 있었던 여러 경험과 맥을 같이 했다. 인간에게만 있는 아름다울 수도 있는 위선은 새로운 사회 구조를 잉태했다. 수평 구조를 지향하는 무리를 연대하는 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인격을 얼마나 믿을 수 있겠는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도 서로 언어의 부피를 다르게 느낀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라고 느낄 수 없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어떻게 침팬지의 언어에 대해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제인 구달이 연구한 침팬지와 인간의 본성에 대해 좀 더 공부해 보아야겠다고 계획을 세운다.
@Unsplash, Fabiana Rizzi
우리가 인식하지 못해도 하나님이 계신 것처럼, 우리가 알지 못해도 모든 피조물에게는 그들만의 질서가 각각 있을 것이다. 제인 구달이 평생을 바쳐 파악한 침팬지의 세계조차 아주 작은 부분일 것이므로 그 누구도 완전하게 다 알 수는 없다. 암막이 쳐진 것을 들어내고 가능한 한 과학적 증명 과정을 함께 느끼고 알아가려는 사람들을 기독교 사회 내에서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기쁘다. 숲의 미로에 홀로 갇혀 있다고 생각하던 나는 고독한 또 다른 동반자들을 만난 듯 기쁘다. 거리낌 없이 마음속에서 생성되는 의문을 대화로 나눌 수 있는 모임에서 책을 통해 과학과 신학의 연결고리를 찾는 과정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숨이 쉬어진다. 제인 구달의 “창문 너머로”가 침팬지의 사회를 알게 한 것처럼 앞으로도 수많은 창문들이 나의 벽에 생기기를 바란다.